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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자의 비유1(고린도전서 9:24-27)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경기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경기자라는 소재는 사도 바울이나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익숙한 소재였습니다. 왜냐하면 올림픽이 개최되는 아테네가 바로 고린도의 북쪽 가까이에 있기 때문에 저들은 경기를 구경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달리는 자의 모습과 관중들의 환호성, 그리고 승리자가 받는 면류관과 영광 등 경기에 대한 모든 것들을 상세히 알고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고린도에서도 2년에 한번씩 약 8마일 거리의 이스데모스까지 달려갔다 오는 마라톤 경기가 있었다고도 합니다. 아무튼 특별한 오락이 많지 않은 때인지라 이러한 경기가 있을 때마다 아주 흥미 있게 구경들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때 사도 바울과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은 운동 선수에 대하여 잘 알고 있음이 분명하며, 이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운동장에서 달리는 경기자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경기자란 어떠해야 하는가 할 때 첫째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본문에 의하면 달리는 자는 상을 얻도록 달릴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는 자가 그저 한번 해보자 거나, 달리다가 힘이 들면 그만두지 하는 생각으로 시작해서는 안됩니다. 흔히들 참가하는데 의의가 있다며 참가상을 주고는 합니다 만은 참가상이나 받겠다고 거기에 출전을 하겠습니까? 적어도 선수로서 일단 경기장에서 뛰었다면 좌우간 1등을 해야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보는 사람이 합격을 하기 위해서 보는 것처럼 경기장에서 뛰는 선수는 1등을 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상을 얻도록 최선을 다하여 경기를 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은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라는 이해하기가 좀 어려운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경기장을 비유로 한 말씀이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이 말씀을 우리의 신앙 생활에 그대로 적용을 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은 많지만 천당을 가는 사람은 하나라는 이야기가 되는데, 분명 본문이의도하는 바는 그런 것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어떤 것을 평가함에 있어서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를 요구함과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상대평가에 의해 사람을 선발한다면 성적이야 어떻든 필요한 만큼의 인원을 상대적으로 우수한 순위에 따라 선발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절대평가란 일정한 기준을 정해 놓고 다른 사람과는 상관없이 일단 기 기준에 합격을 해야만 선발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절대평가는 경우에 따라서는 단 한 사람의 합격자가 없을 수도 있고, 반대로 모두가 합격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시험이나 경기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에 의해 채점되고 선발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간혹 어떤 교파에서는 14만 4천명이라는 기준을 정해 놓고 그 숫자 외의 나머지는 믿어도 소용이 없다는 말을 합니다 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할 이 본문의 의미는 그만큼 고독한 승리라고 하는 말입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면류관을 얻는 것이고 보면 그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분명 좁은 길이요, 어려운 길이며 고독한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체가 그렇고 그리스도인 됨이 그러합니다. 이것은 다름 사람과 비교하여 선택되어지는 조금 낫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에 대한 평가 기준은 철두철미 절대평가에 의해서 결정되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들 믿지 않는 사람들이 농담으로 하는 말이 죄를 지은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미 지옥이 만원이기 때문에 이 다음에 죽는 사람은 자연히 천당행일텐데 무엇 하러 그렇게 교회를 열심히 다니느냐고들 합니다 만은 천당이 비좁아서 나머지를 지옥 보내는 것도 아니요, 지옥이 만원이어서 더 이상 수용할 수가 없어서 천당을 보내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절대평가에 의해서 결정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바로 그 사실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노아의 홍수입니다. 거기에서 보면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쓰러지고 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사건에 앞서 생각할 문제는 하나님의 아들인 그들이 육체가 되어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영이 떠나고 하나님의 형상을 떠난, 그리하여 사실은 인간의 실상을 떠난 육체만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는 이미 죽은 시체와 마찬가지이므로 그대로 쓸어버린다고 해서 문제될 것도 없거니와 상대적인 평가로 구제될 문제도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상을 얻도록 달음질하는 말씀은 그 기준에 도달하도록 목표를 분명히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체육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와 같은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출발이 잘 되어야 하고 두 번째는,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하며 세 번째는, 목적의식이 분명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승리에 대한 확실한 각오를 가지고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 경기에 출전했는가를 생각하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할 때 승리의 영광을 얻을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할 것은 경기자는 방향 감각이 분명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 26절 상반절 말씀에 보면 "내가 달음질하기를 방향 없는 것 같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달리는 사람은 달려야 할 코스를 분명히 알아둔 다음에 달려야 합니다. 