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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의 비유(마태복음 13:31-32)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성경 말씀을 읽을 때에는 그 말씀이 가르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항상 마음에 두고 생각하며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교리적인 것인지, 윤리적인 것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행할 바를 말씀하신 것인지, 그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여야 합니다. 그런 이후에 그 주제를 중심으로 본문을 이해하여야 주어진 본문에 빗나가지 않습니다.
본문의 주제는 천국입니다. 지금 예수께서는 "천국은 이와 같으니"하는 제목으로 설교하고 계십니다. 설교하는 사람도 주제를 중심으로 초점이 분명하게 전해야 되겠지만 말씀을 듣는 사람도 바르게 들을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주어진 의미의 주제를 떠나 아무렇게나 맞추어 나가서는 아니 됩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그 말씀의 중심이 있고 가르치는 바가 있습니다. 이에 오늘 본문은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일반의 교육적인 이야기가 아니며 또한 윤리적 강해도 아닙니다. 이것은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궁극적인 관심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말씀입니다.
앞장에서 잠깐 말씀드린 바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이 땅에 임하여 말씀의 선포로 확장되며 주님의 재림과 함께 완성됩니다. 이것을 농사에 비하면 마치 씨앗을 뿌리고, 자라며, 거두어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신학에서 말하는 좀 어려운 용어를 빌린다면 과거의 구원, 현재의 구원, 미래의 구원으로 삼분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말씀과 함께 임한다는 것입니다. 씨앗과 같이, 생명체로, 밖으로 터, 객관적으로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이는 땅에서 나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나라는 위에서 임하는 것이며, 말씀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는 역시 말씀의 전파로 확장되어 나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계,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 행사로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씨앗과 같이 작은 것으로 임하여서, 그러나 그 세력이 점점 확장되어 온 세계를 다스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인데 지금까지의 본문을 놓고 보면 비유끼리에도 비슷하거나 서로 상통하는 관계성 같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씨뿌리는 비유와 가라지 비유는 한 쌍이라고 할만큼 동시적이고 유사성이 많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의 겨자씨 비유와 다음 차례의 누룩 비유가 역시 한 쌍이 되어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겨자씨 비유를 생각하면서 상대적이면서도 재미있는 표현 둘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말씀의 내용을 집약시키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것과 큰 것, 가장 작은 것으로부터 가장 큰 것으로 자란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하여 이 "작다"는 것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겨자씨는 바로 그런 의미에서 당시에 가장 좋은 예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식물학상으로는 겨자씨보다 더 작아 먼지같은 편백이라는 씨앗이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눈으로 보아 아주 작은 씨앗들이 많이 있지만 2천여년 전 예수님이 사시던 당시의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겨자씨가 가장 작은 씨앗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작은 것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겨자씨 같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작은 것을 말할 때나 혹은 속이 좁은 사람을 가리켜 바늘구멍 같다고 합니다. 무엇이나 그렇듯이 이 "작다"고 하는 표현도 나라마다 다른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제일 작은 것을 말할 때는 겨자씨 같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고사 중에는 한 방울의 피도 희생하지 않는 인색한 사람을 가리켜 겨자씨만큼도 피 흘리지 않는 사람으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까다로운 종교 의식 즉 옷고름 매고 푸는 것을 포함하여 안식일에 대한 것만 해도 7백 가지나 되는 무척이나 까다로운 상태를 말하여 겨자씨같이 까다롭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7장에서 대단히 작은 상태를 말씀하시면서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하셨습니다.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하신 것은 이것도 작다는 뜻인데, 아무튼 당시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작은 것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비유로서 겨자씨를 들었던 것같습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 나무가 얼마만큼 자라느냐 하면 본문에 "다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라고 하였습니다. 나무가 아니고 나물이라 하였는데 이는 나무 같지가 않고 채소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풀처럼 나와서 자라면서 점점 숲처럼 올라와 둥그렇게 퍼져 그 크기가 말 탄 사람이 지나가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자라는 것입니다. 이 높이가 수치로 12피트 정도 되니까 약 4미터로서 꽤 높은 것이 됩니다. 이 작은 겨자씨 한 알이 이처럼 높게 숲을 이룬 것입니다. 이 때문에 가장 작은 것으로 가장 크게 자란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숲같다고 하여 우리가 보통으로 생각하는 아름드리처럼 그렇게 크게 자라는 나무는 아닙니다. 물론 나물도 아니지요. 그러면서도 둥그렇게 12피트나 되는 꽤 큰 숲을 이룹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는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그 의도는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크게 자란다는 거기에 중심이 있는 줄 압니다. 가장 작은 것 사실이 그러합니다.
