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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법과 구원(사도행전 15:1~5)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 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행전 강해도 어언 59회째, 이제 본문도 제 15장으로 접어들면서 예루살렘 공회가 열리게 되는데,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 세계대회' 제1회가 된 셈입니다. 기독교 세계대회 공의회 제1차 회의가 되는 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공의회의 서곡이라고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처음 되는 일입니다. 세계 전도여행을 한 번 하고 조금 사이를 둔 다음에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는바 그 사이에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전도를 하고 여행을 했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어요.
이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 본 교회에 돌아와 거기 있는 제자들과 함께 깊이 의논을 하여 안(案)을 만들어 가지고, 다시말 하면 대책을 세워 가지고 다시 2차 전도여행길에 오르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에 사도 바울이 그 얼마나 큰 온유함과 겸손과, 그리고 협조적인 성격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워낙 교리에 관한 한 한치의 양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걸 정도입니다. 또 인간적으로 말하면 아주 고집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러한 선교 문제가 있을 때에 자신의 견해대로가 옳은 것인데도 그대로 관철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올라와 어른, 선배들, 그리고 온 교인과 함께 의논을 해 가지고 어떤 결론을 얻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그만한 여유와 그만한 온유과 겸손과 아량이 있었다는 것도 이 기회에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릇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해도 일단은 의논을 거칠 필요가 있습니다. 동의를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건 상관없다 하고 밀어붙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물론 결론은 마음에 있어요. 양보 못할 확실한 결론이 있습니다마는 그래도 그는 이것을 들고나와 의논을 하고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모두의 생각이 다 나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특별한 사람을 빼놓고는 나와 같은 이해를 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 공회에 나아가 그 문제를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다시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도여행 중에 있었던 사건이요, 그 사건 중에 이루어진 것이 주제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여 예수 믿게 할 때, 다시 말하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파할 때에 새로운 문제의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복음과 토착문화와의 관계입니다. 오늘도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온 바 생활의 틀, 생각의 틀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활 풍속이요, 나름의 철학이요, 이미 형성된 세계관입니다. 사람은 이 세계관 속에 갇혀있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몸에 배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입맛을 바꾸기 어려운 것처럼 이것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한두 가지입니까? 자, 침대생활 하던 사람은 바닥에서 잠자기가 어렵습니다.
바닥에서 자던 사람이 침대생활 하기도 어렵습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어떤 신혼 부부가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한 이틀 지나서 어머니가 물어보았어요. 장거리 전화로 어머니가 "그래, 잘 잤냐?"하고 물어보니 잠을 못 잤어요"합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지혜롭게도 "땅에서 자거라" 합니다. 침대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었으니 침대에서 잠이 올 턱이 없습니다. 더욱이 혼자 자던 사람이 둘이 자니 더 그렇지요.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굉장한 변화이지요. 독신 문화에서 '더블 문화'로 바뀌는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늘 둘이서 자던 사람은 혼자서 못 자요.
이런 게 다 문화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Sub-culture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 사람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건 절대적으로 옳다 나쁘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화가 그렇듯 중요합니다. 복음이 맨 먼저 전해질 때에 유대사람들 속에 전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사람의 문화 속에 옷을 입고, 이해되고, 설명되고, 전파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전해지는 기독교는 적어도 신학적 차원에서는 순수한 기독교라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문화적으로 각색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이미 히브리적인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세요. '장발족'이 아닙니까? 예삿일이 아니지요. 수년 전, 한창 장발족 단속할 때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장발족들이 길에서 붙들려 머리를 깎이는 판에 용케 피해 다녀서 끝까지 안 깎인 청년이 하나 있었어요. 머리칼이 어깨 밑에까지 내려와요. 콧수염도 잔뜩 길러 가지고 몰골이 영 흉측했습니다. 교회 나오는 청년인데 하도 여론이 안 좋고 해서 장로님들이 순경을 시켜서 문간에서 붙잡아 깎게 하자는 의논까지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러지 말고 사연을 들어보자 해서 한번은 불러다 왜 그렇게 하고 다니느냐고 물어봤더니 대답이 없어요. 그러더니 이윽고 한다는 소리가 "예수님 초상화를 보세요"입니다. 말문이 막힙디다.
예수님을 닮겠다는데야 뭐라고 하겠습니까?
보세요. 우리가 그림으로 보는 예수님, 동양사람 얼굴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동양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그린답시고 갓을 씌워 그려놓으니 그것도 이상합디다.
그런 것이 다 문화의 소산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될 때, 순수한 전파가 있지마는 그 형식 속에는 분명히 히브리적, 헬라적 문화 형태가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이런 것을 몰랐거든요. 생각 못했지요. 의심 못했지요. 문화 속에 있으니까요. 모르는 채로 이것이 기독교다, 이것이 전부다,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곳저곳으로 복음을 전파해보니, 다른 문화권에 가서 전파해보니 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신학이라는 것은 선교와 더불어 발전했다는 말이 있어요. 이렇게 다른 세계에 부딪쳐봐야 나 자신을 알 수 있는 법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말을 잘하려면 영어를 해야 됩니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데 "나는 미국도 안갈 건데 왜 자꾸 영어를 가르치느냐" 할 수는 없습니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한국말을 배우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우리말의 논리를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영어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문화가 다른 문화와 부딪치면 서야 우리 문화가 어디까지 왔는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화며 무엇이 본질인지, 무엇이 형식이고 무엇이 내용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때에 히브리 문화권 속에서 생각했는데 이제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보니 생각지도 않던 문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전통적 유대사람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할례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사람들의 종교문화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독교의 본질로 생각했어요. 그러니 문제가 달라지지요. 유대사람들은 본래 할례 받았고, 할례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할례 받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는데, 다른 나라의 할례 안 받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에 그들도 모두 할례 받아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저들도 마땅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이렇게 나오지요. 보수적이지요.
