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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22절)

by 【고동엽】 2023. 1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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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데살로니가전서 51622)

 

항상 기뻐하라 쉬지 알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몇년 전만 해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입니다마는, 오늘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그 나라들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회주의 국가를 여행해 보면 자유주의 환경에서 살아온 우리와는 현격하게 다른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고맙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독을 번갈아 여행해보면 쉽게 비교됩니다. 서독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말끝마다 'Danke schon,'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데 국경만 넘어가면 'Danke'라는 말을 들어볼 수 없습니다. 고맙다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된 것입니다.

혁명(革命)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혁명이란, 그 말 자체의 개념을 깊이 상고해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 나 아닌 사회에 그 책임이 있다는 사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러한 철학을 근거로 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난한 것은 부유한 사람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고생하는 것은 부르주아 때문이다, 사회가 혼란한 것은 정치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 아는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다 없애야 한다--이것이 혁명의 철학입니다. 혁명하는 사람 치고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혁명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나 아닌 그 무엇, 이를테면 사회구조니 정치구조니 하는 것에 책임을 전가하고 투쟁하려듭니다. 투쟁하여 얻은 것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40년 내내 혁명이요, 아직도 혁명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와 싸우겠다는 것입니까? 그 마음에 감사가 없습니다. 싸워서 얻은 바에는 당연히 감사가 없습니다.

백두산 정상은 일기가 하도 변덕스러워서 천지(天池)의 아름다운 모습을 온전히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며칠씩 기다려서도 못보고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친구 하나는 세 번을 갔는데도 번번이 천지를 제대로 못 보았다고 아쉬워합니다. 백두산 천지에 들어가려면 연길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자동차로 비포장도로를 다섯 시간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게 됩니다. 거기서 다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에 정상을 향하여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 일행이 백두산으로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 드렸습니다.

"하나님, 어렵게 얻은 기회입니다. 부디 가는 길 평탄케 해주시고 백두산 천지 좀 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린아이의 기도 같은, 참으로 순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구름 한점 없이 청명하게 열린 천지의 장관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 장로님이 대표하여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편안한 가운데 좋은 구경을 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일행 중에 공산주의자가 끼여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난 다음, 시종 못마땅해하던 그가 입을 열어 빈정거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재수가 좋았던 겁니다." 일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말았습니다마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재수(財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일진(日辰)이 좋았다, ()이 좋았다---일마다 이렇게 여기는 자연주의자, 무신론자에게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또한, 노예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뿌리라는 영화를 보셨을 줄로 압니다마는, 그 영화를 보면 멀쩡한 사람들이 노예상인에게 붙들려가서 쇠사슬에 묶인 채 온갖 고생을 다합니다. 이후로 평생을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사는 그들에게 감사가 있겠습니까? 누가 빵 한 조각을 준들, 누가 따뜻한 옷 한 벌을 준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아도 노예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노예라는 것 하나로 평생을 감사 없이 살아갑니다. 또 감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식민지 백성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서러움 때문에, 또 그 원한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식민지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정배(定配)당한 사람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그 사실 하나로 그는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름지기 감사란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노예나 머슴, 혹 품삯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내가 수고한 대가를 당연히 받는 것이다, 돈벌기 위해서 일한다---보수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어느 미국 가정에 초대를 받아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습니다. 이튿날 아침 식탁에서 본의 아니게 그 집 부부의 사랑싸움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무엇을 하는데 돈이 좀 모자라니 더 달라고 출근하는 남편을 조릅니다. 남편은 월급 가져다주었는데 무슨 돈이 더 필요하냐 하고, 아내는 모자란다, 더 필요하다 하고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돈이 있어야 찼지요. 하는 수없이 감추어둔 비상금을 꺼내주며 투덜거립니다.

"결혼한 이후로는 빼앗기기만 한다. 월급봉투 고스란히 가져다주고 어쩌다 생기는 돈까지 고스란히 바치지 않느냐? 아침마다 강도 만난 기분이다. 나는 이 식구들 벌어 먹이느라고 고생만 하는 머슴이다." 이르는데 그 아내가 가만있겠습니까? 대거리를 합니다. "나는 이 집 식모다.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청소해주고 아기 낳아 키워주고…… 월급 한푼 못 받으면서 이 고생을 한다." 보다못해 제가 말다툼을 멈추게 하고 한마디했습니다. "이 집은 머슴과 식모가 사는 집인 것 같군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머슴노릇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 나는 이 집의 식모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어쩌다 부부싸움 할 때에, 한번씩 하는 소리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 없습니다. 영원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농부는 여름 동안 땀흘려 수고를 합니다. 많은 수고를 해서 농사를 지어놓고 가을이 되어 추수 때가 되면 저들은 생각합니다.

