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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백성의 길(사도행전 14:19~28)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 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 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 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천국 백성의 가는 길이 어디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루스드라 성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이일을 우리가 한번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여기서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역설적인 면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얼핏보기에는 그저 몇 가지 사건이 있었나보다 싶지마는 그 사건들을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신앙이 아니고는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느냐, 그 믿음의 구조와 내용이 어떠해야 하느냐--이런 것을 말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가진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루스드라에서 되어진 일들을 우리 한번 간결하게 생각해봅시다. 먼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건이 있다면 세계적인 뉴스 거리가 될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어서라 했을 때에 벌떡 일어섰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이렇게 됨으로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하고도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이 기적으로 이렇게 저들의 목전에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는, 이 일로 인하여 온 성이 소동을 합니다. 바울을 두고 저들은 "이거 보통사람이 아니다" "신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합니다. "제우스신인가, 헤르메스 신인가"해서 결국은 제물까지 가지고 와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 앞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려 합니다. 저들의 마음가짐이 이러했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저들의 세계관, 저들이 종래에 가졌던 종교에 준 한다면 당연히 있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놀랐고 놀란 바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으로 그런 소동을 빚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건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납니다. 몇 사람이나 왔는지는 모르지만, 몇 사람이 와서 "저 바울과 바나바는 나쁜 사람이다"하고 선동하니까 이게 또 사람의 간사한 마음들이라 금방 제사지내겠다고 까지 하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떠받들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돌로 쳐죽이겠다고 야단입니다. 가차없이 돌로 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다버렸습니다. 자, 여기까지 생각해보세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어요.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보았으면 온 성이 예수를 믿게 될 것 같은데…… 그뿐 아니라 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신이 내려왔다고 까지 여기던 사람들이라면 이제 몇 사람들이 들어와 선동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넘어가 그들과 함께 바울을 향하여 돌을 던질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생각하면 이야말로 역설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어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여기서 짚고 넘어갑시다. 본문에 보니 루스드라사람들이 돌을 던졌다고는 되어 있지 않아요. 안디옥에서 바울을 핍박하던 유대사람들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사람들입니다. 저들의 요샛말로 말하면 소위 살인 원정입니다. 살인 원정으로 여기까지 와서 자기들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온 성을 선동해 가지고, 군중 심리를 이용해서 폭동을 일으켜 가지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 사건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적을 한두 가지 베푸셨습니까? 눈앞에 그런 일들을 보아온 사람들인데 어떻게 빌라도 법정에 모여서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모순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에 신앙적 역설이 있을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핍박했으면 되었지, 바울이 그 성에서 몸을 빼 다른 성으로 갔으면, 그렇게 쫓아냈으면 되었지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여기까지 따라와 가지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유야 어쨌든 간에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을 보십시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무릇 이 죄라는 것은 가만히 엎드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한번 죄를 짓기 시작하면 죄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욕심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욕심은 죄를 잉태합니다. 또, 죄가 된 다음에는 죄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자꾸 자랍니다. 마침내는 완전히 악한 사람으로 되고 맙니다. 자, 바울을 향해서 핍박을 했으면 한 번 한 것으로 족하지,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올 필요가 있습니까? 아주 없애버리고 말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보면 바울도 한때 이런 이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랬으면 되었지 다메섹까지 쫓아갈 것은 또 뭡니까? 그러니 바울은 이렇게 매를 맞아도 할말은 없는 사람입니다. 안디옥에서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와 가지고 죽이겠다 해도 바울이 할말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이런 과거를 만들어놓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렇게 해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대로 사람들은 바울을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19절)"합니다.
