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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특권과 의무(롬2:1~16)

by 【고동엽】 2023.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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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권과 의무(롬2:1~16)

 

 

우리는 로마서 118절로 시작하여 사람에게 있는 죄를 아주 신랄하게 고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왔습니다. 사람은 여지없이 죄인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이 말씀을 읽느라면 한 사람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완전히 죄인입니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죄인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이미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고 그 심판의 결과로 죄 아래 매여 있습니다. 완전히 자유가 없습니다. 의를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죄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전적 타락입니다. 요새 잘 쓰는 말로 하면 본질적 타락입니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죄인지, 어디까지가 의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깊이 죄에 빠져 있다, total corruption--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문제는 왜 이것을 강조하느냐 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 전제되고야 완전 구원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중에서 혹 내가 예수 믿는다 하고, 내가 좀 선해보고자 하고, 내가 구원을 얻어보고자 발버둥치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전적 타락을 전제하고야, 완전범죄를 전제하고야 완전은혜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나로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그런고로 은혜를 말하기 위해서 죄의 그 무서운 세력을, 죄에 노예 된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오늘도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간에 100퍼센트 내게는 하나도 의가 없습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다시 뒤에 가서 공부하겠습니다만,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고, 조금 무엇을 했다 싶으면 위선에 빠지고, 교만해지고, 조금 더 바로 살고자 하면 어느 사이에 벌써 불 신앙에 빠져버리고, 또 뭐가 잘 안됐다고 절망하고…… 형편이 없습니다. , 우리가 간혹 운동경기 같은 것을 할 때가 있어요. 저 사람이 이기려면 내가져야 하고 내가 이기려면 저 사람이 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가만히 보세요.

운동할 때에는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요. 유독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남이 실수하는 것을 보고 아주 박수를 열심히 쳐요. 그것도 회개해야 돼요. 그 마음씨가 못돼먹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던 죄가 어느 사이에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시간 시간 우리는 다시금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구제불능이다, 나는 완전 타락한 존재다, 나 스스로서는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완전죄인이다, 내게는 죄밖에 없다, 그리고 나에게 좋은 마음이 있고, 선한 일이 있고, 선한 행위가 있다면 이것은 100퍼센트 은혜다, 하고 말입니다. 전적 타락을 시인하고 전제하는 사람, 코끝이 땅바닥에 닿을 만큼 완전히 겸손한 사람, 아무 변명도 없이 오직 나는 100퍼센트 죄인이다 하는 사람--이런 사람에게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만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미급해도 나로서는 이만큼도 고마워요. 아직도 죄를 짓고 있어요. 이만해도 고마워요. 왜요? 나 스스로라면 이보다도 훨씬 엄청난 죄인일 것이니까요. 훨씬 더 못된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만해도 대단한 것이지요. 그야말로 은혜입니다. 여기서 달라지는 거예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구원받은 사람은 설사 죄를 지어도 감사합니다. 왜요? 죄를 요만큼 지은 것만도 은혜거든요. 나는 요만큼보다도 더 나쁜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구원 못 받을 사람은 선한 일 조금 하면서도 교만해요. 절망해요.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 나는 더 선할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이것밖에 안되나, 하고 스스로에게 절망합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 못 받을 사람이에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줄기차게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되 특별히 1절로 11절까지는 이스라엘사람들의 죄를, 다음 시간에 상고하게 될 12절로 16절까지는 이방사람들의 죄를, 이렇게 죄를 둘로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 전제는 전부가 다 죄인이다, 이방사람도 이스라엘사람도 다 죄인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어느 날 국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구구단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나서 시험을 보게 했지요. 그 중에 8×7은 얼마냐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8×756이지요. 그런데 어떤 학생은 54라고 썼어요. 또 어떤 학생은 46이라고 썼어요. 선생님이 아이들 보는 데서 채점을 했는데 당연히 둘 다 틀렸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54라고 쓴 아이가 하는 말이 "선생님, 저는 정답과는 겨우 2밖에 차이가 안 나고 쟤는 10이나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똑같습니까? 왜 둘 다 빵점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다만 얼마라도 자기가 더 낫지 않느냐, 이거예요. 선생님은 대답합니다. "차이가 210이나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56만 맞는 답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그 뜻에 꼭 맞아야 의인입니다. 남보다 조금 낫다고 해서 '나는 조금 더 낫다'--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죄인은 다 죄인이에요. 틀린 것은 다 틀린 거예요. 빵점은 다 빵점이지요. 더 나은 빵점은 있고, 좀 덜한 빵점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는 없어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낫다 덜하다 한다면 오히려 교만 죄가 하나 더 느는 거예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다, 이방사람도 죄인이고 유대사람도 죄인이다, 유대사람은 더 큰 죄인이다--"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9)"--첫째가 유대인이라 합니다. 유대사람이 더 죄인이에요. 왜입니까? 이방사람과

유대사람은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사람은 남 먼저 하나님을 알고 있거든요. 하나님의 뜻도 알고 있고, 계명도 알고 있고, 상선벌악(賞善罰惡)도 알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도 알고 있고, 성경도 알고 있고, 은혜도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하는 것은 이방사람과 똑같아요. 같은 죄를 짓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죄를 지었을 때, 알고 지은 것과 모르고 지은 것은 다릅니다. 죄의 중량은 같으나 죄의 성격은 달라요. 그래서 우리가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 이렇게 합니다. 형제가 똑같이 못된 짓을 했어요. 하나는 형이고, 하나는 동생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어느 쪽을 더 때립니까?

