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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소리(요 1:15~28)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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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소리(1:1528)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어느 누구의 메시지보다 가장 분명하고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직접 눈으로 보면서 말했고, 가장 가까운 일에 대해서 말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확실한 일일지라도 먼 장래의 일, 즉 천 년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는 예언자가 있다면,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은 다같이 희미해지고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쉬운 예로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습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것을 전할 때, 가령 사흘 후에 홍수가 온다고 말했다면, 말하는 사람도 좋고 듣는 사람들도 설사 아무리 믿음이 없는 사람까지도 조금은 실감나게 들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120년 후에 홍수가 온다고 예언을 하게 되니, 말하는 사람도 힘들고 듣는 사람은 더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예언은 달랐습니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일을 말하고 증거함으로 큰 특권을 가진 선지자요 선지자 중의 대표자를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는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추상적이거나 이론적인 이야기를 말하지 않고 구체적인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구주가 바로 여기에 오셨다. 그를 맞이할 길을 예비하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도끼를 나무 뿌리에 놓았다. 지금 하나님의 역사가 여기에 떨어지고 있다 등 실제 생활 속에서 실감나게 외치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그의 메시지의 특징은, 자신과 메시지와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 "진리는 이것이다. 이 길이 바른 것이다"라고 아무리 말해도 전하는 자와 진리와의 관계가 없으면 호소력이 없으며 열매가 맺어지지 않습니다. 물론, 들을 때 "옳은 말이구나" 라고 동의는 하지만, 그 말씀을 따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와 나와의 관계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으로 나는 이렇게 되었고 나는 이렇게 믿는다라고, 나와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들의 초점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진리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고 목숨까지도 바치노라고 자기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호소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는 증거 방법입니다. 본문에서 세례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다. 나는 그 분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감당할 수 없는 자다" 라고 계속 자기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의 내용으로 들어가서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 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1:15), 다소 해석하기가 어려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면에서는 나보다 먼저 계신 자요, 어는 면에서는 나보다 뒤에 계신 자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먼저 "내 뒤에 오시는 이"라는 뜻에서는 흔히 나이를 생각하게 되는데, 요한은 예수님보다 여섯 달 먼저 이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시간적으로 예수님보다 먼저 시작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요한은 예수님보다 먼저 나와야 하는 운명을 가진 자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선발대로서 준비하고 그 준비된 길로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생일을 기준 하거나 일을 시작한 순서 등으로, 즉 인간적인 면에서 본다면 세례 요한은 분명히 주님보다 앞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는 나보다 먼저 계시다"라고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나보다 뒤에 있는 분이지만 본래적인 의미로는 나보다 그가 먼저 계시다고 선재적 성격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주님은 그의 출생부터 시작하는 분이 아니고 그는 본래 하나님이요 말씀이신데 육신을 입어 이 땅에 오셨다는 그의 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선재성은 요한복음의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6).

세례 요한이나 사도 요한이 본 예수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고 똑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19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고 또 2:9에도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충만이라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충만이 헬라어로 가득 찼다는 의미가 있는데, ()로 말하면 보름달이며 그릇으로 말하면 그릇에 철철 넘치는 가득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신 계시는 완전하고 충분한 계시라는 뜻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이전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계시는 어디까지나 부분적이요 예표적이며 임시적인 것이었습니다. 솔로몬, 예레미야, 엘리야 그 누가 말했어도 그 예언은 불완전한 것이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만이 충만한 것입니다. 마치 그림자가 있고 뒤에 본체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림자는 아무리 분명해도 그림자일 뿐, 본체는 아닙니다. 요즈음 사진 기술이 좋아서 때로는 실물보다 사진이 좋게 나올 수도 있지만, 사진은 사진일 뿐 실물이 나타나면 소용이 없습니다. 실물을 만나서 만족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바는 완전한 것이라고 세례 요한이 간증하는 것입니다.