그 이유는 달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을 꼭 죽이려고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유대사람들의 유례대로 돌을 던져 자꾸 때리다보니까 바울이 그만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바울이 죽고 나니까 겁이 더럭 났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사람들의 법이 있거든요. 여기는 지금 로마 통치하에 있는데 만약 이 사실이 발각된다면 시끄러워집니다. 재판도 하지 않았고, 로마사람이 아니면 태형은 가할 수 있으나 죽이지는 못하니까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 스스로 자기네 민족 나름의 자치적인 법은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람들의 법은 어떤고 하니, 사람을 혹 때리기도 하고 태형을 내릴 수도 있지마는, 사형은 절대로 금하고 있습니다. 사형은 반드시 로마 총독만이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사람들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돌을 던지는 것까지는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여서는 안돼요. 그런데 죽였거든요. 따라서 겁이 나니까, 바울을 성밖으로 내던지고, 자기네들이 죽였다고 하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 죄를 짓는 것이지요. 로마사람들의 법을 피하기 위해서 저들은 바울을 성 밖에 내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말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신학적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바울의 말 한마디로 벌떡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매맞지 않게 할 수는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향해 비난한 말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십자가에 죽지 않을 수는 없느냐 함입니다. 그것 말되는 일입니다. 오늘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신 데 내가 고통 당하는 것을 왜 보고만 계시나, 왜 그냥 내버려두시나--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매맞지 않도록 왜 돌보지 않으셨을까? 왜 맞도록 내버려두셨을까? 생각건대,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장님이 된 것처럼, 지금 이 시간 바울을 돌 던져 치려고 할 때에 그 사람들이 팔이 부러지든지 장님이 되든지 그랬다면 얼마나 더 희한했을까, 더 큰 능력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깜짝 놀라게 되었을까, 상상해봅시다. 그런데 그런 이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매를 맞지 않도록, 바울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바울이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그러한 기적은 없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살리시면 서도 바울이 매맞는 것은 내버려두셨습니다.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이 있었습니다. "당신들, 십자가를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그러면 십자가로 죽여주지"하며 바다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거기에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끌어 매놓았습니다. 밀물이 밀려들어옵니다. 이제 물이 깊어지면 절로 익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한 신부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는 너무너무 괴로워서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하나 죽어 가는데 도저히 더는 참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 특별히 순교적 고난을 면하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에 주님께서는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은 굉장했습니다. 분명히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로 하여금 이 고난과 이 핍박과, 이 어려움을 모면하도록 하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똑똑히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핍박을 없게 하는 데에 나타나는 능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잘살기 위해서,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합니다.
그런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 매 안 맞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통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만사 형통하게 해주세요, 소원 성취하게 해주세요--어떻습니까? 이런 기도가 응답될 것 같습니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맞는 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 그 속에 하나님의 드높은 뜻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굳은 마음을 가져라, 흔들리지 말라, 이 믿음에 거하라 하는 말씀은 계속적으로 이 믿음에 살라는 말씀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지구력 있게 이 믿음 안에 계속적으로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본문에서 귀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이것이 바울이 그들에게 주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필수적 믿음의 내용입니다. 권고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궁극적 목적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믿는 사람의 최종적 궁극적 관심사입니다. 그런고로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은 핍박당하고, 고난 당하고, 병들고, 죽고, 매맞고, 굴욕 당하고, 억울하고 문제되지 안아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여기에 분명한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서 잘살고, 잘되고, 병 낫고, 성공하고…… 그런 지엽적이고 2차 3차적인 것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보세요.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그것이면 전부입니다. 그 밖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면 나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가게 할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갈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갈 사람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작품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 주신 말씀대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환난 곧 '들립시스'에는 조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외부 상황에서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경제적 고통,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같은 것을 말합니다. '파메마'라고 하는 말도 같은 '환난'이지만 고통은 고통인데 뜻이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내적 상황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라기보다는 고민이라고 하겠습니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따위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들립시스'--외부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겪어야 합니다. 겪는다는 말은 헬라어에는 본래 동사가 없으므로 '이런 고난' '이런 환난을 통하여'라고 말합니다.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갑니다. 외적으로 오는 고통이지 내적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근심하고, 걱정하고, 불안에 떨고, 초조해하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지요. 그렇다면 믿음이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고통은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 손해 많이 봅니다. 매도 맞습니다. 욕도 먹습니다. 외적 상황으로 인하여 오는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마세요.
이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결론지었어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또한 역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나라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외적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런 고난이 꼭 나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소망 있는 고생이 고생입니까? 확실한 약속을 받고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요새 학생들, 대학입시 보느라고 고생한답니다. 그것도 보통 고생이 아니지요. 그 젊은 나이에 새벽부터 일어나 밤에 도시락 둘 싸 가지고 가서 공부하는 것 보면 안쓰러워요. 불쌍하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동정하는 사람은 없어요. 왜요? 공부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숫제 갈 대학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구제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부를 애써 해서 정말 밝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면 그보다 몇 배 더 고생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렇게 고생해 가지고 결과가 좋을 것인지 나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어려운 고통을 통해서 확실하게 밝은 미래를 약속 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을 주저할 것입니까? 저도 옛날에 고학을 하면서 남 고생하는 것만큼은 고생해봤어요. 누가 고생한다고 해도 나 만큼 고생한 것 같지 안을 정도로 꽤 많이 고생했어요. 밥 벌어먹고 빨래해가면서 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밥은 얻어먹으면서 공부하는 것은 고생이 아니지요.
