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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선지자를 삼가라(마 7:15~23)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제 산상보훈의 마지막 부분으로 본문은 경고의 말씀입니다. 엄밀히 구분하면 바로 앞 장(마 7 : 13-14)에서 산상보훈이 끝나고 여기부터는 부록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에서는 교훈 자체를 말씀하기보다는 교훈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먼저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는 소극적 의미의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특별히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와 교인들에게 필요 적절한 말씀입니다. 선지자(prophet, prohe:tais)라는 말의 의미는 "있는 그대로 말한다"는 뜻입니다. 선지자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앞의 일을 미리 알아서 예언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본래의 뜻은 시간적인 차이를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 역시 번역에서 오는 오해입니다. 선생님이라고 할 때 선(先)자를 썼다 해서 반드시 먼저 태어난 사람이 선생님이 아니듯이 선지자의 선(先)자가 어떤 사실을 먼저 아는 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를 제사장과 대조해서 설명하면 보다 쉽게 이해 될 것입니다. 제사장은 사람을 대표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고,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사람에게 오는 자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뜻을 하나님께 전달하는 자를 제사장이라고 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달해 주는 자를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의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사람까지를 포함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여러 사람이 선지자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바울도 선지자이고 바나바와 유다도 선지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사람에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가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권위로 오기 때문에 높은 존경을 받습니다. 마귀는 그 높은 존경을 기회로 삼아서 자기의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므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순종도 좋고 믿음도 좋습니다만 그러나 지혜가 없으면 순종이 맹종이 되고 맙니다. 충성도 좋지만 소속이 잘못되면 엉뚱하게 간첩이 되지 않습니까? 어느 방향으로 충성하느냐가 문제이며 어느 교훈을 따르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 한국 교인들은 열심에 대해서는 최상급입니다만 지혜가 부족합니다. 앞뒤 가릴 것 없이 열심히 따르다가 저만큼 가서 돌이킬 수 없을 때에 비로소 정신을 차리니 그 때는 늦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잘 만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언젠가 김 형석교수의 강의에서 행복한 사람의 조건을 그 분의 개인적인 견해로써 말씀하신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무리가 없을 줄 압니다. 둘째는 학창시절 동안 한번은 사립학교에 들어가서 기숙사 생활을 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경험이 없다는 것은 불행하다는 뜻입니다. 공부에서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숙사 생활에서 얻는 종합적인 교육은 일생 동안 좋은 교훈이 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선생님을 잘 만나는 것입니다. 훌륭한 스승과의 만남은 성장기에 있는 청년들에게 풍성한 밑거름은 물론 일생에 있어서 일대 전환기를 줄 수 있는 중요한 계기임은 누구나 시인하는 바입니다. 이렇게 지식을 얻고 살아가는 지혜를 배우는 데도 스승의 영향력이 크게 문제일진대, 하물며 우리 영혼을 인도하는 스승의 문제는 얼마나 심각한 일입니까? 한마디로 목사님을 잘못 만나면 큰 일이라는 말입니다. 물론 교역자도 교인들을 잘 만나야 하지만 교인들은 절대적으로 교역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교역자를 완전히 믿고 따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습니까? 만약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서 진짜인지 가짜인지 하며 들어야 한다면 그야말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를 바로 만나서 온전히 따를 수 있다면 큰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 중에는 가짜가 있다는 것이 오늘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이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본문은 경고를 하면서 거짓 선지자의 정체와 속임수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우선 거짓 선지자의 정체는 양의 옷을 입은 이리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하필이면 양의 옷을 입었나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만 양의 가죽은 그 당시 이스라엘의 양치는 목자들이 입는 옷입니다. 그러니까 양의 옷을 입은 자들은 양치는 목자로써 양을 먹이고 보살피는 보호자입니다. 그리고 이리는 양을 잡아먹는 짐승의 대표입니다. 물론 양을 헤치는 동물로는 사자나 호랑이도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장 많이 습격을 당하게 되는 동물은 이리였습니다. 이리들은 특별히 떼를 지어 다니므로 한 번 습격을 하면 목자가 있어도 속수 무책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양을 잡아먹는 이리가 목자인 것처럼 양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거짓 선지자가 진실한 목자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나타나므로 잘 구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유를 들어서 거짓과 참에 대한 분별을 말씀하십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마 7 : 17) 나무를 알려면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라는 것입니다. 