그런가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있어요. 함께 식사하는 문제입니다.
식사 문화 문제입니다. 사실 사람이란 먹는다는 게 중요하거든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아도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이 식사하는 장면입니다.
'저것밖에 보여줄 것이 없나?'싶을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네 가정에는 주부들이 매일 먹는 것만 하더라구요. 그릇 부시고, 시장보고, 빨래하고, 또 먹고--산다는 게 먹는 것이거든요. 초대교회도 이게 문제가 되었어요. 자, 예수를 믿게 됐는데 믿고 나서 같이 음식을 나누다보니 유대인들이 이방사람들과 섞이거든요. 전에는 만나기조차 저어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보고 인사도 안 했어요. 가까이 지나가지도 않았어요. 그렇듯 배타적으로 대하던 사람들인데 예수 믿는다는 것 하나로 마주 앉게 되고 보니 껄끄럽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먹는 방법도 서로 달라요. 이스라엘사람들은 반드시 손을 씻고 먹는데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아버지가 일어나 먼저 음식을 들고 기도한 다음에 나누어주는데 저들은 그렇지를 않아요. 우리네의 경우는 어머니가 담당하지 않습니까? 이런저런 풍속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이렇듯 식사 문화부터가 부딪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12절에 보면 아니나다를까 문제가 터지고 맙니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공회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학자들이 많아요. 그렇다면 더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안디옥에 갔어요. 아직도 기독교 교리가 정돈되어 있지 않을 때의 그 안디옥에 복음 전하러 갔는데, 가서 이방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베드로로서는 당연한 일이지요.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만 해도 대견스러운 일이니, 자, 같이 앉으세요. 형제여 자매여--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사람들이 들어왔어요. 순간 베드로는 무심결에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방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우리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싶었겠지요. 베드로의 그런 태도를 보고 사도 바울이 과감하게 책망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모습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의 믿음에 큰 손해를 주게 되지 않느냐, 그 말이지요. 선후배로 말하면야 사도 바울은 베드로보다 새까만 후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책망했다는 것이지요. 신학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아니한 가운데 있는 신앙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흔들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들과 함께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이 문제가 아직도 결정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들하고 먹다가 유대사람들이 들어오니까 베드로는 그만 흔들린 것입니다.
할례의 문제, 식사의 문제, 공동 식사의 문제, 이런 것들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문제될 것도 없지요.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되고 있어요.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가 됩니다. 기독교가 유대사람들의 종교가 될 것이냐, 아니면 세계 종교가 될 것이냐의 기로에서는 일입니다. 만일 유대사람들의 풍속과 문화 속에 그대로 매이게 되면 기독교는 유대 종교가 되고 맙니다. 유대 기독교가 되고 맙니다. 민족 종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을 타파하고 개혁하고 나오면 온 세계를 향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기독교는 마침내 세계적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문화, 풍속의 장애를 극복할 때에만 선교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선교학적 차원에서는 엄청난 계기를 마련한 셈이 됩니다. 이 때부터 기독교는 세계 종교가 되고, 선교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 장애(barrier)를 극복하지 못하면 선교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듯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공회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비약하게 됩니다. 도약을 하게 됩니다.
자, 이제 공회에서 문제되었던 것을 생각해봅시다. 첫째가 보수파와의 문제입니다. 보수파들은 할례 받아야 된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무조건 할례 받아야 된다고 우깁니다. 그런데 이 보수가 신앙적 보수냐 문화적 보수냐 하면 대개 보수라는 게 문화적 보수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어요. 신앙적 보수와 문화와 생활의 형태에 대한 보수는 달라요. 오늘도 보면 신앙적으로 보수하는 사람이 있고 생활에 보수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지금 신발을 신은 채 강대에 올라와 섰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 설교하러 가보면 나보고 신발을 벗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벗습니다. 벗으면서 농담을 한마디 더합니다. "그럼 양말도 벗어야지." 슬리퍼를 신으라고 해요. 슬리퍼는 화장실 갈 때 신는 건데…… 아무튼 어정쩡해서 그래요. 신발을 벗어라--이게 보수주의라면 신발 신고 올라가는 것은 자유주의인가요? 또, 요새 어떤 교회에 여전도회 헌신예배 설교하러 가보면 사회자는 저 밑에서 사회를 해요. 여자는 강대 위에 못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이건 보수적인 것입니까? 우리 이런 점을 분명히 생각해야 됩니다.
보수라고 해서 다 신앙적인 보수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나라에도 지금 보수주의 구분이 없지 않지만 신앙에서는 별로 입니다. 다 같아요. 별 차이가 없어요. 다만 생황 양식에 있어, 문화적 차원에서 보수적이라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한번은 가톨릭 신부와 유대인 랍비가 마주앉아 식사를 하는데 가톨릭 신부가 랍비보고 말합니다.
"당신들은 참 불쌍하오. 이렇게 맛있는 새우도 못 먹고, 신선한 굴도 못 먹고, 기름진 돼지고기도 못 먹으니 말이요." 그러자 랍비는 대꾸합니다.
