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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에 빠진 양(마태복음 12 : 10 - 13)
「한편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물을 가로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마태 복음 12장은 마태복음 중에서도 특별히 안식일에 대한 문제를 취급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그 내용상의 특징을 보면 예수님의 안식일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본래적인 해석에 의해 유대 사람들이 잘못 지키고 있는 안식일에 대한 그 위선을 비판하는 말씀으로 일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회만 있으면 문제 삼고자 하는 안식일의 시비에 대해 바른 대답을 주신 귀중한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율법주의, 즉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러한 율법주의에 빠졌던 경험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신학적인 측면에서 우리의 사상적인 배경을 보노라면 거기에는 유교적인 사상이 다분히 자리하고 있으며, 그것은 또한 은연중에 율법주의적 방법론을 동반하고 있어서 거기로부터 비롯되는 율법주의적 성향과 자세가 우리의 의식 구조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당시의 율법자들이 범하고 있는 위선과 외식을 비판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깊이 이해하는 가운데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함을 물론 우리의 온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이러한 외식주의에 빠지거나 젖어들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그 배경을 살펴보면 12장 서두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나 오늘이나 자식을 잘못 두면 부모가 망신을 당하고, 제자를 잘못 두면 선생님이 고달픕니다. 저는 여기에서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이 제자들이 시원치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면서 그 밀 이삭 하나 비벼 먹었다고 하여 시장기를 끌 것도 아니고 굶어 죽을 사람이 살 것도 아닐텐데 그것을 왜 생각 없이 비벼 먹어서는 예수님의 입장까지 곤란하게 만들었나 하는 그런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이 제자들이 시원치 않아서 예수님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어 드렸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안식일에 저지른 일입니다. 지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까다롭게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한편으로는 배우기도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예수님을 책잡아 시비를 벌이고 송사를 하고자 잔뜩 눈에 불을 켠 채 쫓아다니고 있는 터에 어쩌자고 이런 멍청한 짓을 하겠습니까? 그저 아무런 생각도 없이 시장한 본능에서 밀 이삭을 잘라 비벼서는 그냥 입에다 넣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것은 타작을 한 것이란 말입니다. 이제 바리새교인들은 이것을 트집잡아 왜 안식일에 타작을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12:2)라며 시비를 벌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시비를 벌이는 사람도 나쁘지만 시비를 당하는 사람도 시원치 않는 것입니다. 아무튼 이렇게 문제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다닐 때에 있었던 일을 들어 설명하시므로 이 일에 답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뜻 생각하면 이러한 내용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대답은 마치 대답을 위한 대답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은 왜냐 하면, 다윗 왕에게 있었던 일은 사울 왕을 피해 도망을 치는 신세로 사흘길이나 굶주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 되어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찾아갔을 때에 제사장으로서도 달리 줄 것이 없자 생각다 못해 성전에 들어가서는 하나님께 제사 드렸던 거룩한 떡인 진설병을 주어 먹게한 것으로 이것은 본래 제사장 외에는 어떠한 경우도 절대 먹어서는 아니 되는 떡입니다. 그런데 이 떡을 제사장은 주었고 다윗은 그와 함께 하는 자들과 더불어 먹었으나 무사하였던 것입니다. 그 진설병은 제사장 외의 다른 사람이 먹게 되면 죽는 것이어서 그렇게 하고서는 결코 무사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의 일행이 그것을 먹고도 무사하지 않았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심으로 진정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다면"이라고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형식적이요, 외식적으로 지키는 그런 율법이 아니라 바로 자비임을 강조하시면서 저들의 시비에 답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제 예를 드신 다윗 일행의 상황과 예수님의 제자들의 상황과는 그 비교상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 일행은 사흘이나 굶어 정말 죽은 지경이 된 처지에서 먹었으니 용서받을 만도 하거니와 당시 저들의 심정으로 돌아가 생각을 해본다면 두렵고 경건한 마음으로 용서를 빌며 참으로 죄송한 마음으로 먹었을 것이 아니겠느냐 할 때, 그렇다면 용서받을 만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은 것은 굶어서 죽을 지경이 된 것도 아니고 특별히 경건한 마음을 가진 것도 없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른 일이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상황을 엄격히 비교한다면 동일한 의미로 처리 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는 자비이니 그런 형식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으로 이 말씀을 들어 답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권위 있고 지혜로운 예수님의 대답 앞에 저들 바리새인들은 다시 공격적인 대답으로 응수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어디 두고 보자"는 심사로 언젠가는 반드시 문제로 삼으리라는 생각으로 잔뜩 벼르고 있는 중입니다. 