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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따라 사는 청년(시편 119편 9절~16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全心)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한 나라의 장래를 알려면 그 나라의 젊은이를 보라'라고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는 말했습니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볼 때, 여러분은 이 나라의 장래를 어떻게 전망할 수 있습니까?
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통해서 여러분은 이 세계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할 수 있습니까?
인생의 아침에 비유되는 청년시절은 그 개인의 것만이 아닙니다. 그 집안의 것이요, 그 민족의 것이요, 그 나라의 것이요, 그리고 세계의 것입니다. 부득불 이 세대는 다음 세대인 젊은이들에게 넘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 나라의 앞날이 그들의 어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adolescence'라고 표현되는 '청년'은 14세에서 25세의 남자와 12세에서 21세의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상식화해 있습니다. 이 연령, 이 청년의 시간에 있는 그들은 이제 어린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인에 미치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중간기입니다. 그래서 혼란기요 격동기요 탐색기요 반항의 계절입니다. 이렇듯 복잡한 청년기의 특징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저들을 믿어야 합니다.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들을 그 모습 그대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적 차원에서 저들의 진실과 저들의 현실 자체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의 고민, 저들의 고독, 저들의 절규를 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청년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정체감의 위기(identity crisis)'를 꼽고 있습니다. 'Who am I?---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맞닥뜨린 혼란기라고 봅니다. 자신의 뿌리를 찾습니다. 이제는 어버이로부터 벗어나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시간입니다. 그 동안에는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부모님이 인도하는 대로 부모님의 눈치를 보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그 안에서 무심히 살아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고(思考)도 부모님에게 예속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어른이 되어가면서 저들의 생각이 독립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정체는 무엇인가, 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이런 것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자기관, 인생관, 세계관이 형성됩니다. 사람이 물질인지 동물인지, 아니면 예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지 향락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지, 절망적 존재인지 낙천적 존재인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부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인생을 허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무한한 소망의 세계로 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시기에 형성된 가치관과 세계관대로 일생을 살게 됩니다. 이 시기에 결정된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일생을 살게 됩니다. 그 척도로 만사를 재고 만사를 생각하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렇듯 청년기란 얼마나 위험하고 중요한 시기인지 모릅니다.
언젠가 서울에 있는 한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저를 꼭 만나야 한다는 간절한 요청이 있어서 스물 한 살 난 청년을 하나 만났습니다. 저는 그 청년을 만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훤칠하게 잘도 생긴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벙어리였습니다. 원래는 벙어리가 아니었는데, 무슨 충격을 받았는지 얼마 전부터 벙어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말을 하고 싶고, 하려고 애는 쓰는데도 전혀 입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같이 온 사람에게서 청년의 성장 과정을 듣고 저는 그 원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청년의 어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숱한 고생을 하다가 어찌 어찌되어 창녀촌의 포주(抱主)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수하에 많은 윤락 여성들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결국 윤락 여성들과 한 지붕 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어려서 영문을 모르고 지냈지만 눈이 열리면서 처음으로 본 것이 윤락행위였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그것뿐이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별수 없이 타락을 했고, 그 방면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피곤하고 지친 삶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친구의 안내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영혼이 눈을 뜨기 시작하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날의 악몽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그 악몽에 시달립니다. 자기 정체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너무나 강한 충격을 받았음인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벙어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말은 못하고 울기만 하던, 그 울부짖던 스물 한 살의 청년을 만나고 가슴아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네 젊은이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네 젊은이들은 너무 일찍부터 나쁜 것만을 보고 들어왔습니다. 들어서는 안될 말을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 충격이 커서 그들의 정신, 그들의 영혼, 그들의 가치관이 온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고, 세계의 의미를 찾고,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로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바른 세계관을 심어주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자기와 현실적인 자기 사이에는 너무 먼 거리가 있음을 압니다. 정체감에 혼란이 옵니다. 몸은 어른입니다. 그러나 정신은 여전히 어린아이입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의젓한 청년입니다. 그러나 내 사고의 수준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꿈과 나약함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은 많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큰소리는 칩니다. 그러나 자신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들은 모방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 어머니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더라는 것을 이제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들은 모방의 세계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려고 몸부림칩니다. super ego에서 벗어나 true ego, 자기의 참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음을 겪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저들은 새로운 세계로 향하고자 합니다. 여기에 의의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꿈이 많습니다. 모두가 상상 속에서 삽니다. 여러분 가운데 젊었을 때에 시 한 수 안 읊어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시인이요, 모두가 소설가입니다. 그러나 꿈의 세계와 현실은 엄연히 다릅니다. 동화의 세계와 현실은 같지 않습니다.