기독교는 가장 작게 시작하여 가장 큰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복음 증거도 그렇습니다.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어 온 가정, 온 마을, 온 민족, 온 세계에 복음이 전파되어 가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그런가하면 문명도 그렇고, 생각해보면 참으로 모든 것이 한 사람 혹은 작은 일로부터 시작되고 발전해갑니다. 크고 작은 수많은 교회들이 있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크고 웅장했던 것은 아니지요. 돌이켜보면 가장 작은 것의 의미를 실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놀라운 발전상은 기독교 세계사에 불가사의라고 합니다만 그 시작은 참으로 미미했던 것입니다. 그 일면으로 이 땅의 개신교 첫 선교사인 언더우드 박사와 아펜셀러 목사가 부활절 아침 제물포 항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게 되었을 때 누가 먼저 내리느냐 하는 것이 궁금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만히 있다가 언더우드 박사가 "내가 먼저 내린다"하고는 냉큼 먼저 내렸다고 합니다. 한 사람, 내가 먼저 내린 것입니다. 어쨌든 시작은 다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미미하게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역사를 이루어갑니다. 복음의 역사는 굉장한 무엇이 있거나 요란하게 떠들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의 역사가 그렇고 선교의 역사가 더욱 그러합니다.
여의도 광장에 모여 한 번씩 크게 떠든다고 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한 번 모일 때마다 엄청난 경비가 드는 일인데, 한 번씩 모여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몇년에 한 번쯤은 필요한 행사인지 모르지만 해마다 하려고하니 걱정입니다.
복음의 역사란 조용하게 겨자씨처럼 자란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시작하여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에서 그리고 골고다에서 죽으시는 예수, 이 모두가 다 겨자씨입니다. 인류 역사의 현장에서 본다면 그 사건은 하나같이 미미한 겨자씨와 같은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신통치도 못한 제자 열둘을 놓고 이야기를 하는 것도 한심한 일입니다. 그 중에는 가롯 유다가 있는가 하면, 성미 급한 베드로가 있지 않습니까? 인간적으로 열두 제자를 분석하면 하나도 시원치를 않습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저들을 앞에 놓고 말씀을 하시는 중에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눅 12:32) 고 하셨는데, 제자들을 보시니 한심해서 그러셨는지 아니면 위로하시느라고 그러셨는지 잘은 모르지만 여기서는 꼭 서로를 위로한 것 같습니다. "적은 무리", 그러니까 아주 적게, 미미하게 시작하여 큰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이것이 복음이며 또한 교회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생명입니다. 이렇게 작아도 겨자씨는 생명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한 줌의 콩과 금시계 하나가 있다면, 우리는 쉽게 금시계를 값비싼 것으로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환 가치에 의한 선택이고, 생명적 차원에서 볼 때에는 한 줌의 콩이 귀한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살지 않는 외딴 섬에서 지내게 되었을 경우, 금시계를 가진 사람과 한 줌의 콩을 가진 이 두 사람 중 누가 승자가 되겠습니까? 이처럼 생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생명! 이 생명체라고 하는 것은 무궁 무진한 신비가 있고, 무궁 무진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생명의 소중함, 생명의 능력, 생명의 위대함을 말해주는 진리가 있습니다.
복음은 생명이며, 교회가 생명이며 이는 살아있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소중함은 살아있는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첫째는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요, 두번째는 죽었느냐 살았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살아있기만 하면 크게 보아야 합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어쨌든 아주 큰 것입니다.
