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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빛이다(마태복음 5 : 14 - 16)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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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빛이다(마태복음 5 : 14 - 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하는 이 두 비유는 앞서 비유에 대한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 수차에 걸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쌍둥이 비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은 동시에 생각게 되고, 비교해서 생각할 수 있는 비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두 비유는 우리에게 공통적인 입장에서 주시는 교훈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세상과 믿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고 보면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인은 이 세상에서는 언제나 이방인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소수인, 마이노리티(minority)입니다. 이러한 소수적인 입장을 가지고 믿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는 관계성의 문제, 그리고 책임성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떠한 책임을 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소금이다" "빛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앞장에서 우리는 극히 짧은 "소금이다"하는 이 간단한 말씀 속에서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 어떤 것인가 하는 중요한 교훈이 있음을 공부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심으로 우리에게는 또한 이 세상을 향한 빛의 책임이 있음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빛이라 하게 되면 우리는 먼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그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로 생각을 전개해 보면 빛에는 햇빛, 달빛, 별빛 등의 본래 주어진 자연적인 빛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 빛을 눈으로 보며 그 빛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어두움을 밤이라 하고, 빛을 낮이라 하며, 그 빛 뒤에 있는 그늘을 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인공적인 빛입니다. 그것은 바로 촛불이나 등잔불은 물론 전등 빛이며, 요즈음에 와서는 놀라우리만큼 발전된 여러 가지의 빛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적인 빛으로 밤을 낮처럼 밝히며 불편 없이 활동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제 세 번째로 오늘 우리가 생각할 빛 곧 영적인 빛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빛만이 빛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신령한 빛을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눈에 보이는 빛은 보이지 않는 빛에 대한 비유요 상징입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그 영적인 빛을 생각할 때마다 이 보이는 빛을 보면서 거기로부터 그 보이지 않는 신령한 빛의 뜻을 배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다 깜깜한 데를 갔다가 불빛 하나를 만나게 되면 그것이 그렇게도 반갑고, 이 빛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작은 빛 한 줄기도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 빛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출애굽기 10장에 보면 캄캄한 흑암의 재앙이 임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에 보면 흑암이 임하는 사흘 동안 애굽인의 영내에는 빛이 전혀 없이 낮이 밤처럼 캄캄하게 되었으며 사람이 서로 볼 수도 없는 가운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어나 보았자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인데 일어나서는 무엇하겠습니까? 그냥 그렇게 누워서 뭉개는 수 밖에요. 이처럼 인간들의 모든 활동은 알고 보면 빛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빛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고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영적인 빛을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지혜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빛을 보면서, 이것을 상징으로 하여 영적인 빛을 생각하라는 것으로 주신 말씀인 줄 압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바로 받은 사람은 크고 작은 어떤 빛을 보든지 간에 "너희는 빛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 영적인 빛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거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자세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빛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말하는 영적인 빛이라는 것은 양심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며, 선의의 빛이요, 혹은 말씀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말씀! 바로 이것이 빛입니다. 우리는 이것이 없이는 살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빛의 반대가 어두움일진대 이 어두움은 무엇을 말함이겠습니까? 이 어두움은 곧 무지와 무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진 것이 많다손치더라도 지식과 지혜가 없으면 되지를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무리 힘이 있고 용맹스럽다 하더라도 어두우면 힘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힘센 장수가 칼을 뽑았다 하더라도 볼 수 있는 눈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삼손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삼손이 그만 머리털이 밀리우고 힘이 빠진 후 블레셋 사람에 의해 눈이 뽑혔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16:21). 