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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로마서 13장 11절~14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 1990년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 새 아침, 새 해 새 날의 뜻을 깊이 생각해보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13:11)." 여러분! 시간(時間)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몇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연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과 같이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모든 것이 다 과거로 변합니다. 과거화(過去化) 해버립니다. 미래가 현재로 되고 현재는 과거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든 모르든,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시간은 그 나름으로 흐릅니다. 모든 것은 이 시간 속에서 낡아집니다. 남자는 스물 여섯 살부터 늙고 여자는 스물 네 살부터 늙어간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나이를 지난 사람들은 다 죽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까? 여러분은 시간을 이토록 심각하게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결국은 시간 속에서 사람은 늙고 썩고 쇠잔(衰殘)하는 것입니다. 보다 엄격히 말한다면 날 때부터 죽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이것이 시간 안에 있는 존재의 모습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에는 저와 같은 자연적인 시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역설적이라고나 할 또 하나의 '시간'이 있습니다.
곧 창조적인 시간, 생명적인 시간이 그것입니다. 썩은 거름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듯, 죽은 것에서 생명이 움트는 그런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꾸준히 성장을 합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이룩됩니다. 묵은 껍질을 벗고 새로운 것이 돋아나며, 메마른 곳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릅니다. 그 시간 속에는 생명에 이르는 아름다운 시간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간 ---- 구원의,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의미의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시간입니다. 창조하시는 시간이요, 예언하시고 성취하시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시는 시간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인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픔이 있고, 하나님의 희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말씀의 역사가 있고, 끊임없이 꾸준히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나가시는 구속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가 믿건 믿지 않건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시간으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제 네 번째로, 성도에게 주어진 선교의 시간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인터림(interim)'이라고 말하는 시간입니다. 본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부터 재림하실 때까지의 시간을 이릅니다. 이것은 성도가 의식해야 할 시간이요, 깨달아야 할 시간이요, 성도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의 시간 ---- 교회론적(敎會論的)인 시간입니다. 이 시간 안에서 우리는 선교(宣敎)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할 수 있을 때에 전도를 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고 서둘렀습니다. 주님 재림하시기 전에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평생을 걸고 애썼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의 엄숙함을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는 시간은 그실 시간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나에게 우선 생리학적 시간이 있습니다. 내 육체가 나서 자꾸 자라고 죽어 가는 시간입니다.
또한 철학적 시간이 있어서 깨달음이 있습니다. 내가 잠자는 시간은 시간으로 치지 말아야 합니다. 멍하여 있는 시간은 죽은 시간입니다. 의식이 있는 시간만이 시간에 속하는 것입니다.
같은 시간을 가지고 많이 깨닫고 많이 알고 많이 의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멍청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는 먹어도 되지 못한 생각만 하고 당장 발 밑에 떨어진 것밖에 헤아릴 줄 모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유치한 사람입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에 보면 어떤 사람은 당장의 한 수 앞밖에 내다보지 못하여 늘 잡혀먹고 집니다마는 수를 많이 보는 사람은 다섯 수 여섯 수 앞을 내다보고 막판의 수까지 멀리 내다볼 줄 압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내다보고 사십니까? 여러분의 철학적 시간은 어느 정도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철학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한발 앞의 일만 내다보고는 원망하여 탄식을 하고 다 된 것처럼 절망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착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계절이면 흔하게 봅니다마는 입학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세상 만난 듯이 좋아하고, 떨어졌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진 듯 실망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답답한 노릇입니다. 일년 후 10년 후를 내다본다면 결코 그런 착각에 빠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멀리 잡아야 합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은 다음의 시간까지 헤아리고 삽니다. 자신의 장례식 시간까지 생각할 줄 압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의 시간, 영원에 속한 그 시간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삽니다. 이렇게 사는 시간이 철학적 시간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중생하는 시간에서부터 성화(聖化)하는 과정의 시간, 육신의 몸을 벗고 하나님 앞에 가는 영생의 시간까지 생각합니다. 중생과 성화와 영화(榮化)의 역사를 나의 시간 안에서 생각합니다. 