"한 번은 먹을 때가 있겠지요. 당신이 장가가는 날 먹어드리지요." 카톨릭 신부는 장가를 못 가지 않습니까? 그 장가가는 것도 문화적이지 신앙적인 것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그렇듯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고, 거기에 목숨을 걸로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피나도록 싸우는데, 생각하면 난센스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이런 얘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별로 중요치 않은 얘기가 그렇게 중요시됩니다. 오직 풍속에 대한 얘기일 뿐, 교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신앙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과거 경험에 속한 것입니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치 그것이 신앙인 양 착각하고 있어요. 요새 젊은 사람들이 자주들 말하지 않습니까? 착각은 자유라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바울과 베드로는 말하자면 진보파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 이 두 사람은 할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성령이 임했는데 무슨 할례가 필요하냐, 이방사람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말자고 주장을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되는 것이다, 이미 성령이 역사 했고,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는데 누가 막을 거냐, 이렇게 소위 진보적인 태도로 나옵니다. 이 진보파와 보수파가 싸우게 되니까 거기에 여느 경우들처럼 중도파가 나타납니다. 곧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역시 어른입니다. 중용을 택합니다. 그래서 할례의 문제에 관한 한 이것은 신앙의 문제와 관계없이 이방사람은 할례 안 받고도 예수 믿을 수 있다, 할례라는 것은 유대사람 것이니까 이것 이방사람에게 강요할 것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유대사람의 종교에 관한 문제이리만큼 이방사람에 대해서는 이 문제를 초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식사 문화에 관한 것은 지키는 게 좋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은 먹지 말라고 못 받음으로 중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호응을 한 것입니다. 역시 야고보는 어른이었습니다. 그런 때이면 으레 중간 사람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래야 양쪽이 합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그 같은 도전 가운데서 발전해왔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같은 과정을 거쳐서 바른 교리가 생생하게 부각되고 체계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새로운 문제에 계속 부딪쳐야 신학이 발전합니다. 그럼으로써 위를 향해 더욱 힘차게 도약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생각해봅시다. 유대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할례란 선민의 종교의식입니다. 몸에 주신 표징입니다. 할례란 히브리 원문대로 살펴보면 '칼자국을 낸다' 혹은 '둘레를 자른다'는 뜻입니다. 선택된 사람이다, 이방사람으로부터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좀더 깨끗하게 하나님 편으로 구별해놓았다는 뜻입니다. 선민의 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표지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는 것과도 같습니다. 옛 생활을 베어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너희가 그 몸을 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 함입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몸을 베지 말고 마음을 베어라 하는 말을 합니다. 옛사람에 속한 것, 이방사람에 속한 것, 혹은 self-righteousness--자기의 의지 같은 것을 베어버린다는, 깨끗이 잘라 베어버린다는 뜻을 가진 종교예식인 것입니다.
할례에는 아주 신비로운 뜻이 또한 있어요. 유대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유대사람인 줄 알이 않는가, 그러므로 선민이란 육체적인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지요. 아무리 유대사람으로 태어났고, 유대사람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해도 다 유대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선민은 아닙니다. 할례를 받아야 선민입니다. 그 때부터 선입니다. 선민이란 혈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사람으로 태어났더라도 할례를 받아야 유대사람입니다. 동시에 이방사람도 할례 받으면 유대사람입니다. 대단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유대사람들이 '우리는 선민이다' 자랑할 것 없어요. 우리도 할례 받고 서약을 하면 유대사람이 됩니다. 오늘도 얼마든지 됩니다. 선민이란 혈통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입니다. 고백적인 것입니다. 신앙 고백적인 것입니다. 할례란 그러한 것을 아주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면서 할례를 받아야 누구든지 유대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뜻이 있다면 몸에 새겨준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라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결혼 생활을 할 때에 사랑의 증거로 가락지를 낍니다. 이거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잠깐 텔레비전을 보니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디다 노인끼리 결혼한 얘기가 나오는데 칠순 넘은 할머니가 할아버지 신랑 앞으로 손을 내밀면서 말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는 죽은 남편도 사랑합니다. 지금 끼고 있는 이 가락지는 죽은 남편이 결혼식 때 끼워준 건데 아직 한번도 뺀 일이 없습니다. 이제 다시 당신과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여기에다 나란히 끼워주세요." 그러니까 새 남편 될 할아버지가 "그럽시다"합니다. 그 참 인심도 좋습디다. "죽은 남편 사랑하는 거, 좋은 일이지요. 가락지 하나 더 끼지요. 뭐." 마음이 넓지요? 요새 보면 흔히들 결혼 때 받은 다이아반지 어디 빼두었다가 잊어버리고는 말썽을 부립디다만 대체로 서양사람들은 결혼반지가 아주 가느다랗습니다. 그것을 한번 끼고는 그만입니다. 죽을 때까지 안 뺍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결혼반지입니다. 다이아반지는 결혼 10년 후에나 하는 반지입니다. 결혼식 때에 해주는 게 아닙니다. 결혼반지는 값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징표입니다.
징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빼버리거나 없어질 우려 없는 징표, 이것이 할례였습니다. 몸에다 표지를 준 것입니다. 핏자국, 칼자국을 낸 것입니다. '너는 선민이다'하고 도장을 찍어놓은 것입니다. 항상 기억하라고, 항상 잊지 말라고, Remember also me.------이런 뜻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들의 문화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선택은 별도의 문제입니다.
선택은 선민적, 사명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학적인 문제가 되므로 다른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시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표지를 줄 때에 그 형식은 어디까지나 문화적인 테두리에서입니다. 곧 이스라엘사람들은 할례이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세례입니다. 방법은 어떠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세례만 해도 여러 가지입니다.
물에 들어앉아 세례주기도 하고, 머리에다가 물을 쏟아 붓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재미있는 예기를 해요, 죽은 다음에 들어가는 관 있지요? 그 관을 갖다놓고, 그 속에 사람을 집어넣고 관 뚜껑을 덮은 다음에 "옛사람은 죽었도다.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일어나라."---이렇게 세례를 주자는 것입니다. 실감나게 죽고 사는 것이지요.
원래 죽고 사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거든요. 부활의 의미가 아닙니까? 여러분 알게 모르게 제가 하나 하는 게 있습니다. 제가 소망교회에서 세례를 줄 때에 물을 많이 붓습니다. 조금 붓지 않고 확 붓습니다.
