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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그 두 사이에 있는 삶(빌1장 22절~26절)

by 【고동엽】 2022.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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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두 사이에 있는 삶(빌12226)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함이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기본적인 본능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말로는 이 두 가지가 인간의 가장 뿌리깊은 본능인데, 그 하나는 살고 싶은 본능이요 그 둘은 죽고 싶은 본능이라고 합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옛것을 동경하는 마음, 쉬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이다 죽고 싶은 본능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본능은 하나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본능은 우리의 언어 습관에도 쉽게 나타납니다. '슬퍼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좋아 죽겠다' -- 이런 버릇은 우리 나라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도 '산다' '죽는다'는 소리가 일상의 언어에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생래적으로 걱정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걱정을 심리학적으로 깊이 추적해 올라가 보면 그 종류가 많은 것 같으나 실은 딱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죽을까하는 걱정이요 또 하나는 죄로 말미암은 걱정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둘도 결국 하나로 합쳐진다고 합니다. 죄가 없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본인이 믿건 안 믿건'만일 지옥이 있다면 틀림없이 내가 거기 갈 것'이라고 느끼는 데서 연유한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학자요 무신론자인 볼테르(Voltaire)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 내 생명이 6개월만 연장된다면 나는 내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의 절반을 내놓겠소. 나는 이제 그만 두렵고 떨리는 지옥으로 가게 되었소. 당신도 가게 될는지 모르오."

그리고 임종 때에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리스도여, 나를 도와주소서."

평생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지만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버림을 받고 끝장에 이르러 시간이 없을 때에 이렇게 부르짖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에게 있어 죽음이란 가장 심각한 고민입니다. 죄가 문제되는 것도 죽음 대문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밝혀졌듯이 인간 내면의 심층에서 죄가 지옥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과 죄로 인한 고민이 사람의 마음을 그토록 짓누르게 하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회의론자 토마스 홉즈(Thomas Hobbes)는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 하루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 나는 내 앞에 다가오고 있는 저 세상이 무섭다.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나 마지막 이 어두움 속으로 그냥 덥석 뛰어들어가는 것 같다."

이 죽음의 문제와 죄의 문제가 함께 엉켜서,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살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죄 문제를 고민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죽음과 죄, 이 두 가지를 떼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정말로 깨끗하게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이것의 해결이 없이는 어떤 일로도 그에게 기쁨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도 결혼 주례를 두 번 섰습니다. 주례를 볼 때마다 저는 신랑 신부에게 예수 잘 믿고 신앙대로 살라고 당부합니다. 행복의 기본은 사랑에 있는 것이요, 돈과 명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줍니다. 과연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결혼했다고 행복합니까? 돈이 많다고 행복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면 행복합니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죽음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예수 믿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도 이것 때문입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 맨 밑바닥에 깔린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이 두 가지 걱정이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다 해결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좀 웨슬리(John Wesley)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만일 내일 밤 12시에 죽는다고 한다면 오늘 무슨 준비를 하겠습니까?" 이것은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웨슬리는 대답했습니다. "글쎄, 따로이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요? 날마다 준비하고 있는데 새삼 무엇을 준비하겠습니까? 평상시같이 사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밤 12시에 죽는다면 그 이튿날 새벽에는 천국에서 눈을 뜨게 되겠지요." 내일 죽든 오늘 죽든 별다른 준비를 할 것이 없는 사람, 그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른 신앙 생활입니다. 매일 매시간 깨끗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생의 출발이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을 잡아 가두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할 사람이 은혜로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생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그의 참된 생은 다메섹에서 시작된 것이지 길리기아 다소에서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의 제자로, 전파하는 자로, 그렇게 그리스도만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평생은 그렇게 사는 과정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오래 그리워하던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찬송가 162장 가사에도 있듯이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립고 보고 싶어하다가 몸도 마음도 단장하고 예수님 앞에 다가서는 그런 모습입니다.