그 프로세스(과정)를 항상 한 사건으로 묶어서 의식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신학적인 시간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시기를 알거니와"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시기(時機)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카이로스'입니다. 시간은 시간인데 시계로 재는 작은 의미의 시간이 아니고 크고 깊은 의미의 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이라 하지 않고 '시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분명히 시간인데, 몇 시 몇 분을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라고 하는 시간 내게 주어진, 내가 속한, 내가 지금 발붙이고 있으며 내 생명의 근본이 되는 그 시간, 곧 깊고 오묘한 의미를 지닌 그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현재는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지나간 것입니다. 천방지축 실수만 되풀이하다가 나이 들어 가지고는 내 청춘 되돌려달라느니, 청춘이 그립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아직도 과거에 매여 있다면 그사람은 현재라는 새로운 시간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건 무한한 미래를 향하여 과거와 인연을 끊은 채 앞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간은 정지하는 법이 없습니다. 내 생각이 정지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도 같이 정지해주지는 않습니다. 마치 나도 모르게 내 몸이 늙고 있는 것처럼, 또다시 한 해가 저물고 새 해가 성큼 다가온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의식하건 모르건 시간은 언제나 물 흐르듯 쉬지 않고 미래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데로 제 걸음으로 가고 있습니다. 쉼없이 운행하고 있는 이 시간 안에서 나는 어떻게 안정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변합니까? 내가 같이 변하면 내가 안정됩니다. 나는 부동자세로 서 있으면서 안정을 찾겠다고 합니다. 이런 안정은 죽은 안정입니다. 죽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차가 어지러이 지나가는데 그 가운데에 내가 가만히 서 있으면 안정이 없습니다. 이런 때에 내가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달리는 차들과 속도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긴 밤길에 차를 몰고 가노라면 외롭습니다. 이런 때에는 자연스레 차들끼리 몰려서 가게 됩니다. 한 십여 대씩 함께 어우러져서 달리느라면 길이 내 앞으로 달려오는 것 같고 모든 차가 일제히 정지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러한 안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든 인간의 시간이든, 신학적 시간이든 철학적 시간이든, 시간은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에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구속사적인 시간의 안정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 오늘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면, 우선 과거의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구원이 있습니다. 현재 하나님과 동행하는 차원의 구원이 있습니다. 최종 심판의 날에 구원받는, 다시 말하여 종말론적인 구원이 있습니다.
시간과 함께 우리 앞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다가오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생리학적으로 볼 때에는 죽음입니다마는, 내세를 믿고 천국을 바라보고 구원의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죽음 아닌 구원인 것입니다. 육신을 벗고 오래 기다려오던 주님을 맞이하는 시간입니다. 눈물이 없고, 한숨도 이별도 없는 그 영광스러운 나라로 들어가는 승리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시간 너머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영생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생각해보아도 이 세상의 끝이 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깝습니다.
이 세상은 날로 험악해지고 있습니다. 점점 어두워집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세상이 점점 어두워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에는 할 수만 있다면 택한 백성이라도 유혹하려드는 무서운 환난과 핍박과 죄악이 난무하리라고 경고합니다. 우리의 짧은 일생 동안에도 수없이 보아오지 않았습니까?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대로 자본주의는 또 그 나름으로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문제 투성이요, 돈푼이나 있는 나라에서는 그 나름대로 방탕과 타락과 폭력과 불화와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됩니다. 때마침 세계적으로 동서 진영의 긴장이 완화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모든 문제가 호전되리라고 전망합니다마는 제 견해는 좀 다릅니다. 사회주의 체제를 버렸다고 해서 금방 민주주의가 이룩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실현한다 해서 반드시 안정과 평화가 주어집니까? 경제적 부를 성취했다고 해서 자유와 평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에,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곳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동구권의 나라들이 심하게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변혁을 일으키기 위해 무수한 희생을 치릅니다. 저는 저 나라들이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7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하지마는 앞으로 70만, 아니 그 이상이 죽어갈는지도 모릅니다. 수십 년에 걸쳐 많은 격동과 진통을 겪어야만 비로소 어제 정도의 안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리 밝게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밤은 깊어만 갑니다. 우상숭배와 부도덕과 폭력과 무질서, 헐뜯는 일과 질투, 시기, 재난과 무수한 전쟁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분명히 밤입니다. 그러나 이 밤은 아침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현재는 미래에 잇닿아 있습니다. 과거에 매일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 집착해서도 안됩니다. 내 발은 현재를 딛고 있지만 내 생각과 내 믿음은 미래를 살고 있어야 합니다. 빛과 아침, 미래와 그리고 영원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에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적 지식입니다. 또 이성과 그 능력에 의해 판단되는 합리적 이해로서의 지식이 있습니다. 현재적입니다. 그러나 참된 지식은 오직 믿음에 있습니다. 저 앞에 밝아오는 아침을 바라보는 지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눈, 믿음의 판단, 믿음의 의식으로야 알 수 있는 세계입니다.
