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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히브리서 6장 9절~15절)

by 【고동엽】 2023.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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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히브리서 6915)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지금까지도 유감스럽게 생각되는 일이 있습니다. 오래 전 제가 뉴욕에 갔을 때, 친분이 두터운 어느 목사님의 가정을 방문했었습니다. 그 부인과 자녀들과 함께 즐겁게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마침 자녀 하나가 갖은 고생을 하면서 고학을 하여 10년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우리 나라의 모 대학으로부터 교수로 초빙 받아 놓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힘자라는 대로 도와달라고 하여 저도 총장님께 특별히 말씀을 드려놓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지 불과 두 주일만에 소식이 왔습니다. 아주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우리 나라에 올 여비를 마련하겠다고 부둣가에서 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날, 일하는 것도 서툰 터에 이 배 저 배로 옮겨다니며 고된 노동을 하다가 그만 실족하여 물에 빠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죽을 일, 죽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10년간의 고학생활, 그렇게 해서 이룬 공부가 이렇듯 허망하게 끝나고 만다는 것에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과정도 좋았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그렇듯 허망하게 끝나고 말 때에 우리는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신앙도 약속과 성취의 긴장관계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알고자 해도 일시에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한번에 다 배울 수가 없습니다. 배움에는 부득불 과정이 필요합니다. 국민학교 1학년 어린이가 대학 교과서를 읽을 수 있습니까? 무릇 공부에는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소유도 그렇습니다. 무엇을 가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원하는 대로 다 가질 수도 없을 뿐더러, 혹 가졌다 해도 진정한 의미의 소유가 되지 않습니다. 나의 지식과 능력이 바람직한 수준까지 향상되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을 수 있는, 감당할 수 있는, 가치를 누릴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지식, 소유, 재물이 소용없습니다. 한마디로 성숙한 인격이 따라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해서 지식은 얻었는데 거기에 인격이 따르지 않으면 그 지식은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지위는 얻었는데 성숙한 인격에서가 아니면 그 지위가 결코 복되지 않습니다. 물질은 더욱 그렇습니다. 가진 자의 인격이 형편없으면, 그 돈은 없는 것만도 못합니다. 결론지어 말하면, 사람은 저마다 그 인격의 성숙, 그 한계만큼의 소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식도 재산도 그러합니다. 가졌다고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고 내것이 아닙니다. 나의 인격, 인격의 성숙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그 약속을 내가 믿습니다. 얼마나 믿고, 어떻게 믿고, 어떤 내용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둘째가 믿는 바 약속을 따라가는 믿음입니다. 깨닫고, 인내하고, 순종하고, 공부하고, 수련을 쌓아가면서 계속 발전해나갑니다. 셋째가 약속의 성취를 믿는 믿음입니다. 약속을 바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그 약속을 누리는 것입니다. 약속을 받은 자로서의 믿음입니다. 장차의 종말론적 약속을 받는 완성의 믿음입니다. 축복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다만 문제되는 것은 약속 받는 자인 우리의 미숙함과 그릇됨과 미완성인 것입니다. 약속은 미래적입니다.

제가 어려서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인품과 덕망이 높은 부자가 살았다고 합니다. 아시는 대로 옛날에는 거지가 많았습니다. 아침저녁 할 것 없이 끼니때가 되면 깡통을 하나씩 들고 먹을 것을 얻으러 옵니다. 이 부자는 워낙에 마음씀씀이가 좋아서 늘상 식구 수에 비하여 밥을 많이 짓게 했습니다. 걸식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밥을 나누어주려는 것이었지요.