저는 한 30년간 결혼 주례를 해 왔습니다. 옛날에는 결혼식장에 두 사람을 세워놓으면 신랑 신부가 벌벌 떨었습니다. 반지를 끼워 주다 당황해서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달라요. 반지가 잘 안 들어가면 신랑이 침까지 발라서 끼워 줍니다. 둘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감상할 만합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 이것이 신랑 신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죽음이란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는 것과도 같다고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주님 만나는데 얼마나 좋으랴" "하루라도 더 빨리 가면 좋지." 그렇게 미래지향적인 마음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더울 때에 결혼 주례를 하노라면 저는 '좀 참았다 가을에 하지'하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뭐가 그리 급한지 이 더운데 하겠다고 합니다. 주례를 해줄 수 밖에요. 선선할 때 하면 좋을 것 같으나 이것은 제삼자의 마음이고 당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함께 있고 싶어서 이렇게 서두릅니다. 바울이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런 마음입니다. 바울에게는 죽음의 순간이 곧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7절에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골인점에 들어가는 순간 예수님이 "너 왔구나"하고 맞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골인점에서 면류관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막 달려가 거기에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죽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을 때에 내 옆에 누가 있어 주느냐, 상주가 몇 명이냐, 장례식이 제대로 될 것이냐 따위는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괜찮습니다. 바울에게는 모든 것이 주님 앞에 가는 것으로 꽉 차 있을 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죽음을 아주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절에서는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만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도 두 사이에서 고민한다고 했습니다. 23절에서 "두 사이에 끼였으니"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헬라어로"쉬네코마이"로 양쪽에 큰 장벽이 있는 골짜기를 지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두 사이, 두 절벽 골짜기 사이에 끼였다는 말입니다. 끼여서 가고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I have no choice.),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죽고 사는 데 대한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원은 있습니다. 살아야겠다, 죽어야겠다는 소원은 있으나 적어도 믿는 사람에게는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어느 시간에 죽느냐 하는 것에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가든지 주님의 뜻대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 사람이 차 사고로 죽고, 병으로 죽고, 이래저래 세상 떠나는 모습을 보며 '아 그분 참 안됐다'고 동정합니다. 그러면 저는 농담삼아 "당신은 하나님께 이러이러한 모양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런 모습으로 죽게 해주세요"라고 평생을 통해 부지런히 기도해도 들어주실 지 말지 모르는데 하물며 한마디의 기도도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그냥 알아서 그 방법을 정하실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어떤 권사님은 식사 때에도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따뜻한 봄날에 데려가 주십시오." 장례식 하는 사람들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겨울에 가면 고생할 것 아닙니까? 어머니의 기도를 듣고서 그 자녀들이 "어머니, 식사 때에 왜 그런 기도를 하십니까?" 하면 "나는 이제 아무 소원도 없다. 너희들 예수 잘 믿고 다 잘되니 더 바랄 것이 무엇이냐?"고 하더니 정말 따뜻한 봄날에 가셨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올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것까지는 기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두 사이에 끼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떠나서'란 말은 헬라어로 아날뤼에인으로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가 천막을 걷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해변에 가서 캠프 생활을 하다가 끝나면 천막을 척 걷어서 둘러메고 차에 실은 다음 집으로 옵니다. 천막을 걷는다는 것은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집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 학생이 방학이 되어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의 시골집에 다니러 왔습니다. 며칠 지내더니 그 아이가 아버지에게 "이제 캠프 그만하고 집에 가요." 하더랍니다. 미국에 살다 한국의 시골에 와 보니 꼭 캠프 생활 같았던 모양입니다. 캠프 생활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천막을 걷는다는 것은 죽음이요, 떠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닻을 감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배를 많이 타 보신 분은 알겠지만 배가 정박할 때에는 닻을 내립니다. 닻을 내리고 기다리다가 떠날 때가되면 닻을 끌어올립니다. 이 닻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그 다음 목적지로 간다는 뜻입니다. 일이 끝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닻을 감아 올리면 이제는 출발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이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 육신의 장막을 걷어 버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집으로 들어갑니다. 또 오랫동안 이 세상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 닻을 걷어 버리고,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고 약속이 있는 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떠난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빨리 떠나 오래 기다리고 바라던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과 함께 살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욕망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꼭 이루실 것이 아닙니까? 일단 이쯤 해 두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좀 살아야겠는데, 사는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이 유익하다는 단어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더 좋다'는 헬라어로 크레이손으로 좋은 것의 비교급이요 영어의 the better입니다. 그리고 이 '유익하다'는 아낭카이오테론으로 필요하다(more necessary) 는 의미도 있는데 이것이 본문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유익하다는 말보다 필요하다는 말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다는 말은 감정적이요 필요하다는 말은 의지적입니다. 사람이 좋은 것은 가슴으로 받고 필요한 것은 머리로 받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탕은 달콤하여 입에는 좋은 것이나 유익하지 않습니다. 약은 입에 쓰나 몸에는 유익합니다. 건강식품들이 입에는 좋지 않게 느껴지나 몸에 유익합니다. 그래서 영어의wantneed는 다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좋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선택할 때는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골라야 합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것은 유익합니다. 그러나 일어날 때마다 피곤하니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자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든지 보다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선택합니다.