여러분, 캄캄한 밤에도 빛은 있습니다. 구름이 덮여 있어도 태양은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아침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시간이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아침의 밝은 빛을 바라볼 줄 아는 영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 통찰력(spiritual insight)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침을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생각, 우리의 목적은 저 미래에 있어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역사 의식이 있습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라" ---- 밤에 속한 것, 부끄러운 것, 밤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 이런 것들은 다 어두운 것들이요 부끄러운 일들입니다. 사람 앞에도 부끄러운 일이요 하나님께는 더욱 그러합니다. 다 잊어버리고 씻어 버려야 합니다.
어린 국민학생 하나가 가방을 메고 신이 나서 뛰어옵니다. 가만히 보니 손에 종잇장 같은 것을 하나 쥐고 콧노래를 부르며 싱글벙글합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그것 좀 보자 했더니 "예"하고 얼른 내어줍니다. 들여다보니 성적표예요. 전부가 '수'입니다. 공부를 썩 잘했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보라, 이겁니다. 시원치 않은 성적표라면 쉽게 보여주겠습니까? 가방 깊숙이 숨겨두었다가 부모 몰래 아버지 도장 찍어 갑니다.
선한 일할 때에 이름을 숨기는 것은 부끄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지만 그 일 때문에 괴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어두운 세상에 살지만 빛이 환히 다가 올 때에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이 나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두울 때에 옷을 입는 것은 밝은 아침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침이 올 때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를테면 여성의 화장을 두고도 그것이 근본적으로 거짓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별로 잘나지도 않은 얼굴 예쁘게 보이려니까 거짓 아닙니까? 거짓이란 어두운 데서나 행사하는 것인데, 밤에나 어울릴 짙은 화장을 하고 밝은 대낮에 활보하는 것처럼 추한 것도 없습니다.
가끔 결혼식 주례를 맡다보면 우스운 일도 겪습니다. 짙은 화장을 한 신부가 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에 보면 가관입니다.
눈물이 흐르면 화장한 얼굴 꼴이 말이 아니지요?
여러분, 밝은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자" ---- 어두움의 일은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갑옷이라는 말 '호플론'은 반드시 옷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군 장비 일체를 뜻합니다. 투구와 방패와 갑옷과 칼과 창을 다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하나의 전투태세로 묘사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빛과 어두움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빛 앞에 존재하는 어두움이란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의 싸움은 조용합니다. 빛이 비추면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갑니다.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가냘픈 촛불빛에도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이미 이겨놓은 싸움입니다. 승리가 보장된 싸움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두움과 싸우며 자기와 싸우며 죄와 싸우며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새 해, 새 아침이 되었습니다. 밤이지만 아침인 것처럼, 어두우나 빛을 보면서 새로운 영적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빛에 살고 그리스도로 옷입어 새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의미로,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새 날을, 새 해를 제대로 맞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새로운 창조 역사에 동참한 자로서, 새로운 창조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는 긍지와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빛의 갑옷을 입은 사람(로마서 13장 11절~14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 1990년 새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 새 아침, 새 해 새 날의 뜻을 깊이 생각해보시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13:11)." 여러분! 시간(時間)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몇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자연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흐르는 물과 같이 쉼 없이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모든 것이 다 과거로 변합니다. 과거화(過去化) 해버립니다. 미래가 현재로 되고 현재는 과거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내가 알든 모르든,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시간은 그 나름으로 흐릅니다. 모든 것은 이 시간 속에서 낡아집니다. 남자는 스물 여섯 살부터 늙고 여자는 스물 네 살부터 늙어간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나이를 지난 사람들은 다 죽기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까? 여러분은 시간을 이토록 심각하게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결국은 시간 속에서 사람은 늙고 썩고 쇠잔(衰殘)하는 것입니다. 보다 엄격히 말한다면 날 때부터 죽기 시작하는 셈입니다. 이것이 시간 안에 있는 존재의 모습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에는 저와 같은 자연적인 시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역설적이라고나 할 또 하나의 '시간'이 있습니다.
