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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자의 은혜(야고보서 4:4-7)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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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자의 은혜(야고보서 4:4-7)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야고보서 강해도 오늘로서 스무 번째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겸손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에 대하여 공부하게 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인간의 사회 안에 있는 싸움과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다툼과 번민, 고통, 이런 것들이 왜 있어야 하는 것인지, 그 원인에 대해서 공부하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공부하기에 앞서 그 요점을 다시 한번 되새겨볼까 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번민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싸움이 있고 전쟁이 있습니다. 그 원인은 욕심 때문이요, 이 욕심이 문제되는 것은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며, 기도를 하는데도 문제가 없어지지 않는 것은 욕심 가운데서 기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야고보 사도의 명확한 결론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해답을 얻어야 합니다.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올바로 기도하는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욕심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이에 대하서 좀더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또 야고보는 오늘의 본문말씀 가운데서 적어도 네 가지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형식상으로는 부정적인 면으로 설명한 것 같으나 실은 긍정적인 면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기도하라 함입니다. 둘째, 세상 것과 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목적은 오직 그의 나라와 그의 의()에 두어야 한다 함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세상에 목적을 두고 있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자세로 기도하여야만 응답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5)." 이 말씀을공동번역성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심어주신 영혼을 질투하실 만큼 사랑하신다는 성서 말씀이 공연한 말씀인 줄 압니까?"-모름지기 하나님만 사랑하는 일편단심으로 기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넷째는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해야만 합니다. 감히 누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겠느냐,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마는 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 교만한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께 마구 대들지 않습니까? 삿대질까지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지릅니다. 안들어주시면 기도하지 않을랍니다, 예수 안믿을랍니다, 이렇게 협박합니다. 고약한 기도입니다. 기도한답시고 하나님 앞에 고얀 짓, 못된 짓 많이 합니다.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짓입니다. 겸손하지 못한 탓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자'란 남자 아닌 여자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절조(節操) 없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영적인 간음을 일삼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남편을 두고 외간남자와 바람을 피우는 여자와도 같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세상에 푹 빠져 있는 사람들을 가리킴입니다. 이사야 545절을 보면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하였고, 예레미야 320절에는 "이스라엘 족속아, 마치 아내가 그 남편을 속이고 떠남같이 너희가 정녕히 나를 속였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으며, 호세아에서도 하나님은 신랑이요, 이스라엘은 신부라고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은 신랑이요 우리들 성도는 다 신부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다 신부(新婦)입니다. 열 처녀와 같이 잔칫날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25:1)"-다같이 주님 앞에 가서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인데, 깨끗한 처녀로, 그리고 기름을 넣은 등을 준비해 가지고 오늘일까 내일일까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자세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순결'이요 '준비'입니다. 신랑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신랑의 마음에 들도록, 또 신랑의 생활에 맞도록 나 자신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시간에 여기 가만히 앉아서 신랑이 변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신랑에 맞도록 변하자는 것입니다.

서울에, 처녀 때부터 제가 알고 있는 목사 사모님 한 분이 계십니다.

이 사모님의 부친도 목사님인데 아들 둘에 딸 둘을 슬하에 두셨습니다.

