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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비유(고린도전서 10:1-1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오늘 본문 중에는 거울이라는 말이 두 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거울이 라는 말은 헬라어로는 '투포이' 라고 하는 말인데, 그 의미상으로는 모양이라든가, 모형, 원형, 표본, 표상 등으로 묘사되어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같은 어원인 '투포스' 라는 말이 로마서 5:14에서는 "표상"으로 번역되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씀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에서 거울이라고 한 것은 매우 직역된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거울이란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거울은 한마디고 자기 자신을 보는 방편입니다. 어디까지나 그 목적이 자신을 보자는 데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다른 사람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보면서 나를 보는 것이 거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의미에서 본 거울의 비유를 소중히 생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먼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를 살필 줄 모르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저는 장례식을 인도할 때마다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을 놓고 슬피 우는가 하면 때로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섞어가면서 그래서 슬프다며 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 중에 제가 생각하며 듣고 싶었던 것과 같은 내용은 없는 것 같아서 어떤 때에는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생각과 내용이란 다른 사람이 이렇게 죽는 것을 보았으면 나도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은 이 죽음과 자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 먼저 가고 늦게 간다는 시간 차이일 뿐 어는 순간 나도 갈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여기 이 사람이 여기치 않는 시간에 여기치 않았던 방법으로 갔다면 나 또한 어느 시간, 어떤 방법으로 죽을지 모른다고 하는 그 정도의 생각은 하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장례식을 보면서도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정말 우리가 죽음이라는 것을 보았다면 그 순간 나의 죽음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차가 사고가 났으면 내 차고 사고날 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울입니다.
이제 거울을 본다고 하였을 때 거울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 거울을 보는 자세, 거울을 보는 마음가짐이 어떠해야 되는가 하는 것이 본 비유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영적인 의미라 하겠습니다. 모든 만물이 다 그렇다고 하겠지만 사람은 자기 자신을 보아야 함에도 자기가 자기를 볼 수 없게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자기 음성은 들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우리가 그냥 그 때 그 때 말하면서 듣고 느끼고 있는 그 음성이 자신의 음성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른 과학적인 설명도 있겠지만 그것은 사람의 귀가 옆에 붙어 있어서 소리나는 바로 앞에서 듣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자기의 음성을 듣는 것도 그럴진대 더욱이 자기 얼굴은 전혀 볼 수가 없게되어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리고 보는 것이라고는 다른 사람의 얼굴만 보고 있으니 그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탈무드에 보면 굴뚝 청소를 하고 나온 두 청년이 서로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너 얼굴이 왜 그렇게 더러우냐며 비웃고있는 내용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결론은 자기 쪽이 깨끗하다는 것은 자기 마음일 뿐이지 같은 길을 거쳐 왔는데 한 쪽만 깨끗할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저쪽 얼굴이 더러워졌으면 자기 얼굴도 더러워졌을 줄을 알아야지 자기 얼굴을 못 보았다고 해서 나는 깨끗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처럼 잘못된 것이 어디 있느냐는 말입니다.
진정 자기를 보기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상한 얼굴을 보면서 내 얼굴 이상한 것을 알고, 다른 사람의 사건을 보면서 그 사건을 나의 사건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마음 자세가 바로 거울을 보는 마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건이나 물체, 혹은 인격이나 역사에 자기를 투영시켜 자기의 참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곧 거울 보는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거울을 봄에 있어서는 가져야 하는 절대적인 조건이 있는데, 그 첫째는 거울에 비친 사람과 자신과는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에서도 이것이 다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추녀는 거울을 싫어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만은 거울을 보지 않는다고 자기의 얼굴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는 것이 거울입니다. 자기 얼굴이 보기 싫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거울에 비춰진 얼굴을 그대로 자기의 얼굴로 받아드릴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서야 거울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저기 저 모습과 나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고 그런 사람에게는 거울을 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거울의 역사를 놓고 보면 사람이 처음 자기의 얼굴을 비추어 본 것은 잔잔한 물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물 거울이라는 말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유리거울이 보편화된 것입니다.