곧 창조적인 시간, 생명적인 시간이 그것입니다. 썩은 거름더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듯, 죽은 것에서 생명이 움트는 그런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싹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힙니다. 꾸준히 성장을 합니다.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역사가 이룩됩니다. 묵은 껍질을 벗고 새로운 것이 돋아나며, 메마른 곳에서 물줄기가 솟아오릅니다. 그 시간 속에는 생명에 이르는 아름다운 시간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시간 ---- 구원의, 구속사적(救贖史的)인 의미의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시간입니다. 창조하시는 시간이요, 예언하시고 성취하시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심판하시는 시간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인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픔이 있고, 하나님의 희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다림이 있습니다. 말씀의 역사가 있고, 끊임없이 꾸준히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나가시는 구속사적인 시간입니다. 우리가 믿건 믿지 않건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시간으로 역사를 주관하고 계십니다.
이제 네 번째로, 성도에게 주어진 선교의 시간이 있습니다. 신학적인 용어로는 '인터림(interim)'이라고 말하는 시간입니다. 본디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부터 재림하실 때까지의 시간을 이릅니다. 이것은 성도가 의식해야 할 시간이요, 깨달아야 할 시간이요, 성도에게 주어진 복음 전파의 시간 ---- 교회론적(敎會論的)인 시간입니다. 이 시간 안에서 우리는 선교(宣敎)를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도할 수 있을 때에 전도를 해야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알고 서둘렀습니다. 주님 재림하시기 전에 더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평생을 걸고 애썼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의 엄숙함을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는 시간은 그실 시간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나에게 우선 생리학적 시간이 있습니다. 내 육체가 나서 자꾸 자라고 죽어 가는 시간입니다.
또한 철학적 시간이 있어서 깨달음이 있습니다. 내가 잠자는 시간은 시간으로 치지 말아야 합니다. 멍하여 있는 시간은 죽은 시간입니다. 의식이 있는 시간만이 시간에 속하는 것입니다.
같은 시간을 가지고 많이 깨닫고 많이 알고 많이 의식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 것도 모르는 채 멍청히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는 먹어도 되지 못한 생각만 하고 당장 발 밑에 떨어진 것밖에 헤아릴 줄 모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요 유치한 사람입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에 보면 어떤 사람은 당장의 한 수 앞밖에 내다보지 못하여 늘 잡혀먹고 집니다마는 수를 많이 보는 사람은 다섯 수 여섯 수 앞을 내다보고 막판의 수까지 멀리 내다볼 줄 압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내다보고 사십니까? 여러분의 철학적 시간은 어느 정도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은 철학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한발 앞의 일만 내다보고는 원망하여 탄식을 하고 다 된 것처럼 절망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착각하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계절이면 흔하게 봅니다마는 입학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세상 만난 듯이 좋아하고, 떨어졌다고 해서 하늘이 무너진 듯 실망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답답한 노릇입니다. 일년 후 10년 후를 내다본다면 결코 그런 착각에 빠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은 멀리 잡아야 합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은 다음의 시간까지 헤아리고 삽니다. 자신의 장례식 시간까지 생각할 줄 압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의 시간, 영원에 속한 그 시간을 생각하면서 오늘을 삽니다. 이렇게 사는 시간이 철학적 시간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중생하는 시간에서부터 성화(聖化)하는 과정의 시간, 육신의 몸을 벗고 하나님 앞에 가는 영생의 시간까지 생각합니다. 중생과 성화와 영화(榮化)의 역사를 나의 시간 안에서 생각합니다. 그 프로세스(과정)를 항상 한 사건으로 묶어서 의식합니다. 그것이 성도의 신학적인 시간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 시기를 알거니와"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시기(時機)라고 하는 것은 헬라어로 '카이로스'입니다. 시간은 시간인데 시계로 재는 작은 의미의 시간이 아니고 크고 깊은 의미의 시간이기 때문에 '시간'이라 하지 않고 '시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분명히 시간인데, 몇 시 몇 분을 말하는 게 아니라 현재라고 하는 시간 내게 주어진, 내가 속한, 내가 지금 발붙이고 있으며 내 생명의 근본이 되는 그 시간, 곧 깊고 오묘한 의미를 지닌 그 시간임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현재는 과거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과거는 지나간 것입니다. 천방지축 실수만 되풀이하다가 나이 들어 가지고는 내 청춘 되돌려달라느니, 청춘이 그립다느니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마는 소용없는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아직도 과거에 매여 있다면 그사람은 현재라는 새로운 시간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느 순간에건 무한한 미래를 향하여 과거와 인연을 끊은 채 앞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시간은 정지하는 법이 없습니다. 내 생각이 정지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간도 같이 정지해주지는 않습니다. 마치 나도 모르게 내 몸이 늙고 있는 것처럼, 또다시 한 해가 저물고 새 해가 성큼 다가온 것처럼 말입니다.
