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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비의 그 자녀(요 8:42~50)

by 【고동엽】 202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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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비의 그 자녀(8:4250)

 

이 본문은 예수님께서 유대인들(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변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대체적으로 변론이란 피곤한 일입니다. 물론, 내 말을 상대방이 잘 들어주고 믿어 준다면 말하는 것이 좋은 휴식이 될 수 있습니다만, 상대방이 의심하고 왜곡하며 책잡으려고 마음을 도사리고 있으면 이것처럼 피곤한 일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당하신 어려움 중의 하나가 당신의 말씀을 저들이 믿지 않고 나쁜 방향으로만 계속 몰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마지막 통첩으로, 너희들은 마귀의 자식들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포기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8:44). 믿지 않는 것은 너희들이 믿지 않겠다고 해서 안 믿는 것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로서 처음부터 믿지 않도록 그렇게 만들어진 사람들이라고 심판적으로 결론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여러 차례 인용했습니다만 믿음은 선물입니다(2:8). 그러므로, 나의 어떤 노력이나 결심과 참회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믿는 마음을 주셔야 비로소 믿게 됩니다. 믿는 데에는 다른 어떤 이유가 없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믿지 않는 이유를 상대방에게 돌리기를 좋아합니다. 당신이 나를 속였고 환경이 그랬으므로 나는 믿지 않았다고 남을 탓합니다. 그러나, 믿는다는 것은 객관적인 이유에 있지 않고 주관적인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이유가 부족해서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믿지 않도록 된 사람이기에 안 믿는다고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믿는 마음은 하나님께서 주셔야 하고, 또 계속 믿음을 성장시켜 주셔야 우리는 믿음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공로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믿지 않는 것보다는 믿을 수 없는 심판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으므로, 내가 믿었다고 해서 공로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유대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고 지금까지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1 : 1에서, "우리는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했고, 사도 바울도 "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눈으로 본 바요, 귀로들은 바요, 손으로 만졌다"고 증거했습니다. 보고 듣고 만졌다고 믿어집니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믿는 자로서 할 수 있는 말입니다. 내가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사건마다 체험을 했노라고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말할 수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 편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았다고 믿고, 들었다고 믿으며, 만졌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았다고 믿고 만졌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믿고 보니 깨닫게 되고 믿음으로 들으니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에게는 어떤 증거도 소용이 없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예수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꿈속에서라도 보지 못했으니,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자기 대변을 하며, 만일에 내가 예수님 당시에 태어나서 그 분을 직접 보았다면 잘 믿었을 것이라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그 당시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온갖 이적과 말씀을 보고 들었어도 믿지 않는 자는 끝까지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핍박하고 드디어 십자가에 못박을 정도로 악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면, 믿음이 생기는 구조, 즉 지식이 생기는 과정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흔히 교육학적으로 말하기는, 알고(knowledge) 받아들이고(acceptance) 실천하는(practice) 세 과정을 통해서 지식을 얻는다고 합니다. 일단 사리적으로 지식적으로 깨닫고,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그리고 실천한다는 것입니다. 이래야만 확실하게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는 것임을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감정이 지식보다 앞서서 그 사람은 무조건 싫거나 좋을 때가 있습니다. 뚜렷한 이유 없이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이 나쁘면, 그가 하는 말은 믿어지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지만 싫은 감정이 앞서는 것입니다. 또한 꿈과 현실을 혼돈하여 꿈속에서 그 사람과 싸웠으면, 실제로도 나쁜 감정을 가지고 그를 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야만인일수록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꿈을 현실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모든 미신적인 종교가 꿈과 깊게 관련되어 있음을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일입니다.

