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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나오는 자(요한복음 3장 19절~21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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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나오는 자(요한복음 31921)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3:20, 21)." 성경에서 말씀하는 빛은 단단히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기독교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쉽게 평범하게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면 확실한 믿음에 설 수 없을 뿐더러, 여러 가지 시험에 걸려 쉽게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러나 이 깊은 진리를 똑바로 깨닫기만 하면, 그 뒤로는 뿌리가 아주 튼튼하게 박혀서 마치 잘 박힌 못과 같이 빠지지도 흔들리지도 않게 될 것입니다. 이로써 진리를 알게 되고, 심오한 세계를 꿰뚫는 지혜와 능력도 얻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은 여러분 모두가 신학대학 강의실에 앉아 있다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의 잠언은 너무도 심오한 뜻을 담고 있어서 여간 정신을 모으지 않고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하고 시작합니다. 그에 바로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라고 말씀하셨으며, 그리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그 빛이 "좋았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하는 ''은 히브리말로 '오르'이며 헬라말로는 '포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깊이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빛이 있은 것은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되기 전의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깊이 생각함이 없이, 여느 책을 읽듯이 무심코 읽어나가기 때문에 그 같은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 빛이 있으라 하시니 어둡던 세상에 환한 빗이 생겼나보다'--이런 식으로 내 상식의 수준에서 쉽게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어물쩡 넘어가는 것이지만, 그실 이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창조과학계의 석학들이나 심지어는 아인슈타인까지도 이 문제를 굉장히 심각하게 논하고 있습니다. 성경말씀대로라면 ''은 태양이 있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라고 하면 우리는 기껏해야 태양이나 전등이나 촛불 같은 발광체로부터 나오는 빛이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오르' '포스'로 말씀되는 ''은 우리 상식으로 아는 빛이기 이전에 훨씬 더 근원적이고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것입니다. 하늘의 발광체들(해나 스스로 빛을 내는 별)보다 우선하여 그것들과는 무관하게 창조된 깊은 차원의 빛인 것입니다. 이런 초자연적인 빛이 자연적인 빛보다 먼저 존재하는 것입니다. 모든 생명의 원천된 빛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된 빛입니다. "빛이 있어라"하신 바의 그 빛입니다. , , 별이 창조되기 이전, 훨씬 근본적이고 원천적인, 아주 깊은 의미의,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의 빛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태양 중심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 특별히 육체적 생명은 철저하게 태양계 중심으로 이해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헤아리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몇년 몇월 며칠 이야기해봤댔자, 그것은 지구의 회전을 따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지구가 스스로 한 바퀴 돌아가면 그것이 '하루'입니다. 이를 가리켜서 '지구의 자전'이라고 합니다. 이 자전으로 말미암은 하루를 분할해서 시간, , 초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달이 지구를 한 바퀴 돌아가면, 그것이 '한 달'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한 바퀴 돌아가면, 그것이 '일 년'이 됩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을 기준으로 태양의 나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태양은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 엄청나게 뜨거운 불덩어리로 여기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운데 놓고 조그마한 흙덩이인 지구가 그 주위를 뺑뺑 돌고 있습니다. 한 바퀴 돌고서 태양의 나이가 1년 됐다, 한 바퀴 더 돌고서 태양의 나이가 2년 됐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구 자신에 대한 이야기일 뿐입니다. 태양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생명력을 가지고 존재합니다.

태양 자체가 생명의 근원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육체는 태양에서 난 에너지를 먹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식물이라고 하는 것 역시 엄격히 말하면 태양에너지의 산물입니다. 식물의 잎이 햇빛을 받아서 뿌리에서 흡수한 물과 조화를 이루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열매는 태양에너지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열매를 우리가 먹는 것입니다. 태양이 만들어준 열매를 먹고, 그것을 태우면서 열량을 발산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태양과 절대적 관계가 있는 공기를, 태양이 만들어주는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갑니다. 아주 오묘하지 않습니까?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 가지는 것은 말할것도없이 온 지구의 생명력이라는 것이 이렇듯 철저하게 태양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태양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렇습니다. 우리의 성장, 우리의 육체와 관계된 모든 여건이 다 태양 중심적입니다. 우리의 뇌까지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영()에 대한 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영은 태양 중심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영은 태양과는 다른 차원의 빛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더 근본적인 빛을 생각해야 합니다. 태양이 아닌, 눈으로 보지 못하는 빛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빛은 어떠한 체제 안에서도 동일합니다. 지구의 회전과도 관계없고 태양과도 관계없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건 보지 못하건 상관없습니다. 아주 신비로운 빛입니다. 태양 이전에 창조된 빛입니다. 이 빛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인 것입니다.