이 목사님께서는 평소에 두 아들 중에서 한 아들이라도 목사가 되어 자기의 뒤를 잇게 되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소원은 퍽이나 간절한 것이었습니다. 다른 직업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겠습니다마는 목사가 성직(聖職)이어서 그런지 목사님들은 대체로 내 아들도 목사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목사님도 그러한 소원을 두고 간절히 기도해왔는데, 결국은 어느 아들도 목사가 되지 않았습니다. 맏딸도 목사님한테 시집을 가지 않았습니다. 이쯤 되자 막내딸이 생각을 해봅니다. '나는 목사님한테 시집을 가서 남편 되는 목사님이 큰일을 할 수 있게 내조(內助)해드리리라.' 이렇게 마음을 정한 것이 이화여자대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제게 그런 결심을 털어놓기에 "지금은 대학 1학년생이 아닌가. 앞으로 수년을 더 있어야 시집을 갈 텐데 그 사이에 마음이 변할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 장담할 것은 못되지"하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가씨,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하고 다부진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닌게아니라 그 결심은 단단히 굳힌 결심인 것 같았습니다. 그 후 4년에 걸쳐 이 아가씨는 이 교회 저 교회를 부지런히 쫓아다니면서 주보(週報)를 알뜰히 모으는가 하면 목회(牧會)에 관한 책들을 탐식 하듯 읽어대는 것입니다. 스크랩을 해둔 것만 해도 엄청난 분량이었습니다. 그러더니 한번은 저보고 "목사님, 이만하면 중매해 주실만하지 않아요?" 미상불 저 역시 내심으로 크게 감동해오던 참이라 "맞다. 그만했으면 하나님께서도 감동하셔서 기꺼이 중매해주실 것 같구나!" 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대학 졸업반 마지막 학기에 여름 캠프를 가더니 거기서 덜컥 임자를 만났고, 이내 결혼을 하더군요. 그 신랑이 목사였습니다. 신랑 되는 목사님이 지금은 서울 안에서도 목회 잘하는 것으로 평판이 높은 분이지만 여기서 그 이름은 밝히지 않고 넘어가겠습니다. 아무튼 이 사모님 보십시오. 목사의 아내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 순간부터 4년을 여일 하게 열심으로 준비를 해왔던 것입니다. 그 자세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마태복음 25장의 다섯 처녀가 늘 기름을 준비하고 있다가 마침내 신랑을 맞을 수 있었듯이, 우리 성도들은 한시도 게을리 말고 주님 맞을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맥놓고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이니 신랑인 당신이 알아서 움직여보시우-이럴 것입니까? 아닙니다. 내 편에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신랑 신부의 사랑은 만남의 사랑입니다. 사랑 중에서도 신랑과 신부의 사랑은 서로가 아무리 그리워해도 또다시 그리워지는 사랑인 것입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의행복론에 나오는 말을 보십시다. '사랑은 서로가 그리워하는 것이다. 서로가 마주보는 것이다.

상대에게 내 마음을 다 주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신랑 신부로 비유하는 데는 몇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이 관계는 선택적인 사랑입니다.

'숱한 여자들 가운데서 하필이면 신부가 왜 이 여자냐?'-이것이 중요한 점입니다. 저는 결혼주례 할 때 신랑 신부를 바라보느라면 으레 생각하게 됩니다. 그 많은 여자들 중에서 바로 이 여자, 그 많은 남자들 중에서 바로 이 남자-이렇게 둘이 만났다는 사실만도 이미 굉장한 사건이 아닙니까? 신비롭기 이를데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택적인 관계인 것입니다. 선택된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요새 젊은이들을 보면 여자 쪽에서 남자 쪽에서 프로포즈하는 일도 있는가본데, 이는 아무래도 정상적인 일은 못되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성서적이지는 못한 일입니다. 서양사람들 이야기를 하게 되어 뭣합니다마는, 그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민주화가 잘된 나라 사람들인데도 대체로 사랑의 고백만은 남자가 먼저 하게 되어있습니다. 프로포즈는 남자 쪽에서 하고 여자는 응답을 하는 것이 상례입니다. 응답은 가부간(可否間)에 여자의 자유입니다. 거절할 수도 있고 승낙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강제성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우리를 선택해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응답하기를 바라십니다. 남자가 여자를 보고 사랑을 고백합니다. "그대와 평생을 같이하고 싶소." 이럴 때에 여자 쪽에서 고맙게 받아들이면 좋겠는데 그렇지를 않고, '! 웃기고 있네. 볼품도 없는 주제에. 지가 돈이 있나 지위가 있나, 누굴 보고 감히 결혼을 해달래?'하고 코방귀나 뀌고 만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하겠습니다. 어느 장로님한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분이 장가를 든 것은 서른네 살 노총각 때였다고 합니다. 중매로 선을 보게 됐는데 여자 쪽도 서른이 넘었습니다. 합석했던 사람들이 자리를 다 피해주고 단둘이 남아서 마주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 신랑 될 노총각, 영 말주변이 없었어요. 거북한 긴장 속에서 삼십 분도 넘게 침묵이 흐릅니다. 피차 진땀이 나고 답답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견디다못한 신랑감이 드디어 말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풍선 터지듯 불쑥 내놓은 첫마디 소린즉 "나하고 결혼하겠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부감도 얼결에 응답합니다. "하죠 뭐 까짓거." 이 두 사람은 지금 훌륭한 가정을 이루어 잘살고 있습니다.

선택적 사랑에는 마땅히 선택적 응답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주셨습니다. 많은 사람 가운데서 나를 선택해주셨음을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인 것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여러분이 오늘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선택적 사랑에 힘입은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필이면 여러분이 이만한 믿음과 이만한 열심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응답적 사랑입니다.