또 하나는 의지가 감정보다 앞서는 경우입니다. 그래서, 애초부터 안 믿기로 결심했거나, 굳어져서 회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적이나 말씀에서도 전혀 동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향해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완악하고 굳어버린 사람이므로, 그들에게 무슨 믿음이 생기고 무슨 지식이 전달되겠습니까? 성경의 앞뒤 문맥을 살펴보면, 그들에게는 말씀을 받아들일 자유가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마음을 자신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욕심과 교만과 거짓과 사악함에 있습니다. , 그들의 심령은 죄악에 매여서 노예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샤마니즘식으로 표현을 하자면, 무엇인가에 씌여서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인가에 꽉 붙들려 있지 않고서는 그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가 그들 속에 들어 있다는 뜻으로 옛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겸손할 수도 진실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회개할 수 있는 자유마저도 빼앗긴 자들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마귀의 자식이 변해서 하나님의 자식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였는데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까? 간단히 테스트 할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8:43).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다가오는 사람, 심지어는 옷자락이라도 만지려는 사람에게 그의 믿음을 보시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가진 믿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단순히 예수님께 가까이 가고 옷자락만이라도 만지기만 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마음 하나뿐입니다. 그가 성경을 잘 아는 자는 물론 아니었습니다. 단지 예수님께로 나아오는 그 마음을 보고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했다, 빨리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필자는 여러분들이 교회에 나오는 그 자체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나올 때마다 말씀을 깨닫고 나올 때마다 말씀이 들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졸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생각으로 말씀을 놓칠 수도 있습니다만, 부지런히 나오는 것 자체가 믿음이요 순종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시금석이 되어 우리의 믿음은 자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어야겠다는 그 마음 자체가 귀한 것입니다.

교인들 중에서 "내가 천당 갈 것인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말하기를, 천당 갈까 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간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말의 뜻은 "잘 믿어야 할 텐데"라는 마음에서 생기는 걱정이니까요. 그러나, "나야 틀림없이 천당 간다" 라고 장담하는 사람은 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언제나 아쉬운 것으로 내가 정말 사랑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랑하지 않은 자입니다. 나는 사랑한 것이 없고 사랑 받은 것뿐이다라고 겸손하게 생각하는 자만이 진정한 사랑을 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본문에서 내 말이 믿어지지 아니하면 들을 줄을 모른다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8: 43). 중요한 것은 들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듣다보면 동화작용이 일어나고 승화작용이 나타나고 중생의 역사가 그 말씀 속에서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그 말씀에 대한 반응(reaction)이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자녀인지 아닌지가 구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나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마귀의 자녀란 어떤 사람입니까? "너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8:44). 마귀는 본질적으로 처음부터 살인자입니다. 살인 전에는 미움이요, 미움 다음에는 질투이며 그리고 살인으로 통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최초의 살인은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에서 나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형은 하나님께 믿음 없이 제사를 드렸고, 동생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제사를 드리고 싶어 드린 것이 아니라, 동생이 드리니 질투가 나서 형식적으로 적당히 드렸습니다. 그러나, 아벨은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름다운 제사를 드렸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벨을 제사만 받으신 것입니다. 분명히 둘 다 제사를 드렸지만, 형식적인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자, 가인은 몹시 불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불만이 왜 아벨을 죽여야만 했습니까? 아마도 어리석은 생각으로 아벨을 죽이면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실 것이 아닌가 하는 질투와 시기가 살인까지 몰고 간 것으로 보입니다. 미움, 질투, 시기는 분별력을 잃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선한 동생을 죽임으로 해결하려는 마귀의 마음입니다. 인간 심리의 아주 어두운 면입니다. 이것은 마치 달리기 경주에서 내가 잘 뛰어서 앞서는 것이 아니라, 앞에 있는 사람을 잡아당겨 넘어뜨리게 해 놓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에 장기를 배워서 며칠 재미있게 두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버님께서 조용히 타이르시기를 "장기가 죄는 아니다. 그러나, 장기 두는 마음은 좋은 마음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장기 두는 마음은, 상대방에게 함정을 만들어 놓고 거기 들어오면 잡아먹는 것이니 좋은 심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그 말씀이 제게 잘 받아들여져서 그 이후로는 장기를 그만 두었습니다. 장기나 트럼프, 각종 도박 등이 모두 남을 걸고넘어지는 것으로, 가인의 마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경쟁심도 좋게 쓰면 그 이상 좋은 것이 없겠지만, 경쟁심의 방향이 비뚤어지면 상대방을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서려는 나쁜 마음으로, 결국은 살인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살인의 뒤에는 대개가 질투와 시기가 도사리고 있으며, 이 마음은 곧 마귀의 마음인 것을 분명히 알았으면 합니다.