목욕까지는 못시키지만 확 부어요. 30년 목회 하면서 보아하니 조금씩 물 부을 때보다 많이 부으니 더 감격이 큰 것 같습니다. 물이 흐르면서 눈물도 같이 나오고 …… 그런데 형식이야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습니까? 어디까지나 문화에 속합니다. 세대 따라 변할 수도 있어요. 민족 따라 다를 수도 있고 풍속 따라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걸 두고 꼭 이래야만 한다 저래야만 한다고 고지식하게 굴 것 있습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를 믿되 문화적 우월감을 보수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신앙 문제에서가 아니라 생활과 문화 차원에서 자기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 형식이 옳고, 내가 믿는 방식이 더 옳고, 내가 받은 종교 의식이 더 옳다. 더 우월하다--이렇게 나오는 것이지요.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앉아서 기도하는 건 나쁘고 무릎꿇어야 한다느니 합니다. 주일날 한두 번 나와 가지고 돼나, 새벽기도에 꼭 나와야지, 그래야 구원받지, 합니다. 그 사람은 그것이 자기 생활일 뿐입니다. 그런 형식을 두고 잘 믿는다 못 믿는다 할 것입니까? 새벽기도에 잘 나온다고 반드시 안나오는 사람보다 더 잘 믿는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래야 잘 믿는 것이다 저래야 잘 믿는 것이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교만한 생각입니다. 생활이나 문화는 다양한 것입니다. 우월감을 가질 것이 아닙니다. Diversity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공통점도 있고 그 뜻은 똑같은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과거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배경을 가졌고 어떤 사람은 저런 배경을 가졌습니다. 배경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문제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가지고 우열의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나는 양반 출신이고, 너는 상놈 출신이다---어쨌다는 것입니까? 공부를 많이 했고 적게 했고가 무슨 문제가 됩니까? 돈이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입니까? 교회에서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자세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쓸 말을 하고 있어요. 5절을 봅시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이 한 구절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예수를 믿으면서 바리새 이끼는 못 버렸어요.
그런 주제에 비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더 잘 믿고, 더 거룩하고, 더 깨끗하고, 더 성결되고, 저 이방사람들은 더럽고 무식하다, 동물 같다----이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바리새 근성은 못 버렸어요. 바리새 끼는 여전히 남아 있어요. 바리새적 교만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 참 문제이지요. 오늘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믿기 전에 가졌던 교만을 여전히 못 버려요. 예수 믿기 전에 보스(Boss) 기질이 있었어요. 그런데 교회에 와서도 그저 '회장'만 하려고 합니다. 봉사 받으려고만 했지 봉사할 줄을 몰라요.
예수 믿으면서 버리지 못하고 있는 바리새 '끼'---이것이 기어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의 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주제가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마는 우선 진리가 중요하고, 사실이 중요하고, 현장 경험이 중요합니다. 3절에 보면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돌아왔더라 하니 듣는 사람마다 다 좋아해요. 다 좋아하는데 이 사람들만 싫어하는 거예요.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복음을 전하고, 현장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믿는 것을 보면 참 감격스럽지요.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그 감격으로 문화적인 장벽을 넘어서야 되는 거예요. 구원받는 감격, 구원받은 자를 영접하는 감격으로 이전에 차별해오던 것--가난하고, 부하고, 잘났고, 못났고, 과거가 이렇고 저렇고가 눈에 보이지 않아 그저 반가운 것뿐입니다. 이렇게 수용할 수 있을 때에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는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선민이 있어요. 선민이라 이제는 유대사람이냐 이방사람이냐가 아닙니다. 다만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인해서 다 같은 선민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되는 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저 아프리카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가톨릭에서는 언제나 마당에다 마리아 상을 만들지 않습니까? 마리아 상의 제막식을 했어요. 하얗게 만들어 가지고 보자기를 씌워놓았다가 아프리카 사람들을 모아놓고서 제막식을 했어요. 보자기가 벗겨지고 '하얀' 마리아 상이 나타나는 순간, 하얀 것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면서 흑인들이 다 도망가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 많이 연구해 가지고 그날 밤으로 페인트칠을 했대요. 새까맣게 칠한 마리아를 세워놓았더니 그제야 흑인들이 와서 기도를 하더랍니다. 말 되지요? 그렇습니다. 협소한 자기 의에 매이거나 자기 문화를 고집함으로 장벽을 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문화나 생활 양식에 대해서는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이럴 때에야 복음의 문이 제대로 열릴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크게 은혜될 것입니다.
모세의 법과 구원(사도행전 15:1~5)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 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행전 강해도 어언 59회째, 이제 본문도 제 15장으로 접어들면서 예루살렘 공회가 열리게 되는데, 이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 세계대회' 제1회가 된 셈입니다. 기독교 세계대회 공의회 제1차 회의가 되는 회의가 예루살렘에서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그 공의회의 서곡이라고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처음 되는 일입니다. 세계 전도여행을 한 번 하고 조금 사이를 둔 다음에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는바 그 사이에 있는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한 번 전도를 하고 여행을 했는데 거기서 문제가 생겼어요.
