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3.20 주일 설교(시편 강해 16)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시 16:1-11
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4 다른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자는 괴로움이 더할 것이라 나는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를 드리지 아니하며 내 입술로 그 이름도 부르지 아니하리로다
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7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8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9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10 이는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를 멸망시키지 않으실 것임이니이다
11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일본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되, 일본 원전 폭발 위험성이 사라지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일본은 처자가 없는 279명으로 결사대를 구성하여 원전 폭발을 막으려고 결사적인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들을‘현대판 사무라이’전쟁터에 투입된‘자살 부대’라고 말합니다. 눈물겨운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보니 그들 중에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전력 복구 작업 담당인 '사토우 나오요시'라는 분이 크리스찬이고, 지금 원전에서 일하시는 분들 중에는 후쿠시마 제일성서침례교회 교인들이 여러 분 있다는 것입니다.
일본 국민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헌신을 하는 그리스도인 형제들 소식을 들으면서 대단하다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읽은 시편 16편은 저에게 말할 수 없이 큰 위로와 은혜가 되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깊이 와 닿은 구절은 2절 말씀이었습니다.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나의 주님 당신을 떠나서는 나에게 행복이 없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 고백은 제가 늘 고백하기 좋아하는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라는 고백과 같은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다윗을 살렸습니다. 다윗이 이 시편을 지을 때 대단히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시 16:1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다윗은 생명이 위협당하는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순간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이 정말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하나님만을 붙잡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히려 생명의 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이 고백은 그렇게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이 고백이 두려울 것입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며 산다는 것은 세상에서는 낙오되고 실패자가 되고 가난한 자가 될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한번은 부흥회에서 설교 후에 찬송 94장을 불렀습니다. 가사가 이렇습니다.
[주(主)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 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 밖에는 없네]
다 잘 아시는 찬송일 것입니다.
그러나 순간‘우리가 정말 이 찬송을 부를 수 있을까? 정말 그런가? 하나님이 들으시기에 괜찮을까? 만약 예수님 외에도 좋아하고 바라는 것이 있는데 이 찬송을 부르면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이 찬송이 자신의 고백이신 분만 불러보시자고 제안했습니다.
아무도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진심으로 94장 찬송을 부르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주 예수 밖에는 귀한 것이 없습니다.” 라고 분명히 고백하지 못한다고 너무 좌절하거나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그것이 더 자연스런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을 해야 한다고 몸부림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더 낙심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백은 저절로 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야말로 진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을 이렇게 믿을 수 있을까요?
다윗의 고백에서 그 열쇠를 찾을 수 있습니다.
8절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하나님을 믿되, 단순히 지식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살아계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계속되는 관계입니다.
우리가 영성일기를 쓰지만 다윗도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7절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양심이 나를 교훈하도다
다윗은 매일 매일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점검하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이 다윗이 죽을 위기에서도 오직 하나님만 믿고 순종할 수 있었던 열쇠인 것입니다.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니” “하나님이 항상 오른쪽에 계시는 것을 알고” 어떤 일을 만나도 “흔들리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섬기고 사는 것은 답답한 삶이 아닙니다. 정말 놀라운 축복의 삶입니다.
5절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6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
9절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어느 분이 교회 게시판에“솔직히 선한목자 교회가 이해가 안됩니다. 탁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선한목자 교회는 좀 이상합니다. 예수님은 있지만 내 존재는 없어진 이상한 느낌도 싫습니다.”.라고 글을 올렸습니다.
아마“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가 없어진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의 존재가 의식된다면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기도 잊어버리는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사랑한다는 사람 앞에서 자꾸 자기 존재가 의식되면 사랑이 식은 것 아닙니까?
어느 목사님께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이 지나 동문들이 모여서 유명한 목사님을 모셔 강연을 들었습니다. 모두들 현장에서 사역하면서 민족을 복음화하고 세계를 위해서 일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사역하다가 모였는데 강사님이 하시는 말씀이“여러분의 할 일은 없다.”는 겁니다. 기가 막힌 이야기입니다. 계속 그러는 겁니다.“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느냐?.”는 겁니다.“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이 짐이 된다.”는 겁니다.“너희들의 할 일은 요한복음 6장29절“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이것이 너희 일이지 너희가 뭐하겠다고 하는 거냐.”고 하셨답니다.
그 때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나중에 목회하면서 깨달았답니다. 목사가 잘 해서 잘되는 게 아니구나!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따라 순종만 하면 잘 되는 것이구나!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속죄함만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사시는 것입니다.