신랑 쪽에서는 신부의 일생을 책임지게 됩니다.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 했을 때에는 이미 '상황 끝'입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의 일생을, 그의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 책임지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말씀에서도 가끔 이야기하는 바입니다 마는 남편은 아내의 눈에 괴는 눈물을 책임져야 합니다. 아내가 우는 것은 남편 탓이요, 웃는 것도 남편 탓입니다. 울리지 말아야 합니다. 울보여서 운다고 하지 말 것이요, 그녀가 울고 싶어 운다고도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책임을 질 것입니다. "내 일은 내가 책임지는 것이지 당신이 웬 상관이오?" 여자는 이런 응답을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책임져주세요'하고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응답의 자세입니다. 그것이 '결혼'이라는 관계입니다. 남의 집에 와서 일생동안을 곧잘 사는구나 생각하면 여자들은 참 대단하다 싶어요. 결혼하고 나서 낯선 신랑집을 내 집 가듯 천연스레 따라가는 것 보면 신통하다 싶을 때가 많습니다. 친정 어버이를 떠나서 멀리든 가까이든 어디라도 믿고 따라갑니다. 곧 응답적 사랑인 것입니다.

결혼을 하게 되면 신랑은 신부에게 무조건 헌신을 요구합니다. '전적으로 나를 위해서만 살아다오'-이렇게 됩니다. 어는 시인의 읊조림과도 같이 새장 속에 새를 가두어놓고 '내가 볼 때에만 울어라'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지독스런 이기심입니다. 다른 사람보고는 웃지 말렷다, 나만 보고 웃으렷다-남자들에게는 여자에 대하여 이런 마음보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요구합니다. 몸도 마음도 뜻도 다 나에게만 바쳐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순결을 요구합니다. 깨끗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결혼식날 흰 드레스를 입는 것도 순결을 상징함이 아니겠습니까? 티없고 그늘 없는 사랑, 지순(至順)한 사랑을 신랑은 신부에게 요구합니다.

순결한 사랑이 참사랑입니다. 그런데 순결이 변질되는 일이 있습니다.