찬물에다 뭐 좀 빨아보려고 하니 비누가 안 풀어집디다. 빨래비누가. 아무튼 그래가면서 지내봤어요.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것입니다. 괜찮은 것이 거기 있어요. 아무리 고생하면 어떻습니까? 젊었을 때에 고생하는 것은 문제가 안돼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고통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적어도 외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내적 상황으로 변질되면서 고민이 되고, 불안이 되고, 초조한 마음이 되고, 불 신앙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절망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외적 상황 그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되는대로 살면 핍박이 없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살고, 바르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열심으로 살면 핍박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생명체에 있어서는 부득이한 것입니다. 필요조건입니다. 당위 조건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서 깊이 분석해봅시다.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원리입니까? 아니면 실재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다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고난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능력에서 떠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작품 만드시느라고 그래요.
마치 쇠를 불에 넣어 가지고 때리는 것과도 같아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공장에서 일을 좀 해보았는데 참 대단합디다. 차 타고 30분을 가야 하는데 그 거리 안에는 다른 집을 못 짓습니다. 공장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 요란하기 때문입니다. 허허벌판에다 지은 공장인데 거기서 별것을 다 만들어냅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나, 해머 하나가 40톤입니다. 무게 40톤의 해머이지요.
이게 전기로 올라갔다가 꽝하고 떨어지니 굉장하지요. 이렇게 반복하여 때려 가지고 쇠를 만듭니다. 이 쇠에는 번호만 붙어 있고 이름도 없어요. 이 쇠로 다른 쇠를 깎는 것입니다. 불에 넣었다가 때리고 또 불에 넣었다가 때리고…… 많이 맞은 쇠가 강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 했습니다. 내가 외적 상황에 의해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고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고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 속에서 내가 고난 당하고 있다고 수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고생시키시는 것입니다.
또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서 고생하게 하시겠어요? 제가 고학할 때에 한번은 몸이 나빠졌어요.
식은땀이 나고 못 견디게 괴로울 때인데 하나님 앞에 새벽기도 나가서 억지 기도를 해보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나 잘살자고 합디까? 목사 되어서 하나님 일 하겠다는 데 이건 너무하십니다. 저는 고난을 각오했습니다마는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응답이 없습디다. 마음에 정말 너무 지나친 것 같아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고통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되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안 마시겠어요?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각오해야 됩니다. 적어도 번민은 없어요. 그러나 고통은 있어요. 아픔은 있어요.
슬픔은 없어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때리는 데 아니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슬프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아픔이 없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예수님께서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제자들이 다 그랬고,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마다하겠어요?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고난을 통해서 선교가 가능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교만한 마음이 깨지고 겸손해집니다. 나도 남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선교가 됩니다. 고난 당하는 자가 고난 당하는 자를 위로하면서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알렌 선교사를 아시지요? 우리 의술로는 고칠 수가 없는 병을 의사인 알렌 선교사가 들어와 한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으로 인해서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 2년 후에는 우리 나라에 호열자가 들어와 사람들이 마구 죽어갑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냈어요. 여기서 감동이 되고, 예수를 믿게 돼요. 기록에 보면 '동학'하던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의 그 헌신적인 수고를 보면서 마음을 돌려 예수믿는 기적이 나오게 됩니다. 환난이 아니고는 도저히 안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혹 돈 많은 사람 전도해보았습니까? 가끔 제게 재벌 전도를 부탁하는 분이 있어요. 한번 모시고 와서 잘 좀 전도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저는 특별히 안 만나줍니다. 왜요? 만나나마나니까요. 두 번 나와 보고는 친절하지 않다면서 가버리고 맙니다. 여기서도 "회장님" 할 줄 알았던가봐요. 어림도 없으니 이야기지요. 깨끗이 다 저버리고, 하나의 죄인으로 무릎을 꿇어야 되는데…… 교회에 와서도 어깨에 힘주고 있으면 누가 알아줍니까? 안돼요. 깨지려면 한참 걸려요?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겠어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요. 그러면 여기 보세요. 그런 환난 속에서 겸손해지지요, 마음 문을 열지요? 환난 속에서 믿는 사람의 믿음이 순수해집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지게 돼요.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게 돼요.
자기 정욕을 포기하게 돼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나를 고칠래도 고칠 수가 없어요. 환난이 고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 담배 못 끊어서 그렇게 고생하더니, 폐암 걸리니까 싹 끊어버립디다. 늦었어요. 진작 그럴 것이지. 자기 의지로는 못 끊어요. 의사가 폐암 선고를 하니까 끊습니다.