완전함(totalism)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가 완전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 완전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난 사랑이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지혜와 권능과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계시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 최대의 능력, 최대의 사랑을 느끼는 것으로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는 충만한 상태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도달했는지 아닌지는 스스로 점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옵기는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라고 더 바랄 것이 없는 완전한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은혜 위에 은혜로써 모든 것을 은혜로만 보는 것입니다. 질서에는 사랑의 질서와 율법의 질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이것이 옳다 그르다, 또는 좋다 나쁘다로 구분하는데, 사랑의 시선으로 보면 모든 것이 다 아름답게 보입니다. 잘못한 것까지도 귀엽게 애교로 보여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좋은 것은 하나도 없고 칭찬은 아첨으로, 충고는 시비조로 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로 이해하게 되면 쉽게 모든 것을 의로 소화할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세계입니다. 불신자들의 눈에는 세상적인 것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믿어도 더 나아지는 것이 없다고 불평하지만, 신앙의 세계에 들어가서 보면 모든 것이 만족하고 충족되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란, 최고의 기쁨이며 신비로운 기쁨인 것입니다. 은혜 위의 은혜라는 말을 성경 원어대로 옮기면 "은혜에 대신되는 은혜"라는 말입니다.

흑백의 논리나 다원적인 논리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 사랑의 눈으로 혹은 감사한 마음으로 보는 그러한 새로운 세계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7). 이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왔다 즉 주어졌다와 왔다의 차이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율법은 모세가 자기 마음대로 창작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근원인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것이며,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가 그 자체이며 근원으로 예수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왔다"라는 말의 원문의 뜻은 "되었다"라는 말이며 영어 번역에서도 "became"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근원이므로 그를 통해 있어지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율법과 은혜에 대해서 상징적으로 표현하기를 "율법은 하나님의 왼손이요, 은혜는 하나님의 오른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가정에서도 아이들을 양육할 때 율법만 강조하다 보면 지나치게 엄한 교육이 되고, 은혜 쪽으로만 기울게 되면 버릇없는 아이들로 키우게 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율법과 은혜의 균형을 잘 조화시켜야만, 한 인격을 훌륭하게 키워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 위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있어진 은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 은혜가 율법을 이긴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 질서가 기울어지면서 다시 사랑의 질서로 은총의 질서로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따르다 보면 죄를 지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에 싸여 율법의 종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노예의 관계에서 자녀의 관계로 바뀌어지는 중요한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필자에게 편지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필자의 설교를 방송으로 듣고 은혜를 받아서 편지를 쓰게 되었다는데 그의 고민은 교회에 가는 것이 두렵다는 호소였습니다. 과거에 교회를 다닌 경험이 있는 분인데,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는 일을 계속 되풀이하게 되는 자기로서는 교회에 나갈 자격이 없어 포기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힘으로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누가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우선 교회에 나와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찾는다고 그분에게 회답했습니다. 믿는다는 것을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선 열심히 교회에 다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변해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변해지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고, 담뱃대를 꺾고, 혈서를 쓰고 여러 자기 노력을 하지만 모두가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의 노력을 다 포기하고 두 손들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순종하는 길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단번에 이루려고 서둘지 말고 한 마디씩 한 마디씩 말씀에 익숙해지며 이해하면, 나도 모르게 얼굴 표정부터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 지식이 많고 박사라도 믿음 세계에서는 다시 공부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종이 아닙니다. 공포나 형벌 의식과 저주에 매여 있지 않고 소망과 사랑에 있습니다. 율법의 종국은 사망이지만 은혜의 종국은 생명입니다.