"이놈! 형인 네가 더 나쁘다"하지요. 왜요? 형이 더 잘 아니까요. 동생은 몰라서 그래요. 알고 저지른 쪽이 더 큰 죄인입니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되, 알고 저지른 족은 더 큰 죄인이에요. 알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중량의 죄일지라도 성격에 따라서 더 무거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사람은 죄가 더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에 보니 유대사람은 남을 비판합니다. 아니까 또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것 참 묘한 일이지요. 자기가 행하지 않는 것은 생각지 않고 남이 행하지 않는 것은 눈에 환히 보입니다. 자기는 죄가 뭔지 의가 뭔지 아니까 다른 사람 잘못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거든요. 그러니까 비판을 해요. 당신은 우상을 섬기고, 뭘 하고, 뭘 하고…… 말을 더 잘해요. 그런데 자기는 안 해요. 가끔 보면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회개운동을 해야 됩니다"--그런데 자기는 회개하지 않아요. 회개운동 한다고 떠들어만 댔지 자기는 하지 않아요. 절제운동 하자 하면서 자기는 안 해요. 자기는 움직이지 않아요. 남 얘기만 하는 거예요. 세계가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말은 많이 하는데 스스로 행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고로 우리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 말씀으로 돌아가 상고해봅시다. 정말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최소한의 비판이라도 삼가야지요. 내가 못됐으면 다른 사람 잘못하는 것보고 비판하는 일은 없어야지요. 남을 비판하게 되면 그만큼 죄가 더 중해지는 거예요. 비판하는 것을 보면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보세요. 알았으니 나쁘지요. 게다가 남을 비판했으니 비방한 죄가 되지요. 또 남을 비판했으니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려 한 것이지요.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남을 비판해서 죄 하나를 추가하는 미련함은 범하지 맙시다. 누구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저 '그런가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나보다, 나도 그 형편이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이렇게 생각해두세요. 추호라도 남을 비판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예사로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어요. , 남의 사정을 내가 다 압니까? 또 안다면 얼마나 압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보면 누가 어떻고 저떻고, 하며 남 얘기를 해요. 그래서 내가 "확실합니까?"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그러던데요"하고 얼버무립니다.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지금 입이 더러워졌고, 하나님 앞에 남을 비판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죄짓는 것만 죄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먼저 알고 있다는 게 또 하나의 죄를 추가함이요, 그 위에 또 하나 내가 남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 죄가 됩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죄 위에 또 죄가 되고 더 큰 죄가 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비판하지 맙시다. 하물며 내가 가진 죄도 많은데 게다가 비판까지 해서 남의 죄까지 뒤집어 쓸 생각은 하지 마세요. 너무 무거워요. 절대로 입 버리지 마세요.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대답해요. "걱정돼서 그래요." 그러면 입다물고 기도하지, 어째서 돌아다니면서 얘기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아주 쓸데없는 일이에요. 벌써 비판하는 순간에 문제가 되고 있어요. 큰 죄를 또 추가하고 있는 거예요. 내 행동은 마찬가지면서 죄만 자꾸자꾸 더 커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 앞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자가 있었어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 여자는 창녀입니다. 창녀는 돌로 쳐죽이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은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네가 옳다고 생각했으면 그냥 쳐죽이면 될 일이지 왜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죽일까요 말까요?'하고 물어보는 것입니까? 그 때에 예수님께서 아주 유명한 대답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 어쩌면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죄목이 내게는 없다고 할는지 몰라요.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에요.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이것이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네 죄가 먼저 있다는 생각을 하라, 네 죄를 먼저 깨끗이 회개하고 그 다음에 가서 얘기를 하라 하심입니다. 비판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것을 우리가 깜빡 잊어버리고 있어요. 그러면 내 죄가 그대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평론하는 자는 평론을 받으리라, 비판하는 자는 비판을 받으리라, 긍휼 없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으리라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설령 어떤 일을 보더라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할 것이지, 결코 비방한다던가 비판한다던가 그 사람만이 죄인인 것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비판하는 사람들은 꼭 자기를 예외시합니다. 그래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죄목의 죄는 내게 없을 수 있어요. 그러나 형태 있는 죄만이 죄가 아닙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복잡한 거리에서 어떤 소매치기가 남의 물건에 손을 댔어요. 그런데 소매치기가 조금 서툴러서 슬쩍 잡아채기는 했는데 저쪽에서 이를 눈치챘습니다. '들켰구나. 잡힐라'하는 순간에 이 소매치기는 "소매치기 잡아라!"하고 소리를 질러요. 그러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소리지르는 사람은 안보고 일제히 다른 사람들만 쳐다봅니다. 정작 이 소매치기는 멀쩡하게 천천히 사라지고 말지요. 보세요. 소매치기가 마치 자기는 소매치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소매치기인 것처럼 바라보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요. 이와 같이 주로 남의 흠을 비판하는 사람이 이런 사람들이에요. 그래서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해요.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나는 점점 더 무거운 죄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니 '이스라엘사람들이 진노를 쌓았도다(5)'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을 멸시했다(4)'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또한 죄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아는 자의 죄입니다. 유대사람의 죄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거든요.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임을 압니다. 그러니까 이를 믿고, 여기에 의지해서 못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를 악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헬라어로 '크레스토테토스'라고 하는 이 말은 아주 친절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 대해서 친절하십니다. 그런데 그 친절하심을 기화로, 그것을 알기 때문에 뻔뻔스럽게 지금 또 다른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하나, 하나님의 용납하심이 있습니다. 용납하심은 헬라어로 '아노케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회개의 기회를 더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죄를 지을 때에 그대로 벼락을 치신다고 한다면 사람치고 그 누가 살아남겠습니까?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또 연장 해주십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 얻도록 연장하십니다. 이것이 용납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의 용납 속에서 불의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대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도 살고, 남을 비판하면서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만큼 너그럽게 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사람들이 바로 이를 악용하는 거예요. 아주 뻔뻔스럽게도 그 다음에 더 위선적인 죄를 짓고 있는 것이지요.