어느 겨울날 아침, 어린아이 하나가 오들오들 떨면서 밥을 얻으러 왔습니다. 먼 빛으로 보아 아마도 예닐곱이나 될까말까한 어린아이인데 그 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이상스럽습니다. 깡통을 들고 다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어린아이는 낡아빠진 병풍을 등에 걸머지고 있습니다. 부자는 무슨 곡절이 있겠다 싶어 집안으로 아이를 불러들입니다. "너는 누구냐?" "네 아버지가 누구냐?" 차근차근 물어보니 이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자신의 친구이더라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가 바로 이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앞뒤 사정이 궁금하여 아이에게 거듭 물어봅니다. "가산도 많았고 형들도 있지 않았느냐? 너의 이 꼴이 대체 어찌된 영문이냐?"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곧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는 수없이 큰 형님 댁에 가서 살았는데 한동안 있으니 작은 형님한테 가라고 합니다. 또 거기서 한동안 있으니 큰 형님한테 가라는 것입니다. 이 집 저 집 왔다갔다하다가 결국에는 쫓겨나서 이렇게 된 것이어요." "네 아버지는 지혜롭고 덕이 높으신 분이었다. 유산도 많았을 터인데 너는 아무 것도 물려받은 것이 없었더냐?" "형님들에게는 땅도 주시고 집도 주셨는데, 제게는 이 낡아빠진 병풍 하나만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래서 힘이 들어도 꼭 가지고 다닙니다." 이 말을 들은 부자가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어 병풍을 내 놓으라 하여 칼로 찢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그 속에는 땅문서가 들어 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형들의 사람됨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어린 막내의 몫으로 재산을 주어놓으면 자신이 죽은 후에 다 빼앗기고 말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땅문서를 낡은 병풍 속에 넣었고, 그 병풍만을 남겨준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서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이 낡은 병풍만을 남기었겠는가'하고 병풍 속을 살펴보게 될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 아버지에 대한 사랑,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을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 것입니다. 그 부자는 아이의 후견인이 되어서 땅문서를 아이 앞으로 돌려주고 장성할 때까지 훌륭하게 키워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 약속을 받을만한 수준에 도달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미래적 현실입니다. 수표는 돈이 아닙니다. 종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돈과 바꿀 수 있다는 약속이 있기에 돈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돈은 물질이 아닙니다. 땅도 아니요 옷도 아니요 음식도 아닙니다. 그러나 돈으로 물질을 살 수 있다는 전제가 있기에 그 약속이 있어서 돈이 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인하신 약속어음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약속을 얼마나 신실하게 믿고 간직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마치 예약된 초대권과 같고 좌석권과 같습니다. 비행기를 탈 일이 있어서 공항에 나갑니다. 비행기는 예약을 할 때에 이미 좌석이 정해집니다. 그런데 너나할것없이 조급하여 서두릅니다. 내가 앉을 좌석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데 좀 천천히 타면 어떻습니까?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좀 여유를 두어도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고 성실하게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단지 이 약속에 대한 우리의 진실한 응답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응답,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공간, 지식과 능력에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내 인격에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내 믿음의 그릇에도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아시고 계십니다.

이것까지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것을 깊이 간증해야 하겠습니다. 공부를 하더라도 단번에 다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지식은 지극히 부분적입니다. 세상의 그 많은 지식 가운데 아주 적은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씩 하나씩 알아 가는 것입니다. 가까운 예로 부모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의 사랑을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모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지식은 부분적 이해에 불과합니다. 소유도 제한적입니다. 다 가질 수 없습니다. 단지 일부분을 가질 뿐입니다. 그 가치도 조금씩 누려갑니다. 어찌 우리가 가진 재산을 다 누릴 수 있습니까? 밥상에 올라온 음식마저도 한 숟갈씩 먹습니다. 공짜로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한적인 존재입니다. 약을 먹어도 좋은 약이라고 해서 한번에 다 먹어서는 안됩니다. ''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재미있는 경험이 있습니다.

