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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복음(갈1장 1~5절)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갈라디아서가 어떻게 기록되었으며 어떤 내용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앞에서는 그런 것을 객관적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갈라디아서의 주제에 대해서도 조금 언급했습니다. 말하자면 갈라디아서의 서론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오늘은 본론에 들어가는 첫 시간입니다. 먼저 문안(問安)의 말씀이 있습니다. 문안이라고 하지만 형식이 그렇다는 것이지 내용은 어디까지나 '구원의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선 편지의 문안 형식이라고 볼 때, 우리는 이 점에서부터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네는 편지를 쓸 때에 대체로 수신자(受信者)의 이름을 먼저 씁니다. 이를테면 '부주전상서(父主前上書)'니 '어머님 보시옵소서'라든가 '사랑하는 OO에게' 등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발신자인 나의 이름은 맨끝에 '불초 OO올림'이라든가 'OO드림' 따위로 밝힙니다. 이러한 우리네 관례로는 수신자를 나타낸 다음에 처음으로 쓰는 내용이 곧 안부를 묻는 문안 인사입니다. '그 동안 안녕하십니까'라든가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옵시며'와 같은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사람들이나 서양사람들의 경우는 우리네의 그것과 다릅니다. 그들은 맨먼저 발신자를 밝힌 다음에 수신자를 밝히고, 그리고 나서 문안을 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식의 문안은 안부를 묻는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복을 비는 말로 이루어집니다. 축복으로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의 서신에도 나타난 형식입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 헬라식과 히브리식이 혼합되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편지 쓰는 형식은 헬라적이요 문안의 내용은 히브리적입니다.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1절)"------이 말씀의 헬라 원문은 첫마디가 '파울로스 아포스톨로스'입니다. 맨처음이 '바울'이고, 그리고 '사도(apostle)'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어서 '사도'에 관한 것을 죽 설명합니다. 그런데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 성경은 한참동안 사도에 관한 설명을 길게 한 다음에야 '바울'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 형식이 아니라 내용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바울은 자신의 이름을 말할 때에 '사도(使徒)'라고 하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의미를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조금 언급했습니다마는 갈라디아교회에 지금 교회 핍박자들이 있습니다. 무릇 핍박자는 밖에도 있지마는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자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경우입니다. 이런 자들을 다른 말로는 이단(異端)이라 하지요. 그런데 교리(敎理)가 전혀 다른 이방종교적인 이단--겉으로도 표가 나는 그런 이단인가 하면 그것이 아닙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예수를 같이 믿는 것 같은데 속이 다른 것입니다. 같은 자리에 나란히 앉아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으나 목적이 달라요. 이들은 아주 교묘한 언변(言辯)으로 교회를 헐뜯고 파괴해나갑니다. 이름하여 '율법주의자'----이런 자들이 있어서 자꾸만 교회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이래서 사도 바울이 '복음은 이것이다' '바로 믿는 신앙은 이것이다'하고 변증(辨證)으로 쓰게 된 것이 갈라디아서입니다.
복음과 교회를 파괴시키려는 시험이 어찌 들어왔는지 살펴봅시다. 형식상으로는 율법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들어왔습니다. 저희 딴에는 더 철저하게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니 행함이 있어야 한다, 세례만으로는 소용없으니 할례까지 받아야한다---이렇게 시작합니다. 행함이 없이 어떻게 구원받겠느냐, 구원받을 수 없다고 자꾸 강조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그럴 것도 같습니다. 처음에는 오로지 믿음으로 시작된 신앙이었습니다마는 어느 사이에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선을 행하여야 한다'라는 생각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것은 속 다르고 겉 다른 이야기다, 세속적이다'하고 반박하던 사람들마저 어느 사이엔가 귀가 솔깃해집니다. 율법을 잘 지켜야만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토록 율법적으로 깨끗하게, 진실되게, 완벽하게 사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예수님이 간데온데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고, 예수님의 보혈이 무의미해집니다.