그러다가 나중에는 머리털이 자라나면서 다시 힘이 생겨지는 모습이 최후의 순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마는 힘이야 있든지 없든지 간에 삼손이 아무리 장사라 하더라도 그에게 눈이 없다면 그 힘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더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어두움은 무능이요, 모든 능력은 빛에 근거합니다. 또한 이 어두움은 혼돈을 말합니다. 어두우면 무질서해져서 마치 어두움 가운데서 헤매는 것처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옛날 헬라의 철학자 디오게네스(Diogenes)는 세상이 너무 어둡다며 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다녔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종교적인 암흑은 우상이요, 미신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마음이 어둡기 때문입니다. 정초 때 보는 토정비결에서부터 사주, 궁합, 신수 등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에 지금도 매여들 있습니다. 여러분, 놀라지 마시고 들어보세요. 아직도 우리 나라에는 정식으로 등록하고 세금을 내는 무당과 점쟁이만도 자그마치 168천명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 외에도 얼마든지 많은 무당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이것으로 밥을 먹고사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인데 곧 그만큼 무지한 사람들이 많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소위 지성인이라는 양반들이 이름 있다는 점쟁이들에게 혹해서는 많은 복채를 놓고 그 앞에다 운명을 맡긴답니다. 심지어는 국회의원에 출마하면서도 그 여부를 점쟁이에게 물어 보고, 사업을 하면서도 무꾸리를 한다니 한 마디로 말해 얼마나 한심한 사람들입니까? 너무도 어두워요, 무지하기 때문에 총명이 흐려졌어요, 그 때문에 이 엄청난 결과를 낳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초등학교 1학년 학생 중 40%가 부적을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지만 여기에는 박사도 대학 졸업자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한 술 더 뜨는 처지이기에 저 유명하다는 이화여대 앞에 점쟁이가 제일 많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두움에서 오는 무지와 혼돈이 아무 것이나 붙들게 하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의미의 용어로 말하면 이것은 허무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 중에서도 마음이 어두워질 때면 "그만 죽고 싶어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어디 제 마음대로 죽을 수 있는 것이 목숨이더냐 말입니다. 다른 이야기는 다해도 좋지만 죽고 싶다는 말만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오늘이라도 부모님 앞에서 한숨을 푹 쉬면서 "제가 그만 죽고 싶어요"라고 했다면 그것은 내가 죽는다는 이전에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 앞에야 어떻게 그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겠습니까? 비록 죽을 때 죽더라도 죽겠다는 말만은 절대로 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때로는 한숨을 쉴 수도 있고, 절망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슬픔이 있다고 하여 쉽게 죽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은 철저히 삼가 해야 합니다. 그것은 어두움 가운데 있는 허무주의의 소산입니다. 저주와 슬픔, 미움과 불화, 죄와 공포, 이 모두가 다 어두움에서 오는 것입니다. 어두우면 두려움이 생기고 두려우면 허무해지며 마지막에는 정말로 죽고 싶다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서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눈이 있어 본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밝은 눈을 가졌어도 빛이 없으면 못 본다는 점입니다. 내 이 눈이 눈의 구실을 하려면은 빛이 있어야 하고 내 힘이 유효한 힘이 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빛이 없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이는 힘이 있다고 아무렇게나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기는 귀하고 필요한 것이지만 잘못된 용기는 만용일 뿐 결코 용기가 아닌 것입니다. 참된 용기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하는 빛이 있을 때에, 그 가운데서 활동되어질 때에 비로소 진정한 용기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를 못하고 의와는 상관이 없는 용기라면 그것은 깡패의 용기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두고 우리는 만용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빛은 모든 것의 근본입니다. 마음의 빛, 보이지 않는 이 영적인 빛이 없고서는 지혜도, 능력도, 돈도, 힘도, 지식도, 그 모두가 다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은 빛의 역할이란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을 근본적으로 돌아가서 보면, 우리의 "빛됨"이라는 것은 빛의 근원이라는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따라서 먼저 하나님이 빛이시오, 예수가 빛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빛이심을 여러 곳에서 친히 말씀하고 계십니다(1:4, 9, 3:19, 8:12, 9:5, 12:35, 36) 영어 성경에는 아이엠 더 라잇(I am the light)으로 빛이라는 말 앞에는 정관사가 놓여 있습니다. 이는 내가 그 빛, 곧 하나밖에 없는 그 빛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관사를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그 점에 있어서의 강조를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그 빛이다"라며 유일한 빛이심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진실로 주님은 생명의 빛이시오, 빛 자체가 되십니다.