오래 전 괌 섬에 새로 예배당을 짓고 부흥회를 하는데 초청을 받아서 갔습니다. 일본에서 괌 섬까지 논스톱 비행을 하는데 도착시간이 새벽 3시입니다. 영접하러 나오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마는 도착해보니 목사님과 그 교회에서 가장 충성스런 권사님 한 분이 나와 있습니다. 새벽 3시까지 기다렸다가 맞이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디다. 하도 고마워서 목사님과 함께 나온 권사님을 눈여겨보았는데, 웬일인지 그날 저녁 부흥회에 그 권사님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사흘 내내 보이지 않습니다. 궁금하여 물어보았더니, 며칠 전부터 감기에 걸려 고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빨리 나아서 부흥회에 온전하게 참석하겠다고 감기약인 '콘텍600'을 두 알이나 먹었다고 합니다. '콘텍 600'은 좀 독한 약입니다. 먹고 나면 정신이 어찔어찔합니다. 그런 것을 한꺼번에 두 알이나 먹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현기증이 나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부흥회에는 참석도 못하고 제가 일정을 다 마치고 떠나는 날, 비행장에 나왔습디다. 알파(A)파 오메가( ), 처음과 끝에서만 만난 것이지요. 아무리 급해도 약은 처방에 따라 먹어야 합니다. 효력은 절차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음식을 먹고, 몸에서 영양분을 흡수하고, 그러면서 효력을 내고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계가 있습니다. 그럴진대 저 크신 하나님, 저 크신 하나님의 축복, 저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어찌 단번에 알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 되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소망입니다. 정치니 경제니, 기술이니 소유니 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문제입니다. 소망은 미래의 문제입니다. 미래는 약속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말씀합니다.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11)" 라고. 모름지기 소망의 풍성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무지개를 따라가는 어린아이의 어리석음 같은 막연한 미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약속이 있는 미래입니다. 오메가 포인트( point)가 있고, 디데이(D-day)가 있는 약속입니다. 결정적 미래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주의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성경 전체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역성경을 해석함에 '주의 날Lord's day' '여호와의 날'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구약성경을 풀 길이 없습니다. 그토록 귀중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그 마지막날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날에 의해서 오늘을 생각합니다. 이 보증이 있는 미래, 여호와께서 보증하신 그 미래를 항상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소망을 항상 확인, 재확인하여 확증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소망에 살아야 하겠습니다.

소망이 크고 확실하게 보일 때에 오늘의 문제는 작아집니다.

자연스럽게 쉽게 풀어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에머슨(R.W.Emerson)은 비유하여 말하기를, 믿음이라는 것은 종달새의 알을 손에 들고 종달새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손에는 종달새의 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귀는 저 앞에 있을 종달새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저 앞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 돼지꼬리 붙잡고 순대 내놓으라 한다는 말처럼 성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마땅히 그 약속을 받는 인내와 믿음과 겸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11)"---'동일(同一)'이라는 말은 곧 지속적 경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태하지 않은 부지런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스퓨네'입니다. 단순하게 '중단 없는 열성'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요, 정해진 목표를 향하여,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경주를 가리킵니다.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가는 경주자를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은 산책이 아니요, 바로 경주입니다.

여러분, 당면한 문제가 복잡하고 어수선합니까? 산책을 해서 그렇습니다. 경주를 해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목회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주일 아침에 비가 오면 '오늘은 안나오는 사람이 많겠구나'했는데, 요즘은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비오는 날에 더 많이 나옵니다. 오히려 날씨 좋은 날이 걱정입니다. 교회에는 안나오고 아침 일찍 다른 데로 빠져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Priority N0.1,' 최우선, 절대 우선이 무엇입니까? 절대 양보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 들쭉날쭉 하는 사람을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얼마나 바쁜 때인데, 시간을 그토록 허비합니까? 경주하는 사람은 앞만 바라보고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어째서 한가한 것입니까?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라고 말씀합니다. 비행기의 이치를 생각해봅시다.