또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인내, 오래 참으심,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 또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오래오래 참아주시는 것인데, 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면 더 서둘러 회개해야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예요. 오히려 여기에 의지해서 제멋대로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더 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더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미 믿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범하는 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이 있는 줄은 알아요.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합니다. 하나님께서 벌하실 줄도 알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니까 다 참아주실 것이다'합니다. 또 참아주시니까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하심을 멸시하는 큰 죄가 됩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5)"--하나님의 진노를 쌓았어요. 하나님의 멸시하고 오래오래 위선적으로 살았어요. 위선의 날이, 회개함이 없이, 알고도 짐짓 범하는 죄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진노를 많이 쌓는 것입니다. 이중삼중으로 계속 죄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라고 하는 사건 하나만 놓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중량은 이렇게 점점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불 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만홀히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내를 업신여겼기 때문에, 멸시했지 때문에, 알고도 행치 않았기 때문에, 또 남을 비판했기 때문에, 이런 일로 인해서 계속 죄가 중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도 행치 않아요. 남을 비판하면서도 행치 않아요. 회개치 않아요. 그래서 진노를 쌓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결국은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위치를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고집, 이것 참 쓸데없는 것입니다. 회개치 않는 마음이 바로 고집스런 마음입니다. 출애굽기 32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요샛말로 목에 힘주는 사람들이지요. 목에 깁스붕대를 한 사람들이에요. 목이 곧아요. 굽힐 줄을 몰라요. 이것이 무서운 죄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전혀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할 마음이 없어요. 남 얘기나 하고 있고, 남 보고나 회개하라 하고, 스스로는 회개가 없어요. 목이 곧은 백성, 고집스러운 백성--이들이 회개치 아니할 때에 점점 더 무거운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함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6)"---신학적으로 참 중요한 문제를 제기함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경의 맥락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선을 행하고 합니다마는, 이것은 율법적인 얘기가 아니라 원리적인 얘기입니다. 원리적으로 행한 대로 갚으신다 하는 뜻입니다. 좀더 본문의 맥락대로 살펴보면 이는 즉 회개 없는 행위에 대해서 말씀함입니다. 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씀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 신앙적인 행위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안다는 것에 의해서 보응받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보응받는 것이에요. 왜 이런 말이 있지요?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뻔히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이 건강에 좋고, 무엇이 건강에 나쁘고…… 하는 소리 많이 합니다. 그러나 알기는 잘 아는데 행하지 않아요.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행한 대로 갚는 것입니다. 머리 속에 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교리를 많이 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회개로 비롯해서 행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만 보상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예요. 그런고로 성경적 지식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상 받을 수 있는 길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구원의 길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회개의 행위,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행위, 믿음으로서의 행위--이것이 따를 때에 그 행한 만큼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다 함입니다. 이것은 곧 믿음의 열매를 말씀함입니다. 그 믿음이 지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 됨을 증거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서 한번 살펴봅시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고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18:2123)." 보세요.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건간에 오늘 돌이켜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 행한 것으로 인하여 살고 지난날로 기억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행한 대로 보응 받는다는 그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 유대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어요. 그러나 행하는 것은 없어요. 그런고로 구원이 없다, 그런고로 이것이 더 큰 죄가 된다 함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9)"--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 영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곤고가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말씀이 '유대사람에게 먼저, 그리고 헬라인에게'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에요. 왜 유대사람이 먼저냐?--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죄인에게 내리시는 고통과 심판이 유대사람에게 먼저 있다 함은 본문의 맥락대로 살펴본다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지은 자에게 심판이 먼저 있어요. 또 남을 비방하는 사람에게 심판이 먼저 있어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은 아는 지성인에게 먼저 떨어지는 것입니다. 모르고 행하는 자는 앞으로 알게 될 때가 있기 때문에 그 알게 될 때까지, 알려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미 다 알고, 다 권면 받고, 다 체험하고, 그리고 죄에 빠져 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권면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모르고 할 때가 아니라 다 알고 하는 일인데요. 이제는 심판밖에 없어요. 끝까지 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래서 알고 행하는 죄가 더 큰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도 먼저입니다. 알고 행하는 자에게 심판이 먼저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사람이 율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심판을 먼저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유대사람이 심판을 받았어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가끔 이런 얘기를 우리 교인들에게서 들어요. "목사님, 안 믿는 사람들을 보니까 못할 짓 많이 하면서도, 부정부패다 뭐다 해도 장사도 잘되고, 그럭저럭 잘살더군요. 그런데 저는 어쩌다가 한번 살짝 못된 짓을 하려고 하면 당장 벼락이 떨어져서 실패하고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병도 들고…… 아무튼 당장 얻어맞아요. 하나님께서 아주 민감하게 때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웬걸요. 안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하신다고 성경에 다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징계가 없으면 자식이 아니라고, 징계가 없으면 남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내 아들이니까 때리지 남의 아들을 왜 때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때리시지 남의 아들이야 어차피 지옥 갈 것인즉 급할 것 없지 않아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알고 있기에, 알고 짓기에,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기에 징계가 먼저 있어요.

