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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으면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장 33~44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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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으면 영광을 보리라(요한복음 113344)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그 중 어떤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 대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거듭 말씀드리지만,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적 가운데 가장 클라이막스에 해당하는 사건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므로 이 이적에 대해서만 세 시간에 걸쳐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이 이적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기 바로 직전에 행하신 일이기 때문에 더욱 귀하고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반면, 그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께서는 며칠 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됩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였습니다. 이 십자가 사건은 창세 전부터 예정된 것으로 성경에서 끊임없이 예언해왔던 일입니다. 또한 레위기를 중심으로 내려온 유대인 제사법의 예표가 성취된 일이기도 합니다. 이와같이 십자가 사건은 그 자체에 여러 가지 깊은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그 사건의 경위를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게 된 경위 가운데 간과할 수 없는 두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 사건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입성하였기 때문에 매우 번잡하였습니다. 게다가 대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계책을 꾸며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물에 걸리기를, 그 올무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삼엄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은 '날 잡아 죽여라'하고 스스로 그물에 걸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슈바이처같은 이는 "예수님이 '나를 죽여라'하고 올라간 것이 아니냐? 예수님께는 자살하려는 마음이 있었다"고까지 말합니다. 신앙 없는 눈으로 보면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 입성을 말렸고 피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굳이 유월절 예루살렘 그 현장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두 번째로,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성은 날이 갈수록 높아졌습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그 인기를 떨어뜨릴 수 없었습니다. 질문을 해봐도, 올무를 걸어봐도 안됩니다. 유혹과 협박도 통하지 않습니다. 어떤 중상과 모략으로도 예수님의 권세는 격하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니, 예수님의 인기랄까 권위는 최절정에 달하였습니다. 분명한 증거가 있고, 무덤도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이렇게 되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리새인들마저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일찍부터 두고두고 원수처럼 지내오는 터였습니다. 서로가 논리적으로, 정치적으로 팽팽한 긴장 관계에 있었습니다. 교리적으로도 크게 대립되어 이를테면 사두개인은 육신의 부활을 믿지만, 바리새인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교권의 중심을 잡고 있는 제사장의 태반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은 여당이고, 사두개인은 야당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당신들은 로마 사람들과 타협하고 있다' '당신들은 부정 행위로 돈을 모았다' '당신들이 하는 일은 모두 가증스럽다'하고 바리새인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차에 마침내 나사로가 살아났으니 사두개인은 할말이 더 생긴 것이지요. '보아라,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았느냐?'

바리새인들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더러워진 예루살렘 성전을 정결케 함으로써 자신들의 위신이 크게 실추되고, 부끄러움을 당한 터였습니다. 거기에다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마저 살리셨으니 바리새인들은 더욱 불리해졌습니다. 자기들이 살아남으려면 예수님을 없앨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사로를 살리신 이 엄청난 사건 때문에 바리새인과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참 얼마나 난센스입니까?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분을 죽여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라면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있는 분입니다. 우리는 흔히 '에이, 나 죽으면 그만이지' '죽으면 되지'하고 말합니다. 인간들이 하는 못된 생각들이지요. 하지만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능력의 예수님 앞에서는 '죽는다' '죽인다'하는 문제로 예수님을 대항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본문 37절 말씀을 보십시다.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였다면 죽어 가는 나사로도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죽지 않게 하는 것이 능력이 아니겠느냐?' '그것이 이적인데 이미 죽어버리지 않았느냐?' 이것이 당면한 저들의 고민입니다.