내가 의식하건 모르건 시간은 언제나 물 흐르듯 쉬지 않고 미래를 향하여 달려갈 뿐입니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데로 제 걸음으로 가고 있습니다. 쉼없이 운행하고 있는 이 시간 안에서 나는 어떻게 안정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변합니까? 내가 같이 변하면 내가 안정됩니다. 나는 부동자세로 서 있으면서 안정을 찾겠다고 합니다. 이런 안정은 죽은 안정입니다. 죽음을 의미합니다. 많은 차가 어지러이 지나가는데 그 가운데에 내가 가만히 서 있으면 안정이 없습니다. 이런 때에 내가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길은 달리는 차들과 속도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긴 밤길에 차를 몰고 가노라면 외롭습니다. 이런 때에는 자연스레 차들끼리 몰려서 가게 됩니다. 한 십여 대씩 함께 어우러져서 달리느라면 길이 내 앞으로 달려오는 것 같고 모든 차가 일제히 정지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러한 안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이든 인간의 시간이든, 신학적 시간이든 철학적 시간이든, 시간은 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쉬지 않고 흐르는 시간에 보조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구속사적인 시간의 안정이 있는 것입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 오늘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면, 우선 과거의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는 구원이 있습니다. 현재 하나님과 동행하는 차원의 구원이 있습니다. 최종 심판의 날에 구원받는, 다시 말하여 종말론적인 구원이 있습니다.
시간과 함께 우리 앞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다가오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생리학적으로 볼 때에는 죽음입니다마는, 내세를 믿고 천국을 바라보고 구원의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죽음 아닌 구원인 것입니다. 육신을 벗고 오래 기다려오던 주님을 맞이하는 시간입니다. 눈물이 없고, 한숨도 이별도 없는 그 영광스러운 나라로 들어가는 승리의 시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이라는 시간 너머로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영생의 시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주적 관점에서 생각해보아도 이 세상의 끝이 오고 있습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깝습니다.
이 세상은 날로 험악해지고 있습니다. 점점 어두워집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세상이 점점 어두워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에는 할 수만 있다면 택한 백성이라도 유혹하려드는 무서운 환난과 핍박과 죄악이 난무하리라고 경고합니다. 우리의 짧은 일생 동안에도 수없이 보아오지 않았습니까?
사회주의는 사회주의대로 자본주의는 또 그 나름으로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문제 투성이요, 돈푼이나 있는 나라에서는 그 나름대로 방탕과 타락과 폭력과 불화와 전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됩니다. 때마침 세계적으로 동서 진영의 긴장이 완화되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제 모든 문제가 호전되리라고 전망합니다마는 제 견해는 좀 다릅니다. 사회주의 체제를 버렸다고 해서 금방 민주주의가 이룩되는 것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를 실현한다 해서 반드시 안정과 평화가 주어집니까? 경제적 부를 성취했다고 해서 자유와 평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나라에,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그곳에 진정한 평안이 있습니다.