말(言語)이 교훈이라고 한다면 행위는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외모를 보고 판단치 말고 행위를 보고 알라는 것입니다. 둘째로 열매를 보는 이유는 나와 그와의 관계가 아니고 다른 사람 또는 일반 사물과의 관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나의 눈에는 아름답게 비치어서 양의 옷을 입고 있는 목자로 보이지만 그것만 보지 말고 다음 일을 보라는 말입니다. 언젠가는 정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의 행위의 결과가 반드시 드러나게 됩니다. 흔히 중매를 할 때에 상대방을 바로 알기 위해서 일단 한 번 만나보라고 권합니다. 사실 또 만나보면 그를 바로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만나면 모르게 됩니다. 눈과 눈이 마주치면 분별력을 잃고 맙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서 알고 싶거든 멀리서 보고, 그와 그의 친구와의 관계가 어떠하고 그의 사회 생활이 어떠한가를 물러서서 보라는 것입니다. 나를 얼마나 사랑할 것인 가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와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행위의 열매를 어떻게 맺어가고 있나를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나쁘더라도 나와는 좋을 것이다라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다른 관계가 나쁘면 나하고도 나쁠 것을 예상해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집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는 말처럼 자기버릇 남주지 않는 것입니다. 잠시동안은 감추고 속일 수 있지만 언젠가는 정체가 나타나므로 그 열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세째, 열매를 보라는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좀 수상하더라도 조급해 하지 말고 기다려 보아야 합 니다. 나무로만 구별할 수 없거든 찬바람이 불고 가을이 와서 열매 맺는 것을 보면 정확히 알 수 있지 않습니까? 필자는 식물에 대해 문외한이지만 어릴 때 늘 감나무를 보고 자랐습니다. 그래서 나무하면 제일 먼저 감나무가 생각납니다. 감나무의 일종으로 고염나무가 있는데 열매가 감과 비슷하지만 아주 작습니다. 그런데 이 고염나무와 감나무가 거의 비슷해서 구별할 수가 없지만 가을이 되어 열매가 맺어지면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힐 때까지 인내하는 기다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분별력으로 일단 참 목자를 구별하게 되면, 그 후로는 전적으로 믿고 따르는 일만 남게 됩니다.
주후 100년경에 기록된「디다케」(Didache)라는 고대문서가 있습니다.
디다케는 헬라어로 가르친다는 의미가 있는데 이 책의 내용은 옛날 초대교회의 질서에 대한 교훈서입니다. 그래서 격언식으로 "이렇게 하라, 또는 저렇게 하라"고 교훈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에 대한 재미있는 교훈이 있어서 몇 가지 소개하려 합니다.
첫째는 참 선지자를 만나면 그를 최고로 높이고 영접하며 그의 교훈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지자가 말씀을 자유롭게 전하도록 환경을 보장해 주라고 했습니다. 셋째는 그가 하루를 머물겠다고 하면 아주 잘 대접하고 이틀까지도 좋다고 영접하되, 사흘을 머물겠다고 하면 그가 거짓 선지자인 줄을 알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는 선지자도 탁발(托鉢)적으로 보따리만 들고 무전여행처럼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 이틀은 대접을 잘하되, 사흘을 머물겠다고 하면 그것은 전도하는 목적에서 벗어나 인정에 끌리는 것이므로 잘못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혜롭고도 재미있는 기준이라고 생각됩니다. 넷째는 그가 빵 외에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이 없으면 참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저 한끼 먹을 것만 있으면 족한데, 만일 돈을 요구하면 가짜 선지자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어디든지 돈이 게재되면 마음이 흐려지게 됩니다. 요즘 현금주의가 팽배하여 곳곳에서 만들어진 부조리가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특별히 변호사, 의사, 목사등 세 가지 직업이 돈을 생각하면 그 사회는 망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볼 때에, 병 이전에 돈부터 생각하고 변호사가 변호할 생각보다 돈부터 계산하며, 목사가 돈에 연연하면 그 사회는 끝났다는 뜻입니다. 필자가 목회학을 강의할 때 특히 강조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목사가 적어도 돈에 관해서는 초월할 수 있어야 목사로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다섯째는 방언으로만 말하는 선지자는 거짓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방언으로만 말해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결국 자신이 신령하다는 것을 보이고 싶은 의도가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여섯째는 선지자들이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당연하되, 선지자 자신이 가르치는 바를 행하지 아니한다면 거짓 선지자인줄 알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는 기도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기도하라 하고, 자기는 봉사하지 않으면서 남에게는 봉사하라 하며, 자신은 게으르면서 남에게는 부지런하라 하면, 그가 거짓 선지자인 줄 알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일곱째는 식사 기도를 방언으로 하면 거짓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식사 기도에 왜 방언이 필요합니까? 여덟째는 그가 다른 사람의 어려운 점을 돕자고 하면, 그는 참 선지자이니 그를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디다케라는 책 속에서 이천 년 전의 교회에서 있었던 교훈을 잠깐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거짓 선지자와 참 선지자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란 잠시동안은 가장할 수 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자기 욕망, 욕심등이 드러나고야 맙니다. 본래가 돈이 욕심이었다면 언젠가는 돈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목적이 명예였다면 자기영웅주의가 반드시 드러나고야 마는 것입니다. 성경을 교묘하게 인용해도 마지막에는 인간적인 자기 철학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오랫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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