많은 동화를 읽고, 환상 속에서 왕자가 되고 공주가 되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내가 왕자도 아니고 공주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충격은 만만찮습니다. 세상은 동화의 세계가 아닌, 냉혹한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sense of autonomy-----자율성'을 추구합니다.
자치(自治)하고 싶은 것입니다. 부모님의 제재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합니다. 여기서 이탈성이 생깁니다. 여러분, 젊었을 때에 가출할 마음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실제로 가출해본 분도 있을 줄로 압니다. 부모님들이 자꾸 잔소리를 하면 요즘 아이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내가 지금은 능력이 없어서 얻어먹자고 할 수 없이 참고 있는 거지만 조금만 있어봐라. 나가버리고 말지.' 이탈적 성향인 것입니다. 둥지를 떨치고 나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하여 나가고는 싶으나 자신이 없습니다. 가정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정서의 자율성, 행위의 자율성, 나아가 가치의 자율성을 찾습니다. 부모님이 정해준 가치를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마치 부모님의 노예가 되는 것 같고, 소유물이 되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치관 자체를 독립하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크다'라고 할 때에 나도 같이 '크다'라고 하면 부모님에게 예속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부모님이 '크다'라고 할 때에 나는 '작다'라고 해야 살맛 나는 것만 같습니다. 부모님이 내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할 때에 그 말씀대로 하면 노예가 되는 것 같고, 그 말씀을 어기고 피우면 살맛 나는 것만 같습니다. 자유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탈성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숙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들은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된 모든 책임을 부모님을 포함한 기성세대와 사회에 돌립니다. 왜 입니까? 자기는 행한 일이 없으니까 자기 탓이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잘못된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 아닌 외부의 여건에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반항합니다. 어찌 보면 무책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책임질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무책임의 계절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자신이 지닌 생각도 있습니다마는 이보다는 다른 사람의 평판에 귀를 기울입니다.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만약 인정받지 못했을 때에는 불만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실적 없는 인간을 누가 인정합니까? 실적이 없는 인격을 누가 인정합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 실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심 하나만을 가지고 인정해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내일 아침부터 4시에 일어나서 공부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합니다. 부모님에게 믿어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생전 안 해본 일을 네가 해내리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실적 없는 일을 믿지 않습니다.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백 번 천 번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했으니 믿어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결심과 맹세가 인정받지 못할 때에 그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청년기를 충동의 시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한 충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확실합니다. 그들은 폭풍의 계절, 공허와 불안의 항로를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도 있고 충동도 있고 욕망도 있고 성취욕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허함과 허무, 불확실한 세대에 매여 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저들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젊은이들의 고민을, 그들의 현실 그 자체를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해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접해야 합니다. 그대로 영접하고 사랑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믿어주어야 합니다.
끝까지 실망하지 말고 믿어야 할 것이며, 그들의 모든 잘못에 대하여 우리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들의 성격에서 비롯된 잘못을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그들의 눈에 비친 인생의 모습에 대하여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솔직하고 깨끗하게 내 탓으로 돌려서 함께 책임을 나눌 것입니다. 그들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보고들은 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뿐입니다. 같이 책임을 지는 것 말고는 다른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요즘「사랑이 뭐길래」라는 연속극이 아주 인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 연속극을 안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저도 가끔 보는데, 아닌게아니라 재미가 없지는 않습디다. 거기 남성기피증에 걸린 딸이 나오지 않습니까? 남성기피증이란 무조건 남자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설명하고 협박하고 가르쳐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부모가 그 딸을 위하여 어떻게 수고할는지가 궁금하더군요. 언젠가 보니 아버지가 딸을 앞에 앉혀놓고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내 탓이다. 내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더군요. 물론 딸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합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거듭 말합니다.