칙합니다. 그래서 온 교인들이 찬송을 부르며 기뻐하고 있는 터인데, 부흥회가 끝나는 날 그 교회의 어떤 장로님 부인되는 분이 이불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교회로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본 목사님이 "그 이불보따리는 왜 가지고 들어오십니까?"하고 물었더니 "우리는 집에 가지 않고 여기에서 살랍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건 왜요?"라고 하였더니 "우리 장로님이 교회에서는 저렇게 은혜가 많고 좋은데 집에만 갔다하면 당장 마귀가 되어 버리니까 아주 여기에서 요대로 살랍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 보면 천사와 같고 어떤 때에 보면 이제 막 지옥에서 튀어나온 악마와 같으니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정말 말씀 그대로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해서 엎치락뒤치락 합니다. 그런데 자기자신의 그런 모습은 '인간인 고로'라는 관용으로 보아주면서 왜 다른 사람이 엎치락뒤치락 하는 것에 대해서는 그토록 냉철하게 심판만 하려고 드는 것입니까? 그래서 흔히들 말하기를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바다처럼 관용하고 남에게 대해서는 바늘처럼 예민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은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광야 교회라는 것은 애굽에서 나오긴 나왔으므로 원칙적으로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옛 습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한 채 이렇게 머물러 있는 거십니다. 그리고 이 많은 시련이 많은 사건 속에서 엎치락뒤치락 하면서 지금 성화 되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앞으로 들어가게 될 가나안 땅에서 지킬 소중한 율법을 미리 받아 그 법을 하나 둘씩 익혀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 새로운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란 천국 생활을 위한 오리엔테이션 기간입니다. 이는 마치 영화의 예고편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이것이 모두가 아닙니다. 저 하늘나라의 영원한 세계를 오늘 여기에서 보여주는 하나의 예고편 적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사랑과 겸손을 배우고 인내를 배우는 등 필요한 것들을 다 배워 나가고 있는 이것이 바로 교회 생활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온 그 길고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간다면 가나안에 가더라도 살지를 못합니다. 공간적으로 땅만 옮겨 놓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마치 돈이 좋다고는 하지만 돈을 관리할 줄 아는 지혜와 능력과 인격을 갖추기 전에 돈을 주면 다 망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고 결국은 나라도 망하게 만들 수밖에 없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돈주세요, 돈주세요."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것처럼 한심한 소리가 없으실 것입니다.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주시겠습니까? 아직 주시지 않는 것은 주어서는 안될, 혹은 자격 미달이기 때문에 주시기 않는 것입니다. 요즈음도 가만히 보면 재산을 가지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가졌기 때문에 살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이 시끄러운 것도 가져야 할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고, 오히려 가져서는 안 될 사람이 가진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시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격미달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간의 긴 훈련 코스를 만들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인데, 오늘 사도 바울은 그 사건을 거울로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악을 즐겼다고 하였습니다. 즐거움을 악에서 찾는 생활! 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오늘 우리 주위에도 보면 소위 오락을 한답시고 다른 사람의 눈을 가려 놓고 넘어지고 실수하는 것을 보면서 좋아라고 웃으며 박수를 치고 하는데 이런 짓이 어디에 있단 말입니까? 그렇게 꼭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을 보고 웃는 것이 웃음이라면 그 오락은 죄입니다. 우리네의 웃음을 놓고 보면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좋은 뜻에서의 웃음이 많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코미디언들이 텔레비젼에서 자기들의 답답한 심정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그들의 말인즉 다른 나라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욕도 해보고, 심지어는 교황을 비웃기까지 하면서 마음대로 유머를 만들거나 웃기고는 하는데, 우리는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며 다 안 된다고 하기 때문에 병신노릇 밖에 달리 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병신노릇이나 보고 웃는 것이라면 그 웃음은 죄이지 어떻게 그것이 선일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께서는 무엇을 즐기고 있습니까? 우리의 즐기는 바 그 출처가 정말 어디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대체로 보면 악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이야기는 굳이 밝히지 않더라도 여러분께서 충분히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이 악을 즐기고, 악에서, 스릴을 느끼는 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이고 보면 이래도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할 일이 없을 때에 악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간음을 했으며, 간음을 한 결과 하루에 그만 3천명이 죽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속에 살면서도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죽었습니다. 게다가 특별히 큰 죄를 지은 것은 원망죄입니다. 믿는 사람이 제일 범하기 쉬운 죄가 원망죄인데 이는 불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원망이란 자꾸만 그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는 내 자신에 대한 원망이 물질에 대해서 원망하게 되고, 친구에 대해서 원망하게 되며, 그리고 형제에 대해서 원망하다가 마침내는 부모를 원망하게 되고 세상에 태어난 것을 원망하게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모든 원망은 하나님께로 통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하나님을 원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40년간의 훈련 코스가 못마땅한 것입니다. 왜 가까운 직선 코스로 가지 않고 이리도 빙빙 돌면서 광야로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이며, 그리고 당장 가야 되겠는데 40년이 웬말이냐고 하는 원망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코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시간, 하나님께서 훈련하시는 방법 이 모든 것들이 못마땅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문제를 두고 절대 하나님을 원망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그대로가 다 내게 필요하기 때문에 주신 것입니다.
자기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는 사도 바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도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처럼 지금의 내 처지 이대로가 내게 주신 가장 큰 은혜요, 하나님의 충분한 사랑의 표시임을 알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제 더 이상 원망하지 마십시다. 생각이 모자라더라도 원망하지 말고, 자녀로 인해서도 원망하지 말며, 물질 혹은 정치가 어떻다며 너무 원망하지 맙시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시 한번 거울을 봅니다. 거울을 통하여 자신을 보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죄스러운 모습을 보는가 하면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게 됩니다. 내 믿음의 상태와 정도를 거울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거울로 보면서 내 운명을 보십시다. 이렇게 원망하다가는 저렇게 죽어갈 것입니다. 여기 이렇게 회개하고야 저렇게 구원받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울을 통하여 나의 운명, 나의 미래, 나의 종말을 보는 마음을 가져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거울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 잡다한 현실 속에 깊이 계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는 거울을 보는 마음으로 성경을 대하고 그 사건, 그 인물을 거울로 삼아 그 속에서 언제나 내 모습, 내 믿음, 내 운명을 보며 더욱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볼 줄 아는 그런 은혜가 함께 있어야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의 결론으로 11절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기록된 말씀을 이렇게 받아 드릴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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