이 문제를 가지고 예루살렘 본 교회에 돌아와 거기 있는 제자들과 함께 깊이 의논을 하여 안(案)을 만들어 가지고, 다시말 하면 대책을 세워 가지고 다시 2차 전도여행길에 오르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에 사도 바울이 그 얼마나 큰 온유함과 겸손과, 그리고 협조적인 성격을 가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워낙 교리에 관한 한 한치의 양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목숨을 걸 정도입니다. 또 인간적으로 말하면 아주 고집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러한 선교 문제가 있을 때에 자신의 견해대로가 옳은 것인데도 그대로 관철하지 않고 예루살렘에 올라와 어른, 선배들, 그리고 온 교인과 함께 의논을 해 가지고 어떤 결론을 얻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그만한 여유와 그만한 온유과 겸손과 아량이 있었다는 것도 이 기회에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릇 아무리 옳은 일이라 해도 일단은 의논을 거칠 필요가 있습니다. 동의를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남이야 뭐라고 하건 상관없다 하고 밀어붙이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닙니다. 물론 결론은 마음에 있어요. 양보 못할 확실한 결론이 있습니다마는 그래도 그는 이것을 들고나와 의논을 하고 사람들을 설득합니다. 모두의 생각이 다 나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특별한 사람을 빼놓고는 나와 같은 이해를 하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그는 예루살렘 공회에 나아가 그 문제를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다시 2차 전도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것은, 어디까지나 전도여행 중에 있었던 사건이요, 그 사건 중에 이루어진 것이 주제입니다.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여 예수 믿게 할 때, 다시 말하면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파할 때에 새로운 문제의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복음과 토착문화와의 관계입니다. 오늘도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살아온 바 생활의 틀, 생각의 틀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활 풍속이요, 나름의 철학이요, 이미 형성된 세계관입니다. 사람은 이 세계관 속에 갇혀있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날 때부터 몸에 배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입맛을 바꾸기 어려운 것처럼 이것을 바꾸기는 어렵습니다. 한두 가지입니까? 자, 침대생활 하던 사람은 바닥에서 잠자기가 어렵습니다.
바닥에서 자던 사람이 침대생활 하기도 어렵습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어떤 신혼 부부가 신혼여행을 떠났는데 한 이틀 지나서 어머니가 물어보았어요. 장거리 전화로 어머니가 "그래, 잘 잤냐?"하고 물어보니 잠을 못 잤어요"합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지혜롭게도 "땅에서 자거라" 합니다. 침대를 보지도 못한 사람이었으니 침대에서 잠이 올 턱이 없습니다. 더욱이 혼자 자던 사람이 둘이 자니 더 그렇지요. 이게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굉장한 변화이지요. 독신 문화에서 '더블 문화'로 바뀌는 일입니다. 그런가하면 늘 둘이서 자던 사람은 혼자서 못 자요.
이런 게 다 문화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Sub-culture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속에 사람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것이건 절대적으로 옳다 나쁘다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문화가 그렇듯 중요합니다. 복음이 맨 먼저 전해질 때에 유대사람들 속에 전해졌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사람의 문화 속에 옷을 입고, 이해되고, 설명되고, 전파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 전해지는 기독교는 적어도 신학적 차원에서는 순수한 기독교라 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문화적으로 각색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알게 모르게 이미 히브리적인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세요. '장발족'이 아닙니까? 예삿일이 아니지요. 수년 전, 한창 장발족 단속할 때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입니다. 장발족들이 길에서 붙들려 머리를 깎이는 판에 용케 피해 다녀서 끝까지 안 깎인 청년이 하나 있었어요. 머리칼이 어깨 밑에까지 내려와요. 콧수염도 잔뜩 길러 가지고 몰골이 영 흉측했습니다. 교회 나오는 청년인데 하도 여론이 안 좋고 해서 장로님들이 순경을 시켜서 문간에서 붙잡아 깎게 하자는 의논까지 나왔어요. 그래서 제가 그러지 말고 사연을 들어보자 해서 한번은 불러다 왜 그렇게 하고 다니느냐고 물어봤더니 대답이 없어요. 그러더니 이윽고 한다는 소리가 "예수님 초상화를 보세요"입니다. 말문이 막힙디다.
예수님을 닮겠다는데야 뭐라고 하겠습니까?
보세요. 우리가 그림으로 보는 예수님, 동양사람 얼굴이 아닙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동양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문제가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그린답시고 갓을 씌워 그려놓으니 그것도 이상합디다.
그런 것이 다 문화의 소산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될 때, 순수한 전파가 있지마는 그 형식 속에는 분명히 히브리적, 헬라적 문화 형태가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이런 것을 몰랐거든요. 생각 못했지요. 의심 못했지요. 문화 속에 있으니까요. 모르는 채로 이것이 기독교다, 이것이 전부다, 하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곳저곳으로 복음을 전파해보니, 다른 문화권에 가서 전파해보니 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래 신학이라는 것은 선교와 더불어 발전했다는 말이 있어요. 이렇게 다른 세계에 부딪쳐봐야 나 자신을 알 수 있는 법입니다. 아시다시피 한국말을 잘하려면 영어를 해야 됩니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데 "나는 미국도 안갈 건데 왜 자꾸 영어를 가르치느냐" 할 수는 없습니다. 영어를 공부하면서 한국말을 배우게 되어 있어요. 그래야 우리말의 논리를 알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말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 영어를 배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문화가 다른 문화와 부딪치면 서야 우리 문화가 어디까지 왔는지, 내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화며 무엇이 본질인지, 무엇이 형식이고 무엇이 내용인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을 때에 히브리 문화권 속에서 생각했는데 이제 이방인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보니 생각지도 않던 문제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이렇습니다. 전통적 유대사람들은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할례라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사람들의 종교문화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독교의 본질로 생각했어요. 그러니 문제가 달라지지요. 유대사람들은 본래 할례 받았고, 할례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습니다. 할례 받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는데, 다른 나라의 할례 안 받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에 그들도 모두 할례 받아야 되는지 말아야 되는지,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저들도 마땅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이렇게 나오지요. 보수적이지요.
그런가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있어요. 함께 식사하는 문제입니다.