모든 것은 다 상대적입니다. 그러나 이 상대적이라고 하는 것 역시 절대적인 것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상대적인 것으로 평가된다는 것 자체가 절대를 기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절대가 없이는 상대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존재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바로 빛입니다. 이것은 태양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빛은 절대입니다. Maximumism -- 총 기준입니다. 이것이 기준이 되어서 상대적인 것을 판단합니다. 여기에 비추어서 길고 짧고, 검고 희고, 옳고 그르고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조금 더 깊이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시간'이라거니 '공간'이라거니 합니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빛 안에 함께 있습니다. 빛 안에서 하나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 정리해서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빛이라고 하면 물리적 물질적인 빛만을 생각하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환한 빛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높은 차원의 빛이 있습니다. 생명적인 빛이 그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빛을 가리켜서 과학자들은 적외선이니 자외선이니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심오한 생명적인 빛이 있기에, 그 빛 안에 생명이 있기에 지금 우리가 삶을,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눈에는 확연히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생명적인 빛이 있습니다.

또한 도덕적인 빛이 있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이 빛이 있습니다.

이 빛이 있기에 우리는 '이것은 밝은 것이요, 저것은 어두운 것이다. 이것은 선한 것이요, 저것은 악한 것이다'하고 구분할 수 있습니다. 그 기준이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이 빛이 있기에 전혀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무엇이 선이요 무엇이 악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마음 속에 도덕적인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좀 비밀스러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지난번에 북녘 땅을 방문했을 때에 평양에서 소위 말하는 유물사관에 정통한 교수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목사하고 믿지 않는 유물론 철학자가 만났으니 무슨 말이 오갔겠습니까? 저들은 하나님은 없다는 자신들의 믿음에 퍽이나 자신감이 있더군요. 그러니까 공산당원이 되었겠지만요.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모양인데 하나님의 모습을 보기를 했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했소? 무엇으로 그 존재를 증명하오?"라고 질문을 해오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되물어보았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는데, 보이는 것이 근본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 근본입니까? 보이지 않는 것에서 보이는 것이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 나왔다고 생각하십니까? 보이는 것이 많겠습니까, 보이지 않는 것이 많겠습니까?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많습니까, 경험할 수 없는 것이 더 많고 근본적입니까?" ", 그야 물론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지요."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것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에너지니 아르케(arkhe)…… 어떻게 표현해도 좋습니다. 어쨌든 물질의 근본은 보이지 않아요. 이것을 무엇이라고 이름 붙여도 좋습니다마는, 그것이 물질입니까, 아닙니까?" "유물사관적 차원에서는 물질의 근본도 물질입니다.

보이건 안보이건 물질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물질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인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인격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렇게 믿고 있습니다. 비인격적인 것은 인격으로부터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보고 듣고 느끼는 이 물질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왔고, 보이지 않는 세계 저쪽의 가장 근원적인, 아르케는 인격입니다. 우리 인간만 해도 이렇게 인격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모든 것의 근본이 비 인격일 수 있습니까? 인격에서 인격이 나오지, 비 인격에서 인격이 나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의 설명에 말문이 막힌 저들은 "예수믿는 사람들 말 잘한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구먼" 하더군요. 내가 말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고 하며 웃고 말았더니, 자신들도 예수 믿게 될까봐 걱정이라고 농담을 합디다.