더욱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바람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여건을 고루 갖추어주시어 오늘 이렇게 귀한 추수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수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이 곡식을 내려주셨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나는 지극히 작아집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만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이 '추수감사'입니다.

어느 유명한 정치인이 정치하느라고 바쁘게 나다니다보니 자연히 가정에 소홀했습니다. 마침내 어린 아들이 불만을 터뜨립니다. 내 친구 누구는 자기 아버지하고 놀러 가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는 수없이 아버지가 하루 시간을 내어 종일 아들과 낚시질을 했습니다. 그날 잠자리에 들기 전, 각자 일기장에 하루일 을 적습니다. '오늘은 아들과 함께 낚시질로 하루를 허비했다'---아버지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들은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해서 아주 즐거운 하루였다'라고 썼습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한 사람에게는 괴로운 시간이요 다른 한 사람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불평하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으면 노예입니다. 불평하면 비참해집니다. 불평함으로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은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determined will'--결정적 의지와 'desired will'--소원적 의지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고 소원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컨대 예정섭리능력지혜권능……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절대적 주권은 결정적인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것은 불변하며 불가항력입니다. 또한 의도적이고 포괄적이며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의지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반면에 소원적 의지는 인격적이고 개인적입니다. 그리고 자원적이고 선택적이며 조건적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자녀를 낳으면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을 지으면서 부모는 저마다 자녀에 대하여 소원을 가집니다. '너는 장차 이런 사람이 되어다오'하는 부모의 소원이 있습니다. 저도 첫아이를 낳고 보니 그 생각이 간절합디다. 아직은 핏덩이나

다름없는 아이여서 커서 무엇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지금 당장 내게 소원이 있습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다오.' 그래서 이름을 짓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소원입니다. 어떤 여건에 준한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가진 소원입니다. 이것이 소원적 의지입니다. 우리는 그 소원에 맞도록,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고자 기도로 자녀를 키우게 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봅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하나님의 소원적 의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상 이 말씀을 보면서도 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소원은 초환경적이며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곧 어떤 환경에서든지, 어떤 경우에든지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지극히 환경적입니다. 조건적이요 종속적입니다. 그러므로 있으면 기뻐하고 없으면 슬퍼합니다. 성공하면 좋아라 하고 실패하면 원망합니다. 잘되면 기도하고 안되면 그만둡니다. 기도도 답답하면 하다가 조금 열리면 하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의 새벽기도회에는 다른 때보다 많은 분들이 나옵니다. 근 이천여 명이 매일 아침 나옵니다마는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이 일년 중 가장 많이 나올 때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대입시험이 있지 않습니까? 3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너도나도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머니가 기도 안 해서 떨어졌다고 할 판이니 적어도 그 원망만은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열심히 나와서 애를 쓰는 것까지는 고마운 일이고 잘하는 일이다 싶습니다마는, 시험이 끝나면 다음날부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변덕입니다. 이럴 때에 기도하고 저럴 때에 안하고, 이럴 때에 조금 진실하게 하고 저럴 때에 건성으로 하고--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일에 늘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이 소원적 의지를 결정적 의지로 바꾸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여러분, 어느 때에 기쁨이 있습니까? 어느 때에 기도합니까? 어느 때에 감사합니까? 실제적으로 보면 이것은 아주 상대적입니다. 주었다가 빼앗고, 성공하게 했다가 실패하게 하고, 건강하게 했다가 병들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기뻐할 줄도, 기도할 줄도,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못 가졌다가 가지게 되면 좋아합니다. 모르다가 알게 되면 기뻐합니다. 조금 더 가지게 되면 조금 더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입니다. 다시금 원망이 생깁니다. 더 못 가진 것을 원망하게 되고, 더 배우지 못한 것을 원망하게 됩니다. 본디 기쁨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지극히 찰나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잃어버렸다가 얻고, 병들었다가 낫게 되면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줄 압니다마는, 그렇게 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어떤분이 제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외롭고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고통스러운 일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렇게 모두 잃기만 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얻은 것 같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었고 답답하니까 기도를 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불러 기도하게 만드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여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만족하고 한번만이라도 성전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간절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을 뻔한 사람이나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감사도 그렇습니다.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자동차 사고라도 크게 나서 죽을 뻔하다 살아나야 감사를 합디다.