제가 대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타이쭝이라는 곳에 갔었는데 산 위에 있는 연못가에 삼국지에 나오는 관운장을 모셔놓은 사당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관광객을 위하여 근간에 만든 것인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고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장사꾼들만 와글거릴 뿐 그 앞에 가서 경배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보고 있다가 관운장께서 노하시겠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사람이 "뭐 귀신이 오나요" 하고 대답해 왔습니다. 아무리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거기엔 생명이 없습니다. 거기엔 경건도 없고 두려움도 없습니다. 물론 구원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생명의 진리는 조그만 어느 골방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어도 그 속에서 놀라운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이 복음 진리가 사람이 보기에는 겨자씨 같아도 이것은 분명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현상의 문제가 아니고 물질의 문제도 아니며, 크다 작다의 문제도 아닙니다. 많으냐 적으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오직 생명의 문제, 살았느냐 죽었느냐, 생명이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생명의 신비는 아무리 죽어있는 것 같아도 다시 살아나고, 미미한 것 같으나 엄청난 역사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본문 말씀 중에 해석상 문제되는 것이 있어서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야겠습니다. 겨자씨가 자랐는데 새가 와서 깃들었다는 것에 쓸데없는 해석을 붙이는 이들이 있는데 이것은 다 부질 없는 생각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길가에 뿌린 씨를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다고 하시면서 이 새를 악한 자, 곧 마귀로 설명하신 것에 따라, 여기 겨자씨 비유에서도 새를 마귀로 비교하여 교회가 커지면 그 속에 마귀가 깃들이는 것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새가 마귀를 의미한다고 해서 아무데서나 새만 보면 마귀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의 주제로 돌아가 생명의 신비를 소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눈에 들어오지 않고 의식도 되지 않으며 아무런 응답도 없는 것 같습니다. 겨자씨같이 작은 씨앗은 흙 위에 떨어져도 먼지 하나가 떨어지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씨앗이 뿌려졌는지 안 뿌려졌는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작은 씨앗을 하나 뿌려놓고 이것을 뿌렸나 안 뿌렸나, 정말 날 것인가 안 날 것인가 하고 궁금해집니다. 그러나 뿌린 것은 뿌린 것이고 생명은 생명으로 역사 되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낮 예배에 출석하는 많은 교인들을 가리키면서 "알곡은 얼마나 될까요?"하고 물어 왔습니다. 저의 대답은 "그거야 하나님 앞에 가 보아야 알지 누가 알겠어요?" 그러나 한 가지 잊지 말아야할 것은 교회란 처음부터 한 시간도 빠지지 않고 잘 나오면 좋기야 좋겠지만, 한 번만 왔다 가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가서라도 열매는 맺힐테니까 말입니다. 언젠가 일생 동안 예수 믿지 않던 분이 임종을 맞았던 적이 있습니다. 아들의 요청이 있어서 임종을 보게되었는데 가서는 물어보았습니다. "당신은 일생 동안 예수를 믿지 않았는데 왜 나를 오라고 불렀습니까?" 했더니 답답한 숨길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초등학교 3,4학년 되었을 때 교회에 가면 연필을 준다기에 교회에 몇번 가서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을 듣고 배웠는데 그 후로도 마음속에서 항상 예수 사랑하심은 그 찬송이 나오고 종탑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도 좋게만 보였답니다. 그리고는 언젠가는 자신이 교회에 나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고는 했으며, 교회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으면 언제든지 교회편을 들어서 말하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임종이 가까와오니 시간이 없지만 부득불 목사님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를 베풀고 임종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을 보십시오. 초등학교 3학년 때에 몇번 교회에 나가서 무엇을 배웠겠습니까? 장난만 하다가 연필 한 자루 받으면 좋아하고 즐거웠겠지요. 그러나 "예수 사랑하심은" 이것이 마음속에 겨자씨와 같이 쏙 들어가 이 사람을 60년 동안 따라다닌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임종의 순간에 "예수 사랑하심은" 그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 나라로 간 것입니다. 이것이 겨자씨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이라도 좋으니 교회에 왔다가게 해야 합니다. 일단 겨자씨만 들어가면 되는 것이니까요. 씨만 뿌려지면 큰 역사가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는 학교 교육이라고는 1년도 못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인간적으로 말하면 참으로 불행한 처지었습니다.