비행기는 공중을 날아서 갑니다. 비행기에서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로 갈 수 없습니다. 잠시라도 추진력이 떨어지면 그대로 추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활주로가 길지 않습니까? 계속 앞으로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래야 합니다. 줄기차게 앞으로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잠시라도 멈추면 병에 걸리고 시험에 듭니다. 우리는 과거에 쫓기는 것이 아니요, 미래에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약속된 미래, 그 결정적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인내하라고 말씀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소망은 인내를 낳습니다. 소망을 가진 자에게 인내는 결코 어려움이 아닙니다.

인내가 소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칼뱅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인간은 그 약속에 이르도록 인내하여야 한다.' 경주의 지속성, 경건의 지속성을 지켜가야 합니다. 이제 본문은 귀중한 말씀으로 결론을 짓습니다.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2)."

우리가 성경을 봅니다. 성경은 약속을 받은 사람, 약속을 따라 산 사람, 약속을 누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약속을 따라 산 사람들에 대한 케이스 북(case book)입니다. 전부가 사례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갑니다. 그러나 도중에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에 못 들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을 들어 말씀합니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15)." 아브라함은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을 그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받기까지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손자를 본 것으로 치자면 85년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리라'하신 말씀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되, 먼 훗날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약속을 받은 사람, 약속을 기업으로 누린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겸손이 있고 인내가 있습니다.

약속은 있으나 믿음이 없으면 모처럼 받은 약속도 그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약속을 기업으로, 나의 기업으로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약속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성취된 현실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히브리서 6915)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지금까지도 유감스럽게 생각되는 일이 있습니다. 오래 전 제가 뉴욕에 갔을 때, 친분이 두터운 어느 목사님의 가정을 방문했었습니다. 그 부인과 자녀들과 함께 즐겁게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마침 자녀 하나가 갖은 고생을 하면서 고학을 하여 10년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우리 나라의 모 대학으로부터 교수로 초빙 받아 놓고 있었습니다. 저한테 힘자라는 대로 도와달라고 하여 저도 총장님께 특별히 말씀을 드려놓겠다는 약속까지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지 불과 두 주일만에 소식이 왔습니다. 아주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우리 나라에 올 여비를 마련하겠다고 부둣가에서 노동을 했다고 합니다. 추운 겨울날, 일하는 것도 서툰 터에 이 배 저 배로 옮겨다니며 고된 노동을 하다가 그만 실족하여 물에 빠져 목숨을 잃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죽을 일, 죽음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10년간의 고학생활, 그렇게 해서 이룬 공부가 이렇듯 허망하게 끝나고 만다는 것에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하지 않습니까? 참으로 유감스럽습니다. 시작은 좋았습니다. 과정도 좋았습니다. 최선을 다했습니다. 진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이 그렇듯 허망하게 끝나고 말 때에 우리는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신앙도 약속과 성취의 긴장관계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알고자 해도 일시에 다 알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한번에 다 배울 수가 없습니다. 배움에는 부득불 과정이 필요합니다. 국민학교 1학년 어린이가 대학 교과서를 읽을 수 있습니까? 무릇 공부에는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소유도 그렇습니다. 무엇을 가지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원하는 대로 다 가질 수도 없을 뿐더러, 혹 가졌다 해도 진정한 의미의 소유가 되지 않습니다. 나의 지식과 능력이 바람직한 수준까지 향상되어 있어야 합니다. 깨달을 수 있는, 감당할 수 있는, 가치를 누릴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지식, 소유, 재물이 소용없습니다. 한마디로 성숙한 인격이 따라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공부는 해서 지식은 얻었는데 거기에 인격이 따르지 않으면 그 지식은 무용지물일 뿐입니다.