병에 걸려도 감기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다가 겨우겨우 살아나야 "아이구 하나님, 감사합니다" 합니다.

그랬다가도 얼마 지나고 나면 "그때는 아마 그 약이 효험이 있었나봐" 해버리고 말지요. 사람이 이토록 간사하고 변덕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죽을 지경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범사에 감사하려면 절대 감사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바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옥중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라는 말이 전체를 통하여 무려 열세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이 '희락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도 바울의 기쁨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의 처한 환경에 연유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는 충분히 기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주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아주 만족해합니다. 이제는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절대적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십시다. 결혼이란 본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이 결혼의 본뜻입니다 마는, 요즈음에 와서는 다이아반지를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집이 크니 작으니 하는 문제들로 결혼의 본질이 흐려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배우자가 건강하니 고맙고, 먹고 살 수 있으니 고맙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니 고맙지 않은가? 이것밖에 더 바라는 것이 없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철학을 가지기 위해서는 큰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시련 속에서, 많은 변화 속에서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러한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로마 교외에 카타콤(Catacomb), 곧 지하묘지가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죽어 매장된 곳입니다. 그 카타콤 벽에 이러한 글귀가 씌어 있다고 합니다. '이 어두움 속에 빛이 있습니다. 이 무덤 속에 아름다운 음악이 있습니다'--이러한 신앙적 낙천주의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철저하게 훈련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찬양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은 그 자유 하나로 만족합니다. 지금 소련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형편입니다.

제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식량조차 넉넉하지 못한 것을 보고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우냐고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문제도 아니다, 자유를 되찾은 것으로 만족한다고 대답합니다. 전에는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탄광으로 끌려가기 일쑤요, 심지어 숙청 당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마음대로 말이나마 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일년에 백만 명씩을 숙청하면서 유지해온 체제가 아닙니까? 되찾은 자유만으로 만족합니다. 굶어도 좋습니다. 자유 하나로 만족할 수 있어야 진정 자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가끔 차를 몰고 지나다니다 보면 중국에서 온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두 내외가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면 물어보지 않아도 이제는 알만합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일부러 차의 속도를 낮추어서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아마도 아내는 남의 집의 파출부로, 남편은 막노동판에서 인부로 일할는지도 모릅니다. 일이 끝난 저녁에 이렇게 만나서 길을 걷는 것이지요. 그들은 정말로 만족해합니다. 얼마동안 더 고생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집도 사고 가게도 낼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자동차도 부럽지 않습니다. 좋은 집이 있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 자유로운 나라에 와서 마음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그 자유 하나로 그들은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더는 바람이 없는 것입니다.

기쁨의 무조건성, 기도의 절대필요성, 감사의 무한성--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았고, 또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 은혜를 알고, 이 귀한 은혜와 감사를 밖으로 내보내고, 이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나간 모든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앞으로 다가올 모든 사건을 신앙적으로 소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도 없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 없는 기도가 진실일 수 없습니다. 기쁨 없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그리스도인,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범사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도 소원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강한 주권으로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되게 하실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반드시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바라시는 바를 알고, 속히 기뻐하시는 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데살로니가전서 51622)

 

항상 기뻐하라 쉬지 알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몇년 전만 해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입니다마는, 오늘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이 문호를 개방하면서 그 나라들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사회주의 국가를 여행해 보면 자유주의 환경에서 살아온 우리와는 현격하게 다른 점을 하나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은 '고맙다' '감사하다'라는 말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독을 번갈아 여행해보면 쉽게 비교됩니다. 서독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말끝마다 'Danke schon,'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는데 국경만 넘어가면 'Danke'라는 말을 들어볼 수 없습니다. 고맙다는 말이 사라진 지 오래된 것입니다.

혁명(革命)에는 감사가 없습니다. 혁명이란, 그 말 자체의 개념을 깊이 상고해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 나 아닌 사회에 그 책임이 있다는 사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러한 철학을 근거로 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를 이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난한 것은 부유한 사람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고생하는 것은 부르주아 때문이다, 사회가 혼란한 것은 정치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 아는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다 없애야 한다--이것이 혁명의 철학입니다. 혁명하는 사람 치고 모든 잘못이 내게 있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혁명은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전적으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합니다. 나 아닌 그 무엇, 이를테면 사회구조니 정치구조니 하는 것에 책임을 전가하고 투쟁하려듭니다. 투쟁하여 얻은 것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40년 내내 혁명이요, 아직도 혁명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와 싸우겠다는 것입니까? 그 마음에 감사가 없습니다. 싸워서 얻은 바에는 당연히 감사가 없습니다.