여러분, 빛이란 무엇입니까? 빛을 물질로 보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은 빛을 인격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은 하나님이요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인격입니다. 따라서 빛을 물질로만 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물질적인 빛만을 생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인격적인 빛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부분이 아닙니다. 전체입니다. 그 빛 안에서 태양이라고 하는, 지구라고 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지극히 작은 것들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자기가 중심인 줄로 착각하지 마십시오. 태양도 별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큰 빛 앞에서 태양은 자그마한 한낱 물질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그 큰 빛 앞에서 지구는 더욱 하찮은 물질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들의 공깃돌만도 못한 물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구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니 오죽이나 하찮은 존재입니까? 그런데 이렇듯 보잘것없는 존재, 인간이 언감 고개를 잔뜩 쳐들고 하나님이 있다거니 없다거니 하고 있으니 가소롭지 않습니까? 내가 못 봤으니 하나님은 없다, 어디에 있는지 보여달라 --- 말이나 됩니까?

이 큰 빛 하나만 깨닫는다면 우리는 ''라는 존재의 의미를 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다윗도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勸告)하시나이까(8 : 4)"하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도대체 사람이 무엇입니까, 도대체 내가 무엇입니까, 아무 것도 아닌 저를 왜 이리도 사랑하십니까, 저에게 왜 관심을 두시고 잘못을 책망하십니까, 왜 잘했다고 칭찬하십니까, 하나님도 바쁘실 텐데 나 같은 것까지 왜 돌아보십니까?'하고 절실히 고백함입니다. 바로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야 할 고백입니다.

종교적인, 영적인 빛이 있습니다. 영적인 빛 --- 하나님의 빛을, 그리스도의 빛을 반사한 빛입니다. 사람이 있기에 빛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이 있기에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 빛 안에서, 그 빛을 받아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귀중한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물질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를 구분하여 생각하려고 합니다. 인격적인 세계와 비인격적인 세계를 구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 안에서 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태양계를 넘어선, 그 깊고 심오한 빛 안에서는 물질과 비 물질이 구분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따로 떼어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빛이 있기에 우리가 있습니다. 이 세계에서만 잠시 물질과 영이 갈라져 있을 뿐이지, 본디 하나입니다.

간혹 보면 "우리가 죽은 뒤에는 부활을 해야 하는데, 만약 시신을 불태워버린다면 어떻게 부활을 하겠어요?"라고 쓸데없이 걱정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스갯소리 비슷하게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육체가 없어서 부활시키시지 못할 하나님이라면 우리는 차라리 부활을 포기하는 게 속편하지요. '부활'이 겨우 그런 것이라면 그런 부활은 해서 무엇하겠어요?" 어떤 분들은 "기독교가 박해받던 시절 원형극장에서 맹수들의 먹이가 된 순교자들은 어떻게 부활을 했을까요?"라고 걱정합니다. "그 순교자들이 하지 못한 부활이라면 나도 안하겠소." 웬 걱정이 그리도 많은지요? 우리는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도 많이 합니다. 큰 빛 안에서 보면 물질 비 물질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오늘이니 내일이니가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무의미한 것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영적인 것을 강조하여 ''을 말씀합니다. 하나님께로서 나오는 빛을 말씀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보는 빛은 상징적 계시적인 것입니다. 오늘도, 지금 이 자리에도 우리 눈에 보이는 빛이 있습니다. 이것은 참 빛의 조그마한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이렇듯 눈으로 보는 빛에는 상당한 계시적 의미가 있습니다. 이 빛을 보면서 우리는 저 빛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엑스레이'라는 것이 있어서 사람의 뱃속까지도 훤히 들여다보더군요. 몸 속의 각 기관이 꿈틀꿈틀 운동하는 것, 물 내려가는 것까지도 보여줍니다. '엑스레이'라는 빛 앞에서 우리의 몸 속 구석구석이 드러납니다. 전기 불빛, 전자의 빛이 엄청납니다. 하물며 보이지 않는 빛, 하나님의 빛은 어떻겠습니까? 저러한 물질적인 빛보다, 태양의 빛보다 하나님의 빛은 훨씬 더 근원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8 : 12)." 그 빛,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보십시오."빛이 세상에 왔으되(19)"--빛이 세상에 와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이 빛은 계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근원적인 빛을 사람이 알아보도록 하기 위하여, 사람이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빛을 들어 말씀하십니다.