보세요. 나로서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환난입니다. 고통입니다. 이래도 고통이 꼭 업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욕망을 버리고, 자기를 부정하고, 환난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또한 환난을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화목하게 됩니다. 평안할 때에는 서로 분쟁하다가도 환난 속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환난을 통해서 강해지고, 더욱 중요한 것은 환난 속에서 영원 지향적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잘사니까 예수 믿으면 건강합니다, 예수 믿으면 병났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하지만 중국이라든가 북한, 러시아 같은 곳의 핍박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오는 편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요.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없어요. 오직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데 안녕하십니까?"--그렇게 나와요. 아주 종말론적입니다. 뭐, 부하냐 가난하냐는 안중에도 없어요. 하나님나라에 간다고 하는 영원 지향적 신앙이 분명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거든요. 이게 환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거든요. 자, 그래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늘나라에 간다고 사도 바울이 결론 짓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신앙 위에서 장로를 선택하고 교회를 조직합니다. 그 핍박 속에서도요. 그리고 임명을 하고, 믿은바 주께 부탁을 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 자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받고, 도의 젖을 먹고, 교훈을 받고, 양육을 받고, 하늘나라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이 거룩한 공동체 종말론적 공동체의 구원론적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장로 임명하고도 그 다음에 하는 말인즉 본문을 자세히 보면, 교훈도 하고, 근면도 하고, 명령도 하고, 친히 모본을 보이기도 하고, 기도하고, 희생도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23절)"----주님께 부탁을 해요. 주님께서 지켜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이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것처럼 이들에게도 은사를 주시옵소서, 하고 위탁합니다. 주님께 위탁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도 지금 자녀를 키웁니다. 가르치고, 정성을 다하고, 기도하고 애쓰지만 마지막에는 내 마음대로 못해요. 이제는 "주여, 이 자녀를 돌보아주세요" 하고 위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대하는 자녀, 어떡하면 좋아요? 내가 거기까지 따라가겠습니까? 주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위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장로들을 주님께 위탁하고,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저들을 통하여 에베소교회를 잘 인도해나가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26절 끝에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3절에서는 주께 부탁하고, 여기서는 은혜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는 하나님 은혜에 부탁을 해야 되겠어요. 위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가 노력을 하고, 수고하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돼요. 주님 친히 인도하시는 역사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신앙고백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순수하게 더 바른 자세로 서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디슨이라고 하는 찬송가 작가의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는 시 한수를 소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나의 가시에 대하야 결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천 번이나 감사했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지워 주시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번도 감사하다고 생각 못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럼으로 나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리고 나서 나로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천국 백성의 길(사도행전 14:19~28)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 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고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 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제 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천국 백성의 가는 길이 어디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루스드라 성에서 되어진 일입니다. 이일을 우리가 한번 객관적으로 살펴본다면 여기서 기독교 교리와 신앙의 역설적인 면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얼핏보기에는 그저 몇 가지 사건이 있었나보다 싶지마는 그 사건들을 연계해서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신앙이 아니고는 소화하기 어렵습니다.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느냐, 그 믿음의 구조와 내용이 어떠해야 하느냐--이런 것을 말해주는,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문제를 가진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루스드라에서 되어진 일들을 우리 한번 간결하게 생각해봅시다. 먼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굉장한 사건입니다. 오늘도 이런 사건이 있다면 세계적인 뉴스 거리가 될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일어서라 했을 때에 벌떡 일어섰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이렇게 됨으로 모두가 깜짝 놀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굉장하고도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이 기적으로 이렇게 저들의 목전에서 나타났습니다. 두 번째는, 이 일로 인하여 온 성이 소동을 합니다. 바울을 두고 저들은 "이거 보통사람이 아니다" "신이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온 것이다"합니다. "제우스신인가, 헤르메스 신인가"해서 결국은 제물까지 가지고 와서 사도 바울과 바나바 앞에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려 합니다. 저들의 마음가짐이 이러했다는 것은 지난 시간에 생각해보았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저들의 세계관, 저들이 종래에 가졌던 종교에 준 한다면 당연히 있을 일이 있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만큼 놀랐고 놀란 바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으로 그런 소동을 빚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세 번째 사건은 이야기가 다릅니다.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그래서 폭동이 일어납니다. 몇 사람이나 왔는지는 모르지만, 몇 사람이 와서 "저 바울과 바나바는 나쁜 사람이다"하고 선동하니까 이게 또 사람의 간사한 마음들이라 금방 제사지내겠다고 까지 하던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고 떠받들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돌로 쳐죽이겠다고 야단입니다. 가차없이 돌로 칩니다. 그래서 바울은 초죽음이 되었습니다. 