이제 그 기회가 왔습니다. 안식일이 되어 모두들 예배를 드리기 위해 회상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 보니 한편 손 마른 사람, 요즈음 말하는 소아마비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한편 손이 말라 시들어진 신체 장애자 한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는 순간 저들은 적어도 두 가지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 하나는 예수라는 이는 저렇게 불쌍한 사람을 보고는 그냥 참지 못하는 분이니 분명히 이제 고쳐 줄 것이라는 생각이고 두 번째 생각은 당장 생명에 관계되는 화급한 병도 아닌데 이 하루를 못 참아 굳이 안식일을 범해 가면서까지 고쳐야 하느냐는 생각입니다. 이에 누가 복음 13장 10절 이하에도 보면 18년 동안이나 귀신이 들려 앓고 꼬부라진 한 여인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고쳐 주셨다 하여 회당장이 분을 내어하는 말이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여기에서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이 사건을 놓고 예수님을 송사하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 묻는 말이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것입니다. 병을 고친다는 자체는 선한 일이니까 치유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어요. 그러나 그 날이 안식일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며 게다가 지금 말은 안하고 있지만 이 병은 급한 병도 아니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여 지금 예수님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이 문제 자체를 놓고 이야기를 하게 되면 시비가 벌어지고 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그 문제 자체를 이야기하시지 않고 한 비유를 들어서 말씀하셨으니 바로 여기에 비유의 좋은 점이 있고 중요함이 있는 것입니다. 저들은 지금 낡은 율법적인 지식과 습관화된 고정관념에 붙들린 규례에 따라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데"하는 생각이 앞서고 보니 병을 고친다는 문제에까지도 시비를 하게 된 것입니다. 이들은 무엇이 먼저요, 무엇이 중요한가를 지금 잊어버리고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시간에 저들과 함께 문제를 두고 말싸움을 벌이려 들이지 않고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만약 이 문제를 직접 놓고 따지기를 시작한다면 안식일이 아닌 날이 엿새나 따로 있는데, 내일 고쳐 주면 되지 않는가 등 여러 가지 문제가 나옵니다. 그러나 이렇게 비유를 들어 말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 마디로 말하면 시비를 피하는 것이요, 그러면서도 근본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 자체를 놓고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논쟁을 벌이지 않으시려 합니다. 세상에 변론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습니다. 이것은 끝이 없는 말놀림이요, 마침내는 자기 감정, 자기 체면의 개입으로 사건 자체에 대한 객관적 안목이나 객관적 비판력이 완전히 흐려져 버리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냉정을 되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사건 자체를 논하는 대신 한번 돌리시어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론으로 싸우자는 것을 이론으로 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습니다. 이론은 이론으로 끝내지를 못합니다. 왜냐 하면, 이 세상 어떤 이론이든지 모순과 함정이 없는 이론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이렇게 질문하면 저렇게 답할 수가 있고, 또 저런 면으로 논리를 전개하게 되면 이런 면으로 도전해 올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이론적인 공박이란 끝없이 이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결론은 어떻게 지을 수 있는가 할 때에 그것은 곧 실제 문제를 대두시킴으로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가 옳으냐, 민주주의가 옳으냐? 하는 문제를 두고 이론적으로 생각하자면 두고두고 말이 많습니다. 공산주의에도 훌륭하고 옳은 점이 있는가 하면 민주주의에도 잘못된 것이 있는 것이기에 말로, 이론으로 하자면 얼마든지 서로를 공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나타난 실제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더는 부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어느 외교관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제 외교관으로서 공산권내의 사람들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경우 저들이 시비를 걸더라도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때에 저들과 말싸움을 벌여 어떤 놀라운 이론을 설명한다고 하여도 저들이 "당신들이 그 민주주의가 역시 옳소!"하고 나올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비를 벌인다 해서 절대로 그 시비에 말려들어 혈전을 벌이거나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딱 한 마디 "공산주의자는 세계 어디를 보아도 다 가난하오" 그렇게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저들이 이쪽을 가리켜 하는 말이 "너희는 계급차도 많고 빈부의 차도 너무 심하다"고 한다는 것이지요. 그 말에는 또 농담조로 "그런데 우리 가난한 사람이 너희 부자보다 나으니 어쩌면 좋으냐?"고 대답을 해버리고 만답니다. 이론이야 어떻게 되었든 실제 문제에 있어서 당장에 못살고 있는데에야 어떻게 하면 좋으냐? 이론이야 너희 이론, 우리 이론 다 들추어 이야기할 수 있겠으나 문제는 가난이요, 못 사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론상의 문제와 실제상의 문제는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이 실제 문제를 가지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그것도 특별히 먼 이야기가 아닌 자기 자신들이 매일 매일 경험하는 일상 생활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에 비유하시는 이야기의 내용인즉 양 한 마리가 구덩이에 빠졌는데 안식일이라 하여 건져주지 않고 그대로 두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는 너무도 실제적인 문제이기에 이것을 두고 논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양이야 죽든 말든 안식일이나 지켜야지 하는 그런 말은 못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유대 사람들도 이러한 것은 타당한 것으로 알고 있기에 양이 죽게 되었을 때에 건지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율법이라는 것은 세 가지 측면에서 해석이 됩니다. 