다음, 마귀란 거짓말장이입니다. 에덴 동산에서 마귀가 이브를 유혹할 때 다섯 마디를 했는데 그 중에 네 마디는 참말이고 한 마디가 거짓말이었습니다. 옳은 말만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 결정적인 순간에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거짓말을 하며 또한 거짓을 조장합니다. 그래서, 진리를 싫어하고 빛보다 어두움을 좋아하며 참된 것을 질투합니다. 또한 마귀의 지혜는 대단합니다. 어디서 그런 지혜가 나오는지 기가 막힙니다. 이런 마귀의 속성을 가진 자가 바로 너희들이라고 예수님은 오늘 심판하고 계십니다. 정말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한 모습을 보시면서 마지막으로 "누가 나를 책잡겠느냐"고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8:46). 이 말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이것을 주제로 하여 쓴 책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 나를 책잡겠느냐" 대단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을 책잡으려고 했지만,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전혀 책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이라면 나라법도 잘 지키고 신사도도 지키고 이웃 관계도 바로 하여 양심에 이르기까지 책잡을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전혀 예수님으로부터 책잡을 것이 없자, 그들은 이제 귀신이 들렸다고 말을 합니다.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8 : 48). 마귀들로부터 귀신들렸다는 말을 듣는 것은 괜찮습니다. 그들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부정한 사람이라는 뜻이 있는데, 원 기록인 아랍말을 보면 "마귀의 자식"으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을 헬라어로 옮기면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번역을 했다고 해설자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유대인들은 욕으로 "귀신들렸다. 사마리아 사람이다"라고 예수님께 말했지만, 그들은 악한 마귀의 자식들이었기에 오히려 전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좋은 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와서 한참 선교할 때에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어느 선교사가 한국 사람들이 싸울 때, 개새끼를 욕으로 쓰는 것을 보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개새끼는 털이 보송보송하여 귀엽고 특히 주인을 알아보며 꼬리를 흔들 때는 정말 예쁜 동물로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데, 어찌해서 개새끼가 욕이 될까 하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 말이 욕이 됩니까? 그 말의 뒤에는 부정한 자식이라는 끔찍한 뜻이 숨어 있습니다. 그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개로 통해서 났다, 즉 음란한 자식이라는 뜻이 있기에 그 말이 대단한 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귀신들렸다, 사마리아 사람이다라고 한 것은 다시 되풀이되지만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자기들 스스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런 욕을 듣는 것은 당연합니다. 대신에 도덕적이거나 율법적으로는 욕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가령, 세금을 내지 않았다든지, 군대를 기피했다든지, 교통 법규를 어기는 등 이런 문제에서 책잡힐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새 술에 취했다는 욕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습니다.

가령, 어느 회사에서 예수 믿는 사람은 전혀 채용하지 않겠다고 공고를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직장을 구하다가 직장이 없어 고전하는 중에 마침 이 회사를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믿는 사람이었지만 안 믿는 척하고 무사히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3년간 전혀 예수 믿는 것을 내색하지 않고 회사에 잘 다니고, 한편으로는 몰래 주일마다 교회에도 다녔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과연 믿는 사람입니까? 아닙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믿는 것을 숨겨서는 안 됩니다. 무엇으로든지 믿는 것이 나타나야지 몰래 믿는 것은 교인이 아닙니다. 나타나야 당연한 것입니다.

필자가 군에 있을 때 경험한 일입니다. 어느 날 좋은 일이 생겨서 파티가 벌어졌는데, 사령관이 저에게도 술을 권했습니다. 저는 안 된다고 했고 동료들은 억지로 먹이려고 야단을 했습니다. 끝까지 마시지 않았더니, 저에게 예수 15단이라는 별칭이 내려졌습니다. 사실, 술 한 잔 마신다고 크게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만, 믿는다고 전제해 놓고 이제 와서 마시면 오히려 무시당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권할 때 술을 먹으면, 당장은 융통성이 있어 보이고 훌륭하다는 칭찬을 듣지만 돌아서서는 별 수 없다는 비웃음을 받습니다. 끝까지 먹지 않으면 당장은 욕을 먹고 멸시 당하는 것 같지만, 그들의 중심으로 존경을 받게 됩니다.

저도 그 후에 사령관의 사랑을 많이 받고 공부하러 갈 기회가 왔을 때에 그 분께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듣는 욕이라면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귀신이라는 욕을 들었는데, 하물며 우리가 좋은 말만 듣고 살기를 원합니까? 가만히 생각하면, 거짓투성이인 세상에서 진리를 찾아 헤맨다는 것이 다른 차원에서 보면 미친 짓으로 보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모두가 서로 증오하고 서로 넘어뜨리려고 야단인데, 사랑을 말하면서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이 통할 리가 있습니까? 나를 미워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미친 사람이라고 욕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들의 면류관이요 영광입니다.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핍박은 받아야 합니다. 핍박이 없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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