다음 본문에서 중요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이 말의 뜻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으되 예수를 통해서(믿으면)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20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즉 너희들이 나를 보는 날이면 죽는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을 입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신명기 4:12에도 보면 오직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뿐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나타나셨습니다. 사람의 형상으로 육신을 입고 우리 가운데 나타나시고 또한 우리 문화권에 오셔서 우리와 대화적 관계에서 우리를 만나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9에 보면 빌립이 말하기를 "주여, 아버지를 보고 싶습니다. 보여주십시오"라고 예수님께 졸라대자 주님은 놀라운 대답을 하셨습니다. "아직도 보지 못했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오히려 되묻고 계십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 나가면 하나님은 이미 만난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벌써 하나님을 만났는데, 무엇을 또 보겠다는 것입니까? 사실, 사람의 눈은 불과 몇 자 앞도 식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눈을 가지고 누구를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믿는 자들은 이미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고 하나님을 보았으므로 더 이상 보겠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이대로 만족하고 충분합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인자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 말은 "나로 인하여 만족한 자는 복이 있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불평이 있고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를 바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 물을 때에 요한의 증거가 이러하니라"(1:19).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요한에게 왔다는 이야기는, 그 당시 종교와 정치를 겸한 산헤드린이라는 국회가 있었는데, 회원이 72명으로 그 중 대표 몇 명이 세례 요한에게 왔다는 말입니다. 산헤드린회는 예수님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마지막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결의를 한 곳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세례 요한에게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그들은 거짓 선지자에 대한 감독 책임이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표자 몇 명을 세례 요한에게 보내어 네가 누구냐고 공적으로 묻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정치적 소요를 근심하여서입니다. 정치적 소요를 근심하는 그들의 심정이 요한복음 11:48 이하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많은 표적을 행하시니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르게 될 것이고 그러면 혁명이 일어나게 되며 혁명이 일어나면 로마 사람들이 이 나라를 빼앗아 갈 것이니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 없지 않느냐 하는 걱정이었습니다. 예수가 의인인지 죄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사람을 죽여서 이 소요를 막아 편안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옳은 일이라고 가야바는 유식한 척하며 "너희는 아무 것도 모르는구나" 라고 한 마디 했습니다. 한 사람을 죽여서 정치적인 소요를 막겠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말속에는 또 다른 목적이 있는 대제사장으로서의 독 있는 말이었습니다. 셋째로는 그들의 당연한 의무로써 진짜 메시야를 기다리는 생각으로 세례 요한에게 묻게 된 것 같습니다. 어딘가 좀 특별한 분이 나타나면 저 분이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것이 그들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메시야 대망 사상이 그들에게도 분명히 있었으므로 본문에 보면 세 가지 사항을 세례 요한에게 묻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네가 메시야냐"고 묻습니다(1:19). 예수께서 재판을 받으실 때에 제사장 가야바도 네가 메시야냐고 물었고, 빌라도도 예수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면 죽일 것이고, 아니라고 하면 놓아 줄 심산이었습니다.

이것은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욕구에 의한 심판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들은 거의가 다 그런 모양의 못된 인간성을 가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인간들에게 예수님의 얼굴을 그리라고 한다면 대부분 자기 얼굴을 그려 놓고 말 것입니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그들의 최대 관심사인 메시야에 관해 물었습니다. 네가 다윗의 왕으로부터 내려오는 이 나라를 구속할 바로 그 분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드러내어 말하고 숨기지 아니하며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분명히 대답했습니다.

다음 질문은 "그러면 네가 엘리야나"고 묻습니다(1:21). 말라기 4:5에 보면 메시야가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오겠다고, 즉 전위대가 온다고 한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해가 뜨기 전에 새벽별이 뜨는 것처럼 예수가 오기 전에 세례 요한이 선발대로 먼저 올 것이 예언되어 있었습니다. 요한이 그것도 아니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선지자냐고 묻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있는 계시 문학에 보면 메시야가 올 때에는 옛날에 있던 유명한 선지자들이 모두 다시 나타날 것이라는 전승이 있었습니다. 이 전승에 의해서 선지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도 아니라고 대답할 때 그러면 "도대체 너는 누구냐, 우리를 보낸 사람들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 말해 달라"고 다시 물었습니다.