9절의 말씀을 문자대로 살펴봅시다.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곤고가 있으리니"--이는 고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고민이 없어요. 또 있다고 해도 적어요. 죄를 지으면 '나만 죄인인가? 다른 사람들도 늘 그러는데……'합니다. 뻔뻔해요. 그러고도 괜찮아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그 죄 때문에 고민이 더 많습니다. 당장 영적으로 심판이 와요. 그래서 잠을 못 자요. 괴로워해요. 병들어요. 실패해요. 그럴 수 밖에요. 다름 아닌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는 자가 먼저 심판을 받아요. 더 큰 심판을 받아요.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돼요. 그런고로 바로 회개해야 돼요. 바로 회개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런 고통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 뻔뻔스럽게 잘산다고 부러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믿을 때까지, '믿음 다음에 보자'하시지 얼마든지 기다려주시지만, 이제 다 알고, 비판하고, 남을 가르치기까지 하면서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즉각적으로 치십니다. 더 고민이 많아져요. 문제가 더 많아요. 그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유대인에게요 그 다음에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사람,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래오래 아직도 더 많이 참아주십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이미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내가 짧습니다. 오래 참아주시지 않으세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심판에 대해서도 유대사람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을 보니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사람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10)"-축복에 대해서도 복음받은 사람이 먼저요. 하나님 아는 사람이 먼저요, 유대사람이 먼저다, 라고 말씀합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여기서 외모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이방사람 유대사람 가리지 않아요. 노예다 주인이다 가리지 않습니다. 남자다 여자다 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다 같은 죄인인데 자기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의가 있다고, 조금 더 하나님을 안다고, 조금 더 성경을 안다고 하는 것은 아무 관계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런고로 유대사람들의 자랑, 먼저 믿던 사람들의 자랑, 다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다 부인하십니다. 깨끗이 부인하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깨끗이 죄인 됨을 시인하고, 전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라야 구원 얻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특권과 의무

 

 

우리는 로마서 118절로 시작하여 사람에게 있는 죄를 아주 신랄하게 고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들어왔습니다. 사람은 여지없이 죄인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는 이 말씀을 읽느라면 한 사람도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완전히 죄인입니다. 머리서부터 발끝까지 죄인입니다. 또 어떤 면에서 보면 이미 죄에 대하여 심판을 받고 그 심판의 결과로 죄 아래 매여 있습니다. 완전히 자유가 없습니다. 의를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그렇게 죄에 깊이 빠져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신학적 용어로 말하면 전적 타락입니다. 요새 잘 쓰는 말로 하면 본질적 타락입니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죄인지, 어디까지가 의인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깊이 죄에 빠져 있다, total corruption--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문제는 왜 이것을 강조하느냐 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이 전제되고야 완전 구원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여러분 중에서 혹 내가 예수 믿는다 하고, 내가 좀 선해보고자 하고, 내가 구원을 얻어보고자 발버둥치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모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근본적으로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전적 타락을 전제하고야, 완전범죄를 전제하고야 완전은혜를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나로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이런 사람이 구원을 받았다,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그런고로 은혜를 말하기 위해서 죄의 그 무서운 세력을, 죄에 노예 된 인간의 모습을 이렇게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세요. 오늘도 작은 일에나 큰 일에나 간에 100퍼센트 내게는 하나도 의가 없습니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생각하는 것, 행하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다시 뒤에 가서 공부하겠습니다만, 사도 바울처럼 우리는 내가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고, 조금 무엇을 했다 싶으면 위선에 빠지고, 교만해지고, 조금 더 바로 살고자 하면 어느 사이에 벌써 불 신앙에 빠져버리고, 또 뭐가 잘 안됐다고 절망하고…… 형편이 없습니다. , 우리가 간혹 운동경기 같은 것을 할 때가 있어요. 저 사람이 이기려면 내가져야 하고 내가 이기려면 저 사람이 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가만히 보세요.