"아니, 너는 모른다.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모두 다 내 잘못이다." 이렇게 말하자, 비로소 그 딸은 묵묵히 순종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반항, 그들의 불신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이보다 위대한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는 저들에게 깨끗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출세해라, 공부해라, 돈 많이 벌어라, 성공하라고만 했지 깨끗하라, 진실 하라고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잘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보여주었지만 깨끗하게 사는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는 것만을 보여주고 가르쳤습니다. 저들이 진실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하다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깨끗한 언어, 깨끗한 양심, 깨끗한 사고, 진실한 행위를 보여주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9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무릇 깨끗함이란 모든 문제의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럽고 혼탁한 세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는 모습을 이제 더는 역겨워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진실함뿐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없어도 좋습니다. 진실함만 있다면……. 깨끗한 마음의 자세로 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먼저입니다. 행동은 충동과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이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을 스스로 지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마음대로 하지 못했듯이 그들 역시 그들의 마음을 뜻한 대로 다듬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의지나 신념이나 결심은 보잘것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들에게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쳐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결혼식에서 주례를 볼 때마다 신랑신부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줍니다마는 그 끝말만은 언제나 같습니다. "사랑은 은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결심, 내 사랑, 내 정열만 가지고 사랑이 이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기지 말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자기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은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오직 은혜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바르고 깨끗하게 성공적으로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반납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오리엔테이션을 받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가정에서 서로들 지지 않고 이 말 저 말 하다가도 할아버지가 계셔서 그분이 큰기침 한번하고 '어찌어찌 하렷다'함으로 모든 식구가 조용해진다는, 그런 모습의 훈련을 해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부부 사이에도 한치의 양보가 없습니다. 상대의 의견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모름지기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절대순종---아무리 내 생각이 있고, 내 의견이 옳은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절대순종 하는 인격을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사람들이 왜 강한지 아십니까? 어떻게 그 조그마한 나라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강하게 자신들을 지켜나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은 전승 앞에서는 절대복종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국민들 사이에 말도 많고 분쟁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다가도 그들은 '이것은 전승이요, 하나님의 율법이다'라는 말만 나오면 더는 비판이 없습니다. 절대복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비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 앞에서는 자유를 반납해야만 합니다. 그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청년이 그 행위를 정결케 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0, 11절)"---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만이 자신의 행위를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말씀함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가 달린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마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대로 행했어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복종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의가 없어서 그 말씀을 어기고 맙니다. 아마 오늘날에도 선악과가 있다고 하면 모두들 만사 제치고 모여들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팽개치고 그것부터 먼저 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아담의 후예들이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은 먹지 마라"라고 했을 때에 "예" 하고 대답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인격이 필요합니다.
주석가 메튜 헨리(Mathew Henry)는 말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기 위해서는 선악과에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한다. 가까이 가서 쳐다보고 만져보고나서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애당초 그 가까이에 갈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악한 자의 모임에는 가지도 말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는 앉지도 말고, 말 같지 않은 말은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대로 행하지를 못합니다. 기어이 선악과를 먹어야 되겠다고 합니다. 그 잘못의 원인을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습니까? 젊은 세대는 물론 기성 세대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오리엔테이션이 바로 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에만 즐거워하며, 그 말씀만을 따라서 살며, 그 말씀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길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느 대학교 졸업식에서 노교수 한 분이 사회로 나가는 제자들에게 "이제 위험한 바다에 배를 띄워 항해를 떠난다는 것을 자네들은 알겠나?"라고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학생들은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졸업식이 끝난 뒤에 학생 하나가 그 교수님 가까이로 가서 말합니다. "위험한 바다를 향해서 출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성경책을 꺼내더니 "위험한 바다에 막연하게 떠나는 것 같으나 나침반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직한 학생이 아닙니까?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파스칼(Pascal, Blaise)은 말했습니다. '세 유형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찾으려 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는 지혜도 행복도 없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찾을 수는 있으나 찾지 않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는 지혜는 있는 것 같으나 행복이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는 지혜도 있고, 행복도 있다.' 스퍼젼(Spurgeon)은 26세에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겸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리빙스턴(Livingstone, David)은 23세에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갑니다. 칼뱅(Calvin, Jean)이 불후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기독교 강요」를 쓴 것은 26세 때였습니다.