본문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는 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좋으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세상에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돈을 번다든가 잘산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령한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세상에는 이와 반대로, 살기는 사는데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퇴보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예수 믿던 사람도 안 믿게 되고, 잘 믿던 사람도 신앙이 황폐해집니다. 그렇게 사는 생은 부끄러운 생이요 살지 말아야 할 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은 못 주고 근심을 줍니다.

많은 걱정을 끼칩니다. 이런 사람은 부모, 형제, 자매와 사회에 큰 걱정거리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생이요 문제가 있는 생입니다.

그러면 어떤 생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자신의 기쁨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다른 사람의 믿음 성장에 이바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의 믿음을 더 온전케 하는 유익한 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만나면 살맛이 납니다.

우리는 남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집사님 아들이 강원대학에 입학했다고 그 어머니가 너무 좋아합니다. 그것을 보고 옆의 사람이 하는 말이 "남들은 서울대학도 가는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비꼽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당신은 아들도 없는 주제에 웬 간섭이냐"고 맞받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쁨을 더 크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슬픔은 반으로 줄어들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조금 울적하다가도 이런 사람만 만나면 어느새 슬픈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슬픈 마음에다 설상가상으로 화만 돋우고 고요한 마음에 오히려 돌을 던집니다.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은 돈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여집사님들 가운데 몇 사람은 만날 때마다 웃고 다닙니다. 잘 웃어서 그런지 몸이 몹시 뚱뚱하기도 합니다. 싱글벙글 웃고 다니는 것은 돈 안 들/이고 하는 봉사입니다. 제발 울상 짓고 다니지는 맙시다. 그 정도면 행복할 터인데 왜 그리 궁상맞게 삽니까?

이제 26절에서 바울은 나를 인하여 너희 자랑이 풍성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엄청난 말씀을 합니다. 자랑은 헬라어로 카우케마 입니다. 가만히 보면 내 자랑에 급급해서 남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남의 자랑을 빼앗아 자기 자랑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남의 자랑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그가 사는 것이며, 자기는 어떤 부끄러움을 당해도 좋다고 합니다. 가장 큰 봉사는 남에게 자랑의 요소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돈 몇 푼으로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봉사는 상대방의 명예에 보탬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도와준답시고 그 사람을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하고 그 사람을 꽉 눌러 버려서 아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름지기 상대방의 기분, 명예, 자랑을 높이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나의 봉사, 수고, 희생을 통해 너희 자랑이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고차원적인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을까요? 내가 희생해서 남편이 자랑스럽게 되고 내가 수고해서 아내의 자랑이 되고, 내가 좀 더 수고해서 자녀들의 자랑이 될 수는 없을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813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유익이 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 했고 919절에서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찬송가 355장 가사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영광은 주님이 받고, 또 다른 사람이 받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이 사도 바울의 생의 철학이었습니다. 바스커 빌(BaskerBill)의 신앙적 간증이 있습니다. 그는 일주일의 생활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행복한 월요일