십자가도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740절에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소리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십자가를 지지 않을 수 없더냐?' '십자가를 지지 않는 것이 능력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적이 무엇입니까? 이적, 즉 하나님의 권능은 어떻게 나타나야 우리 마음에 드는 것입니까? 병에 걸리지 않는 것. 병 걸렸다 낫는 것, 죽지 않는 것. 그것이 이적입니까? 십자가를 지지 않든지 십자가에 달렸다가도 죽지 않는 것, 말하자면 고난을 당하지 않아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고 하겠습니까? 마태복음 2742절에서는 이런 희롱의 소리까지 들립니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것이 인간의 얄팍한 생각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믿겠다는 말입니까?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임을, 능력의 사람임을 믿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다는 것을 믿겠다는 말입니다. 죽으면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 저들의 마음이요 우리들 인간의 일반적인 마음입니다. 누가복음 2337절에도 그같은 말이 나옵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네가 너를 구원하라." 다른 사람은 구원하면서 너 자신은 구원하지 못하느냐, 다른 사람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면서 너 자신은 살려내지 못하느냐 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구원이 무엇입니까? 죽지 않는 것이 구원입니다. 요즘도 그런 일이 많습니다. 병 걸렸다 나으면 ', 하나님의 은혜,' 차 사고날 뻔하다 안 나면 '하나님이 보호하셨고,' 죽을 뻔하다 살면 ', 하나님 감사합니다!' 합니다. 이것은 은혜에 대한 아주 유치한 마음입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당신이 능력의 사람이요,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하고 말하는 사람들과 같습니다.

고난을 당하거나 병에 걸리지 말아야, 죽지 않아야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겠노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실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자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당황하고, 제자들은 뿔뿔이 도망갑니다. 베드로가 칼을 빼들고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쪽 귀를 잘라버립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여러분, 참 이적은 부활 하나뿐입니다. 모든 것은 부활을 설명해주는 작은 그림자요. 상징일 뿐입니다. 예표와 비유에 불과합니다. 병에 걸린 것도, 병 걸렸다 나은 것도 모두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병이 나았다고 해도 조금 더 살다가 결국은 모두 죽게 됩니다. 따라서 부활만이 진정한 의미의 능력이요. 기적입니다. 부활신앙만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입니다. 사람들은 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병 걸리면 기도하고, 나으면 감사했다가 또 걸리면 시험 당했다고 합니다. 변덕이 죽끓듯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활신앙의 능력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의 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나사로를 사랑했다면 애초에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는가?' '소경의 눈을 뜨게 했으면 이 사람도 죽지 않게 할 수는 없었는가?'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주님의 능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을 보아서 아시는 대로 죽어서 장사지내고, 썩어서 냄새까지 났다가 '나사로야, 나오라' 할 때에 걸어나오는 것, 하나님의 능력은 거기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 주시는 분으로 나타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병 고치는 의사로 나타나기도 원치 않으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예수님께서는 부활 생명의 주인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이러한 큰 이적이 있기 위해서는 믿음과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믿음의 그릇이 있어야 이적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 없는 자에게 믿음을 가지게 하고, 마음을 주어가면서 이적을 나타내셨습니다. 믿음이 있을 때에만 이적이 나타나고, 믿음이 있을 때에만 이적이 이적됩니다. 믿음이 있을 때에만 이적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참된 진리의 말씀, 그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나사로의 이적이 나타나는데 필요했던 큰 믿음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내용을 보면 제자들에게 믿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특별히 죽은 나사로의 누이가 되는 마르다와 마리아에게도 믿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믿음은 그리 온전하지 않았습니다. 실낱같은 믿음을 겨우겨우 지켜왔던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약한 믿음을 꾸짖지 않으시고 보살펴 주셨기 때문에 그 믿음을 지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적을 위해 그들에게 어떤 믿음이 있어야 했는지 살펴봅시다.

나사로가 병이 들자 그 누이들인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하고 소식을 전했습니다. '오십시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병들었으니 와서 고쳐 주세요'하는 거나 다름없는 전갈을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소식을 접한 예수님께서는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라고 말씀하시고 나사로에게 가지 않았습니다.

머물던 곳에 그대로 계셨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을병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 죽지 않는다고 믿어야 합니다. '빨리 오지 왜 안 오십니까?'하고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알았습니다'하고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며칠 동안 심하게 앓든, 열에 들떠 헛소리를 하든 묵묵히 기다려야 합니다. 고통스럽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참고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이것이 이적을 위한 첫 번째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두 번째 사실은 예수님께서 며칠간 지체하신 일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유대를 떠나 잠시 피신해 있는 중이었습니다. 바로 며칠 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 돌로 쳐죽이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도 지체하시자, 한편에서는 핍박이 두려워 오시지 못한다는 오해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은 것은 핍박을 두려워하는 인간적인 나약함 때문이 아닙니다.