순결이 변질된 것, 곧 간음(姦淫)인 것입니다. 남편 아닌 딴사람은 사랑합니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기보다도 남편 외에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간음입니다. 남편 사랑하기를 몸과 마음 다해서라야 하겠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몸은 여기 있으나 마음은 딴데 가있습니다. 기막힌 노릇이지요. 실제로 이런 경우를 제게 고백한 여인 이있었습니다. 신혼여행을 갔는데 하필이면 그 사나흘 동안 줄곧 남편 아닌 옛 애인 꿈만 꿨다는 것입니다. 꿈이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 여인 스스로도 참 기막힌 노릇이라며 하소연합니다. "제가 이러다가 불행해지는 거나 아닐는지요?" 걱정을 합니다. 남편은 또 뭐가 되는 것입니까? 곁에 나란히 누워 자는 아내가 엉뚱한 다른 남자 꿈을 꾸고 있다---얼마나 비참한 관계입니까? 이 여인은 본의야 아니라 하더라도 아무튼 정신적 간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같은 간음을 원치 않으십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마음, 단순치 못하고 부정하고 정성이 없고 기쁨과 감사가 없는 이런 마음은 곧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드리는 기도에는 응답이 없다는 것을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참사랑은 정성이 있고, 기쁨이 있고, 순결이 있고, 감사가 있는 법입니다. 기쁨을 다해서 응답하는 사랑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라, 그리하면 응답을 얻으리라,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세상과 벗되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라 함은 이원론적 견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마는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하나님을 떠난 세상, 타락한 세상, 잘못된 세상, 그릇된 세상을 지칭합니다. 로마서 85절로 7절을 보십시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세상과 육신에 대한 것과 영적인 것, 세상에 대한 것과 하나님께 대한 것을 대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고 육신을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원수질 수밖에 없다, 둘 가운데 한쪽을 사랑하게 되니 부득불 한쪽은 놓쳐야 되고 잃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어느 여집사님의 가정을 특별히 심방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여집사님은 술을 많이 마시는 남편 때문에 늘 속을 썩이고 있었습니다. 평상시에는 아이들을 곧잘 사랑하는 남편인데, 만취하여 들어오는 날에는 예외 없이 잠든 아이들을 발길로 툭툭 차면서 "이것들을 냉큼 내다버려!" 하고 소리친다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이 정신병자가 아니겠느냐며 집사님은 한숨을 쉽니다. 그러는 집사님을 보고 저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집사님부터 고쳐야 할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바깥양반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사님은 아이들을 돌보느라고 남편에게 등한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로 인한 불만이 잠재의식 속에 쌓여 있다가 터지곤 하는 것입니다." 여느 때는 내색을 하지 않다가 술만 들어가면 아이들까지 질투하게 되는 남편이라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두 가지를 함께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돈과 하나님을 함께 사랑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이 맘몬(mammon)이라고 하는 우상은 지금 하나님께로까지 올라갔지 않습니까? 세상 참 가관으로 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다 이 모양이 되었는지 모르겠으나 요새는 돈을 최고로 압니다. 돈이 엄청난 위세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돈이 제일이라고들 합니다. 돈만 있으면 그만이라고들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돈을 제 아내보다도, 제 남편보다도, 제 자식보다도 더 중히 여깁니다. 이런 마음이 곧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미움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디모데후서 410절에서 바울은 말씀합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데마가 세상 것을 사랑하여 나를 버렸다'고 함입니다. 세상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과 원수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는 기도에는 응답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20세기의 지구상에 대표적인 문제아가 둘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그들입니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유물주의로 말미암아서 망하게 됩니다. 소위 자유주의는 보편적인 성적 충동으로 일체의 심적 현상을 설명한 프로이트로 말미암아서 망하게 됩니다. 과도한 성()으로 인하여, 방탕으로 인하여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상적이요, 세속적인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은 워낙 수효가 많아서 교인들의 생활을 일일이 살피지 못하고 있습니다마는, 전에 작은 교회를 목회 하던 때에는 교인들의 동태를 비교적 소상히 살필 수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교인들 가운데서 젊은 사람끼리 서로 결혼을 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보면 둘 다 믿음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일단 결혼을 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대체로 한두 해 동안은 신앙생활이 희미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밀월(蜜月)에 취해서인지 그렇게도 열심히 나오던 교회에마저 나오다 말다하고, 시간도 잘 지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동안이 지난 다음에야 다시금 믿음이 건설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이 신앙 안에서 바로 서지 않고는 여자나 남자나 믿음이 미혼일 때만 못하게 됩니다. 둘이 합치면 신앙생활도 더 잘할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실제는 그렇지 않더란 말입니다. 기도 시간도 뺏기고, 봉사할 시간도 뺏기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소중한 시간들이 자꾸만 엉뚱한 데로 새어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사업하는 사람들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사업에 재미가 나서 교회생활을 등한히 합니다. 돈버는 재미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게을리 합니다. 사업이 망하면 망했다고 속상해서 안나옵니다. 이처럼 '세상 것' 이 신앙생활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너무도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이 세상과 벗이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고 말입니다. 세상 것에 탐닉하고 세상 것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인 것입니다. 본문은 이어서 말씀합니다.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5)"-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얼마나 질투하시는지 보십시다. 우선 신명기 3216-"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는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그리고 우리 모두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의 제 2계명-"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20 : 5, 6)." 그러나 이것은 우리 인간의 그것과 같은 질투를 말씀함이 아닙니다. 사람의 질투나 시기는 독점욕이요, 육욕입니다. 소유욕입니다. 때로는 소유하지 못한 자의 비뚤어진 마음입니다. 가지려고 하는데 가질 수나 없거나 가진 것을 누군가에게 빼앗길 판인데 힘이 미치지 못하면, 이것이 질투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사랑의 이면(裏面)입니다. 배신감에서 이는 불길입니다.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질투와 시기를 가리켜 더러운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경고합니다.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2)." 그렇습니다. 남을 시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키며 살인으로까지 발전합니다. 그러니 시기란 얼마나 무서운 것입니까? 이 감정은 분명히 이치에 맞지 않는 불만의 감정입니다. 허황한 감정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이같이 더러운 질투, 이같이 잘못된 시기심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감정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는 성경 한 절을 참조하시면 알게 될 것입니다. "다른 남자를 좇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3:3)"-하나님께서 신랑된 입장에서 신부격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나도 너만을 사랑할 것이니 너도 나만을 사랑해달라는 말씀입니다. 당연한 말씀이 아닙니까?

호세아서를 다시 보십시다. 호세아가 고멜이라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고멜은 원래 창녀 출신입니다. 호세아는 그것을 알고도 그녀를 사랑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고멜은 옛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음란합니다. 그러다가 고멜은 어딘가로 팔려가게 됩니다. 호세아는 값을 치르고 고멜을 다시 구해냅니다. 이렇게 잘못을 거듭거듭 용서하고, 사랑하고, 씻어줍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나의 아내이니 다시는 딴 사내와 놀아나지 마시오. 나도 당신을 용서하고 사랑하리다"-'나만을 사랑해다오. 나도 너만을 사랑할 테니'라는 말입니다. 이는 사랑의 정열을 의미합니다.