첫째는 율법자체, 즉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할 때 그 율법 자체가 원본으로 그대로 살아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율법에 대한 해석입니다. 법에는 그 해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법 자체보다 해석이 더 중요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을 때에 그러면 살인이란 어떠 어떠한 것이냐 하는 법적인 풀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 자체를 놓고 볼 때에도 반드시 해석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적질이란 어떤 것이냐 했을 때 저 아프리카 사람들은 형제 관계가 너무 좋아서 형님의 옷을 동생이 입고 나갈 때에라도 "형님 나 이 옷 좀 입고 나갑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 보고 자체를 오히려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너와 나 사이에 그런 것을 왜 정없이 물어 보고 그러느냐 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의 것을 동생이 입을 때에는 그냥 입고 나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서양 사람들의 법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형제간이라 하더라도 동생이 형의 것을, 또한 형이 동생의 것을 말없이 입고 나가면 그것도 도둑질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도둑질입니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그 해석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그 해석은 가장 합리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세 번째는 법을 해석한 범위내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정상을 참작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가령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그 정상에 따라 취중에 저지른 사건일 경우에는 고의적인 것과는 죗가가 달라지게 되고, 더욱이 전혀 악의가 없는 상태에서 상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부득이 빚어진 정당방위의 결과라면 비록 사람을 죽였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동일하게 나타난 범법 행위를 두고도 그 정상을 참작하는 일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람들의 안식일 법에 대해서도 정상 참작이 이루어집니다. 그리하여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은 분명 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에 여기 구덩이에 빠진 이 양 한 마리를 두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안식일이 지나서 건져내어도 될 수 있는 것을 건져내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하지만 오늘 이 안식일을 지나게 되면 죽게 될 것 같은 그런 경우에는 건져내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말하는 것으로 보면 이론적으로는 꼭 맞는 매우 합리적인 이야기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안식일을 지날 때까지 이 양이 죽을는지 살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렇다고 양에게 "하룻밤은 무사하겠느냐?"고 물어 대답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여 건져 놓고 보면 여기에서 시비가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구덩이에 빠져 있는 양을 발견하고는 다 죽어 가기 때문에 건져내었더니 획하고 도망을 가버린단 말입니다. 이제 그렇게 되면 이틀을 두어도 죽지 않을 양을 왜 안식일에 건졌느냐며 시비가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건져내어 놓은 양의 모습이 숨을 헐떡이며 곧 다 죽어가는 상태이면 "오! 그런 것은 괜찮다"고 판단할 참인 것입니다. 그 까다로움이 얼마나 심한지! 만사가 다 이렇게 취급된단 말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도 보면 38년 된 베데스다 못가의 환자를 예수님께서 낫게 해주심으로 자기의 누웠던 자리를 들고 기쁨으로 걸어가게 될 때에 이것이 문제가 되어서 유대인들이 시비를 벌이기를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저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에 환자가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으면 그것도 죄가 됩니다. 따라서 여기 이 사람이 환자로서 자리를 들고 갔다면 죄가 아닐텐데 병이 나은 상태에서 들고 가니 죄가 된다는 것이요, 그 때문에 시비가 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것에 대해 대답하십니다. 이에 하시는 말씀이 양이 구덩이에 빠졌으면 불쌍히 여겨서 건져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냐며 건진다는 문제에 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며 양도 그렇게 생각하고 건져야 한다면 사람이야 당연히 건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두번째 관점에서 하시는 말씀은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니라!