여기서 율법주의자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파괴하고 변질시키기 위하여 먼저 행위와 율법을 강조하고, 나아가 복음을 전파하는 바울을 공격합니다. 바울로 하여금 사도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도자인 바울을 꺾어놓으면 교회가 무너지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목자를 치면 양의 무리가 흩어지지 않습니까? 사단이 그 이치를 이용하여 바울을 치려고 합니다. 그 방편의 하나로 먼저 바울의 족보를 따집니다. 과거사를 거론하여 트집을 잡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데는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훌륭한 사도요, 신학자요, 하나님의 종이요, 능력의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던 사람이다' '자칭 사도라고 떠벌이고 다니지만 사도 자격이 없다'라고 하면서 과거를 문제삼습니다. 덧붙여, 사도가 되려면 적어도 세 가지의 자격을 겸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셔서 제자로 삼아 공생애 3년에 동참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야 합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도임을 나타내는 증거로서 이적을 보여야 합니다.
바울은 두 가지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적을 나타내는 권능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자격 미달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직접 부름받고 3년 동안 예수님의 생애에 동참한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예수님을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저들은 이 점을 약점으로 들추어냅니다. 사단의 시험입니다. '바울은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는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려고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이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님의 제자로 역사할 때에 예수가 누구인지도 몰랐던 사람이다' '스데반을 죽일 때에 동참한 사람이다'----이러한 사람이 사도랍시고 돌아다닌다며 헐뜯습니다. 그렇게 하여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사단은 언제나 이렇게 역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꼭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바울의 사도권과 카리스마적인 권세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역사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중에서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1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으로부터 난 것으로 말하면 그는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가 누구의 후손이기 때문이 아니요, 사람들이 회의에서 결정하여 사도로 세워준 것도 아니요, 투표 결과 임명된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메섹 도상에 있는 나를 친히 부르셔서 내가 사도된 것이다'라고 바울은 고백합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face to face)로 직접 만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임명했습니까? 어느 회의에서 파송했습니까? 예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게 된 첫째 이유는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 가운데 내가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능력이 나를 붙들어 내가 사도 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난 것에서부터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것, 심지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것까지 모든 과거사가 하나님의 섭리 중에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경륜이 그를 불러서 사도 되게 한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으로 그를 붙드신 것입니다. 그 능력 안에서 얼마든지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드고아의 목자도 선지자가 되고, 야곱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방 여인인 룻도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쓰였습니다. 이렇듯 대단치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부르시고 당신의 역사를 감당하게 하십니다. 예로써 특히 기억할만한 인물은 요나입니다. 질투가 많고 심성이 못됐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는 요나를 택정하셔서 니느웨를 구원하십니다. 이렇듯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데 내가 왜 사도가 못되느냐고 바울은 반박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그 부활의 능력을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사도된 것이다---당당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좀더 깊이 생각해봅시다. 사도(apostle)란 '보냄을 받은 자(one who is sent)'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예수의 보냄을 받아 이방세계에서 많은 역사를 이룬 실적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하여 나타나고 있고 참된 복음의 진리가 넉넉하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제 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느냐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할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시는가'---이것만을 생각하며 모세를 따랐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은 옛날에 애굽사람을 때려죽이고 미디안으로 도망가 있던 사람이 아니냐? 40년 동안이나 도망가 있다가 돌아오지 않았는가'----이렇게 따지는 데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다고 비방하던 미리암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미리암을 치셨습니다. 모름지기 모세의 지도를 받는 사람들은 모세가 어떤 인간인지, 어떤 과거를 가졌는지, 어떤 실수를 하였는지 알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시는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가, 모세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시는가---이것만을 알고자 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모세를 따랐어야 합니다. 섣부른 판단으로 모세를 죽이느니 살리느니 했다가는 큰일납니다. 정면으로 하나님께 도전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 왕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다윗 왕에게는 좋은 점이 많았습니다마는 밧세바를 취하고 그의 남편을 죽이는 결정적인 실수가 있었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회개한 후 계속 왕위에 있었습니다. 