우리는 젊은이에게 기대합니다. 악한 세대에 사나 마음은 그리 두고, 불안한 세대에 사나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만 평화를 얻고, 불신의 세대에 사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받을 때에 비로소 그들에게 소망이 있게 됩니다. 이 젊은이들이 오는 세대를 인도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금 주님의 귀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랍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1-10)."
말씀 따라 사는 청년(시편 119편 9절~16절)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내가 전심(全心)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찬송을 받으실 여호와여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입의 모든 규례를 나의 입술로 선포하였으며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 내가 주의 법도를 묵상하며 주의 도에 주의하며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
'한 나라의 장래를 알려면 그 나라의 젊은이를 보라'라고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Fichte, Johann Gottlieb)는 말했습니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볼 때, 여러분은 이 나라의 장래를 어떻게 전망할 수 있습니까?
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통해서 여러분은 이 세계의 미래를 어떻게 전망할 수 있습니까?
인생의 아침에 비유되는 청년시절은 그 개인의 것만이 아닙니다. 그 집안의 것이요, 그 민족의 것이요, 그 나라의 것이요, 그리고 세계의 것입니다. 부득불 이 세대는 다음 세대인 젊은이들에게 넘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 나라의 앞날이 그들의 어깨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영어로 'adolescence'라고 표현되는 '청년'은 14세에서 25세의 남자와 12세에서 21세의 여자를 가리키는 말로 상식화해 있습니다. 이 연령, 이 청년의 시간에 있는 그들은 이제 어린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인에 미치는 것도 아닙니다. 어린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닌 중간기입니다. 그래서 혼란기요 격동기요 탐색기요 반항의 계절입니다. 이렇듯 복잡한 청년기의 특징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저들을 믿어야 합니다.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저들을 그 모습 그대로 영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적 차원에서 저들의 진실과 저들의 현실 자체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저들의 고민, 저들의 고독, 저들의 절규를 바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청년기의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정체감의 위기(identity crisis)'를 꼽고 있습니다. 'Who am I?---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에 맞닥뜨린 혼란기라고 봅니다. 자신의 뿌리를 찾습니다. 이제는 어버이로부터 벗어나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시간입니다. 그 동안에는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부모님이 인도하는 대로 부모님의 눈치를 보고 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그 안에서 무심히 살아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사고(思考)도 부모님에게 예속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어른이 되어가면서 저들의 생각이 독립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내 정체는 무엇인가, 나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이런 것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자기관, 인생관, 세계관이 형성됩니다. 사람이 물질인지 동물인지, 아니면 예술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지 향락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인지, 절망적 존재인지 낙천적 존재인지, 긍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부정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인생을 허무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무한한 소망의 세계로 보아야 할 것인지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시기에 형성된 가치관과 세계관대로 일생을 살게 됩니다. 이 시기에 결정된 자기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일생을 살게 됩니다. 그 척도로 만사를 재고 만사를 생각하면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이렇듯 청년기란 얼마나 위험하고 중요한 시기인지 모릅니다.