저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다버렸습니다. 자, 여기까지 생각해보세요.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어요.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는 기적을 보았으면 온 성이 예수를 믿게 될 것 같은데…… 그뿐 아니라 두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신이 내려왔다고 까지 여기던 사람들이라면 이제 몇 사람들이 들어와 선동을 한다고 해서 거기에 넘어가 그들과 함께 바울을 향하여 돌을 던질 것 같지 않은데 말입니다. 생각하면 이야말로 역설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어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다시 한번 여기서 짚고 넘어갑시다. 본문에 보니 루스드라사람들이 돌을 던졌다고는 되어 있지 않아요. 안디옥에서 바울을 핍박하던 유대사람들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사람들입니다. 저들의 요샛말로 말하면 소위 살인 원정입니다. 살인 원정으로 여기까지 와서 자기들만 가지고는 안되니까 온 성을 선동해 가지고, 군중 심리를 이용해서 폭동을 일으켜 가지고 돌을 던진 것입니다. 예수님 사건도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적을 한두 가지 베푸셨습니까? 눈앞에 그런 일들을 보아온 사람들인데 어떻게 빌라도 법정에 모여서 십자가에 못박아라, 십자가에 못박아라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게 모순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여기에 신앙적 역설이 있을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핍박했으면 되었지, 바울이 그 성에서 몸을 빼 다른 성으로 갔으면, 그렇게 쫓아냈으면 되었지 억하심정(抑何心情)으로 여기까지 따라와 가지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유야 어쨌든 간에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15절을 보십시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무릇 이 죄라는 것은 가만히 엎드려 있지 않습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한번 죄를 짓기 시작하면 죄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욕심이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욕심은 죄를 잉태합니다. 또, 죄가 된 다음에는 죄가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자꾸 자랍니다. 마침내는 완전히 악한 사람으로 되고 맙니다. 자, 바울을 향해서 핍박을 했으면 한 번 한 것으로 족하지,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올 필요가 있습니까? 아주 없애버리고 말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보면 바울도 한때 이런 이을 하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랬으면 되었지 다메섹까지 쫓아갈 것은 또 뭡니까? 그러니 바울은 이렇게 매를 맞아도 할말은 없는 사람입니다. 안디옥에서 여기까지 살인 원정을 와 가지고 죽이겠다 해도 바울이 할말없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미리 이런 과거를 만들어놓으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렇게 해서 핍박을 받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대로 사람들은 바울을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19절)"합니다.
그 이유는 달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을 꼭 죽이려고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유대사람들의 유례대로 돌을 던져 자꾸 때리다보니까 바울이 그만 죽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바울이 죽고 나니까 겁이 더럭 났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사람들의 법이 있거든요. 여기는 지금 로마 통치하에 있는데 만약 이 사실이 발각된다면 시끄러워집니다. 재판도 하지 않았고, 로마사람이 아니면 태형은 가할 수 있으나 죽이지는 못하니까요.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 스스로 자기네 민족 나름의 자치적인 법은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사람들의 법은 어떤고 하니, 사람을 혹 때리기도 하고 태형을 내릴 수도 있지마는, 사형은 절대로 금하고 있습니다. 사형은 반드시 로마 총독만이 명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로마사람들의 법입니다. 그러니까 돌을 던지는 것까지는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여서는 안돼요. 그런데 죽였거든요. 따라서 겁이 나니까, 바울을 성밖으로 내던지고, 자기네들이 죽였다고 하는 사실을 은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거듭 죄를 짓는 것이지요. 로마사람들의 법을 피하기 위해서 저들은 바울을 성 밖에 내던지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말았다 그 말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신학적 문제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루스드라의 앉은뱅이를 바울의 말 한마디로 벌떡 일으키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사도 바울로 하여금 매맞지 않게 할 수는 없느냐 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에도 사람들이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향해 비난한 말이 바로 이것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십자가에 죽지 않을 수는 없느냐 함입니다. 그것 말되는 일입니다. 오늘도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신 데 내가 고통 당하는 것을 왜 보고만 계시나, 왜 그냥 내버려두시나--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매맞지 않도록 왜 돌보지 않으셨을까? 왜 맞도록 내버려두셨을까? 생각건대, 선지자 엘리사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 장님이 된 것처럼, 지금 이 시간 바울을 돌 던져 치려고 할 때에 그 사람들이 팔이 부러지든지 장님이 되든지 그랬다면 얼마나 더 희한했을까, 더 큰 능력으로 인해서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깜짝 놀라게 되었을까, 상상해봅시다. 그런데 그런 이적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매를 맞지 않도록, 바울이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바울이 아픔을 당하지 않도록 하는, 그러한 기적은 없었습니다. 앉은뱅이는 살리시면 서도 바울이 매맞는 것은 내버려두셨습니다.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핍박이 있었습니다. "당신들, 십자가를 그렇게 좋아한다는데 그러면 십자가로 죽여주지"하며 바다 한가운데에 십자가를 세워놓고, 거기에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비끌어 매놓았습니다. 밀물이 밀려들어옵니다. 이제 물이 깊어지면 절로 익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한 신부가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는 너무너무 괴로워서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침묵하십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하나 죽어 가는데 도저히 더는 참고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부의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 특별히 순교적 고난을 면하게 하는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에 주님께서는 동참하시는 것입니다. 이 점을 깊이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은 굉장했습니다. 분명히 바울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울로 하여금 이 고난과 이 핍박과, 이 어려움을 모면하도록 하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는 않았습니다. 똑똑히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핍박을 없게 하는 데에 나타나는 능력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작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내가 편안하기 위해서, 잘살기 위해서, 이기적인 욕망을 위해서, 하나님께 능력을 구합니다.