운동할 때에는 그 사람의 모습이 드러나요. 유독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남이 실수하는 것을 보고 아주 박수를 열심히 쳐요. 그것도 회개해야 돼요. 그 마음씨가 못돼먹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 깊은 곳에 꿈틀거리고 있던 죄가 어느 사이에 튀어나오는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시간 시간 우리는 다시금 다시금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구제불능이다, 나는 완전 타락한 존재다, 나 스스로서는 예나 오늘이나 마찬가지다, 나는 완전죄인이다, 내게는 죄밖에 없다, 그리고 나에게 좋은 마음이 있고, 선한 일이 있고, 선한 행위가 있다면 이것은 100퍼센트 은혜다, 하고 말입니다. 전적 타락을 시인하고 전제하는 사람, 코끝이 땅바닥에 닿을 만큼 완전히 겸손한 사람, 아무 변명도 없이 오직 나는 100퍼센트 죄인이다 하는 사람--이런 사람에게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만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미급해도 나로서는 이만큼도 고마워요. 아직도 죄를 짓고 있어요. 이만해도 고마워요. 왜요? 나 스스로라면 이보다도 훨씬 엄청난 죄인일 것이니까요. 훨씬 더 못된 사람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만해도 대단한 것이지요. 그야말로 은혜입니다. 여기서 달라지는 거예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구원받은 사람은 설사 죄를 지어도 감사합니다. 왜요? 죄를 요만큼 지은 것만도 은혜거든요. 나는 요만큼보다도 더 나쁜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구원 못 받을 사람은 선한 일 조금 하면서도 교만해요. 절망해요. 내가 이 정도밖에 안되나, 나는 더 선할 수 있는 사람인데 왜 이것밖에 안되나, 하고 스스로에게 절망합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 못 받을 사람이에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줄기차게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여지없이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모든 사람이 다 죄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되 특별히 1절로 11절까지는 이스라엘사람들의 죄를, 다음 시간에 상고하게 될 12절로 16절까지는 이방사람들의 죄를, 이렇게 죄를 둘로 구분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본 전제는 전부가 다 죄인이다, 이방사람도 이스라엘사람도 다 죄인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어느 날 국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구구단을 가르쳤어요. 그리고 나서 시험을 보게 했지요. 그 중에 8×7은 얼마냐 하는 문제가 있었어요. 8×756이지요. 그런데 어떤 학생은 54라고 썼어요. 또 어떤 학생은 46이라고 썼어요. 선생님이 아이들 보는 데서 채점을 했는데 당연히 둘 다 틀렸다고 했지요. 그랬더니 54라고 쓴 아이가 하는 말이 "선생님, 저는 정답과는 겨우 2밖에 차이가 안 나고 쟤는 10이나 차이가 나는데 어떻게 똑같습니까? 왜 둘 다 빵점입니까?"하고 묻습니다. 다만 얼마라도 자기가 더 낫지 않느냐, 이거예요. 선생님은 대답합니다. "차이가 210이나 틀린 것은 틀린 것이다. 56만 맞는 답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 그 뜻에 꼭 맞아야 의인입니다. 남보다 조금 낫다고 해서 '나는 조금 더 낫다'--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죄인은 다 죄인이에요. 틀린 것은 다 틀린 거예요. 빵점은 다 빵점이지요. 더 나은 빵점은 있고, 좀 덜한 빵점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는 없어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 낫다 덜하다 한다면 오히려 교만 죄가 하나 더 느는 거예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니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이다, 이방사람도 죄인이고 유대사람도 죄인이다, 유대사람은 더 큰 죄인이다--"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9)"--첫째가 유대인이라 합니다. 유대사람이 더 죄인이에요. 왜입니까? 이방사람과

유대사람은 다른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사람은 남 먼저 하나님을 알고 있거든요. 하나님의 뜻도 알고 있고, 계명도 알고 있고, 상선벌악(賞善罰惡)도 알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도 알고 있고, 성경도 알고 있고, 은혜도 알고 있어요. 다 알고 있으면서도 행동하는 것은 이방사람과 똑같아요. 같은 죄를 짓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죄를 지었을 때, 알고 지은 것과 모르고 지은 것은 다릅니다. 죄의 중량은 같으나 죄의 성격은 달라요. 그래서 우리가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가르칠 때에 이렇게 합니다. 형제가 똑같이 못된 짓을 했어요. 하나는 형이고, 하나는 동생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어느 쪽을 더 때립니까?