이 빛은 동시에 심판적 의미가 있습니다. 어떠한 곳에서든 빛이 비취는 곳에서는 더럽고 추한 잘못의 전부가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에서 멀리 떨어져서는 자기가 잘난 줄 알고 살고 있지만 빛에 가까이 가서 보면 부끄럽고 추한 그 모두가 하나도 남김없이 노출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도덕적인 암흑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밝음을 얻었습니다. 종교적인 미신과 우매함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인류 문화사를 한번 보세요. 문화사가 웅변적으로 말해 주는 것은 예수가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세상이 밝아지고 인간 역사가 밝아졌습니다. 그로 인해 노예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미신이 물러갔고 자연과학이 발전되었습니다. 적어도 문화사를 바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예수를 믿지는 않아도 오늘 우리가 누리는 현대 문명의 뿌리가 기독교에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지도를 펴놓고 보아도 아직 기독교가 들어가 있지 않은 나라, 또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 나라들의 미개함은 20세기의 오늘에도 놀라울 정도가 아닙니까? 미개함의 뿌리는 종교 문제에 있습니다. 종교가 잘못 되면 도덕이 잘못 되고, 도덕이 잘못 되면 가치관이 잘못 되며, 가치관이 잘못 되면 사회생활 전체가 다 잘못되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도 방글라데시 같은 나라에서는 한 집에 평균 13명의 어린이가 있고 15명이 넘는 가정도 많다고 합니다. 한번은 우리 교인 한 분이 밤에 차를 몰다가 후진을 하던 중 그만 실수를 하여 어린이 한 명을 치어 숨지게 했답니다. 이에 너무도 죄송해서 어떻게라도 보상을 할 마음으로 그 어머니를 찾아가서는 보상을 해드리겠다고 하니까 그 어머니가 하는 말이 "여기 아이들이 많은데 그 애 하나 없어도 괜찮으니 그냥 가세요"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보십시오!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이 곧 미신입니다. 그들의 종교가 이렇게 만들어 준 것입니다. 무지하게 되는대로 낳고서는 죽으면 죽는 대로 괜찮고, 굶으면 굶는 대로 어쩔 수 없는 우매함이 다름 아닌 종교에서 온 것입니다. 이와 같이 종교가 주는 우매함이란 실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복음이 들어오기 이전에는 얼마나 어리석고 수치스러운 일이 많았습니까? 이러한 인간 역사에 있어서 예수는 세상의 빛입니다.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철학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심지어는 과학적으로도 예수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생명의 빛이십니다. 그러시면서 우리를 향해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저 태양은 적어도 지구를 중심으로한 태양계에 있어서는 빛의 근원입니다. 여기에 비추어 달빛의 빛은 자신의 빛이 아닙니다. 오로지 태양의 빛을 받아 그것을 반사할 뿐입니다. 어두운 밤에는 그 달빛만 가지고도 길을 갈 수 있을 만큼 제법 밝습니다마는 달은 결코 자체의 빛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이라는 것도 자기의 빛을 발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서 그 빛을 반사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알아야 할 것은 마치 만월과 같이 정면으로 충분한 빛을 받아야만 반사의 빛도 충분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달은 햇빛을 받는 만큼만 우리에게 되비춰 줍니다. 그래서 정면으로 받은 보름달도 있고, 초생달, 반달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그리스도의 빛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듯이 정면으로 받는 만남의 관계를 가지며 사는 사람은 그 생활 전체가 밝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 어떤 이는 50%만 받거나 극히 부분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초생달이나 반달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조금밖에는 예수 믿는 냄새가 나지를 않아요. 빛이 보이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교회에 왔을 대는 빛을 받은 것 같다가 집에 돌아가면 어느 사이에 다 꺼지고 말아요. 그러자니 천사가 되었다가 악마가 되었다가 빛이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빛과 사귀어야 합니다. 그것도 오래 사귀어야 합니다. 마치 마술처럼 하루아침에 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기에 대한 좋은 예로써는 모세가 하나님과 만난 시내산의 40일 이후에 산에서 내려오는 모세의 광채 나는 얼굴입니다. 하나님과 40일 간이나 직접으로 깊게 사귄 모세는 그 얼굴에 광채가 너무 나서 사람들이 가까이 하기조차 두려워하여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이 오래 가지는 못했습니다만 사실은 사실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랜 시간을 두고 그리스도와 정면으로 만나는 깊은 사귐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사귄다는 말은 만난다는 것이요, 사랑한다는 것이요, 계속적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항상 자기를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 앞에 자기를 보이는 것입니다.