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왜 이 문제에 대하여 그렇게 시비를 벌이느냐는 것으로 대답하신 것 같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면 바리새주의가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철저한 형식주의에 대해 이론적인 반박이 아닌 실제를 들어서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형식주의에 빠지고 있느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내적인 진실이지 형식적인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 저들은 위선에 빠지고 있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실을 원하시는 분이시지 위선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 깊은 문제는 저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도 지키는 그 목적이 자기 의를 내세우는 데에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수다한 법조문을 까다롭게 만들어 놓고 그것을 형식적으로 다 지키고는 나는 안식일을 잘 지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앞에 나와 영생의 도리를 묻던 사람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막 10:20, 눅 18:21)라며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대로, 규례대로 다 지켰나이다! 이러한 자부심과 이런 교만을 가지고 그렇게 철저히 지키지를 못하는 사람들을 멸시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 율법을 못 지키는 데에는 숙명적으로 지킬 수가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미처 알지를 못해서도 못 지키고, 환경 때문에, 때로는 부득이한 사건으로 제대로 지키지를 못하게 될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이는 멸시와 정죄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결과는 율법을 지키는 그 자체를 자기 자랑으로 삼는 외식주의자들의 무자비한 소치인 것입니다. 이에 저들의 위선을 고발하는 이야기들 중 하나를 소개해 보면 그 내용이 매우 재미가 있습니다. 이제 어느 유대인 한 사람이 자기 집 바람벽에 못이 빠져 꼭 박아야 되겠는데 이날이 안식일이라 이 못을 박게 되면 안식일을 범할 처지란 말입니다. 그래서는 생각 끝에 이웃에 사는 이방 사람을 좀 와 달라고 하여 못을 박아줄 것을 부탁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선은 오늘날 우리의 주위에도 있음을 실감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너무 직선적인 이야기가 되어 죄송한 감이 없지 않습니다만, 지난번 주일 저녁 중공에서 오신 김 성하 목사님을 모셨을 때의 일입니다. 며칠 예정으로 오셨다가 주일을 지내시고 곧장 월요일에 떠나시게 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하여 주일 아침이 되고 보니 이래 저래 받은 선물들도 있고 하여 짐이 많아져서 항공용 가방이 하나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김목사님께서는 아무 생각 없이 어느 젊은 목사님 한 분을 불러서는 미안하지만 내가 어디 가서 살 줄도 모르는데 당장 내일 떠나기는 해야겠으니 가방을 하나 마련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목사님이 저의 사무실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서는 자기가 돈을 줄터이니 가방을 하나 사서 김 성하 목사님께 드려 달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나는 평생에 주일에 물건 사본 일이 없거든"하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되자 비서가 어떻게 처리해야 될 줄을 몰라서 전화를 바꾸어 주길래 받았는데 저에게도 그 설명을 또 하면서 "돈을 제가 낼께요"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목사님이 누구이신지도 모르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러길래 "목사님 그렇게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죄는 제가 짓지요. 돈 내시지 않아도 됩니다."하고서는 가방을 사다가 저녁에 드렸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하실 때에 김 성하 목사님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여 이러한 일이 있었다고 말씀드렸더니 목사님께서 껄껄 웃으시면서 "예나 오늘이나 바리새교인은 많거든요"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외식주의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이렇게 빠져 들어가기 시작하면 걷잡지를 못하게 됩니다. 도대체 무엇이 근본이요. 무엇이 직접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의도는 무엇인가 할 때에 그 깊은 뜻을 7절 말씀에 기록된 대로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어디까지나 자비와 긍휼이란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코 우리의 생각이나 우리의 방법대로 하나님께 나아가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근본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여 거기에 따르는 자기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이사야서 1장을 보면 유대와 이스라엘의 외식주의, 그 가증한 제사에 대해 여지없이 책망하시고 심판을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너희의 무수한 재물이 내게 유익하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 헛된 재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그리고 내 이름으로 모이는 것조차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인다고 해결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진실이 없는 외식! 그 위선을 무섭게 심판하고 계십니다.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는 정결과 거룩이며 선행과 공의임을 계속해서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뜻이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바에 바르게 응답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이를 위해 신명기 10장 12절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기억할 것은 하나님의 법도를 지킬 때에는 믿음으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명하신 바를 다 이해하거나 충분히 납득하기에 지킨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완전히 납득해서 지키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납득이 가지 않아도 믿음으로 지키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이 부모님이 무슨 말씀을 하게 될 때에 그 때마다 모두 납득이 되기에 순종하는 것이겠습니까? 