백두산 정상은 일기가 하도 변덕스러워서 천지(天池)의 아름다운 모습을 온전히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며칠씩 기다려서도 못보고 오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친구 하나는 세 번을 갔는데도 번번이 천지를 제대로 못 보았다고 아쉬워합니다. 백두산 천지에 들어가려면 연길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자동차로 비포장도로를 다섯 시간 달려야 합니다. 그래야 백두산 입구에 도착하게 됩니다. 거기서 다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새벽에 정상을 향하여 산을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 일행이 백두산으로 떠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 드렸습니다.

"하나님, 어렵게 얻은 기회입니다. 부디 가는 길 평탄케 해주시고 백두산 천지 좀 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어린아이의 기도 같은, 참으로 순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우리는 좋은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구름 한점 없이 청명하게 열린 천지의 장관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만찬을 나누는 자리에서 한 장로님이 대표하여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편안한 가운데 좋은 구경을 하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일행 중에 공산주의자가 끼여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난 다음, 시종 못마땅해하던 그가 입을 열어 빈정거렸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재수가 좋았던 겁니다." 일순간 분위기가 이상해지고 말았습니다마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재수(財數)를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일진(日辰)이 좋았다, ()이 좋았다---일마다 이렇게 여기는 자연주의자, 무신론자에게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또한, 노예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뿌리라는 영화를 보셨을 줄로 압니다마는, 그 영화를 보면 멀쩡한 사람들이 노예상인에게 붙들려가서 쇠사슬에 묶인 채 온갖 고생을 다합니다. 이후로 평생을 노예로 살아갑니다. 그렇게 고통스런 하루하루를 사는 그들에게 감사가 있겠습니까? 누가 빵 한 조각을 준들, 누가 따뜻한 옷 한 벌을 준들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아도 노예이기 때문에 감사하지 못합니다. 노예라는 것 하나로 평생을 감사 없이 살아갑니다. 또 감사할 필요도 없습니다. 식민지 백성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나라를 빼앗겼다는 서러움 때문에, 또 그 원한 때문에 감사가 없는 것입니다. 식민지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정배(定配)당한 사람에게도 감사가 없습니다. 그 사실 하나로 그는 감사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모름지기 감사란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노예나 머슴, 혹 품삯을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내가 수고한 대가를 당연히 받는 것이다, 돈벌기 위해서 일한다---보수 의식을 가진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언젠가 제가 어느 미국 가정에 초대를 받아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습니다. 이튿날 아침 식탁에서 본의 아니게 그 집 부부의 사랑싸움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무엇을 하는데 돈이 좀 모자라니 더 달라고 출근하는 남편을 조릅니다. 남편은 월급 가져다주었는데 무슨 돈이 더 필요하냐 하고, 아내는 모자란다, 더 필요하다 하고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러나 남편에게 돈이 있어야 찼지요. 하는 수없이 감추어둔 비상금을 꺼내주며 투덜거립니다.

"결혼한 이후로는 빼앗기기만 한다. 월급봉투 고스란히 가져다주고 어쩌다 생기는 돈까지 고스란히 바치지 않느냐? 아침마다 강도 만난 기분이다. 나는 이 식구들 벌어 먹이느라고 고생만 하는 머슴이다." 이르는데 그 아내가 가만있겠습니까? 대거리를 합니다. "나는 이 집 식모다. 밥해주고 빨래해주고 청소해주고 아기 낳아 키워주고…… 월급 한푼 못 받으면서 이 고생을 한다." 보다못해 제가 말다툼을 멈추게 하고 한마디했습니다. "이 집은 머슴과 식모가 사는 집인 것 같군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머슴노릇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 나는 이 집의 식모다 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어쩌다 부부싸움 할 때에, 한번씩 하는 소리지만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에 아무런 기쁨도 느낄 수 없습니다. 영원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농부는 여름 동안 땀흘려 수고를 합니다. 많은 수고를 해서 농사를 지어놓고 가을이 되어 추수 때가 되면 저들은 생각합니다.

더욱이,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바람을 주시고 비를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지혜를 주시고 시간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여건을 고루 갖추어주시어 오늘 이렇게 귀한 추수를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내가 한 수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로지 하나님께서 이 곡식을 내려주셨다는 것에 감사할 뿐입니다. 나는 지극히 작아집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만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고 감사하는 것이 '추수감사'입니다.