그 동안 다윗의 과오를 거론하고 트집잡아 이야기한 사람들은 모두 심판을 받았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운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다윗과 함께 하셨습니다. 백성들은 이 점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다윗을 따랐어야 합니다. 다윗을 신앙적으로 보지 못한 것은 사람들의 큰 실수였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수제자라고는 하지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이만한 배신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부인할 뿐만 아니라 맹세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가 불과 두 달도 못되어 삼천 명의 군중 앞에서 예수 믿으라고 설교를 합니다. 이 때 누군가가 비난하기를 "저 사람이 누구냐? 며칠 전에 불 쬐다말고 예수 모른다고 부인했던 바로 그 사람이 아니냐? 이 사람은 예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비실비실 도망 다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이제 와서 예수 믿으라고 설교를 하고 있다니, 말도 안 된다"라고 한다면 이런 사람은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갈릴리의 어부이든 어떻든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예수를 세 번 부인하였든 열 번 부인하였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지금 성령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쓰시고 그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오직 이것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생각은 다 쓸데없습니다. 쓸데없는 생각이 들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마귀 사단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베드로를 가리켜 '아그람마토스'라고 조롱합니다. '그람마'가 '글'이라는 뜻이므로 '아그람마토스'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저 촌사람, 저 불학무식(不學無識)한 갈릴리 촌뜨기가 하는 말을 뭣하러 듣느냐"라고 하면서 바리새인들이 훼방을 놓습니다. 이런 짓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은혜 받지 못하고 맙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16절)." 당시 예수를 육체대로 알았던 사람들은 "저사람, 갈릴리 촌사람이 아니냐"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것을 배웠나?"------이런 소리나 하다가 결국은 예수를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부활의 능력이 함께 하고, 말씀의 능력이 함께 하고, 하나님의 계시가 그와 함께 한다는 것을 믿었어야 예수를 따를 수 있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예나 오늘이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 갈라디아교회 안에서 교회를 헐뜯고 바울의 사도권에 도전하는 행위는 바로 사단의 전략입니다. 이래서 시험에 들게 됩니다.
작년 4월에 저는 시카고에서 개최되는 큰 선교대회에 강사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하루는 특별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데 저를 만나겠다고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인사를 합니다. 그들과 인사를 나누자니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지만 마치 오래 사귄 친구처럼 반갑게 느껴졌습니다. 서로들 만나서 대화도 나누고 대접도 하고 싶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저를 만나기 위해 11시간 동안 차를 운전하여 달려왔다고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만나드리지 않을 수 없는 분들입니다. 알고 보니 이분들은 모두 제 설교가 녹음된 카세트 테이프를 통해 저를 알게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교포들에게 카세트 테이프를 보내주는 것은 참으로 보람있는 일이구나----저는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외국에 나가 있으면 어쩔 수 없이 외롭습니다. 더구나 한국사람이 많지 않은 곳에 살다보면 우리말부터 몹시 그리워집니다. 그들은 우편으로 전해지는 카세트 테이프를 꼬박꼬박 받아서 매주일마다 두 번 세 번씩 들어왔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설교 중에 인용된 예화들까지 줄줄 외고 있었습니다. 목사님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목사님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지요, 차를 타고 다닐 때에도 테이프를 들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목소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습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몰라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생각보다 늙으셨네요, 생각보다 젊으셨군요---이런저런 이야기꽃이 피어났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분들은 제 음성만 들었습니다. 그 음성을 통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분들은 내가 누구인지, 내 나이가 몇 살인지, 제가 성스럽게 생겼는지 괴물로 생겼는지, 내가 소망교회에서 왔다지만 그 소망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그런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또 알 바도 아닙니다. 다만 제 음성을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을 뿐이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반가운 나머지 되도록 오래 그분들을 붙잡고 정담을 나누고 기도를 하고 그랬습니다마는 여러분, 우리는 사람을 대할 때, 특별히 하나님의 종을 대할 때, 그 누구를 대할 때든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을 먼저 보고 그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
주의 종이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말씀하시고, 그를 통하여 역사 하신다는 것---그 이상은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단 시험에 들고 보면 지금 내 귀에 들리는 말씀은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상대의 과거, 상대의 결점, 상대의 실수를 생각합니다. 자꾸 약점을 캐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것이 보이게 됩니다. 마귀의 시험이 성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혜가 자꾸 엎질러집니다.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은혜 못 받으니 끝난 것입니다. 무엇 하려고 모입니까? 예배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아버지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합니다.