공부를 하라고 하면 하지만 공부는 꼭 하여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깊이 있게 납득했기에 하는 것이겠느냐 말입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그 모든 순종이 그 때마다 부모님의 뜻을 다 알고 헤아림으로 있어지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순종하는 것은 부모님의 말씀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서만 말씀하시는 분이기에 이를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사랑으로 대하며 순종하는 그것을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나를 사랑하셔서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앞서 주신 8절 말씀에 보면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안식일의 주인! 이는 참으로 엄청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가복음 2장 27절에 의하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안식일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바쁜 날들 속에서도 주일을 주셔서 하루를 편안히 쉬게 하여 주시니 우리 하나님 얼마나 감사하신가!"라며 말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번은 55세가 넘으신 분이 자진하여 교회에 나오셨다기에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리셨느냐고 물어 보았더니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인즉 같이 자란 친한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예수를 믿는 것을 보고는 1주일을 다 일하며 살아도 모자랄텐데 1주일, 그 7일 중에 하루를 놀고 살겠다고 하니 저 친구 참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20년을 그렇게 살아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보니 그 친구의 경제 수준이 자기의 것이나 별 차이가 없이 비슷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가만히 생각하니 자기만 손해보았다는 것이지요. 왜냐 하면 나는 1주일 다 일하고도 요모양이고 저 친구는 1주일에 하루씩 꼭꼭 쉬고 저 정도라면 결국 자기만 멍청한 생활을 해 왔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라도 쉬어야지 하고서는 교회에 나왔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분은 참으로 지혜로운 분입니다.
여러분!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안식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실 때에 우리는 백 번, 천 번 감사해야 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쉬라고! 내 영혼을 소생시키기 위하여 주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물론 모든 율법은 감사한 마음으로 지켜야 하고 억지로 지켜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생각해야 하는 가장 핵심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기를 보고 이웃을 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건져 내지 않겠느냐?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어라 말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곧 구원이 최고의 목적이요, 최우선적이어야 하며, 최고의 가치라는 의미입니다.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듯이 죄의 구덩이에 빠진 사람을 건지는 일이 최우선적 급선무요, 그것이 최고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너희들이 수천 년을 두고 대대로 안식일을 지켜 내려온 방법이든, 나의 생각, 나의 주의, 나의 이상, 나의 규례든 간에 그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구원이 최고다. 그러므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라! 그리고 이것을 위해서라면 나의 의견, 나의 전통적인 가치관도 다 포기하며, 나아가 협소하고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나서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말입니다. 적어도 생명을 구원하는 일은 어떤 이유, 어떤 규례로도 시비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지금 양이 구덩이에 빠져서 신음을 하고 있다면, 이것을 건지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못하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교인 중에 그런 분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떤 부인이 믿지 않는 집에 시집을 가서는 많은 고생을 하며 15년을 살아 왔는데 이제 더는 못 견디겠다며 아무래도 이혼을 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해를 하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이제 사랑을 못 받는다고 걱정하거나 섭섭해하지도 말고 내가 이 집 가문을 구원하기 위해 이 집안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는 생각을 해보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리하면 될 것 같네요"하고 돌아가서 그렇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6개월만에 그 남편을 교회로 인도하고 그후 온 가정이 교회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 부인이 하는 말이 "나는 선교사"라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간 그날, 이제는 벌써 들어갈 때부터 마음도 자세도 다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무슨 시비가 나더라도 나는 선교사이니까, 내가 이 가문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을 못하겠으며 보다 더한 것인들 못 참겠느냐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구원을 위해서라면 십자가라도 질 것이거늘 이제는 마땅히 구원을 제일의 목적으로 하여 나머지 시비들은 다 포기하고 거기에 최고의 가치를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구덩이에 빠진 양을 건져내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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