언젠가 서울에 있는 한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저를 꼭 만나야 한다는 간절한 요청이 있어서 스물 한 살 난 청년을 하나 만났습니다. 저는 그 청년을 만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훤칠하게 잘도 생긴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벙어리였습니다. 원래는 벙어리가 아니었는데, 무슨 충격을 받았는지 얼마 전부터 벙어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말을 하고 싶고, 하려고 애는 쓰는데도 전혀 입이 돌아가지 않습니다. 같이 온 사람에게서 청년의 성장 과정을 듣고 저는 그 원인을 알 수 있었습니다. 청년의 어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숱한 고생을 하다가 어찌 어찌되어 창녀촌의 포주(抱主)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수하에 많은 윤락 여성들이 있습니다. 이 청년은 결국 윤락 여성들과 한 지붕 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너무 어려서 영문을 모르고 지냈지만 눈이 열리면서 처음으로 본 것이 윤락행위였습니다. 보고 듣는 것이 그것뿐이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는 별수 없이 타락을 했고, 그 방면의 모든 것을 다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피곤하고 지친 삶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친구의 안내로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영혼이 눈을 뜨기 시작하고, 인생의 의미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날의 악몽을 떨쳐버리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기도를 하면서도 그 악몽에 시달립니다. 자기 정체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너무나 강한 충격을 받았음인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벙어리가 되고 만 것입니다.
말은 못하고 울기만 하던, 그 울부짖던 스물 한 살의 청년을 만나고 가슴아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네 젊은이들의 문제입니다.
우리네 젊은이들은 너무 일찍부터 나쁜 것만을 보고 들어왔습니다. 들어서는 안될 말을 어렸을 때부터 너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 충격이 커서 그들의 정신, 그들의 영혼, 그들의 가치관이 온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고, 세계의 의미를 찾고, 인생관과 세계관이 바로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 우리는 그들에게 바른 세계관을 심어주는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의 젊은이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자기와 현실적인 자기 사이에는 너무 먼 거리가 있음을 압니다. 정체감에 혼란이 옵니다. 몸은 어른입니다. 그러나 정신은 여전히 어린아이입니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의젓한 청년입니다. 그러나 내 사고의 수준은 여전히 어린아이의 꿈과 나약함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은 많습니다. 그러나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불안합니다. 큰소리는 칩니다. 그러나 자신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저들은 모방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버지 어머니가 전부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더라는 것을 이제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들은 모방의 세계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려고 몸부림칩니다. super ego에서 벗어나 true ego, 자기의 참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음을 겪으면서 깨닫게 됩니다.
저들은 새로운 세계로 향하고자 합니다. 여기에 의의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꿈이 많습니다. 모두가 상상 속에서 삽니다. 여러분 가운데 젊었을 때에 시 한 수 안 읊어본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시인이요, 모두가 소설가입니다. 그러나 꿈의 세계와 현실은 엄연히 다릅니다. 동화의 세계와 현실은 같지 않습니다.
많은 동화를 읽고, 환상 속에서 왕자가 되고 공주가 되어보았습니다. 그러나 마침내는 내가 왕자도 아니고 공주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 충격은 만만찮습니다. 세상은 동화의 세계가 아닌, 냉혹한 세계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저들은 'sense of autonomy-----자율성'을 추구합니다.
자치(自治)하고 싶은 것입니다. 부모님의 제재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합니다. 여기서 이탈성이 생깁니다. 여러분, 젊었을 때에 가출할 마음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아마 여러분 가운데는 실제로 가출해본 분도 있을 줄로 압니다. 부모님들이 자꾸 잔소리를 하면 요즘 아이들은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답니다.