가난해서 통나무집에서 살아야하고 게다가 여덟 살 때는 어머니까지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계모가 좋은 사람이라서 링컨에게 성경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링컨은 이 계모의 노력으로 성경과 셰익스피어를 읽었을 뿐 다른 책을 계통적으로 읽은 것이 거의 없습니다. 링컨의 불행은 열네 살 때 또 다시 계모가 돌아가심으로 갖은 고생을 해가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랍게도 대통령이 되었고,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훌륭한 대통령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대통령 취임식 때에 조그만 포켓 성경을 들어 보이며 내가 오늘 대통령이 된 것은 이 성경 때문이며,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준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열네 살 때까지 성경을 배웠다면 얼마나 배웠겠습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유치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겨자씨가 아브라함을 대통령 되게 하였고 미국 역사에 오점을 남겨온 노예제도를 폐지시키고 노예해방이라는 찬란한 업적을 남기게 한 것입니다. 참으로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겨자씨입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희미하게 자신 없이 볼 것이 아닙니다. 당장 알아듣지 못해도 말씀을 전하고, 읽어주며, 가르쳐야 합니다. 어쨌든 부지런히 전하면서 생명 중심의 가치관을 세워야 합니다. 금덩어리만 좋아할 것이 아닙니다. 생명이 중요한 것입니다. 생명, 곧 복음의 큰 힘과 신비로움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된다, 안된다 말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생명의 능력이 있음을 항상 새롭게 간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환상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작은 것에서 가장 큰 것을 보는 환상 말입니다.
시인의 말 가운데 씨앗을 손에 들고 새 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심어 놓으면 싹이 날 것이고, 그리고 자라고 자라면 새들이 올 것입니다. 그만한 환상이 있어야 합니다. 씨앗을 보면서 새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겨자씨를 보면서 새 소리를 들으시던 주님의 말씀과 그 놀라운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전한 복음에 아무런 반응도 없는 것 같지만 조금만 두고 보면 언젠가는 역사를 바꾸어 놓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돌아다니시면서 뿌린 씨앗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겨자씨였다는 말씀입니다. 보이는 것이 없었고 아무 것도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하여 세계의 역사는 바꾸어진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크나 큰 생명의 역사, 우주적인 생명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는 진정으로 겨자씨에 숲을 보고 새 소리를 들으시던 주님의 놀라운 환상과 그 믿음, 그 안목이 필요합니다.
이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성장이 없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점입니다.
내 안에 있는 복음의 역사는 계속 성장하여야 하고 교회 또한 성장하여야 합니다. 성장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계속 확장되어야 합니다. 어느 교회든지 문제가 생길 때는 일을 하지 않을 때입니다. 열심히 일하고 계속 성장을 하면은 교회는 조용한 것입니다. 원인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인격이나 지식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의 영적 생명, 내 안에 있는 복음적 생명의 역사가 계속 성장하여야만 비로소 온전한 생명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의 위대한 능력을 항상 새롭게 간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령 속에 뿌려질 때에는 미미한 것 같으나 큰 역사로 나타날 것입니다. 자신의 변화는 물론 가정의 변화, 사회의 변화가 다 여기에서 이루어집니다. 나 스스로의 힘으로 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복음 자체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 야사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혜롭다고 소문난 한 어린아이를 놓고 어른들이 놀리느라고 동네 가운데 있는 커다란 바위를 가리키며 "이 바위를 굴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쉬운 표정으로 할 수 있다고 하니까, 어른들은 겁 없는 녀석이라면서 내기를 약속했습니다. 엄청난 내기를 걸어놓은 이 아이는 그 바위 밑을 파고는 마른 콩을 집어넣은 다음 자꾸만 물을 줍니다. 그러니 물먹은 콩은 싹을 내며 부풀어오르기 마련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부풀어오르면서 땅이 계속 밀리게 되니까 이 바위가 굴렀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어른들이 그 아이를 훌륭히 높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생명의 힘이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겨자씨로부터 시작해서 이루는 신비하고 놀라운 그 능력을 믿어야 하고, 그럴 때에 복음의 능력으로 새로워지는 우주적인 환상을 보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복음의 생명, 그 위대한 능력을 순간순간 새롭게 고백하고 그 능력 안에서 성장되어지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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