식사 문화 문제입니다. 사실 사람이란 먹는다는 게 중요하거든요.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아도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이 식사하는 장면입니다.
'저것밖에 보여줄 것이 없나?'싶을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네 가정에는 주부들이 매일 먹는 것만 하더라구요. 그릇 부시고, 시장보고, 빨래하고, 또 먹고--산다는 게 먹는 것이거든요. 초대교회도 이게 문제가 되었어요. 자, 예수를 믿게 됐는데 믿고 나서 같이 음식을 나누다보니 유대인들이 이방사람들과 섞이거든요. 전에는 만나기조차 저어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보고 인사도 안 했어요. 가까이 지나가지도 않았어요. 그렇듯 배타적으로 대하던 사람들인데 예수 믿는다는 것 하나로 마주 앉게 되고 보니 껄끄럽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먹는 방법도 서로 달라요. 이스라엘사람들은 반드시 손을 씻고 먹는데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고, 이스라엘사람들은 아버지가 일어나 먼저 음식을 들고 기도한 다음에 나누어주는데 저들은 그렇지를 않아요. 우리네의 경우는 어머니가 담당하지 않습니까? 이런저런 풍속이 서로 다른 것입니다.
이렇듯 식사 문화부터가 부딪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됩니다.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12절에 보면 아니나다를까 문제가 터지고 맙니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공회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학자들이 많아요. 그렇다면 더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베드로가 안디옥에 갔어요. 아직도 기독교 교리가 정돈되어 있지 않을 때의 그 안디옥에 복음 전하러 갔는데, 가서 이방사람들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베드로로서는 당연한 일이지요. 이방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만 해도 대견스러운 일이니, 자, 같이 앉으세요. 형제여 자매여--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사람들이 들어왔어요. 순간 베드로는 무심결에 당황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이방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우리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나?' 싶었겠지요. 베드로의 그런 태도를 보고 사도 바울이 과감하게 책망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런 모습을 보임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의 믿음에 큰 손해를 주게 되지 않느냐, 그 말이지요. 선후배로 말하면야 사도 바울은 베드로보다 새까만 후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책망했다는 것이지요. 신학적으로 정리되어 있지 아니한 가운데 있는 신앙이기 때문에 베드로가 흔들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들과 함께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이 문제가 아직도 결정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사람들하고 먹다가 유대사람들이 들어오니까 베드로는 그만 흔들린 것입니다.
할례의 문제, 식사의 문제, 공동 식사의 문제, 이런 것들이 큰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문제될 것도 없지요. 당연한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되고 있어요. 신학적으로 정리하면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가 됩니다. 기독교가 유대사람들의 종교가 될 것이냐, 아니면 세계 종교가 될 것이냐의 기로에서는 일입니다. 만일 유대사람들의 풍속과 문화 속에 그대로 매이게 되면 기독교는 유대 종교가 되고 맙니다. 유대 기독교가 되고 맙니다. 민족 종교가 되고 맙니다. 이것을 타파하고 개혁하고 나오면 온 세계를 향해서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야 기독교는 마침내 세계적 종교가 되는 것입니다. 문화, 풍속의 장애를 극복할 때에만 선교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선교학적 차원에서는 엄청난 계기를 마련한 셈이 됩니다. 이 때부터 기독교는 세계 종교가 되고, 선교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 장애(barrier)를 극복하지 못하면 선교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렇듯 대단히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공회로 모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비약하게 됩니다. 도약을 하게 됩니다.
자, 이제 공회에서 문제되었던 것을 생각해봅시다. 첫째가 보수파와의 문제입니다. 보수파들은 할례 받아야 된다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무조건 할례 받아야 된다고 우깁니다. 그런데 이 보수가 신앙적 보수냐 문화적 보수냐 하면 대개 보수라는 게 문화적 보수입니다. 거기에 문제가 있어요. 신앙적 보수와 문화와 생활의 형태에 대한 보수는 달라요. 오늘도 보면 신앙적으로 보수하는 사람이 있고 생활에 보수하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지금 신발을 신은 채 강대에 올라와 섰습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에 설교하러 가보면 나보고 신발을 벗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저는 벗습니다. 벗으면서 농담을 한마디 더합니다. "그럼 양말도 벗어야지." 슬리퍼를 신으라고 해요. 슬리퍼는 화장실 갈 때 신는 건데…… 아무튼 어정쩡해서 그래요. 신발을 벗어라--이게 보수주의라면 신발 신고 올라가는 것은 자유주의인가요? 또, 요새 어떤 교회에 여전도회 헌신예배 설교하러 가보면 사회자는 저 밑에서 사회를 해요. 여자는 강대 위에 못 올라온다는 것입니다. 이건 보수적인 것입니까? 우리 이런 점을 분명히 생각해야 됩니다.
보수라고 해서 다 신앙적인 보수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나라에도 지금 보수주의 구분이 없지 않지만 신앙에서는 별로 입니다. 다 같아요. 별 차이가 없어요. 다만 생황 양식에 있어, 문화적 차원에서 보수적이라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얘기가 있어요. 한번은 가톨릭 신부와 유대인 랍비가 마주앉아 식사를 하는데 가톨릭 신부가 랍비보고 말합니다.
"당신들은 참 불쌍하오. 이렇게 맛있는 새우도 못 먹고, 신선한 굴도 못 먹고, 기름진 돼지고기도 못 먹으니 말이요." 그러자 랍비는 대꾸합니다.