'내가 지금은 능력이 없어서 얻어먹자고 할 수 없이 참고 있는 거지만 조금만 있어봐라. 나가버리고 말지.' 이탈적 성향인 것입니다. 둥지를 떨치고 나가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세상을 향하여 나가고는 싶으나 자신이 없습니다. 가정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고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정서의 자율성, 행위의 자율성, 나아가 가치의 자율성을 찾습니다. 부모님이 정해준 가치를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마치 부모님의 노예가 되는 것 같고, 소유물이 되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치관 자체를 독립하려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크다'라고 할 때에 나도 같이 '크다'라고 하면 부모님에게 예속되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부모님이 '크다'라고 할 때에 나는 '작다'라고 해야 살맛 나는 것만 같습니다. 부모님이 내게 담배를 피우지 말라고 할 때에 그 말씀대로 하면 노예가 되는 것 같고, 그 말씀을 어기고 피우면 살맛 나는 것만 같습니다. 자유로워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이탈성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성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성숙을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저들은 경험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된 모든 책임을 부모님을 포함한 기성세대와 사회에 돌립니다. 왜 입니까? 자기는 행한 일이 없으니까 자기 탓이 될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는 잘못된 모든 책임을 남에게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나 아닌 외부의 여건에 그 책임을 묻는 것은 정상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반항합니다. 어찌 보면 무책임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책임질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금 무책임의 계절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저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해보려고 합니다. 자신이 지닌 생각도 있습니다마는 이보다는 다른 사람의 평판에 귀를 기울입니다. 인정받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만약 인정받지 못했을 때에는 불만을 품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실적 없는 인간을 누가 인정합니까? 실적이 없는 인격을 누가 인정합니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아무 실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결심 하나만을 가지고 인정해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내일 아침부터 4시에 일어나서 공부하겠습니다"라고 맹세합니다. 부모님에게 믿어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이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생전 안 해본 일을 네가 해내리라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실적 없는 일을 믿지 않습니다.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백 번 천 번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했으니 믿어달라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결심과 맹세가 인정받지 못할 때에 그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청년기를 충동의 시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강한 충동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확실합니다. 그들은 폭풍의 계절, 공허와 불안의 항로를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도 있고 충동도 있고 욕망도 있고 성취욕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 있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공허함과 허무, 불확실한 세대에 매여 있을 뿐입니다.
이제, 우리는 저들을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젊은이들의 고민을, 그들의 현실 그 자체를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해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접해야 합니다. 그대로 영접하고 사랑하고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믿어주어야 합니다.
끝까지 실망하지 말고 믿어야 할 것이며, 그들의 모든 잘못에 대하여 우리가 함께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들의 성격에서 비롯된 잘못을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그들의 눈에 비친 인생의 모습에 대하여 누가 책임질 것입니까? 솔직하고 깨끗하게 내 탓으로 돌려서 함께 책임을 나눌 것입니다. 그들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보고들은 대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할 뿐입니다. 같이 책임을 지는 것 말고는 다른 해결의 길이 없습니다.
요즘「사랑이 뭐길래」라는 연속극이 아주 인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 연속극을 안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저도 가끔 보는데, 아닌게아니라 재미가 없지는 않습디다. 거기 남성기피증에 걸린 딸이 나오지 않습니까? 남성기피증이란 무조건 남자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설명하고 협박하고 가르쳐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습니다. 부모가 그 딸을 위하여 어떻게 수고할는지가 궁금하더군요. 언젠가 보니 아버지가 딸을 앞에 앉혀놓고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내 탓이다. 내가 너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더군요. 물론 딸은 그렇지 않다고 부정합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거듭 말합니다.
"아니, 너는 모른다.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모두 다 내 잘못이다." 이렇게 말하자, 비로소 그 딸은 묵묵히 순종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의 반항, 그들의 불신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사랑입니다. 이보다 위대한 능력은 없습니다.
우리는 저들에게 깨끗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출세해라, 공부해라, 돈 많이 벌어라, 성공하라고만 했지 깨끗하라, 진실 하라고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잘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은 보여주었지만 깨끗하게 사는 모습은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뛰는 것만을 보여주고 가르쳤습니다. 저들이 진실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하다면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깨끗한 언어, 깨끗한 양심, 깨끗한 사고, 진실한 행위를 보여주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9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무릇 깨끗함이란 모든 문제의 최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럽고 혼탁한 세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려는 모습을 이제 더는 역겨워서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진실함뿐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없어도 좋습니다. 진실함만 있다면……. 깨끗한 마음의 자세로 함께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먼저입니다. 