복된 화요일

즐거운 수요일

유쾌한 목요일

좋은 금요일

영광스런 토요일

하늘의 기쁨이 넘치는 일요일

일주일 내내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직도 문제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생의 의미와 생의 문제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풀이해 놓고, 목적이 분명하고, 명분이 분명하고, 철학이 분명한 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 때에 하루하루 사는 것이 천국이요 매일매일 사는 것이 큰 보람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높은 생의 철학이 또한 우리에게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두 사이에 있는 삶(12226)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함이라.

 

 

인생에 있어서 가장 귀중한 기본적인 본능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심리학자들의 말로는 이 두 가지가 인간의 가장 뿌리깊은 본능인데, 그 하나는 살고 싶은 본능이요 그 둘은 죽고 싶은 본능이라고 합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옛것을 동경하는 마음, 쉬고 싶은 마음 같은 것이다 죽고 싶은 본능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두 본능은 하나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본능은 우리의 언어 습관에도 쉽게 나타납니다. '슬퍼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좋아 죽겠다' -- 이런 버릇은 우리 나라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도 '산다' '죽는다'는 소리가 일상의 언어에 습관적으로 나타납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사람은 생래적으로 걱정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걱정을 심리학적으로 깊이 추적해 올라가 보면 그 종류가 많은 것 같으나 실은 딱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죽을까하는 걱정이요 또 하나는 죄로 말미암은 걱정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둘도 결국 하나로 합쳐진다고 합니다. 죄가 없으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본인이 믿건 안 믿건'만일 지옥이 있다면 틀림없이 내가 거기 갈 것'이라고 느끼는 데서 연유한다고 합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학자요 무신론자인 볼테르(Voltaire)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소. 내 생명이 6개월만 연장된다면 나는 내게 있어서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되는 것들의 절반을 내놓겠소. 나는 이제 그만 두렵고 떨리는 지옥으로 가게 되었소. 당신도 가게 될는지 모르오."

그리고 임종 때에는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리스도여, 나를 도와주소서."

평생 하나님을 믿지 않던 사람이지만 하나님과 사람에게 다 버림을 받고 끝장에 이르러 시간이 없을 때에 이렇게 부르짖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사람에게 있어 죽음이란 가장 심각한 고민입니다. 죄가 문제되는 것도 죽음 대문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밝혀졌듯이 인간 내면의 심층에서 죄가 지옥으로 연결되었다는 느낌과 죄로 인한 고민이 사람의 마음을 그토록 짓누르게 하고,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영국의 회의론자 토마스 홉즈(Thomas Hobbes)는 그의 일생을 마감하는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탄식하고 있습니다. ", 하루만이라도 더 살고 싶다. 나는 내 앞에 다가오고 있는 저 세상이 무섭다. 저 세상을 조금이라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나 마지막 이 어두움 속으로 그냥 덥석 뛰어들어가는 것 같다."

이 죽음의 문제와 죄의 문제가 함께 엉켜서, 우리는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살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죄 문제를 고민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명랑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죽음과 죄, 이 두 가지를 떼어버리는 데 있습니다. 정말로 깨끗하게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이것의 해결이 없이는 어떤 일로도 그에게 기쁨이 없습니다. 저는 오늘도 결혼 주례를 두 번 섰습니다. 주례를 볼 때마다 저는 신랑 신부에게 예수 잘 믿고 신앙대로 살라고 당부합니다. 행복의 기본은 사랑에 있는 것이요, 돈과 명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 줍니다. 과연 진정한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결혼했다고 행복합니까? 돈이 많다고 행복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면 행복합니까? 가장 근본적인 것은 죽음과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예수 믿는 것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목적도 이것 때문입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 맨 밑바닥에 깔린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이 두 가지 걱정이 문제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다 해결한 대표적 인물입니다.