내가 사람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라고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사도 되었다고 그는 말씀합니다. 나는 사도(使徒)다---스스로 이같은 마음가짐으로 설교하며, 듣는 자도 그 같은 마음가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다------이것만을 생각하고 말씀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2절에서는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라고 수신자를 밝힙니다.
갈라디아교회라고 했습니다마는 무릇 교회는 하나입니다. 동서고금의 모든 교회가 수신자입니다. 갈라디아교회는 갈라디아 지방에 있어 지역적으로 문화적으로 구분되어 있을 뿐입니다. 3절로 넘어가면 문안(問安) 대신 축복의 말씀이 나옵니다.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은혜와 평강, 이 말은 바울의 편지마다 나오는 말입니다마는 여기서 꼭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입니다. 이 '카리스'는 성경에서 흔히 아름답다는 말로, 또는 '신령한 기쁨' '기쁨'으로도 번역되는 말입니다. 본 성경에서 이말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은혜'입니다. 자격 없으면서 받는 사랑, 공짜로 받는 사랑---이것이 곧 은혜입니다. 나에게는 그 큰사랑을 받을만한 의가 없습니다.
이렇듯 무자격한 가운데 받게 되는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사랑을 은혜라고 합니다. 은혜란 실제적으로는 깨달음도 되고, 형통함도 되고, 병 고침 받는 것도 되고, 축복도 됩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자격 없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로 거저 받는,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는 그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한편 '평강'은 히브리적인 인사말로 화평을 뜻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샬롬(shalom)'이 '평강'입니다. 헬라어로는 '에이레네'---공동체적이고 종교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제(和睦祭), 사람과의 화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하면 헬라식 인사와 히브리식 축복이 합쳐진 표현입니다.
바울은 이 축복의 근원을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3절)"---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동격시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론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를 통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를 통하여 복이 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듯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삼위일체의 교리가 여기에 나타납니다. 복의 근원으로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함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을 설명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4-5절)."---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목적이 무엇이냐, 건지시려고--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그 목적이 이에 있습니다. 악한 세대, 마귀가 다스리는 세대로부터 건지심 받기 위함입니다.
죄가 다스리는 세대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함입니다.
구원이란 건짐 받는다, 즉 자유의 구원이라고 풀이됩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건짐 받는 것과 같습니다. 루터가 말했듯이 죄와 사망과 사단과 율법과 진노로부터, 죄와 사망과 사단의 역사로부터 건짐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나 스스로 건짐 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물에 빠져 떠내려가고 있는 사람이 제 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고 물에서 건져집니까? 스스로 아무리 위로 잡아 당겨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밖에서 줄을 던져줘야만 합니다. 누가 밖에서 손을 내밀어줘야 합니다.
이와 같이 내가 나를 스스로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아무리 도를 닦고, 수양을 하고, 극기를 하고, 고행을 하고, 공로를 세우고, 별 짓을 다한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나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요한 주제입니다. 한마디로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구원의 의미가 설명됩니다.