동구권의 나라들이 심하게 개혁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변혁을 일으키기 위해 무수한 희생을 치릅니다. 저는 저 나라들이 앞으로도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어느 나라에서 7만 명이 희생되었다고 하지마는 앞으로 70만, 아니 그 이상이 죽어갈는지도 모릅니다. 수십 년에 걸쳐 많은 격동과 진통을 겪어야만 비로소 어제 정도의 안정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리 밝게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밤은 깊어만 갑니다. 우상숭배와 부도덕과 폭력과 무질서, 헐뜯는 일과 질투, 시기, 재난과 무수한 전쟁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분명히 밤입니다. 그러나 이 밤은 아침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현재는 미래에 잇닿아 있습니다. 과거에 매일 것이 아닙니다. 현재에 집착해서도 안됩니다. 내 발은 현재를 딛고 있지만 내 생각과 내 믿음은 미래를 살고 있어야 합니다. 빛과 아침, 미래와 그리고 영원을 의식해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에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적 지식입니다. 또 이성과 그 능력에 의해 판단되는 합리적 이해로서의 지식이 있습니다. 현재적입니다. 그러나 참된 지식은 오직 믿음에 있습니다. 저 앞에 밝아오는 아침을 바라보는 지식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의 눈, 믿음의 판단, 믿음의 의식으로야 알 수 있는 세계입니다.
여러분, 캄캄한 밤에도 빛은 있습니다. 구름이 덮여 있어도 태양은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아침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시간이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가오는 아침의 밝은 빛을 바라볼 줄 아는 영적인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영적 통찰력(spiritual insight)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아침을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생각, 우리의 목적은 저 미래에 있어야 합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역사 의식이 있습니다.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라" ---- 밤에 속한 것, 부끄러운 것, 밤에만 할 수 있는 것들을 다 버리라고 말씀합니다.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 이런 것들은 다 어두운 것들이요 부끄러운 일들입니다. 사람 앞에도 부끄러운 일이요 하나님께는 더욱 그러합니다. 다 잊어버리고 씻어 버려야 합니다.
어린 국민학생 하나가 가방을 메고 신이 나서 뛰어옵니다. 가만히 보니 손에 종잇장 같은 것을 하나 쥐고 콧노래를 부르며 싱글벙글합니다. 제가 그 아이에게 그것 좀 보자 했더니 "예"하고 얼른 내어줍니다. 들여다보니 성적표예요. 전부가 '수'입니다. 공부를 썩 잘했습니다. 그러니 누구라도 보라, 이겁니다. 시원치 않은 성적표라면 쉽게 보여주겠습니까? 가방 깊숙이 숨겨두었다가 부모 몰래 아버지 도장 찍어 갑니다.
선한 일할 때에 이름을 숨기는 것은 부끄럽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고하지만 그 일 때문에 괴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비록 어두운 세상에 살지만 빛이 환히 다가 올 때에는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이 나설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두울 때에 옷을 입는 것은 밝은 아침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아침이 올 때에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를테면 여성의 화장을 두고도 그것이 근본적으로 거짓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별로 잘나지도 않은 얼굴 예쁘게 보이려니까 거짓 아닙니까? 거짓이란 어두운 데서나 행사하는 것인데, 밤에나 어울릴 짙은 화장을 하고 밝은 대낮에 활보하는 것처럼 추한 것도 없습니다.
가끔 결혼식 주례를 맡다보면 우스운 일도 겪습니다. 짙은 화장을 한 신부가 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에 보면 가관입니다.
눈물이 흐르면 화장한 얼굴 꼴이 말이 아니지요?
여러분, 밝은 빛 가운데서 살아야 합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자" ---- 어두움의 일은 벗어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어야 합니다.
갑옷이라는 말 '호플론'은 반드시 옷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군 장비 일체를 뜻합니다. 투구와 방패와 갑옷과 칼과 창을 다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빛의 갑옷을 입으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하나의 전투태세로 묘사하는 말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빛과 어두움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는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빛 앞에 존재하는 어두움이란 없습니다. 빛과 어두움의 싸움은 조용합니다. 빛이 비추면 어두움은 자연히 물러갑니다. 어두움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가냘픈 촛불빛에도 어두움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이미 이겨놓은 싸움입니다. 승리가 보장된 싸움입니다. 빛의 갑옷을 입고, 어두움과 싸우며 자기와 싸우며 죄와 싸우며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새 해, 새 아침이 되었습니다. 밤이지만 아침인 것처럼, 어두우나 빛을 보면서 새로운 영적 안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빛에 살고 그리스도로 옷입어 새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존재로, 새로운 의미로,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새 날을, 새 해를 제대로 맞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새로운 창조 역사에 동참한 자로서, 새로운 창조의 거룩한 역사를 이루는 긍지와 영광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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