찬송가에도 보면 '작은 등불을 켜서 세상을 비추니……'하는 곡이 있지 않습니까? 대수롭지 않은 자그마한 불이지만 아주 캄캄하고 어두울 때에는 그것이 얼마나 귀하게 쓰입니까? 얼마나 생명적으로 쓰입니까? 그렇습니다. 사람은 빛이 없으면 죽습니다. 아주 작은 빛도, 하찮은 촛불일지라도 소중한 것입니다. 이러한 빛에는 우리로 참 빛을 깨닫게 하기 위한 상징적이요 계시적인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오늘도 빛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빛이 비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빛을 받아야 합니다. 그 빛을 믿어야 합니다. 빛을 전하고, 빛을 비추고, 빛을 반사해야 합니다. 작은 빛들을 통하여 저 큰 빛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장님에게는 빛이 소용없다'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눈을 감은 사람에게는 밝음이 소용없습니다. 전깃불도, 형광등도, 수은등도, 촛불도…… 소용이 없습니다. 밝으나 어두우나 아무 소용없습니다. 눈 딱 감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장님에게는 빛이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스스로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에 '세상에는 빛이 없다. 내가 보는 것처럼 세상은 어둡다'라고 생각하는 장님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이러이러한 빛이 있다고 설명해도 자기 눈에 보이지 않으므로 믿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일이지요.

그러나 이것이 현실입니다. 오늘도 보십시오. 눈을 감은 사람이 많습니다. 도덕적으로 어두운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물리적으로 어두운 사람은 물질적인 빛을 보지 못하듯이, 영적으로 어두운 사람은 영적인 빛을 보지 못합니다.

그리스에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장님이 밤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눈이 어두워서 앞을 보지 못하는 이 장님을 위하여, 캄캄한 길에 다른 사람이 그와 부딪칠까봐 친구가 등불을 켜서 그의 손에 들려주고 말했습니다. "이 등불을 들고 가면 다른 사람이 당신을 알아보고 비켜갈 것이네." 장님은 그 등불을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한참을 가다가 누군가와 꽝하고 부딪쳤습니다. 장님이 그 사람을 나무랍니다. "나야 장님이라서 그렇다고 하지만, 당신은 눈도 성할 터인데 왜 이 등불도 보지 못하고 이렇게 부딪친단 말이오?" 그러자 상대방은 한참을 더듬어보더니 말합니다. "당신이 들고 있는 등불은 이미 꺼졌다오." 장님은 불이 꺼진 줄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빛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빛보다는 빛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중요합니다. 빛을 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빛 안에서 살 수 있습니다. 빛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내가 빛을 보지 못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그 빛의 영롱함을 못 보게 됩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비참하지 않습니까? 모든 가치가 소멸되는 것이니까요. 지금 여기에 빛이 있습니다. 빨간빛, 노란빛, 파란빛…… 영롱하게 빛납니다.