말씀 중에 "우리 죄를 위하여"라고 합니다. 구원의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문제의 해결 방법이 무엇입니까?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주면 되겠습니까? 병든 사람으로 건강을 되찾게 하면 되겠습니까? 신분이 낮은 사람을 높여주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한다고 해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등으로 되는 것도 아니요 정치구조를 개편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기본개념은 죄로부터 출발합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 중에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형식의 문제가 아니요,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죄로부터 구원한다---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의 개념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개인의 인격, 가정, 사회, 국가가 다 구원받습니다. 죄 문제의 해결이 없는 한 절대로 구원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오셨습니다. 우리 죄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러면 구원의 방법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할 때, 그 방법이 무엇이었습니까?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자기 희생이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부자로 만드는 것, 병을 고쳐주는 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희생이 구원의 방법이 됩니다. 심지어 가르친다고 하여 되는 문제도 아닙니다. 실제로 많은 교육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고등학교 선생님, 심지어 서울대학교 교수님들 중에서도 뒤늦게 신학을 공부하겠다고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구두 시험할 때에 물어봅니다. "평생동안 교단에 서서 훌륭한 일을 해오셨는데 새삼 신학공부를 하시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르치고 공부하고, 아무리 그렇게 해보아도 부족한 것이 있습니다. 실망만이 남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신학공부를 해서 복음을 전할까 합니다. 가르치는 것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하십시다. 참된 구원의 길은 자기 희생에서 옵니다. 이렇게 인도하고 저렇게 가르치고, 이렇게 하면 되겠지, 저렇게 하면 되겠지---이렇게 저렇게 다 해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직 복음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자기 몸을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사건----이 자기 희생을 통해서만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로 해서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세상의 어떤 인간의 이름으로도 구원 얻을 길이 없습니다. 복음 말고 다른 길은 없습니다. '돈토스 헤아우톤'---자기 몸을 드리셨다는 말입니다. 자기 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완전히 주심으로, 제물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것을 믿고, 그 뜻을 알고 따를 때에 죄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죄 문제의 해결이 있을 때에 진정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구원의 진수(眞髓)를 설명하면서 사도 바울은 다시 감격해서 말합니다.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이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주님의 그 길이야말로 구원이요,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요, 오직 하나의 길이었음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당연히 우리는 일생을 두고두고 한없이 끝없이 이것을 찬양할 것입니다. 임종맞은 사람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이 한마디 말이 아니고는 다른 어떤 위로도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 한마디가 구원의 희망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구원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느 집사님의 안내로 그의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병원에를 갔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예수를 믿지 않을 뿐더러 예수 믿는 것을 핍박까지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곧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아버지를 아들된 입장에서 마지막 가는 길에라도 구원해보고자 하는 것이 그 집사님의 충정이었습니다. 병실 문 앞에서 집사님은 침통한 얼굴로 망설입니다. "목사님, 아버님께서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면 더 좋을 것이 없지만 행여라도 목사님께 욕이라도 하며 나가라고 소리지르면 어떡하지요?"하고 걱정이 태산입니다. 절박한 시간의 답답한 심경이 그 표정에 안타까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욕을 듣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분이 영원히 구원받지 못하게 되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목사님, 한번 더 기도하고 들어가십시다." "그럽시다." 함께 기도를 하고 서슴없이 병실 문을 열었습니다. 저는 환자를 보자마자 거두절미하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집사님은 눈이 휘둥그래집니다. 제가 점잖게 인사를 나누고 따뜻한 말로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상식적인 위로의 말로 듣기 좋게 시작할 줄로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때였습니다.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분명히 집사님의 아버지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싱겁다 싶을 만큼 일이 쉽게 풀리고 말았습니다. 뒷날 그 집사님이 제게 농담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큰일났다 싶었습니다. 느닷없이 왜 거기서부터 시작하셨습니까?" "사태가 급하니까요. 여유가 없지요.
인사를 차리고 격식을 찾고, 그럴 틈이 어디 있습니까? 그 순간에는 예수님의 십자가 말고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죽어 가는 자에게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금덩이도 필요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날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믿음만이 구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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