모처럼 힘든 경기에 출전한 선수가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사느냐를 묻기 전에 왜 사느냐 하는 것을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최종 목표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고 그 최종 목표까지의 코스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경기장에서 달음질하는 자가 달려가면서 목표를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마음대로 목표를 정하거나, 궤도를 수정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최종 목표를 정한 다음 거기서부터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생각하는 그것이 바로 방향인 것입니다. 따라서 경기자는 이러한 방향을 분명히 한 다음 그리고 향해서 달려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운동장에서 달리는 사람이 앞만 보며 달리지 않고 달리다가 말고는이리가나 저리가나 하고 헤맨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야말로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는 자동차 면허시험을 운동장 안의 정해진 코스를 한바퀴 도는 것으로 치르게 됩니다 만은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서는 일반 거리에 들어서서 옆에 앉은 시험관의 지시에 따라 좌회전 우회전, 주 정차를 하며 돌아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시험관이 합격이라고 생각되면 당장에 면허증을 주고 맙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시험관이 어디로 가자고 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코스가 없는 것이 아니라 시험관으로서는 그 동네를 돌아다니는 코스를 정해 놓고 응시자에게 이리, 혹은 저리로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은 먼저 시험을 치른 사람과 함께 밤에 그 코스를 돌아본 다음 시험을 치름으로 단번에 쉽게 합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르고 가는 길과 알고 가는 길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경기를 하는 선수는 최종 목표를 향한 자신의 코스를 분명히 알고 달려야 합니다. 아무리 쫓기고 바빠도 이 코스만은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제가 인천에 살면서 기차로 서울을 오르내리던 시절 한 번은 인천 가는 기차를 탄다는 것이 부산가는 기차를 타고 내려가다가 안양에서 버스로 바꾸어 타고 돌아오느라 여간 애를 먹지 않았습니다. 그때 제 스스로격언을 하나 만든 것이 있는데 "아무리 바빠도 기차는 바로 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내 앞에 기차가 많이 있다고 해서 아무기차나 타서 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방향을 알아보지 않고 이것 한번 잘못 타면 큰 낭패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며칠을 산다하더라도 사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바른 코스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음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경기자는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본문 26절 하반절 말씀에 보면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쳐야할 대상을 분명히 보고 그것을 향하여 치라는 말씀입니다. 허공을 친다는 말을 할 때이면 언제나 생각나는 것이 권투선수입니다. 링 위에서 싸우는 권투 선수들이 많은 주먹질을 하지만 실제로 점수에 연결되는 실효의 주먹은 몇 번 되지를 않습니다. 그러고 보면 밤낮 헛손질만 하고 있는 셈인데 어떤 때 심하게 큰 헛손질을 하고 난 다음에 나오는 해설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렇게 헛손질을 크게 하면 때린 것 보다 훨씬 힘이 더 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한번 때리겠다고 힘을 주어 주먹을 내밀었으면 상대방이 그대로 맞아 주어야 힘이 안 빠지는 것이지, 상대방이 싹 피하므로 헛손질만 하게되면 힘이 더 빠진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분명 그것도 진리입니다. 세상에 헛된 일을 하는 것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의미 없는 일, 시원치 않은 일에 자신을 허비했기에 후회만 남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경기자는 결코 허공을 치는 것 같은 헛된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현대 철학의 과제는 허무주의라고 합니다. 이제는 못살아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가 없음이요, 왜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겠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일 하나 하나가 계단을 올라가고 탑을 쌓듯이 의미로서 발전이 되고 축적이 된다면 문제가 없겠는데,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올라가는 것인지 내려가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으며, 따라서 현재도 미래도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점점 헛된 일만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피곤하고 낙심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허공을 치는 것같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경기장의 선수가 단 한 발자국만이라도 미끄러지거나 헛발질을 한다면, 그 결과는 엄청난 문제를 초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단거리 선수들의 신발은 조금도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창 밖으로 뾰족한 못이 나오게 한 스파이크 슈즈(spike shoes)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은 헛된 발걸음이 한 치도 없게 하고자 함이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는 이렇게 의역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목표를 향하여 가는 자는 그 목표만을 향하여 정 코스로 달려야지 곁길로 들어서거나 우왕좌왕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는 말인 줄 압니다.