보다 큰 이적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습니다. 15절에서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그 누이들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미 죽어서 장례까지 치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속으로는 몹시 불만이었을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어가는 동안 예수님은 멀리 도망가서 딴소리나 하셨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잠깐동안 어두운 시간이 필요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어야 했습니다.

장례식이 막 끝난 뒤에야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집에 오십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르다가 성밖까지 나가서 맞이합니다. 21절에 보면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합니다. 성경에는 간단하게 씌었지만 그 때 마르다의 얼굴은 별로 화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좀 짜증스럽고 불평에 가득찼을 것입니다. "장례까지 끝난 다음에 왜 오십니까? 못오신다고나 하시지 왜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셨습니까?" 할말이 많았겠으나 마르다는 그저 "주님이 여기 계셨으면 내 오라비가 안 죽었을 텐데요"라고 말합니다.

사실은 이것도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고통도 없고, 문제도 해결된다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23절에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하십니다.

이 말을 믿어야 하는데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주님 말씀이 다시 살리라 할 때에 "" 하고 믿어야 하는데, 이 믿음이 필요한데, 참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마르다는 기껏 생각해내어서 24절에 "마지막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합니다. 마지막날,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갈 때에는 다 부활할 것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이것도 믿음은 믿음입니다. 최종 부활에 대한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참 어려운 말씀입니다. 예수 믿고 죽은 사람이나 예수 믿고 산 사람이나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모두 같다는 것입니다. 마르다는 지금 살아 있지만 언젠가 죽을 것이고, 나사로는 죽었지만 다시 산다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이 아무런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고 말씀하실 때 이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아멘' 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을 가지는 것이 어렵습니다.

예수님께서는 40절에서 더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않았느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원리적인 것도, 과거의 것도 아닙니다. 장차 부활하리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바로 지금, 현재 이 상태에서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나사로가 병들어도 하나님의 영광, 죽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체하신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내 뜻대로 되어도,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나사로는 죽어서 장례까지 치렀지만 지금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십니다. 이것을 믿어야 했습니다. 사실 모든 사건, 크고 작은 모든 일의 과정과 결과가 모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존재합니다. 특별히 고난의 문제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있어야 하는 일들임을 믿어야 합니다. 순교자는 순교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인은 손해를 보아도, 병 걸려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지금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하나 중요한 문제가 나왔습니다. 그래도 여태까지 마르다는 인내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용케 참고 있었는데 마침내 결정적인 순간이 왔습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십니다. 여기에 시험이 있습니다.

이 때 마르다가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하고 조금 불평조로 말합니다. '이제 와서 열어보면 뭐합니까?' '죽은 시체 보나마나지. 열어볼 필요 있습니까?'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시지만 마르다는 이 말씀을 추상적인 진리로만 생각했습니다. 원리적이고 교리적으로 생각했을 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돌문을 옮겨놓으면서도 나사로가 살아나리라는 믿음은 없었습니다. 믿음은 약하고 온전하지 못했지만 마르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불평과 원망을 하면서도 마르다는 돌문을 옮겨놓습니다. 섭섭한 마음도 있고 믿음도 부족하지만 ""하고 순종하며 옮겨놓습니다. 이것이 마르다의 믿음입니다.

의심이 많지만 마지막 시험에 순종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라는 말이라든가 "냄새가 나나이다"라는 말속에는 확실히 섭섭한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믿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하시니 돌을 옮겨놓습니다. 이것이 순종하는 마르다의 믿음입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이삭을 바친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다시 데리고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을 뿐입니다.

마르다가 순종하여 돌을 옮겨놓자, 예수님께서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그리고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명하십니다. 죽은 자를 향하여 명령하십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이 말씀의 능력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옵니다. 그때에야 마르다는 깨닫게 됩니다. 왜 이 고통이 있어야 했는지,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지체하셨는지,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요구했던 믿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하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야 부활의 현재적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제자들에게 요구하신 믿음, 예수님 말씀 하나 하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에게 주어지는 어려운 순간과 고통을 감수하면서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들이 순종할 때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부활 신앙의 은혜, 부활 신앙적인 믿음이 우리 가운데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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