그런 기도가 응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나 매 안 맞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고통 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만사 형통하게 해주세요, 소원 성취하게 해주세요--어떻습니까? 이런 기도가 응답될 것 같습니까? 우리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맞는 매,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 그 속에 하나님의 드높은 뜻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22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굳은 마음을 가져라, 흔들리지 말라, 이 믿음에 거하라 하는 말씀은 계속적으로 이 믿음에 살라는 말씀입니다. 흔들리지 말고, 지구력 있게 이 믿음 안에 계속적으로 머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이 어떤 믿음이겠습니까? 본문에서 귀한 말씀을 읽게 됩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이것이 바울이 그들에게 주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필수적 믿음의 내용입니다. 권고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마세요. 궁극적 목적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 그것이 믿는 사람의 최종적 궁극적 관심사입니다. 그런고로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믿음은 핍박당하고, 고난 당하고, 병들고, 죽고, 매맞고, 굴욕 당하고, 억울하고 문제되지 안아요.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간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여기에 분명한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 믿어서 잘살고, 잘되고, 병 낫고, 성공하고…… 그런 지엽적이고 2차 3차적인 것을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보세요. 분명하지 않습니까?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그것이면 전부입니다. 그 밖의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면 나를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가게 할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못 들어갈 사람을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갈 사람을 만들어내시는 것입니다. 작품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 주신 말씀대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합니다.
환난 곧 '들립시스'에는 조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외부 상황에서 오는 고통을 말합니다. 경제적 고통, 정신적 고통, 육체적 고통 같은 것을 말합니다. '파메마'라고 하는 말도 같은 '환난'이지만 고통은 고통인데 뜻이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내적 상황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라기보다는 고민이라고 하겠습니다. 근심, 걱정, 불안, 초조 따위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면, '들립시스'--외부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겪어야 합니다. 겪는다는 말은 헬라어에는 본래 동사가 없으므로 '이런 고난' '이런 환난을 통하여'라고 말합니다.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나라에 들어갑니다. 외적으로 오는 고통이지 내적 고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근심하고, 걱정하고, 불안에 떨고, 초조해하고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지요. 그렇다면 믿음이 아니지요.
그러나 우리는 외적인 고통은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 믿어 손해 많이 봅니다. 매도 맞습니다. 욕도 먹습니다. 외적 상황으로 인하여 오는 많은 고통을 겪게 될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마세요.
이런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결론지었어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또한 역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고자 하는 나라는 하나님나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많은 외적 고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런 고난이 꼭 나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여러분 아시는 대로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소망 있는 고생이 고생입니까? 확실한 약속을 받고 고생하는 것이 고생입니까?
요새 학생들, 대학입시 보느라고 고생한답니다. 그것도 보통 고생이 아니지요. 그 젊은 나이에 새벽부터 일어나 밤에 도시락 둘 싸 가지고 가서 공부하는 것 보면 안쓰러워요. 불쌍하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동정하는 사람은 없어요. 왜요? 공부하고 싶은데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숫제 갈 대학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구제의 대상은 아닙니다. 그리고 공부를 애써 해서 정말 밝은 미래가 약속되어 있다면 그보다 몇 배 더 고생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렇게 고생해 가지고 결과가 좋을 것인지 나쁠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문제입니다. 어려운 고통을 통해서 확실하게 밝은 미래를 약속 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을 주저할 것입니까? 저도 옛날에 고학을 하면서 남 고생하는 것만큼은 고생해봤어요. 누가 고생한다고 해도 나 만큼 고생한 것 같지 안을 정도로 꽤 많이 고생했어요. 밥 벌어먹고 빨래해가면서 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밥은 얻어먹으면서 공부하는 것은 고생이 아니지요.