그리고 네 번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강한 훈련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함"이라는 매우 중요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자신에 대한 강한 훈련을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복종하게 하다는 말의 헬라 원어인 '둘라고고' 라는 말의 원뜻을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둘라고고' 는 종이라는 뜻의 '둘로스' 와 인도한다는 뜻의 '아고' 로 이루어진 말입니다. 그러므로 몸을 쳐서 복종하게 한다는 말을 어원적으로 살펴보면, 몸을 바른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를 합쳐서 번역을 하면 "몸을 강하게 단련시킨다"는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영어 번역에서는 엑스사이즈 오브 셀프 컨츄럴(exercise of self-control)이라고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훈련을 강하게 해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몸을 훈련함에 있어서 너무 보아주거나 여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운동 선수들의 훈련 과정을 보면 얼마나 힘든 훈련을 하고 있습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는 일을 비롯하여 저녁 잠자리에 드는 일, 먹고 마시고 쉬는 그 모든 것들이 훈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훈련에는 정해진 코스가 있고, 그 코스에 따라서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정해주신 코스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정 코스대로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훈련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이냐 라고 할 때, 물론 그 목적은 강한 신체를 만들고자함에 있습니다 만은 분석하면 인내와 규칙을 준수한다는 두 가지의 훈련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내력이라고 하면 이는 곧 지구력을 키우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경기란 마음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끔 보면, 나이는 생각지 않고 왕년에 운운하면서 뛰어 보겠다고 하다가 그 길로 병원에 입원하는 이들을 보게 되는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이냐는 말입니다. 짧은 시간을 위해서도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가끔 아마추어 권투 선수들이 3라운드까지 하는 그 시합을 견디지 못해서 숨을 헐떡이며 벅차하는 것을 볼 때이면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그러나 프로 선수들은 15라운드까지를 뛰는 것이고 보면 훈련이라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권투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참 힘들 때에는 이기고 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빨리 종이 울리기만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맞겠으니 어쨌든 바동거려야 되고 옆에서는 코치가 이런 저런 주문을 하고 앉았으며, 관중들은 관중들대로 야단이니 생각해 보면 그 3분, 3분이 얼마나 힘든 시간들이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맞고 지치면서도15라운드를 거뜬하게 끝낸다는 것은 바로 강한 훈련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스태미너(stamina)로 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강한 훈련은 지구력과 인내력을 키워주는 것이며, 결국은 승리의 결정적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규칙을 준수하는 준칙훈련이란 법을 익히고 따르는 훈련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신체 조건과 기술적인 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법대로 경기를 하지 않는 선수는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선수의 실력은 경기장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훈련은 아무렇게나 해 온 선수가 본 경기에서 바로 하겠다며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해서 그것이 제대로 되는 일이겠습니까? 경기에 임할 선수라면 처음부터 원 법대로 훈련을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기자에게는 법을 지키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 살아가는 모든 문제에 있어서 그러합니다. 바른 훈련을 받지 않고 마음만 먹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학생이 공부를 하는 것도, 정치가가 정치를 하는 것도, 기업가가 사업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흔히 쉽게 생각하는 자동차 운전도 처음부터 철두철미하게 잘 배우고, 그대로 버릇을 들여야 사고를 내지 않고 운전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적당히 배워도 되는 것으로 알고 시작을 하니 사고를 유발하게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참으로 말씀이지만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법을 지키는 훈련을 잘 받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많아진 지금에 이런 저런 법을 지키자며 다짐을 해 보아도 잘 지켜지지를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훈련되지 않은 준법정신이 나이 들었다고 나타나는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특별히 서양 사람들을 보면 다른 것은 두고라도 줄서는 훈련이 어려서부터 잘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식당엘 가든, 신문 한 장을 사든, 잠깐 몇 사람만 모여도 줄을 서서 그대로 질서를 지켜나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야 말로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비하여 우리는 어느 쪽으로 훈련을 받았느냐하면 새치기하는 쪽으로 훈련을 받아서 이 방면으로 매우 눈치가 빠릅니다. 