그는 여기에서 완전히 자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좀 웨슬리(John Wesley)에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당신이 만일 내일 밤 12시에 죽는다고 한다면 오늘 무슨 준비를 하겠습니까?" 이것은 우리들 스스로에게도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웨슬리는 대답했습니다. "글쎄, 따로이 무슨 준비가 필요할까요? 날마다 준비하고 있는데 새삼 무엇을 준비하겠습니까? 평상시같이 사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밤 12시에 죽는다면 그 이튿날 새벽에는 천국에서 눈을 뜨게 되겠지요." 내일 죽든 오늘 죽든 별다른 준비를 할 것이 없는 사람, 그가 바로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른 신앙 생활입니다. 매일 매시간 깨끗하게 준비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사는 것 자체가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생의 출발이 그리스도였기 때문입니다. 본래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을 잡아 가두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주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할 사람이 은혜로 부름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됩니다. 여기서부터 그의 생이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그의 참된 생은 다메섹에서 시작된 것이지 길리기아 다소에서가 아닙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의 제자로, 전파하는 자로, 그렇게 그리스도만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평생은 그렇게 사는 과정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죽음이라는 것이 오래 그리워하던 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찬송가 162장 가사에도 있듯이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립고 보고 싶어하다가 몸도 마음도 단장하고 예수님 앞에 다가서는 그런 모습입니다.

저는 한 30년간 결혼 주례를 해 왔습니다. 옛날에는 결혼식장에 두 사람을 세워놓으면 신랑 신부가 벌벌 떨었습니다. 반지를 끼워 주다 당황해서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달라요. 반지가 잘 안 들어가면 신랑이 침까지 발라서 끼워 줍니다. 둘이서 얼마나 좋아하는지 감상할 만합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 이것이 신랑 신부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죽음이란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는 것과도 같다고 바울은 생각했습니다. "주님 만나는데 얼마나 좋으랴" "하루라도 더 빨리 가면 좋지." 그렇게 미래지향적인 마음으로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요즘처럼 더울 때에 결혼 주례를 하노라면 저는 '좀 참았다 가을에 하지'하고 속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뭐가 그리 급한지 이 더운데 하겠다고 합니다. 주례를 해줄 수 밖에요. 선선할 때 하면 좋을 것 같으나 이것은 제삼자의 마음이고 당자들은 하루라도 빨리 함께 있고 싶어서 이렇게 서두릅니다. 바울이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이 이런 마음입니다. 바울에게는 죽음의 순간이 곧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디모데후서 47절에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지막 골인점에 들어가는 순간 예수님이 "너 왔구나"하고 맞아주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골인점에서 면류관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십니다. 막 달려가 거기에 뛰어 들어가는 모습을 죽음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을 때에 내 옆에 누가 있어 주느냐, 상주가 몇 명이냐, 장례식이 제대로 될 것이냐 따위는 알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이렇게 죽든 저렇게 죽든 괜찮습니다. 바울에게는 모든 것이 주님 앞에 가는 것으로 꽉 차 있을 뿐입니다.