행동은 충동과 욕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따라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이고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마음을 스스로 지키지 못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마음대로 하지 못했듯이 그들 역시 그들의 마음을 뜻한 대로 다듬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듯 인간의 의지나 신념이나 결심은 보잘것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저들에게 오직 은혜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가르쳐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결혼식에서 주례를 볼 때마다 신랑신부에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줍니다마는 그 끝말만은 언제나 같습니다. "사랑은 은사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내 결심, 내 사랑, 내 정열만 가지고 사랑이 이루어진다고는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주셔야만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혜롭다 여기지 말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자기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껏 은혜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오직 은혜만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게 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바르고 깨끗하게 성공적으로 사는 길입니다. 우리는 자유를 반납해야 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오리엔테이션을 받지 못한 사람은 참으로 불행합니다. 가정에서 서로들 지지 않고 이 말 저 말 하다가도 할아버지가 계셔서 그분이 큰기침 한번하고 '어찌어찌 하렷다'함으로 모든 식구가 조용해진다는, 그런 모습의 훈련을 해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떻습니까? 부부 사이에도 한치의 양보가 없습니다. 상대의 의견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모름지기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절대순종---아무리 내 생각이 있고, 내 의견이 옳은 것 같아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절대순종 하는 인격을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사람들이 왜 강한지 아십니까? 어떻게 그 조그마한 나라가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강하게 자신들을 지켜나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은 전승 앞에서는 절대복종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국민들 사이에 말도 많고 분쟁도 많다고 합니다. 그러다가도 그들은 '이것은 전승이요, 하나님의 율법이다'라는 말만 나오면 더는 비판이 없습니다. 절대복종만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우리는 비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말씀 앞에서는 자유를 반납해야만 합니다. 그 훈련이 필요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청년이 그 행위를 정결케 하는 방법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10, 11절)"---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사랑하는 것만이 자신의 행위를 깨끗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말씀함입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따먹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에덴동산에는 선악과가 달린 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마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신 대로 행했어야 하는데, 그들에게는 복종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의가 없어서 그 말씀을 어기고 맙니다. 아마 오늘날에도 선악과가 있다고 하면 모두들 만사 제치고 모여들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두 팽개치고 그것부터 먼저 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아담의 후예들이므로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것은 먹지 마라"라고 했을 때에 "예" 하고 대답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 인격이 필요합니다.
주석가 메튜 헨리(Mathew Henry)는 말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않기 위해서는 선악과에 가까이 가지 말아야 한다. 가까이 가서 쳐다보고 만져보고나서 먹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자기 기만이다'---애당초 그 가까이에 갈 생각을 품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악한 자의 모임에는 가지도 말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는 앉지도 말고, 말 같지 않은 말은 듣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대로 행하지를 못합니다. 기어이 선악과를 먹어야 되겠다고 합니다. 그 잘못의 원인을 어디서부터 찾을 수 있습니까? 젊은 세대는 물론 기성 세대 역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오리엔테이션이 바로 되어 있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에만 즐거워하며, 그 말씀만을 따라서 살며, 그 말씀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길 줄 아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어느 대학교 졸업식에서 노교수 한 분이 사회로 나가는 제자들에게 "이제 위험한 바다에 배를 띄워 항해를 떠난다는 것을 자네들은 알겠나?"라고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 학생들은 모두가 숙연해졌습니다. 졸업식이 끝난 뒤에 학생 하나가 그 교수님 가까이로 가서 말합니다. "위험한 바다를 향해서 출발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성경책을 꺼내더니 "위험한 바다에 막연하게 떠나는 것 같으나 나침반이 여기에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믿음직한 학생이 아닙니까?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파스칼(Pascal, Blaise)은 말했습니다. '세 유형의 사람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찾으려 하지도 않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는 지혜도 행복도 없다. 또 하나는 하나님을 찾을 수는 있으나 찾지 않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는 지혜는 있는 것 같으나 행복이 없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에게는 지혜도 있고, 행복도 있다.' 스퍼젼(Spurgeon)은 26세에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겸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리빙스턴(Livingstone, David)은 23세에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갑니다. 칼뱅(Calvin, Jean)이 불후의 명작이라고 일컬어지는「기독교 강요」를 쓴 것은 26세 때였습니다.
우리는 젊은이에게 기대합니다. 악한 세대에 사나 마음은 그리 두고, 불안한 세대에 사나 하나님 말씀 가운데서만 평화를 얻고, 불신의 세대에 사나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길과 진리와 생명으로 받을 때에 비로소 그들에게 소망이 있게 됩니다. 이 젊은이들이 오는 세대를 인도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시금 주님의 귀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기 바랍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잠 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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