"이놈! 형인 네가 더 나쁘다"하지요. 왜요? 형이 더 잘 아니까요. 동생은 몰라서 그래요. 알고 저지른 쪽이 더 큰 죄인입니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되, 알고 저지른 족은 더 큰 죄인이에요. 알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언제나, 똑같은 중량의 죄일지라도 성격에 따라서 더 무거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사람은 죄가 더 크다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오늘의 본문에 보니 유대사람은 남을 비판합니다. 아니까 또 비판하는 것입니다. 이것 참 묘한 일이지요. 자기가 행하지 않는 것은 생각지 않고 남이 행하지 않는 것은 눈에 환히 보입니다. 자기는 죄가 뭔지 의가 뭔지 아니까 다른 사람 잘못하는 것이 눈에 들어오거든요. 그러니까 비판을 해요. 당신은 우상을 섬기고, 뭘 하고, 뭘 하고…… 말을 더 잘해요. 그런데 자기는 안 해요. 가끔 보면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회개운동을 해야 됩니다"--그런데 자기는 회개하지 않아요. 회개운동 한다고 떠들어만 댔지 자기는 하지 않아요. 절제운동 하자 하면서 자기는 안 해요. 자기는 움직이지 않아요. 남 얘기만 하는 거예요. 세계가 어떻고, 교회가 어떻고, 말은 많이 하는데 스스로 행동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과 같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나빠요.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그런고로 우리는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예수님 말씀으로 돌아가 상고해봅시다. 정말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최소한의 비판이라도 삼가야지요. 내가 못됐으면 다른 사람 잘못하는 것보고 비판하는 일은 없어야지요. 남을 비판하게 되면 그만큼 죄가 더 중해지는 거예요. 비판하는 것을 보면 죄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보세요. 알았으니 나쁘지요. 게다가 남을 비판했으니 비방한 죄가 되지요. 또 남을 비판했으니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가려 한 것이지요.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남을 비판해서 죄 하나를 추가하는 미련함은 범하지 맙시다. 누구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저 '그런가보다, 그럴 수밖에 없었나보다, 나도 그 형편이었다면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이렇게 생각해두세요. 추호라도 남을 비판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예사로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가끔 이런 경우가 있어요. , 남의 사정을 내가 다 압니까? 또 안다면 얼마나 압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보면 누가 어떻고 저떻고, 하며 남 얘기를 해요. 그래서 내가 "확실합니까?"하고 물으면 "그렇다고 그러던데요"하고 얼버무립니다.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지금 입이 더러워졌고, 하나님 앞에 남을 비판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죄짓는 것만 죄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먼저 알고 있다는 게 또 하나의 죄를 추가함이요, 그 위에 또 하나 내가 남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 죄가 됩니다. 이것이 내가 가진 죄 위에 또 죄가 되고 더 큰 죄가 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절대로 비판하지 맙시다. 하물며 내가 가진 죄도 많은데 게다가 비판까지 해서 남의 죄까지 뒤집어 쓸 생각은 하지 마세요. 너무 무거워요. 절대로 입 버리지 마세요.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대답해요. "걱정돼서 그래요." 그러면 입다물고 기도하지, 어째서 돌아다니면서 얘기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아주 쓸데없는 일이에요. 벌써 비판하는 순간에 문제가 되고 있어요. 큰 죄를 또 추가하고 있는 거예요. 내 행동은 마찬가지면서 죄만 자꾸자꾸 더 커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 앞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지 않습니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자가 있었어요.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이 여자는 창녀입니다. 창녀는 돌로 쳐죽이라고 그랬습니다. 그것은 율법입니다." 그렇다면, 자기네가 옳다고 생각했으면 그냥 쳐죽이면 될 일이지 왜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죽일까요 말까요?'하고 물어보는 것입니까? 그 때에 예수님께서 아주 유명한 대답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8:7)." 어쩌면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죄목이 내게는 없다고 할는지 몰라요. 그러나 쓸데없는 짓이에요.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이것이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네 죄가 먼저 있다는 생각을 하라, 네 죄를 먼저 깨끗이 회개하고 그 다음에 가서 얘기를 하라 하심입니다. 비판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것을 우리가 깜빡 잊어버리고 있어요. 그러면 내 죄가 그대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성경은 평론하는 자는 평론을 받으리라, 비판하는 자는 비판을 받으리라, 긍휼 없는 자는 긍휼 없는 심판을 받으리라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설령 어떤 일을 보더라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용서하는 마음으로 대할 것이지, 결코 비방한다던가 비판한다던가 그 사람만이 죄인인 것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비판하는 사람들은 꼭 자기를 예외시합니다. 그래서 비판을 하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은 죄목의 죄는 내게 없을 수 있어요. 그러나 형태 있는 죄만이 죄가 아닙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복잡한 거리에서 어떤 소매치기가 남의 물건에 손을 댔어요. 그런데 소매치기가 조금 서툴러서 슬쩍 잡아채기는 했는데 저쪽에서 이를 눈치챘습니다. '들켰구나. 잡힐라'하는 순간에 이 소매치기는 "소매치기 잡아라!"하고 소리를 질러요. 그러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소리지르는 사람은 안보고 일제히 다른 사람들만 쳐다봅니다. 정작 이 소매치기는 멀쩡하게 천천히 사라지고 말지요. 보세요. 소매치기가 마치 자기는 소매치기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소매치기인 것처럼 바라보고 소리를 지르고 있어요. 이와 같이 주로 남의 흠을 비판하는 사람이 이런 사람들이에요. 그래서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해요. 생각을 다른 데로 돌리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 나는 점점 더 무거운 죄인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말씀을 보니 '이스라엘사람들이 진노를 쌓았도다(5)'라고 말씀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의 풍성함을 멸시했다(4)'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또한 죄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아는 자의 죄입니다. 유대사람의 죄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알거든요.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분임을 압니다. 그러니까 이를 믿고, 여기에 의지해서 못된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를 악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헬라어로 '크레스토테토스'라고 하는 이 말은 아주 친절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에 대해서 친절하십니다. 그런데 그 친절하심을 기화로, 그것을 알기 때문에 뻔뻔스럽게 지금 또 다른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하나, 하나님의 용납하심이 있습니다. 용납하심은 헬라어로 '아노케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회개의 기회를 더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죄를 지을 때에 그대로 벼락을 치신다고 한다면 사람치고 그 누가 살아남겠습니까?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또 연장 해주십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구원 얻도록 연장하십니다. 이것이 용납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하나님의 용납 속에서 불의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그럽게 대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지으면서도 살고, 남을 비판하면서도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다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만큼 너그럽게 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사람들이 바로 이를 악용하는 거예요. 아주 뻔뻔스럽게도 그 다음에 더 위선적인 죄를 짓고 있는 것이지요.