본문을 보면 바울은 죽음을 아주 간단하게 생각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4절에서는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만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도 두 사이에서 고민한다고 했습니다. 23절에서 "두 사이에 끼였으니"라고 말씀하는데, 이것은 헬라어로"쉬네코마이"로 양쪽에 큰 장벽이 있는 골짜기를 지나는 모습을 나타냅니다. 두 사이, 두 절벽 골짜기 사이에 끼였다는 말입니다. 끼여서 가고 있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I have no choice.), 이 길로 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나에게 죽고 사는 데 대한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러나 소원은 있습니다. 살아야겠다, 죽어야겠다는 소원은 있으나 적어도 믿는 사람에게는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어느 시간에 죽느냐 하는 것에는 선택권이 없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가든지 주님의 뜻대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위 사람이 차 사고로 죽고, 병으로 죽고, 이래저래 세상 떠나는 모습을 보며 '아 그분 참 안됐다'고 동정합니다. 그러면 저는 농담삼아 "당신은 하나님께 이러이러한 모양으로 가게 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해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이런 모습으로 죽게 해주세요"라고 평생을 통해 부지런히 기도해도 들어주실 지 말지 모르는데 하물며 한마디의 기도도 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그냥 알아서 그 방법을 정하실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어떤 권사님은 식사 때에도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따뜻한 봄날에 데려가 주십시오." 장례식 하는 사람들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겨울에 가면 고생할 것 아닙니까? 어머니의 기도를 듣고서 그 자녀들이 "어머니, 식사 때에 왜 그런 기도를 하십니까?" 하면 "나는 이제 아무 소원도 없다. 너희들 예수 잘 믿고 다 잘되니 더 바랄 것이 무엇이냐?"고 하더니 정말 따뜻한 봄날에 가셨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올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것까지는 기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두 사이에 끼였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떠나서'란 말은 헬라어로 아날뤼에인으로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가 천막을 걷는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해변에 가서 캠프 생활을 하다가 끝나면 천막을 척 걷어서 둘러메고 차에 실은 다음 집으로 옵니다. 천막을 걷는다는 것은 끝났다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집으로 간다는 뜻입니다. 미국에 사는 교포 학생이 방학이 되어 한국에 계신 할아버지의 시골집에 다니러 왔습니다. 며칠 지내더니 그 아이가 아버지에게 "이제 캠프 그만하고 집에 가요." 하더랍니다. 미국에 살다 한국의 시골에 와 보니 꼭 캠프 생활 같았던 모양입니다. 캠프 생활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천막을 걷는다는 것은 죽음이요, 떠난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닻을 감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배를 많이 타 보신 분은 알겠지만 배가 정박할 때에는 닻을 내립니다. 닻을 내리고 기다리다가 떠날 때가되면 닻을 끌어올립니다. 이 닻을 끌어올린다는 것은 그 다음 목적지로 간다는 뜻입니다. 일이 끝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닻을 감아 올리면 이제는 출발입니다. 영원한 세계를 향하여, 이것이 곧 죽음입니다. 이 육신의 장막을 걷어 버리고 하나님이 지으신 집으로 들어갑니다. 또 오랫동안 이 세상에 정박하고 있었는데 이 닻을 걷어 버리고,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고 약속이 있는 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떠난다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빨리 떠나 오래 기다리고 바라던 하늘나라에 가서 주님과 함께 살면 좋겠다는 욕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욕망을 고집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꼭 이루실 것이 아닙니까? 일단 이쯤 해 두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 좀 살아야겠는데, 사는 것이 유익하다고 합니다. 이 유익하다는 단어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더 좋다'는 헬라어로 크레이손으로 좋은 것의 비교급이요 영어의 the better입니다. 그리고 이 '유익하다'는 아낭카이오테론으로 필요하다(more necessary) 는 의미도 있는데 이것이 본문의 뜻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유익하다는 말보다 필요하다는 말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다는 말은 감정적이요 필요하다는 말은 의지적입니다. 사람이 좋은 것은 가슴으로 받고 필요한 것은 머리로 받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탕은 달콤하여 입에는 좋은 것이나 유익하지 않습니다. 약은 입에 쓰나 몸에는 유익합니다. 건강식품들이 입에는 좋지 않게 느껴지나 몸에 유익합니다. 그래서 영어의wantneed는 다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좋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선택할 때는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골라야 합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것은 유익합니다. 그러나 일어날 때마다 피곤하니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자 어느 쪽을 택하겠습니까? 지혜로운 사람은 언제든지 보다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선택합니다.