(공동) 엡 3:17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믿음을 보시고 그리스도로 하여금 여러분의 마음속에 들어가 사실 수 있게 하여주시기를 빕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요한복음 14장23절에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공동) 요 14:23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도 그를 사랑하시겠고 아버지와 나는 그를 찾아가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승천하여 가시는 이유를 설명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요 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것은 제자들이 있을 곳을 마련하려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까지 우리도 우리 마음에 예수님께서 거하실 처소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살다가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을 들었을 때, 제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입니까? 그렇지만 오순절이 이르러 성령님이 그들 마음에 임하셨을 때, 그들은 비로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헤롯의 성전에도 거하지 않으셨으며, 손으로 지은 어느 건물에도 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시는 기적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거하시게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 보다 더 놀라운 복과 특권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지난 3년간 예수님을 따라 살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안 것 보다 성령님이 마음에 임하신 후 예수님을 훨씬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바로 그렇습니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간혹 집에 손님이 와서 며칠을 묵게 될 때 온 식구들이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경험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손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항상 모시고 산다면 어떨까요?
오늘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신자가 있습니다. 똑같은 예수님을 믿지만 어떤 사람은 정말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 것을 믿고 사는 사람이고, 또 한 부류는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진지하게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시다는 생각이 너무나 부담스러운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만 여전히 마음대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그것이 진정한 자유일까요?
제자훈련 세미나의 추천서적 중 하나인 로버트 멍어(Robert Boyd Munger) 교수가 쓴“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My Heart-Christ's Home)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지만 정말 마음에 주님으로 모시고 살지 못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정말 마음의 집에 주님으로 영접하고 되어진 일을 우화처럼 쓴 책입니다.
주인공이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한 다음에 예수님과 함께 자신의 마음의 집 여기저기를 안내하며 다니면서 경험한 이야기입니다.
서재에 들어갔다가 예수님께는 차마 보여드릴 수 없는 책과 잡지, 벽에 걸린 그림 때문에 당황해 합니다.
주방에 가서는 주님께 대접해 드릴 마땅한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식욕만 채우는 탐식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거실에서는 주님과 함께 볼 수 없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살았음을 알았습니다.
작업실에서는 자기의 노력으로 만든 것들을 보면서 얼마나 초라한지를 알았습니다. 주님의 힘을 의지하지 못하고 산 것은 다 실패임을 알았습니다.
오락실에서는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오락에 빠져 산 것을 깨달았습니다. 친구들과 놀러가면서 도무지 예수님을 모시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침실에서의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주님께 보여드릴 수 없는 비밀의 방도 있었습니다.
너무 바빠서 정신 없이 출근하던 날, 그는 거실을 지나치다가 예수님께서 혼자 벽난로 앞에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조심스럽게 주님께 다가가“주님, 아침마다 늘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럼.”하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너무나 부끄러웠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손님처럼도 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 로버트 멍어 교수는 이제라도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소유가 되게 하라고 도전합니다. 이제는 내 집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집에서 산다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항상 주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정말 개인의 자유가 없이 자신의 꿈을 잃고, 자신의 존재도 사라지는 불행한 사람일까요?
지난 목요일 큐티를 한 본문이 신명기 5장 말씀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십계명을 가지고 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이 모세에게 나아와 말했습니다.
신 5:25-27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육신을 가진 자로서 우리처럼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불 가운데에서 발함을 듣고 생존한 자가 누구니이까 당신은 가까이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을 다 듣고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는 것을 다 우리에게 전하소서 우리가 듣고 행하겠나이다 하였느니라
한 마디로 하나님이 무섭고 부담된다는 것입니다. 모세나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모세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줄 때, 얼마나 원망하고 불평하였는지 모릅니다. 결국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기 꺼리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장로들 말 대로 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강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신 5:31 너는 여기 내 곁에 서 있으라
이 말씀이 너무나 제 가슴을 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은 친밀한 교제였던 것 같습니다. 가까이 하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하나님이 두렵다고 부담스럽다는 말을 들으신 하나님의 진심이 어떠했는지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모세라도 가까이 두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여러분, “너는 여기 내 곁에 있으라”는 말을 들은 모세가 불행한 사람처럼 보입니까? ‘모세 너 이제 죽었다.’ 그렇습니까? 분명히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면서 모세의 꿈, 모세의 계획, 모세의 삶, 모세의 성공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불쌍하고, 자기 꿈 펼쳐보지도 못하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평생 산 사람입니까?
저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부러웠습니다. 모세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주여, 제가 주님을 사모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 더 가까이 가기 원합니다.” 하고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다윗이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가 왕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부귀 권세를 많이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과 항상 동행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어도 안된다! 아닙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지 못하여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믿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것이 믿는 것입니다.
11절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생명의 길은 예수님을 바로 믿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명심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으로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오셨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십자가로 인하여 이미 다 이루어진 복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한 생명의 길을 가기 원한다면 예수님을 분명히 주님으로 왕으로 마음에 영접하여야 합니다. 이 단계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 결단을 신실히 지키는 것입니다. 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과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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