또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인내, 오래 참으심,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 또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회개의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오래오래 참아주시는 것인데, 이 얼마나 고맙습니까? 그러면 더 서둘러 회개해야지요. 그런데 그게 아니예요. 오히려 여기에 의지해서 제멋대로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더 남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더 위선자가 되는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이미 믿고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 범하는 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용납하심과, 하나님의 길이 참으심을 멸시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판이 있는 줄은 알아요.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합니다. 하나님께서 벌하실 줄도 알아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니까 다 참아주실 것이다'합니다. 또 참아주시니까 오늘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악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하심을 멸시하는 큰 죄가 됩니다.

그런고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5)"--하나님의 진노를 쌓았어요. 하나님의 멸시하고 오래오래 위선적으로 살았어요. 위선의 날이, 회개함이 없이, 알고도 짐짓 범하는 죄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진노를 많이 쌓는 것입니다. 이중삼중으로 계속 죄를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죄라고 하는 사건 하나만 놓고 생각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죄의 중량은 이렇게 점점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불 신앙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만홀히 여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내를 업신여겼기 때문에, 멸시했지 때문에, 알고도 행치 않았기 때문에, 또 남을 비판했기 때문에, 이런 일로 인해서 계속 죄가 중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알고도 행치 않아요. 남을 비판하면서도 행치 않아요. 회개치 않아요. 그래서 진노를 쌓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결국은 감당할 수 없는 죄의 위치를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5절 말씀을 다시 한번 살펴봅시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고집, 이것 참 쓸데없는 것입니다. 회개치 않는 마음이 바로 고집스런 마음입니다. 출애굽기 32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로다"--요샛말로 목에 힘주는 사람들이지요. 목에 깁스붕대를 한 사람들이에요. 목이 곧아요. 굽힐 줄을 몰라요. 이것이 무서운 죄입니다. 목이 곧은 백성--전혀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할 마음이 없어요. 남 얘기나 하고 있고, 남 보고나 회개하라 하고, 스스로는 회개가 없어요. 목이 곧은 백성, 고집스러운 백성--이들이 회개치 아니할 때에 점점 더 무거운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이다 함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행한 대로 갚으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6)"---신학적으로 참 중요한 문제를 제기함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성경의 맥락에 따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선을 행하고 합니다마는, 이것은 율법적인 얘기가 아니라 원리적인 얘기입니다. 원리적으로 행한 대로 갚으신다 하는 뜻입니다. 좀더 본문의 맥락대로 살펴보면 이는 즉 회개 없는 행위에 대해서 말씀함입니다. 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선을 행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씀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 신앙적인 행위에 대해서입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안다는 것에 의해서 보응받는 것이 아니라 행한 대로 보응받는 것이에요. 왜 이런 말이 있지요?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 뻔히 알면서도 행하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무엇이 건강에 좋고, 무엇이 건강에 나쁘고…… 하는 소리 많이 합니다. 그러나 알기는 잘 아는데 행하지 않아요.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행한 대로 갚는 것입니다. 머리 속에 있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많이 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교리를 많이 안다고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회개로 비롯해서 행하는 바가 있어야 합니다. 그만큼만 보상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지식이 아니예요. 그런고로 성경적 지식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그것이 상 받을 수 있는 길이 되지 않는다, 그것이 구원의 길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회개의 행위, 그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행위, 믿음으로서의 행위--이것이 따를 때에 그 행한 만큼으로써 구원에 이르게 된다 함입니다. 이것은 곧 믿음의 열매를 말씀함입니다. 그 믿음이 지식적인 믿음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 됨을 증거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으로 다시 돌아가서 한번 살펴봅시다.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고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18:2123)." 보세요. 과거에 어떤 죄를 지었건간에 오늘 돌이켜서 회개하고 돌아오면 그 행한 것으로 인하여 살고 지난날로 기억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바, 행한 대로 보응 받는다는 그것입니다. 율법주의자들, 유대사람들은 많이 알고 있어요. 그러나 행하는 것은 없어요. 그런고로 구원이 없다, 그런고로 이것이 더 큰 죄가 된다 함입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말씀으로 돌아가 봅시다.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9)"--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그 영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곤고가 있습니다. 고통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말씀이 '유대사람에게 먼저, 그리고 헬라인에게'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말씀이에요. 왜 유대사람이 먼저냐?--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죄인에게 내리시는 고통과 심판이 유대사람에게 먼저 있다 함은 본문의 맥락대로 살펴본다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고 지은 자에게 심판이 먼저 있어요. 또 남을 비방하는 사람에게 심판이 먼저 있어요.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심판은 아는 지성인에게 먼저 떨어지는 것입니다. 모르고 행하는 자는 앞으로 알게 될 때가 있기 때문에 그 알게 될 때까지, 알려질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러나 이미 다 알고, 다 권면 받고, 다 체험하고, 그리고 죄에 빠져 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권면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모르고 할 때가 아니라 다 알고 하는 일인데요. 이제는 심판밖에 없어요. 끝까지 간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래서 알고 행하는 죄가 더 큰 것입니다. 그리고 심판도 먼저입니다. 알고 행하는 자에게 심판이 먼저 내려진다는 것입니다. 유대사람이 율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심판을 먼저 받았습니다. 예루살렘이 심판을 받았습니다. 유대사람이 심판을 받았어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가끔 이런 얘기를 우리 교인들에게서 들어요. "목사님, 안 믿는 사람들을 보니까 못할 짓 많이 하면서도, 부정부패다 뭐다 해도 장사도 잘되고, 그럭저럭 잘살더군요. 그런데 저는 어쩌다가 한번 살짝 못된 짓을 하려고 하면 당장 벼락이 떨어져서 실패하고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병도 들고…… 아무튼 당장 얻어맞아요. 하나님께서 아주 민감하게 때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웬걸요. 안 믿는 사람은 어떻게 하신다고 성경에 다 있습니다. 히브리서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징계가 없으면 자식이 아니라고, 징계가 없으면 남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내 아들이니까 때리지 남의 아들을 왜 때리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때리시지 남의 아들이야 어차피 지옥 갈 것인즉 급할 것 없지 않아요?"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알고 있기에, 알고 짓기에,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기에 징계가 먼저 있어요.