지위는 얻었는데 성숙한 인격에서가 아니면 그 지위가 결코 복되지 않습니다. 물질은 더욱 그렇습니다. 가진 자의 인격이 형편없으면, 그 돈은 없는 것만도 못합니다. 결론지어 말하면, 사람은 저마다 그 인격의 성숙, 그 한계만큼의 소유를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지식도 재산도 그러합니다. 가졌다고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이름으로 등기가 되어 있다고 내것이 아닙니다. 나의 인격, 인격의 성숙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믿음을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가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그 약속을 내가 믿습니다. 얼마나 믿고, 어떻게 믿고, 어떤 내용을 믿느냐가 중요합니다. 둘째가 믿는 바 약속을 따라가는 믿음입니다. 깨닫고, 인내하고, 순종하고, 공부하고, 수련을 쌓아가면서 계속 발전해나갑니다. 셋째가 약속의 성취를 믿는 믿음입니다. 약속을 바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그 약속을 누리는 것입니다. 약속을 받은 자로서의 믿음입니다. 장차의 종말론적 약속을 받는 완성의 믿음입니다. 축복은 약속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다만 문제되는 것은 약속 받는 자인 우리의 미숙함과 그릇됨과 미완성인 것입니다. 약속은 미래적입니다.

제가 어려서 할아버지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인품과 덕망이 높은 부자가 살았다고 합니다. 아시는 대로 옛날에는 거지가 많았습니다. 아침저녁 할 것 없이 끼니때가 되면 깡통을 하나씩 들고 먹을 것을 얻으러 옵니다. 이 부자는 워낙에 마음씀씀이가 좋아서 늘상 식구 수에 비하여 밥을 많이 짓게 했습니다. 걸식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밥을 나누어주려는 것이었지요.

어느 겨울날 아침, 어린아이 하나가 오들오들 떨면서 밥을 얻으러 왔습니다. 먼 빛으로 보아 아마도 예닐곱이나 될까말까한 어린아이인데 그 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이상스럽습니다. 깡통을 들고 다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어린아이는 낡아빠진 병풍을 등에 걸머지고 있습니다. 부자는 무슨 곡절이 있겠다 싶어 집안으로 아이를 불러들입니다. "너는 누구냐?" "네 아버지가 누구냐?" 차근차근 물어보니 이 아이의 아버지 되는 사람이 자신의 친구이더라는 것입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친구가 바로 이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앞뒤 사정이 궁금하여 아이에게 거듭 물어봅니다. "가산도 많았고 형들도 있지 않았느냐? 너의 이 꼴이 대체 어찌된 영문이냐?"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곧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하는 수없이 큰 형님 댁에 가서 살았는데 한동안 있으니 작은 형님한테 가라고 합니다. 또 거기서 한동안 있으니 큰 형님한테 가라는 것입니다. 이 집 저 집 왔다갔다하다가 결국에는 쫓겨나서 이렇게 된 것이어요." "네 아버지는 지혜롭고 덕이 높으신 분이었다. 유산도 많았을 터인데 너는 아무 것도 물려받은 것이 없었더냐?" "형님들에게는 땅도 주시고 집도 주셨는데, 제게는 이 낡아빠진 병풍 하나만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래서 힘이 들어도 꼭 가지고 다닙니다." 이 말을 들은 부자가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어 병풍을 내 놓으라 하여 칼로 찢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그 속에는 땅문서가 들어 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형들의 사람됨이 좋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어린 막내의 몫으로 재산을 주어놓으면 자신이 죽은 후에 다 빼앗기고 말 것을 내다보았습니다. 깊이 생각하고 땅문서를 낡은 병풍 속에 넣었고, 그 병풍만을 남겨준 것입니다. 아이가 자라서 '아버지가 나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이 낡은 병풍만을 남기었겠는가'하고 병풍 속을 살펴보게 될 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 아버지에 대한 사랑,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을 깨달을 날이 있을 것이라 확신한 것입니다. 그 부자는 아이의 후견인이 되어서 땅문서를 아이 앞으로 돌려주고 장성할 때까지 훌륭하게 키워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분명한 약속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이 약속을 받을만한 수준에 도달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약속은 미래적 현실입니다. 수표는 돈이 아닙니다. 종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돈과 바꿀 수 있다는 약속이 있기에 돈과 같은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돈은 물질이 아닙니다. 땅도 아니요 옷도 아니요 음식도 아닙니다. 그러나 돈으로 물질을 살 수 있다는 전제가 있기에 그 약속이 있어서 돈이 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사인하신 약속어음을 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약속을 얼마나 신실하게 믿고 간직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마치 예약된 초대권과 같고 좌석권과 같습니다. 비행기를 탈 일이 있어서 공항에 나갑니다. 비행기는 예약을 할 때에 이미 좌석이 정해집니다. 그런데 너나할것없이 조급하여 서두릅니다. 내가 앉을 좌석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는데 좀 천천히 타면 어떻습니까?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좀 여유를 두어도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하고 성실하게 이루어집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단지 이 약속에 대한 우리의 진실한 응답이 문제되는 것입니다. 진실한 응답,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간과 공간, 지식과 능력에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내 인격에 제한을 받고 있습니다. 심지어 내 믿음의 그릇에도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아시고 계십니다.