'질투'는 영어로 'jealous'입니다. 헬라어 '젤로스'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본래 아주 뜨겁게 불붙는 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질투는 불붙는 마음, 아주 뜨거워진 마음을 말하는 것이 됩니다. 뜨거운 정열-이것은 일체의 다른 마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나만 사랑하라-이것이 아니면 용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받을 수도 줄 수도 없다 함입니다. 절대로 경쟁자(라이벌)를 허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일편단심으로 열렬하게 사랑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만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질투하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직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것입니다. 질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만을 사랑하시고 크나큰 희생을 지불하신 그 하나님께 대하여 내가 올바로 응답하는 마음으로, 다시말하면 나 또한 하나님만을 사랑할 것이다 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만 응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시다. 사실입니다. 모든 고민, 모든 번뇌, 모든 문제가 다 교만함에서 비롯됩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칼뱅의 저서에기독교강해가 있습니다. 칼뱅은 너무도 유명한 이 저서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얽힌 이야기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제자로부터 질문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덕목 가운데서 으뜸가는 덕목이 무엇이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언하에 대답합니다. "겸손." "그럼 두 번째로 큰 덕목은 무엇이겠습니까?" "겸손." "세 번째는요?" "겸손." 이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칼뱅은 '신앙은 곧 겸손이다'라고 정의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가장 큰 덕목(德目)은 바로 겸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니까요. 겸손하지 못하고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겸손하지 못하고는 은혜가 은혜되지 못합니다. 겸손하지 못하고는 은혜를 보존하지도 못합니다. 모처럼 받은 은혜도 한순간의 교만으로 뒤집혀 엎질러지고 맙니다. 이런 일은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끝까지 겸손할 때에 은혜를 감당할 수 있으며, 나아가 더 큰 은혜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설혹 질병이나 손해를 만나도 '나로 하여금 겸손케 하기 위해서' 되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할 줄 알게 됩니다. 겸손의 은혜가 가장 큰 은혜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겸손케 하여 주십시오. 겸손케 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면 어떠한 역경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어떠한 실패도 감내하겠습니다'-모름지기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을 아는 자의 진정한 고백인 것입니다.

구약으로 돌아가 사울 왕가 다윗을 비교해봅시다. 사무엘상 15장에 나타난 바 겸손에 대한 구체적인 교훈은 너무도 유명합니다. 17절을 봅시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기 그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하나님께서는 사울이 그 스스로를 낮추었을 때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만해졌으므로 왕관을 벗기겠다 하심입니다. 22절을 보십시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邪術)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邪神)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사울이 교만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로부터 왕권을 빼앗으신 것입니다. 사무엘상을 더 읽어 나가다보면 167절에서 우리는 겸손의 은혜를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다윗의 중심에 있는 겸손을 보신 것입니다. 그 겸손을 보심으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겸손보다 아름다운 덕목이 없습니다. 기도하되 겸손한 중심을 가지고 기도할 것입니다. 행여라도 하나님 앞에 내 고집을 부리지 말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젊은 목사님인데, 40일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여러 모로 어려운 여건에 처해 있으면서도 기어이 그 일을 해내겠다고 하면서 굴속에 들어갔습니다. 40일째 되는 날, 친구 한 분이 그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굴속에 들어가 보니 40일 금식으로 말미암아 그 몰골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서 목숨마저 위태로워 보였습니다. "축하합니다. 기어이 해내셨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 이제는 나와 함께 산을 내려가시지요"하고 부축을 해주려고 했더니 그 목사님이 도리질을 합니다. "안내려갈라네" 하고 그 목사님은 실로 교만한 소리를 합니다. "예수님은 40일 하셨지만 나는 그보다 하루 더할라네." 친구가 아무리 설득을 하려 해도 말을 들어먹지 않습니다. 친구 분은 하는 수없이 홀로 산을 내려왔습니다. 이날 밤, 그 목사님은 결국 그 굴속에서 숨져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목사님을 데리러 갔던 그 친구 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셨으니 나는 39일만 하겠다-이래야 옳은 일 아닐까요?"

기도에 교만이 끼여들어서는 안됩니다. 내 뜻을 고집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떠한 서원(誓願)을 아뢰었다 해도 그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씀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이런 겸손이야말로 필수적인 덕목인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기도에 응답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 마음으로, 일편단심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에 대한 사랑을 뚝 끊어버리고 겸손하게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야만 응답이 잇고, 응답이 있을 때에 우리의 범사에 형통함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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