행위를 보이고 마음을 보이고 얼굴을 보입니다. 그리함으로 그 빛을 받게 되고 계속 사귐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그리스도를 닮은 인격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직장 그 어디에든지 예수의 냄새가 나고 빛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빛은 그늘이 있게 합니다. 이쪽이 밝으면 저쪽은 어둡습니다. 내가 태양을 향해 섰을 때는 그늘이 없는 밝음뿐입니다 마는, 같은 자리에서라도 빛을 등지고 돌아서기만 하면 그늘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언제나 그리스도를 향해 바르게 서서 사는 사람은 어두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비록 바로 내 등뒤에는 어두운 그늘이 있지만 그 그늘과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빛을 등지고 사는 사람은 반대로 빛은 못 보고 어두움만 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를 믿으며 사는 사람은 세상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가지만 빛을 등지고 사는 사람들은 곧장 하는 말이 "망할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세상이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는 사람에 의해서 세상이 흥하고 망했더냐는 말씀입니다. 인간 역사의 흥망 성쇠는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그런 걱정은 할 것이 아닙니다. 빛을 향해서 사는 사람은 그늘을 보지 못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정인 빛 앞에는 그늘진 곳이 없어요. 아무 것으로도 가릴 수가 없어요. 그 때문에 다 드러나고 마는 것입니다. 마치 수술실의 불빛처럼 사실 그대로, 깨끗하게 사방에 일시에 비춰진다는 것을 알아야겠습니다. 그러기에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어느 것도 절대로 숨기울 수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일은 노출이 잘되어 하찮은 조그만 일인데도 당장 소문이 나고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밝음 가운데 있다 보니 조그만 것인데도 지체없이 확 드러나고 만단 말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가운데서는 큰 죄악이 있어도 보이지를 않지요.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무엇이고 좀 잘못했다며 시비를 걸어오거든 아예 너무 섭섭하게 생각지를 마십시오. 그것은 그만큼 밝다는 뜻이요. 기대도 컸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는 더욱 오묘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아시다시피 말이라는 것은 곡식 같은 것의 양을 헤아리기 위한 하나의 그릇입니다. 그런데 어두움을 밝히기 위한 등불을 켜서는 이 말 아래에다 두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들이 전구를 높이 달듯이 등불은 높이 등경 위에 두어서 밝히는 것이지 말로 덮어 두는 것은 아니더란 말입니다. 같은 내용의 말씀을 마가 복음 421절에서는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평상 아래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는데 이 평상은 요즈음 말로 침대를 두고 하는 말

DTXT 입니다. 그러니까 등불을 켜서 침대 밑에 두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 등불이라면 당연히 등경 위에 두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너희들도 그와 같이 높이 들려져서 밝히는 빛이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표현되어지고 있는 말과 평상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깊은 의미를 주는 말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오늘날과 같이 정확한 기계식 저울이 없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양과 부피를 재는데 있어서 마치 저울과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이 말은 사고 팔며 장사하는 일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도구이며 따라서 장사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서에 보면 말과 그리고 저울추를 속이는 일에 대하여 경고하시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그 속에 장삿속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장사하는 것이야 어디까지나 돈을 벌자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이익만을 추구하며 돈을 벌고자만 하다가는 그 소중한 빛을 가리운단 말입니다. 언제나 돈벌 생각이 앞서고 보면 공의를 무너뜨리기 마련입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빛됨을 묻어버리게 되고 덮어 놓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얼마나 더 버느냐?"하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그렇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68절 말씀에 보면 "적은 소득이 의를 겸하면 많은 소득이 불의를 겸한 것보다 나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분명 의가 먼저인데 그와는 반대로 이기주의와 실리주의에 급급한 나머지 이득을 앞세우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빛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평상 아래"란 것인데, 이 평상, 곧 침대는 쉬는 것을 말하는 것이요, 안일주의를 뜻하는 말입니다. 