9절의 말씀을 문자대로 살펴봅시다.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곤고가 있으리니"--이는 고민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죄를 짓고도 고민이 없어요. 또 있다고 해도 적어요. 죄를 지으면 '나만 죄인인가? 다른 사람들도 늘 그러는데……'합니다. 뻔뻔해요. 그러고도 괜찮아요.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에는 그 죄 때문에 고민이 더 많습니다. 당장 영적으로 심판이 와요. 그래서 잠을 못 자요. 괴로워해요. 병들어요. 실패해요. 그럴 수 밖에요. 다름 아닌 믿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은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미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아는 자가 먼저 심판을 받아요. 더 큰 심판을 받아요. 더 큰 고통을 느끼게 돼요. 그런고로 바로 회개해야 돼요. 바로 회개시키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런 고통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안 믿는 사람들이 죄를 지으면서 뻔뻔스럽게 잘산다고 부러워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믿을 때까지, '믿음 다음에 보자'하시지 얼마든지 기다려주시지만, 이제 다 알고, 비판하고, 남을 가르치기까지 하면서 잘못된 길로 갈 때에는 즉각적으로 치십니다. 더 고민이 많아져요. 문제가 더 많아요. 그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유대인에게요 그 다음에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방사람, 모르는 사람에게는 오래오래 아직도 더 많이 참아주십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이미 복음이 전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내가 짧습니다. 오래 참아주시지 않으세요. 이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듯 심판에 대해서도 유대사람이 먼저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을 보니까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사람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10)"-축복에 대해서도 복음받은 사람이 먼저요. 하나님 아는 사람이 먼저요, 유대사람이 먼저다, 라고 말씀합니다. 11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겠습니까?

여기서 외모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이방사람 유대사람 가리지 않아요. 노예다 주인이다 가리지 않습니다. 남자다 여자다 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다 같은 죄인인데 자기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조금 더 의가 있다고, 조금 더 하나님을 안다고, 조금 더 성경을 안다고 하는 것은 아무 관계없어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십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런고로 유대사람들의 자랑, 먼저 믿던 사람들의 자랑, 다 소용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다 부인하십니다. 깨끗이 부인하십니다. 오직 믿음으로, 오직 주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깨끗이 죄인 됨을 시인하고, 전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겸손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오직 믿음으로라야 구원 얻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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