어느 유명한 정치인이 정치하느라고 바쁘게 나다니다보니 자연히 가정에 소홀했습니다. 마침내 어린 아들이 불만을 터뜨립니다. 내 친구 누구는 자기 아버지하고 놀러 가는데 우리는 왜 그렇게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는 수없이 아버지가 하루 시간을 내어 종일 아들과 낚시질을 했습니다. 그날 잠자리에 들기 전, 각자 일기장에 하루일 을 적습니다. '오늘은 아들과 함께 낚시질로 하루를 허비했다'---아버지는 이렇게 썼습니다. 아들은 '오늘은 아버지와 함께 해서 아주 즐거운 하루였다'라고 썼습니다. 똑같은 사건인데, 한 사람에게는 괴로운 시간이요 다른 한 사람에게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까? 불평하면 자유인이 아닙니다. 감사가 없으면 노예입니다. 불평하면 비참해집니다. 불평함으로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은혜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determined will'--결정적 의지와 'desired will'--소원적 의지가 있습니다. 결정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고 소원적인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예컨대 예정섭리능력지혜권능……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절대적 주권은 결정적인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이것은 불변하며 불가항력입니다. 또한 의도적이고 포괄적이며 무조건적입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의지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반면에 소원적 의지는 인격적이고 개인적입니다. 그리고 자원적이고 선택적이며 조건적이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자녀를 낳으면 이름을 짓습니다. 이름을 지으면서 부모는 저마다 자녀에 대하여 소원을 가집니다. '너는 장차 이런 사람이 되어다오'하는 부모의 소원이 있습니다. 저도 첫아이를 낳고 보니 그 생각이 간절합디다. 아직은 핏덩이나

다름없는 아이여서 커서 무엇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지금 당장 내게 소원이 있습니다.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다오.' 그래서 이름을 짓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소원입니다. 어떤 여건에 준한 것이 아니요 처음부터 가진 소원입니다. 이것이 소원적 의지입니다. 우리는 그 소원에 맞도록,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고자 기도로 자녀를 키우게 됩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서 봅시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소원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 기쁨과 기도와 감사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하나님의 소원적 의지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늘상 이 말씀을 보면서도 그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소원은 초환경적이며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항상, 쉬지 말고' '범사에' 곧 어떤 환경에서든지, 어떤 경우에든지 이것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지극히 환경적입니다. 조건적이요 종속적입니다. 그러므로 있으면 기뻐하고 없으면 슬퍼합니다. 성공하면 좋아라 하고 실패하면 원망합니다. 잘되면 기도하고 안되면 그만둡니다. 기도도 답답하면 하다가 조금 열리면 하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 교회의 새벽기도회에는 다른 때보다 많은 분들이 나옵니다. 근 이천여 명이 매일 아침 나옵니다마는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금이 일년 중 가장 많이 나올 때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대입시험이 있지 않습니까? 3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 너도나도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머니가 기도 안 해서 떨어졌다고 할 판이니 적어도 그 원망만은 듣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하여 열심히 나와서 애를 쓰는 것까지는 고마운 일이고 잘하는 일이다 싶습니다마는, 시험이 끝나면 다음날부터는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변덕입니다. 이럴 때에 기도하고 저럴 때에 안하고, 이럴 때에 조금 진실하게 하고 저럴 때에 건성으로 하고--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늘 기뻐하기를 원하십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일에 늘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단순히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나아가 이 소원적 의지를 결정적 의지로 바꾸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러한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여러분, 어느 때에 기쁨이 있습니까? 어느 때에 기도합니까? 어느 때에 감사합니까? 실제적으로 보면 이것은 아주 상대적입니다. 주었다가 빼앗고, 성공하게 했다가 실패하게 하고, 건강하게 했다가 병들게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기뻐할 줄도, 기도할 줄도, 감사할 줄도 모르는 것이 인간입니다. 못 가졌다가 가지게 되면 좋아합니다. 모르다가 알게 되면 기뻐합니다. 조금 더 가지게 되면 조금 더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간적입니다. 다시금 원망이 생깁니다. 더 못 가진 것을 원망하게 되고, 더 배우지 못한 것을 원망하게 됩니다. 본디 기쁨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지극히 찰나적이고 가변적입니다. 잃어버렸다가 얻고, 병들었다가 낫게 되면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기도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하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줄 압니다마는, 그렇게 하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어떤분이 제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왜 이렇게 외롭고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고통스러운 일뿐입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보았습니다. "그렇게 모두 잃기만 했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얻은 것 같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었고 답답하니까 기도를 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당신을 불러 기도하게 만드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을 주시려고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하되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여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에 만족하고 한번만이라도 성전에 나아가 기도할 수 있으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는 간절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을 뻔한 사람이나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감사도 그렇습니다. 감사가 어디에 있습니까? 가만히 보면 자동차 사고라도 크게 나서 죽을 뻔하다 살아나야 감사를 합디다.