"한 번은 먹을 때가 있겠지요. 당신이 장가가는 날 먹어드리지요." 카톨릭 신부는 장가를 못 가지 않습니까? 그 장가가는 것도 문화적이지 신앙적인 것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을 그렇듯 중요한 것처럼 생각하고, 거기에 목숨을 걸로 옳다느니 그르다느니 피나도록 싸우는데, 생각하면 난센스입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이런 얘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별로 중요치 않은 얘기가 그렇게 중요시됩니다. 오직 풍속에 대한 얘기일 뿐, 교리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신앙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과거 경험에 속한 것입니다.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치 그것이 신앙인 양 착각하고 있어요. 요새 젊은 사람들이 자주들 말하지 않습니까? 착각은 자유라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바울과 베드로는 말하자면 진보파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읽어 내려가면 이 두 사람은 할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미 성령이 임했는데 무슨 할례가 필요하냐, 이방사람들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말자고 주장을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되는 것이다, 이미 성령이 역사 했고, 하나님께서 역사 하셨는데 누가 막을 거냐, 이렇게 소위 진보적인 태도로 나옵니다. 이 진보파와 보수파가 싸우게 되니까 거기에 여느 경우들처럼 중도파가 나타납니다. 곧 야고보입니다.
야고보는 역시 어른입니다. 중용을 택합니다. 그래서 할례의 문제에 관한 한 이것은 신앙의 문제와 관계없이 이방사람은 할례 안 받고도 예수 믿을 수 있다, 할례라는 것은 유대사람 것이니까 이것 이방사람에게 강요할 것은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유대사람의 종교에 관한 문제이리만큼 이방사람에 대해서는 이 문제를 초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식사 문화에 관한 것은 지키는 게 좋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상의 제물은 먹지 말라고 못 받음으로 중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호응을 한 것입니다. 역시 야고보는 어른이었습니다. 그런 때이면 으레 중간 사람이 필요한 법입니다. 그래야 양쪽이 합의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학은 그 같은 도전 가운데서 발전해왔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같은 과정을 거쳐서 바른 교리가 생생하게 부각되고 체계화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새로운 문제에 계속 부딪쳐야 신학이 발전합니다. 그럼으로써 위를 향해 더욱 힘차게 도약해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돌아보면서 생각해봅시다. 유대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할례란 선민의 종교의식입니다. 몸에 주신 표징입니다. 할례란 히브리 원문대로 살펴보면 '칼자국을 낸다' 혹은 '둘레를 자른다'는 뜻입니다. 선택된 사람이다, 이방사람으로부터 구별한다는 뜻입니다. 좀더 깨끗하게 하나님 편으로 구별해놓았다는 뜻입니다. 선민의 표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표지입니다. 우리가 세례 받는 것과도 같습니다. 옛 생활을 베어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너희가 그 몸을 베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어라 함입니다.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몸을 베지 말고 마음을 베어라 하는 말을 합니다. 옛사람에 속한 것, 이방사람에 속한 것, 혹은 self-righteousness--자기의 의지 같은 것을 베어버린다는, 깨끗이 잘라 베어버린다는 뜻을 가진 종교예식인 것입니다.
할례에는 아주 신비로운 뜻이 또한 있어요. 유대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유대사람인 줄 알이 않는가, 그러므로 선민이란 육체적인 혈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이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의미지요. 아무리 유대사람으로 태어났고, 유대사람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해도 다 유대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선민은 아닙니다. 할례를 받아야 선민입니다. 그 때부터 선입니다. 선민이란 혈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차원에서, 영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유대사람으로 태어났더라도 할례를 받아야 유대사람입니다. 동시에 이방사람도 할례 받으면 유대사람입니다. 대단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유대사람들이 '우리는 선민이다' 자랑할 것 없어요. 우리도 할례 받고 서약을 하면 유대사람이 됩니다. 오늘도 얼마든지 됩니다. 선민이란 혈통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입니다. 고백적인 것입니다. 신앙 고백적인 것입니다. 할례란 그러한 것을 아주 강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고 순종하면서 할례를 받아야 누구든지 유대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뜻이 있다면 몸에 새겨준다는 것입니다. 잊지 말라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결혼 생활을 할 때에 사랑의 증거로 가락지를 낍니다. 이거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잠깐 텔레비전을 보니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디다 노인끼리 결혼한 얘기가 나오는데 칠순 넘은 할머니가 할아버지 신랑 앞으로 손을 내밀면서 말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는 죽은 남편도 사랑합니다. 지금 끼고 있는 이 가락지는 죽은 남편이 결혼식 때 끼워준 건데 아직 한번도 뺀 일이 없습니다. 이제 다시 당신과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여기에다 나란히 끼워주세요." 그러니까 새 남편 될 할아버지가 "그럽시다"합니다. 그 참 인심도 좋습디다. "죽은 남편 사랑하는 거, 좋은 일이지요. 가락지 하나 더 끼지요. 뭐." 마음이 넓지요? 요새 보면 흔히들 결혼 때 받은 다이아반지 어디 빼두었다가 잊어버리고는 말썽을 부립디다만 대체로 서양사람들은 결혼반지가 아주 가느다랗습니다. 그것을 한번 끼고는 그만입니다. 죽을 때까지 안 뺍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결혼반지입니다. 다이아반지는 결혼 10년 후에나 하는 반지입니다. 결혼식 때에 해주는 게 아닙니다. 결혼반지는 값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징표입니다.
징표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빼버리거나 없어질 우려 없는 징표, 이것이 할례였습니다. 몸에다 표지를 준 것입니다. 핏자국, 칼자국을 낸 것입니다. '너는 선민이다'하고 도장을 찍어놓은 것입니다. 항상 기억하라고, 항상 잊지 말라고, Remember also me.------이런 뜻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들의 문화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선택은 별도의 문제입니다.
선택은 선민적, 사명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학적인 문제가 되므로 다른 시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시간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표지를 줄 때에 그 형식은 어디까지나 문화적인 테두리에서입니다. 곧 이스라엘사람들은 할례이고, 우리 나라 사람들은 세례입니다. 방법은 어떠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세례만 해도 여러 가지입니다.