언제나 부지런히 일해야 되겠는데 자꾸만 쉬고 싶고, 뿐만 아니라 매사를 쉽게 처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는 한탕주의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교회 일도 아주 쉽게 별로 손해 보는 것도 없고 수고할 것도 없이 적당히 계산해서 하려는 이들이 있는데 이는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DTXT나님의 일을 땀흘림과 희생을 각오하지 않고 어떻게 쉽게만 하겠다는 것입니까? 바로 그때에 빛을 가리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빛이라면 몸된 교회의 일을 위해서는 때때로 크나큰 희생을 치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못하고 안일주의에서 안주하려고만 할 때에 교회의 빛을 가리우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빛이 된다는 것은 "희생 속에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큰 희생과 수고가 빛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희생없는 안일은 이미 그리스도인의 빛이 가리어진 상태인 것입니다. 다름 아닌 이것이 바로 등불을 켜서 침대 아래 두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등불을 켜서는 말 아래나 침대 아래에 두지 말고 등경 위에 높이 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빛을 우선적으로 하라는 말씀이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빛과 소금을 비교해 보십시다. 소금이라고 하는 것은 녹아져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하나의 실체가 내적으로 용해되고 침투되어 일으키는 내적인 변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빛은 외적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또한 위에서 내려 아래로 비춥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는 소금이 개인적인 것이라 볼 수 있다면 빛은 사회적인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두 가지의 기능은 똑같이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이는 곧 우리의 사명이 그만큼 크고 중요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 앞에서는 죄인들이 부끄러워할 수 있어야 하고 적어도 영적으로는 그리스도인을 두려워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빛의 사람인 그리스도인 앞에서 감히 협잡을 한다거나 하는 불의한 일은 할 수 없어야 합니다. 찬란히 밝은 빛 앞에서는 어두움이 용납되지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두움이 짙기 때문에 빛이 약한 것이 아니라, 빛이 없고 빛이 약하기 때문에 어두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어두움을 몰아내고, 어두움이 설 자리가 없게 하는 그러한 빛의 생활을 하DTXT라는 말씀이십니다. 나아가 이 빛이라고 하는 것은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 빛 안에 있음으로 지혜가 지혜되고 능력이 능력으로 그 힘을 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에 가서 보면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모든 것의 결국은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소금이나 빛은 말이 없습니다. 이들 둘은 적은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소금은 조용히 녹아 없어지고 빛은 계속 타오르며 비춰지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선행이란 곧 이러한 것입니다. 무엇을 한답시고 나팔을 불며 설명을 하는 것도 아니며 크고 작은 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묵묵한 행함의 행동만이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로 숨기어지지 않는답니다. 왜냐 하면 이는 산 위에 있는 동네도 숨기우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나타날 것이니 걱정하지 말란 말입니다. 세상에서의 일은 알리고 또 알리고 게다가 문서화까지 합니다마는 하나님의 일은 그렇게 소문내어 알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저 뒤늦게 알려져서 "그렇게 아름다운 일이 있었느냐?"고 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행이란 참으로 조용하여야 합니다. 빛처럼 말이 없는 행함! 바로 그것이 진정한 선행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 희생이 있고 동시에 그로 인한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구원에 이르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우리는 계속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빛을 받으며, 빛과 사귀는 가운데 충분한 빛이 되어 어디를 향해서나 밝게 비추이는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빛을 말하는 그 무엇을 볼 때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되새기며 이 어두운 세대의 빛 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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