찬물에다 뭐 좀 빨아보려고 하니 비누가 안 풀어집디다. 빨래비누가. 아무튼 그래가면서 지내봤어요. 그러나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미있는 것입니다. 괜찮은 것이 거기 있어요. 아무리 고생하면 어떻습니까? 젊었을 때에 고생하는 것은 문제가 안돼요.
고통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고통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적어도 외적 상황에 의한 고통은 고통이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내적 상황으로 변질되면서 고민이 되고, 불안이 되고, 초조한 마음이 되고, 불 신앙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절망이 되니까 문제이지요. 외적 상황 그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서 말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되는대로 살면 핍박이 없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살고, 바르게 살고, 진실하게 살고, 열심으로 살면 핍박은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생명체에 있어서는 부득이한 것입니다. 필요조건입니다. 당위 조건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생각해서 깊이 분석해봅시다. 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원리입니까? 아니면 실재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다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고난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 있는 것입니다. 능력에서 떠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작품 만드시느라고 그래요.
마치 쇠를 불에 넣어 가지고 때리는 것과도 같아요.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공장에서 일을 좀 해보았는데 참 대단합디다. 차 타고 30분을 가야 하는데 그 거리 안에는 다른 집을 못 짓습니다. 공장에서 나는 소리가 너무 요란하기 때문입니다. 허허벌판에다 지은 공장인데 거기서 별것을 다 만들어냅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나, 해머 하나가 40톤입니다. 무게 40톤의 해머이지요.
이게 전기로 올라갔다가 꽝하고 떨어지니 굉장하지요. 이렇게 반복하여 때려 가지고 쇠를 만듭니다. 이 쇠에는 번호만 붙어 있고 이름도 없어요. 이 쇠로 다른 쇠를 깎는 것입니다. 불에 넣었다가 때리고 또 불에 넣었다가 때리고…… 많이 맞은 쇠가 강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질 때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 했습니다. 내가 외적 상황에 의해서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서 고난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고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 속에서 내가 고난 당하고 있다고 수용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알고 고생시키시는 것입니다.
또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서 고생하게 하시겠어요? 제가 고학할 때에 한번은 몸이 나빠졌어요.
식은땀이 나고 못 견디게 괴로울 때인데 하나님 앞에 새벽기도 나가서 억지 기도를 해보았습니다. "하나님, 제가 나 잘살자고 합디까? 목사 되어서 하나님 일 하겠다는 데 이건 너무하십니다. 저는 고난을 각오했습니다마는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응답이 없습디다. 마음에 정말 너무 지나친 것 같아요.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고통인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되요.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잔을 마시지 않겠느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안 마시겠어요? 그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합니다. 각오해야 됩니다. 적어도 번민은 없어요. 그러나 고통은 있어요. 아픔은 있어요.
슬픔은 없어요.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때리는 데 아니 아프지 않습니다. 그러나 슬퍼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슬프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지요. 아픔이 없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예수님께서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제자들이 다 그랬고, 믿음의 조상들이 다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런데 어찌 우리가 마다하겠어요? 십자가의 길을 어떻게 마다하겠어요?
고난을 통해서 선교가 가능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교만한 마음이 깨지고 겸손해집니다. 나도 남도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선교가 됩니다. 고난 당하는 자가 고난 당하는 자를 위로하면서 선교가 이루어집니다. 알렌 선교사를 아시지요? 우리 의술로는 고칠 수가 없는 병을 의사인 알렌 선교사가 들어와 한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으로 인해서 이 나라 사람들의 마음 문이 열리기 시작합니다. 그 2년 후에는 우리 나라에 호열자가 들어와 사람들이 마구 죽어갑니다.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냈어요. 여기서 감동이 되고, 예수를 믿게 돼요. 기록에 보면 '동학'하던 사람들도 그리스도인의 그 헌신적인 수고를 보면서 마음을 돌려 예수믿는 기적이 나오게 됩니다. 환난이 아니고는 도저히 안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 혹 돈 많은 사람 전도해보았습니까? 가끔 제게 재벌 전도를 부탁하는 분이 있어요. 한번 모시고 와서 잘 좀 전도해달라고 부탁을 하지만 저는 특별히 안 만나줍니다. 왜요? 만나나마나니까요. 두 번 나와 보고는 친절하지 않다면서 가버리고 맙니다. 여기서도 "회장님" 할 줄 알았던가봐요. 어림도 없으니 이야기지요. 깨끗이 다 저버리고, 하나의 죄인으로 무릎을 꿇어야 되는데…… 교회에 와서도 어깨에 힘주고 있으면 누가 알아줍니까? 안돼요. 깨지려면 한참 걸려요? 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겠어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요. 그러면 여기 보세요. 그런 환난 속에서 겸손해지지요, 마음 문을 열지요? 환난 속에서 믿는 사람의 믿음이 순수해집니다. 순수한 믿음을 가지게 돼요. 그리고 자기를 부정하게 돼요.