물에 들어앉아 세례주기도 하고, 머리에다가 물을 쏟아 붓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재미있는 예기를 해요, 죽은 다음에 들어가는 관 있지요? 그 관을 갖다놓고, 그 속에 사람을 집어넣고 관 뚜껑을 덮은 다음에 "옛사람은 죽었도다. 주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 일어나라."---이렇게 세례를 주자는 것입니다. 실감나게 죽고 사는 것이지요.
원래 죽고 사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거든요. 부활의 의미가 아닙니까? 여러분 알게 모르게 제가 하나 하는 게 있습니다. 제가 소망교회에서 세례를 줄 때에 물을 많이 붓습니다. 조금 붓지 않고 확 붓습니다.
목욕까지는 못시키지만 확 부어요. 30년 목회 하면서 보아하니 조금씩 물 부을 때보다 많이 부으니 더 감격이 큰 것 같습니다. 물이 흐르면서 눈물도 같이 나오고 …… 그런데 형식이야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습니까? 어디까지나 문화에 속합니다. 세대 따라 변할 수도 있어요. 민족 따라 다를 수도 있고 풍속 따라 다를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걸 두고 꼭 이래야만 한다 저래야만 한다고 고지식하게 굴 것 있습니까?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를 믿되 문화적 우월감을 보수하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신앙 문제에서가 아니라 생활과 문화 차원에서 자기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내 형식이 옳고, 내가 믿는 방식이 더 옳고, 내가 받은 종교 의식이 더 옳다. 더 우월하다--이렇게 나오는 것이지요. 같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앉아서 기도하는 건 나쁘고 무릎꿇어야 한다느니 합니다. 주일날 한두 번 나와 가지고 돼나, 새벽기도에 꼭 나와야지, 그래야 구원받지, 합니다. 그 사람은 그것이 자기 생활일 뿐입니다. 그런 형식을 두고 잘 믿는다 못 믿는다 할 것입니까? 새벽기도에 잘 나온다고 반드시 안나오는 사람보다 더 잘 믿는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절대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래야 잘 믿는 것이다 저래야 잘 믿는 것이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교만한 생각입니다. 생활이나 문화는 다양한 것입니다. 우월감을 가질 것이 아닙니다. Diversity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공통점도 있고 그 뜻은 똑같은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과거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배경을 가졌고 어떤 사람은 저런 배경을 가졌습니다. 배경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이런 문제가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저런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가지고 우열의 감정을 가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나는 양반 출신이고, 너는 상놈 출신이다---어쨌다는 것입니까? 공부를 많이 했고 적게 했고가 무슨 문제가 됩니까? 돈이 있고 없고가 무슨 상관입니까? 교회에서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자세히 지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쓸 말을 하고 있어요. 5절을 봅시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이 한 구절이 결과적으로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예수 믿는 사람---예수를 믿으면서 바리새 이끼는 못 버렸어요.
그런 주제에 비판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더 잘 믿고, 더 거룩하고, 더 깨끗하고, 더 성결되고, 저 이방사람들은 더럽고 무식하다, 동물 같다----이러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를 믿으면서 바리새 근성은 못 버렸어요. 바리새 끼는 여전히 남아 있어요. 바리새적 교만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입니다. 이것 참 문제이지요. 오늘도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 가운데 믿기 전에 가졌던 교만을 여전히 못 버려요. 예수 믿기 전에 보스(Boss) 기질이 있었어요. 그런데 교회에 와서도 그저 '회장'만 하려고 합니다. 봉사 받으려고만 했지 봉사할 줄을 몰라요.
예수 믿으면서 버리지 못하고 있는 바리새 '끼'---이것이 기어이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결의 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주제가 다음 시간에 이어집니다 마는 우선 진리가 중요하고, 사실이 중요하고, 현장 경험이 중요합니다. 3절에 보면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돌아왔더라 하니 듣는 사람마다 다 좋아해요. 다 좋아하는데 이 사람들만 싫어하는 거예요.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복음을 전하고, 현장에서 한 사람 한 사람 믿는 것을 보면 참 감격스럽지요. 얼마나 굉장한 일입니까? 그 감격으로 문화적인 장벽을 넘어서야 되는 거예요. 구원받는 감격, 구원받은 자를 영접하는 감격으로 이전에 차별해오던 것--가난하고, 부하고, 잘났고, 못났고, 과거가 이렇고 저렇고가 눈에 보이지 않아 그저 반가운 것뿐입니다. 이렇게 수용할 수 있을 때에야 해결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는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선민이 있어요. 선민이라 이제는 유대사람이냐 이방사람이냐가 아닙니다. 다만 예수 믿는다는 것으로 인해서 다 같은 선민 의식을 가질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되는 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저 아프리카에도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가톨릭에서는 언제나 마당에다 마리아 상을 만들지 않습니까? 마리아 상의 제막식을 했어요. 하얗게 만들어 가지고 보자기를 씌워놓았다가 아프리카 사람들을 모아놓고서 제막식을 했어요. 보자기가 벗겨지고 '하얀' 마리아 상이 나타나는 순간, 하얀 것이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겠느냐 하면서 흑인들이 다 도망가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래 많이 연구해 가지고 그날 밤으로 페인트칠을 했대요. 새까맣게 칠한 마리아를 세워놓았더니 그제야 흑인들이 와서 기도를 하더랍니다. 말 되지요? 그렇습니다. 협소한 자기 의에 매이거나 자기 문화를 고집함으로 장벽을 쌓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문화나 생활 양식에 대해서는 마음을 활짝 열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이럴 때에야 복음의 문이 제대로 열릴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크게 은혜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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