본문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는 어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좋으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세상에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돈을 번다든가 잘산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신령한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세상에는 이와 반대로, 살기는 사는데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퇴보시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 예수 믿던 사람도 안 믿게 되고, 잘 믿던 사람도 신앙이 황폐해집니다. 그렇게 사는 생은 부끄러운 생이요 살지 말아야 할 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은 못 주고 근심을 줍니다.

많은 걱정을 끼칩니다. 이런 사람은 부모, 형제, 자매와 사회에 큰 걱정거리입니다. 참으로 불행한 생이요 문제가 있는 생입니다.

그러면 어떤 생의 철학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자신의 기쁨과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 없는 사람에게 믿음을 주고, 다른 사람의 믿음 성장에 이바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남의 믿음을 더 온전케 하는 유익한 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만나면 살맛이 납니다.

우리는 남이 기뻐할 때 함께 기뻐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어느 집사님 아들이 강원대학에 입학했다고 그 어머니가 너무 좋아합니다. 그것을 보고 옆의 사람이 하는 말이 "남들은 서울대학도 가는데 그게 뭐 그리 대단하냐?"고 비꼽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당신은 아들도 없는 주제에 웬 간섭이냐"고 맞받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쁨을 더 크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슬픔은 반으로 줄어들게 해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조금 울적하다가도 이런 사람만 만나면 어느새 슬픈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슬픈 마음에다 설상가상으로 화만 돋우고 고요한 마음에 오히려 돌을 던집니다.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은 돈 가지고 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교회 여집사님들 가운데 몇 사람은 만날 때마다 웃고 다닙니다. 잘 웃어서 그런지 몸이 몹시 뚱뚱하기도 합니다. 싱글벙글 웃고 다니는 것은 돈 안 들/이고 하는 봉사입니다. 제발 울상 짓고 다니지는 맙시다. 그 정도면 행복할 터인데 왜 그리 궁상맞게 삽니까?

이제 26절에서 바울은 나를 인하여 너희 자랑이 풍성하게 되기를 바란다는 엄청난 말씀을 합니다. 자랑은 헬라어로 카우케마 입니다. 가만히 보면 내 자랑에 급급해서 남을 부끄럽게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남의 자랑을 빼앗아 자기 자랑 만들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남의 자랑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그가 사는 것이며, 자기는 어떤 부끄러움을 당해도 좋다고 합니다. 가장 큰 봉사는 남에게 자랑의 요소를 제공해 주는 것입니다. 돈 몇 푼으로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장 높은 차원의 봉사는 상대방의 명예에 보탬을 주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도와준답시고 그 사람을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하고 그 사람을 꽉 눌러 버려서 아주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름지기 상대방의 기분, 명예, 자랑을 높이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은 나의 봉사, 수고, 희생을 통해 너희 자랑이 풍성해지기를 바라는 고차원적인 소원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을까요? 내가 희생해서 남편이 자랑스럽게 되고 내가 수고해서 아내의 자랑이 되고, 내가 좀 더 수고해서 자녀들의 자랑이 될 수는 없을까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813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유익이 된다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 했고 919절에서는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 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찬송가 355장 가사처럼 '이름 없이 빛도 없이'영광은 주님이 받고, 또 다른 사람이 받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가짐이 사도 바울의 생의 철학이었습니다. 바스커 빌(BaskerBill)의 신앙적 간증이 있습니다. 그는 일주일의 생활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행복한 월요일

복된 화요일

즐거운 수요일

유쾌한 목요일

좋은 금요일

영광스런 토요일

하늘의 기쁨이 넘치는 일요일

일주일 내내 좋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아직도 문제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생의 의미와 생의 문제의 원리를 근본적으로 풀이해 놓고, 목적이 분명하고, 명분이 분명하고, 철학이 분명한 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살 때에 하루하루 사는 것이 천국이요 매일매일 사는 것이 큰 보람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도 바울의 높은 생의 철학이 또한 우리에게 함께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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