그러니 매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제 와서 마음먹는다고 그것이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부끄럽게도 늦어도 한참 늦은 처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을 지키는 훈련은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을 지키는 훈련을 철저히 함으로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5 말씀에서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법대로 경기를 하지 아니하면! 다시 말하면 반칙을 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수고가 무효가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코스는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그 모든 코스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를 훈련시키는 코스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어렵다며 괴로워하거나 힘들다고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나로서는 벅차지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내게 꼭 필요해서 주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내 못된 버릇, 내 못된 성격, 내 못된 마음씨,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하겠기에 나를 훈련시키는 과정에 그 코스를 넣은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내 입장에서 이것은 필요 있다, 없다라는 말을 어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내게 주신 이 훈련 과정을 잘 받아들여 언제 어디서나 법대로 경기를 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갖추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이기기를 원하는 자는 모든 일에 절제를 한다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승리란 하루아침에 오는 기적이 아닙니다. 승리를 향한 여정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 나오는 챔피언인 권투 선수가 가끔 저에게 "목사님, 이번만 하고 그만 둘랍니다. 정말 힘들어서 못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고는 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한번 링 위에 나가기 위해서 적어도 두달 전부터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전부를 원 코스대로 해야 되는데 링위에 오를 그 시간을 위해서 몸무게를 무려 12킬로 뺀다고 하는 것입니다. 나가서 싸우는 것은 잠깐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한 훈련과 절제는 평생을 두고 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승리의 면류관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몸도 마음도 절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끔 스포츠 해설자들이 선수들이 개인 자질을 놓고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것은 자기와의 싸움'이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하면 자기와의 싸움, 즉 게으름과의 싸움, 정욕과의 싸움, 욕심과의 싸움, 심지어는 이기겠다는 마음까지 와도 싸워서 이기지 못하면 좋은 선수는 물론 승리와는 거리가 멀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승리란 결코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길고도 고된 훈련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만일 나를 쳐서 복종케 하지 못하면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다."고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버림이 된다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어 번역을 하면 실격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실격자가 될까 두렵다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경기자가 된 자시의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나의 목표는 분명한가? 내가 가는 방향은 분명한가? 대상을 분명히 보고 있는가를 살펴 본 다음 그에 필요한 정해진 코스와 법대로의 훈련을 함에 열심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승리를 원하는 만큼 모든 일에 절제를 해야 되겠습니다.
축복이란 결코 우연이나 요행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을 가능케 하고 이 훈련을 수고로 결심케 하는 거기에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수고가 헛된 것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는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시편 128:2 말씀에 보면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며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축복이란 수고 없이 먹는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승을 목표로 경기장 선수와도 같이 잘 훈련된 그리스도인이 되어 최종 승리를 얻는 영광을 누릴 수 있도록 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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