이것까지 하나님께서 주장하신다는 것을 깊이 간증해야 하겠습니다. 공부를 하더라도 단번에 다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지식은 지극히 부분적입니다. 세상의 그 많은 지식 가운데 아주 적은 것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씩 하나씩 알아 가는 것입니다. 가까운 예로 부모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의 사랑을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월이 지나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부모님의 사랑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지식은 부분적 이해에 불과합니다. 소유도 제한적입니다. 다 가질 수 없습니다. 단지 일부분을 가질 뿐입니다. 그 가치도 조금씩 누려갑니다. 어찌 우리가 가진 재산을 다 누릴 수 있습니까? 밥상에 올라온 음식마저도 한 숟갈씩 먹습니다. 공짜로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제한적인 존재입니다. 약을 먹어도 좋은 약이라고 해서 한번에 다 먹어서는 안됩니다. ''이라고 하니 생각나는 재미있는 경험이 있습니다.

오래 전 괌 섬에 새로 예배당을 짓고 부흥회를 하는데 초청을 받아서 갔습니다. 일본에서 괌 섬까지 논스톱 비행을 하는데 도착시간이 새벽 3시입니다. 영접하러 나오기 어려운 시간입니다 마는 도착해보니 목사님과 그 교회에서 가장 충성스런 권사님 한 분이 나와 있습니다. 새벽 3시까지 기다렸다가 맞이해 주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디다. 하도 고마워서 목사님과 함께 나온 권사님을 눈여겨보았는데, 웬일인지 그날 저녁 부흥회에 그 권사님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사흘 내내 보이지 않습니다. 궁금하여 물어보았더니, 며칠 전부터 감기에 걸려 고생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빨리 나아서 부흥회에 온전하게 참석하겠다고 감기약인 '콘텍600'을 두 알이나 먹었다고 합니다. '콘텍 600'은 좀 독한 약입니다. 먹고 나면 정신이 어찔어찔합니다. 그런 것을 한꺼번에 두 알이나 먹었으니 오죽했겠습니까?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현기증이 나서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부흥회에는 참석도 못하고 제가 일정을 다 마치고 떠나는 날, 비행장에 나왔습디다. 알파(A)파 오메가( ), 처음과 끝에서만 만난 것이지요. 아무리 급해도 약은 처방에 따라 먹어야 합니다. 효력은 절차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사는 것도 그렇습니다. 음식을 먹고, 몸에서 영양분을 흡수하고, 그러면서 효력을 내고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단계가 있습니다. 그럴진대 저 크신 하나님, 저 크신 하나님의 축복, 저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어찌 단번에 알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 되는 바른 자세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문제는 소망입니다. 정치니 경제니, 기술이니 소유니 하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문제입니다. 소망은 미래의 문제입니다. 미래는 약속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말씀합니다.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11)" 라고. 모름지기 소망의 풍성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무지개를 따라가는 어린아이의 어리석음 같은 막연한 미래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는 약속이 있는 미래입니다. 오메가 포인트( point)가 있고, 디데이(D-day)가 있는 약속입니다. 결정적 미래인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주의 날'이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성경 전체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구역성경을 해석함에 '주의 날Lord's day' '여호와의 날'을 이해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구약성경을 풀 길이 없습니다. 그토록 귀중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그 마지막날을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날에 의해서 오늘을 생각합니다. 이 보증이 있는 미래, 여호와께서 보증하신 그 미래를 항상 마음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원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이 소망을 항상 확인, 재확인하여 확증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넘치는 소망에 살아야 하겠습니다.