그러나 내가 보지 못한다면, 내 눈이 감겨 있다면, 그것들이 아무리 영롱해도 나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모든 가치는 빛 안에 있습니다. 빛이 꺼지는 순간에 그 빛의 모든 가치도 함께 소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본문말씀을 통하여 악한 자는 빛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럴 수 밖에요. 빛은 어두움에 대하여 심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빛 앞에서 어두움은 다 물러갑니다. 밝은 빛 앞에서 어두움은 남아날 수가 없습니다. 악한 자는 빛을 생명의 빛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죽음의 빛으로 받아들입니다. 악은 빛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은 빛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빛 앞으로 나오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똑같은 빛인데도 불구하고 산 자에게는 생명이요, 생명이 끊어진 자에게는 죽음입니다. 여기 조그마한 풀 한 포기가 있습니다. 이 풀이 살아 있을 동안은 뿌리를 땅에 내리고 합당한 진액을 받으면서 태양 빛을 의지하여 잘 자라납니다. 태양 빛을 반기면서, 태양 쪽으로 잊을 펴고 자라납니다. 그러나 그 풀의 뿌리가 딱 끊어지는 순간, 그 시각부터 태양 빛은 그 풀을 죽이는 것이 됩니다. 뿌리가 없는 그 풀은 태양 빛 앞에서 더는 살수가 없습니다. 똑같은 빛이지만 이렇듯 산 자에게는 더 큰 생명을, 생명이 끊어진 자에게는 죽음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어두움을 심판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빛으로 나오기를 싫어하는, 빛을 기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어두운 자는 빛으로 나오는 것을 꺼립니다. 언제나 빛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어떻게든 피하려고만 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가 지금보다 좀더 밝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과 행동을 좀더 밝은 데서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젊은 사람들 연애하면서 '사랑합니다' '결혼합시다' 하는 이야기를 쉽게들 하는데, 저녁 9시가 지나서 한 말은 믿지 말라고요. 만일 상대가 '사랑한다'라고 말하거든 다음날 아침에 다시 만나서 밝은 데서 똑바로 쳐다보고 다시 말하라고 하십시오. 어두운 데서 아무도 안보는 나무 밑에서 '사랑한다' 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 말을 믿고 평생을 바치겠노라 하는 것 역시 맹추같은 짓이고요. 여러분, 어두운 데서 하는 말은 믿지 마십시오. 구약성경에도 보면 '재판은 절대로 밤에 하지 말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우리의 모든 언행은 다 빛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빛을 싫어한다는 것은 마음이 어두워졌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9절말씀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고 합니다. 왜 빛을 사랑하지 않고 어두움을 사랑한다는 것입니까? 악하기 때문입니다.

악은 빛 앞에서 드러나거든요. 악은 선() 앞에서 부끄러워지거든요.

어두움은 빛 앞에서 소멸되거든요. 때문에 악한 자는 빛을 싫어합니다.

오히려 어두움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술 마시는 것, 담배 피우는 것, 강한 자극을 주는 오락…… 이런 것들이 모두 어두움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신도 맑은 정신이 빛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 맑은 정신이 흐리멍텅해졌으니, 그것이 어두움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흐린 정신으로 하는 모든 일이 어두움입니다. 술 마시는 것 자체가, 술 취하는 것 자체가 어두움인 것입니다. 이 어두움 속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악에 저항하는 힘도 없습니다. 악을 분별하는 지혜는 더더욱 없습니다.

한때 방송을 통해 나옴으로써 온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이상구박사의 건강비결'이 있지 않습니까? 그 가운데 그럴듯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사람은 술을 마시면 용기가, 힘이, 정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소리도 치고 말도 많아집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그분 말씀인즉 술 마신 다음에는 피 속에 있는 T임파구까지 술기운으로 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균을 이기는 백혈구까지 정신이 해롱해롱해져서 균이 들어오면 '어서 오십시오'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균을 구별하지 못하고, 균과 싸워서 이기지도 못하고, 그만 균을 영접하고 만답니다. 그래서 술에 취한 상태에서 좋지 못한 음식을 먹는다든가, 혹은 건전하지 않은 관계를 가지게 된다든가 하면 영락없이 병균에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정신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빛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죄악을 이기겠습니까? 어떻게 죄악에 대항하겠습니까? 빛이 없음으로 분별력도 능력도 없어집니다. 결국 힘은 빛입니다. 생명은 빛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본문말씀을 보십시다. "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21)" ---진리를 좇는 자, 곧 빛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빛에서 나온 자로서 빛을 반기고 빛을 환영하기에 더 큰 빛을 받게 된다고 말씀하심입니다. 이 빛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빛만이 아닙니다. 도덕적이요 영적이요 아주 신령한 빛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빛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빛을 향하여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그 빛이 내 생각을, 내 정신을, 내 육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빛이 있음으로 도덕적인 빛이, 이성적인 빛이, 지혜의 빛이, 진리의 빛이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력, 지혜, 용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을 사랑할 것입니다. 빛을 영접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영원한 빛, 생명의 빛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온몸 가득히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를 온전히 드러내고 살아갈 것입니다. 참된 용기와 참된 지혜가 이에서 우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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