자기 정욕을 포기하게 돼요. 생각해보세요. 내가 나를 고칠래도 고칠 수가 없어요. 환난이 고치게 만듭니다. 어떤 사람들 담배 못 끊어서 그렇게 고생하더니, 폐암 걸리니까 싹 끊어버립디다. 늦었어요. 진작 그럴 것이지. 자기 의지로는 못 끊어요. 의사가 폐암 선고를 하니까 끊습니다.
보세요. 나로서 못하는 것 하나님께서 하시는데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환난입니다. 고통입니다. 이래도 고통이 꼭 업서야 되겠습니까? 그것은 큰 은혜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환난을 통해서 하늘나라에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욕망을 버리고, 자기를 부정하고, 환난 속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하나님 앞으로 가는 것입니다. 또한 환난을 통해서 하나가 됩니다. 화목하게 됩니다. 평안할 때에는 서로 분쟁하다가도 환난 속에서 한 마음 한 뜻이 되고, 환난을 통해서 강해지고, 더욱 중요한 것은 환난 속에서 영원 지향적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이만큼 잘사니까 예수 믿으면 건강합니다, 예수 믿으면 병났습니다, 예수 믿으면 복 받습니다. 하지만 중국이라든가 북한, 러시아 같은 곳의 핍박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서 오는 편지를 보면 이야기가 달라요. 그런 얘기는 한마디도 없어요. 오직 "주님 오실 날이 가까운데 안녕하십니까?"--그렇게 나와요. 아주 종말론적입니다. 뭐, 부하냐 가난하냐는 안중에도 없어요. 하나님나라에 간다고 하는 영원 지향적 신앙이 분명합니다. 종말론적 신앙이거든요. 이게 환난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거든요. 자, 그래서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하늘나라에 간다고 사도 바울이 결론 짓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신앙 위에서 장로를 선택하고 교회를 조직합니다. 그 핍박 속에서도요. 그리고 임명을 하고, 믿은바 주께 부탁을 합니다.
모름지기 하나님을 아버지로, 교회를 어머니로 모신 자라야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생활을 소중히 여겨야 됩니다.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받고, 도의 젖을 먹고, 교훈을 받고, 양육을 받고, 하늘나라에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이 거룩한 공동체 종말론적 공동체의 구원론적 의미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장로 임명하고도 그 다음에 하는 말인즉 본문을 자세히 보면, 교훈도 하고, 근면도 하고, 명령도 하고, 친히 모본을 보이기도 하고, 기도하고, 희생도 합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는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23절)"----주님께 부탁을 해요. 주님께서 지켜주시옵소서, 주님께서 가르쳐주시옵소서, 주님께서 이들에게 힘을 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것처럼 이들에게도 은사를 주시옵소서, 하고 위탁합니다. 주님께 위탁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알아야 돼요. 여러분도 지금 자녀를 키웁니다. 가르치고, 정성을 다하고, 기도하고 애쓰지만 마지막에는 내 마음대로 못해요. 이제는 "주여, 이 자녀를 돌보아주세요" 하고 위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입대하는 자녀, 어떡하면 좋아요? 내가 거기까지 따라가겠습니까? 주님께 부탁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위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장로들을 주님께 위탁하고, 그리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저들을 통하여 에베소교회를 잘 인도해나가시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26절 끝에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23절에서는 주께 부탁하고, 여기서는 은혜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역시 우리는 하나님 은혜에 부탁을 해야 되겠어요. 위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우리가 노력을 하고, 수고하지마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돼요. 주님 친히 인도하시는 역사가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신앙고백이 여기에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있습니다. 이 모든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 앞에 순수하게 더 바른 자세로 서게 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매디슨이라고 하는 찬송가 작가의 '하나님의 권능'이라고 하는 시 한수를 소개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는 나의 가시에 대하야 결코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나의 장미꽃에 대해서는 수천 번이나 감사했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지워 주시는 십자가에 대해서는 한번도 감사하다고 생각 못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나의 인생을 완성하신 사랑의 주님이시여, 이제 저에게 가시의 가치를 가르쳐주시옵소서. 그럼으로 나의 눈물이 무지개 됨을 알겠나이다. 그리고 나서 나로 고난 당한 것이 유익이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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