병에 걸려도 감기 정도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하다가 겨우겨우 살아나야 "아이구 하나님, 감사합니다" 합니다.

그랬다가도 얼마 지나고 나면 "그때는 아마 그 약이 효험이 있었나봐" 해버리고 말지요. 사람이 이토록 간사하고 변덕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죽을 지경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감사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범사에 감사하려면 절대 감사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바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옥중서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적으로 절망과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 빌립보서에는 '기뻐하라'라는 말이 전체를 통하여 무려 열세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별명이 '희락의 복음'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사도 바울의 기쁨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그의 처한 환경에 연유한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의 부르심을 받아 사도가 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로 그는 충분히 기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주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으로 아주 만족해합니다. 이제는 거꾸로 가든 바로 가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에게는 절대적 감사가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결혼의 경우를 놓고 생각해보십시다. 결혼이란 본디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만나서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고 행복해야 하는 것이 결혼의 본뜻입니다 마는, 요즈음에 와서는 다이아반지를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집이 크니 작으니 하는 문제들로 결혼의 본질이 흐려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저 배우자가 건강하니 고맙고, 먹고 살 수 있으니 고맙고,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니 고맙지 않은가? 이것밖에 더 바라는 것이 없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이러한 철학을 가지기 위해서는 큰 일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시련 속에서, 많은 변화 속에서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이러한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항상 기뻐하는 사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로마 교외에 카타콤(Catacomb), 곧 지하묘지가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 시대에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해 죽어 매장된 곳입니다. 그 카타콤 벽에 이러한 글귀가 씌어 있다고 합니다. '이 어두움 속에 빛이 있습니다. 이 무덤 속에 아름다운 음악이 있습니다'--이러한 신앙적 낙천주의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철저하게 훈련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찬양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를 얻은 사람은 그 자유 하나로 만족합니다. 지금 소련 국민들은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형편입니다.

제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식량조차 넉넉하지 못한 것을 보고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우냐고 그들에게 위로의 말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들은 하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은 문제도 아니다, 자유를 되찾은 것으로 만족한다고 대답합니다. 전에는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탄광으로 끌려가기 일쑤요, 심지어 숙청 당하기도 했는데, 이제는 마음대로 말이나마 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것입니다. 일년에 백만 명씩을 숙청하면서 유지해온 체제가 아닙니까? 되찾은 자유만으로 만족합니다. 굶어도 좋습니다. 자유 하나로 만족할 수 있어야 진정 자유할 자격이 있습니다.

가끔 차를 몰고 지나다니다 보면 중국에서 온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두 내외가 함께 걸어가는 것을 보면 물어보지 않아도 이제는 알만합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발견하면 일부러 차의 속도를 낮추어서 가까이 다가가 봅니다. 아마도 아내는 남의 집의 파출부로, 남편은 막노동판에서 인부로 일할는지도 모릅니다. 일이 끝난 저녁에 이렇게 만나서 길을 걷는 것이지요. 그들은 정말로 만족해합니다. 얼마동안 더 고생하면 본국으로 돌아가서 집도 사고 가게도 낼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자동차도 부럽지 않습니다. 좋은 집이 있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이 자유로운 나라에 와서 마음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그 자유 하나로 그들은 만족해하는 것입니다. 더는 바람이 없는 것입니다.

기쁨의 무조건성, 기도의 절대필요성, 감사의 무한성--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는 조건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나도 큰 은혜를 받았고, 또 약속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이 은혜를 알고, 이 귀한 은혜와 감사를 밖으로 내보내고, 이 은혜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지나간 모든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며, 앞으로 다가올 모든 사건을 신앙적으로 소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기도 없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사 없는 기도가 진실일 수 없습니다. 기쁨 없는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는 그리스도인, 쉬지 않고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범사에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하나님께서는 이 순간도 소원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되도록 오늘도 강한 주권으로 역사 하시고 계십니다.

되게 하실 것입니다. 종말론적으로 반드시 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의 마음을, 바라시는 바를 알고, 속히 기뻐하시는 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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