이 때 세례 요한은 겸손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주의 길을 예비하는 광야의 소리다"(1:23).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다만 소리로 외칠 뿐이라고 자기 위치를 분명히 말해 주고 있습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즉 첩경(捷徑)을 영어 새번역 성경에서는 하이웨이(highway)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풀이하면 길에는 산길이나 골목이나 여러 가지 종류의 길이 있는데, 이 길은 곧은길인 고속도로라는 뜻입니다. 길이 나쁘면 산을 넘고 강을 건너야 함으로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길이 좋으면 빨리 쉽게 갈 수 있으므로 우리 마음에도 하이웨이, 즉 고속도로를 만들어야 합니다. 나와 주님 사이에 곧은 고속도로가 있으면 주님의 말씀이 한 마디도 빠질 것 없이 즉시 바로 들어오고 바로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이 길을 위하여 세례 요한이 먼저 온 것입니다. 사람들의 높고 낮은 마음의 길을 불도저로 밀어서 편편한 길로 만들어 주님이 오실 수 있도록 이 목적을 위해 세례 요한이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말이 "독사의 자식들아" 하고 좀 거칠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존경했고 어떤 이들은 그를 선지자로 혹은 메시야로 보기까지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렇게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게 되면 자기를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지나치게 굴욕을 당하거나 멸시를 받아도 자기를 잃게 되지만,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아도 자신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은 끝까지 나는 광야의 소리다, 그 분의 신들메 풀기도 감당치 못 하겠다라고 자기 위치를 지켰습니다(1:27).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할 수 없다라는 말은 현재 우리의 상황에서는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2천년 전으로 돌아가 보면 그 당시에는 노예제도가 있어 주인이 신을 신고 벗을 때마다 종들이 신들메를 풀었습니다. 신들메를 푸는 노예는 노예들 중에서도 주인과는 가장 가까운 신복들이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주님의 신들메도 풀기에 적합하지 않을 정도로 부족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메시야인 줄로 잘못 알고 그를 따랐지만, 그는 자기 됨의 위치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 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정말, 훌륭한 세례 요한의 자세입니다.

그는 계속해서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성령의 세례를 말했습니다. 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도덕적인 회개를 의미하고 불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성령의 임함을 의미합니다. 세례란 죄를 씻는다는 표인데, 물로 씨는 것과 불로 태우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깨끗하게 씻어지겠습니까? 물로 씻는 것은 아무리 깨끗하게 씻어도 속은 그대로이지만 불로 태우면 속까지 깨끗해짐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뉘우치고 회개를 하며 세례를 받는데 이것은 의지적 결단입니다. 성령이 임해야만 그 마음속에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고 비로소 새 사람의 생명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의지가 아닙니다. 어느 20세 된 청년이 신앙이 좋은 아버지께 눈에 보이지 않는 성령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마침 아버지는 전기 기술자였으므로 발전기를 보여 주며 다음과 같이 설명을 했습니다. "여기 지금 발전기가 돌고 있는데, 줄을 연결하면 저 쪽에서는 불이 켜지고 열도 나며 소리가 나는 등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나지만 그 속에 흐르는 전기는 우리 눈에 보이질 않는단다.

이와 같이 성령도 보이지는 않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들어와 역사 하면, 우리 마음속에는 들려지는 음성도 있고 뜨거움도 일어나고 깨달음도 오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의지적 결단도 생긴단다" 라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습니다. 이 결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불로 세례를 주시는 것으로, 즉 성령의 임함이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세례는 태우는 것입니다. 완전히 나를 없애버리고 중생케하여 거룩하게 되는 역사입니다. 세례 요한은 도덕적 회개를 외치는 데 끝났지만, 예수는 새 사람으로 새 생명으로 탄생케 하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외치기를, 예수로부터 충만함을 보았고 또 충만이 임함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임하는 그 충만에 연합하는 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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