소망이 크고 확실하게 보일 때에 오늘의 문제는 작아집니다.

자연스럽게 쉽게 풀어나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에머슨(R.W.Emerson)은 비유하여 말하기를, 믿음이라는 것은 종달새의 알을 손에 들고 종달새의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내 손에는 종달새의 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귀는 저 앞에 있을 종달새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저 앞을 바라보며 인내하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 돼지꼬리 붙잡고 순대 내놓으라 한다는 말처럼 성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마땅히 그 약속을 받는 인내와 믿음과 겸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11)"---'동일(同一)'이라는 말은 곧 지속적 경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태하지 않은 부지런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스퓨네'입니다. 단순하게 '중단 없는 열성'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요, 정해진 목표를 향하여,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경주를 가리킵니다. 온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가는 경주자를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은 산책이 아니요, 바로 경주입니다.

여러분, 당면한 문제가 복잡하고 어수선합니까? 산책을 해서 그렇습니다. 경주를 해보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목회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주일 아침에 비가 오면 '오늘은 안나오는 사람이 많겠구나'했는데, 요즘은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비오는 날에 더 많이 나옵니다. 오히려 날씨 좋은 날이 걱정입니다. 교회에는 안나오고 아침 일찍 다른 데로 빠져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Priority N0.1,' 최우선, 절대 우선이 무엇입니까? 절대 양보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이 들쭉날쭉 하는 사람을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얼마나 바쁜 때인데, 시간을 그토록 허비합니까? 경주하는 사람은 앞만 바라보고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이 어째서 한가한 것입니까?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라고 말씀합니다. 비행기의 이치를 생각해봅시다.

비행기는 공중을 날아서 갑니다. 비행기에서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뒤로 갈 수 없습니다. 잠시라도 추진력이 떨어지면 그대로 추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활주로가 길지 않습니까? 계속 앞으로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래야 합니다. 줄기차게 앞으로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잠시라도 멈추면 병에 걸리고 시험에 듭니다. 우리는 과거에 쫓기는 것이 아니요, 미래에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확실하게 약속된 미래, 그 결정적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인내하라고 말씀합니다. 참아야 합니다. 소망은 인내를 낳습니다. 소망을 가진 자에게 인내는 결코 어려움이 아닙니다.

인내가 소망을 낳는 것이 아니라 소망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겠습니다. 칼뱅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신다. 인간은 그 약속에 이르도록 인내하여야 한다.' 경주의 지속성, 경건의 지속성을 지켜가야 합니다. 이제 본문은 귀중한 말씀으로 결론을 짓습니다.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12)."

우리가 성경을 봅니다. 성경은 약속을 받은 사람, 약속을 따라 산 사람, 약속을 누린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약속을 따라 산 사람들에 대한 케이스 북(case book)입니다. 전부가 사례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갑니다. 그러나 도중에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에 못 들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아브라함을 들어 말씀합니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15)." 아브라함은 오래 참음으로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분명하신 말씀을 그가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을 받기까지 25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습니다. 손자를 본 것으로 치자면 85년입니다. '복의 근원이 되리라'하신 말씀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서부터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지되, 먼 훗날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약속을 받은 사람, 약속을 기업으로 누린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겸손이 있고 인내가 있습니다.

약속은 있으나 믿음이 없으면 모처럼 받은 약속도 그에게는 소용이 없습니다. 약속을 기업으로, 나의 기업으로 누릴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 약속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약속이 성취된 현실로 살아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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