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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격랑 속의 고요함(마가복음 4장 35절~41절)

by 【고동엽】 2022.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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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랑 속의 고요함(마가복음 43541)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고요한 가운데의 고요는 참 고요가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함을 얻어 와야 비로소 이것이 타고난 마음의 참 경계인 것이다'---동양인의 지혜를 모았다고 하는 중국의 고전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고요한 환경 속에서의 고요는 참 고요가 아닙니다. 사람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번화하고 소란한 환경 속에서 마음의 고요를 얻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참 고요인 것입니다. 소란한가운데서 고요함을 찾을 줄 알고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자기만의 고요함을 찾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야만 진정 고요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환경에 대처하는 스타일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환경에 좌우되는 종속적 인간입니다.

학술적인 용어로는 이렇게 되는 것을 어시밀레이션(assimilation)이라고 합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어컬처라이제이션(acculturiz-ation)이라고도 합니다. 동화(同化)라는 뜻이지요. 환경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되는 사람은 곧 동화적(同化的) 존재인 것입니다. 언제나 남을 따라가면서 동화하기를 잘하는 체질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섞이면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슬퍼합니다. 남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그를 미워하고, 한 대 맞으면 한대 때리고, 격한 가운데에 들어가 욕을 당하면 나도 욕을 보이는 타입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존재란 아예 없는 사람입니다. 그 인격은 오로지 환경의 산물(産物)일 따름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산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항거(抗拒) 체질의 인간형입니다. 환경에 늘 반항하는 역설적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학술적인 용어로는 이런 체질을 디시밀레이션(dissimil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부동화(不同和)내지 이화(異化) 작용을 뜻합니다. 언제나 거스르고 퉁깁니다. 반항해야만 되는 줄 압니다. 반항이야말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고 뜻도 모르면서 일단 반항부터 하고 봅니다. 그래야 자기가 살아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순히 나오면 자기가 지는 줄로 압니다. 덮어놓고 '노우' 해야 됩니다. '아니요!' 해야만 자기가 살아남는 줄 아는 이 철저한 반항심------현대의 젊은이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입니다. 남의 말을 다 들어 보지도 않고, 깊이 생각해 보는 법도 없이, 무조건 '노우'입니다. 반드시 젊은이들만 나무랄 일도 아닙니다. 소위 기성 세대들도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올시다. 이를테면 혼사(婚事) 문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 얼마나 똑똑한지 아십니까?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줄 아는 분별력과 사고력을 지닌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배우자를 택할 때에도 서로의 장래문제나 부모님의 기호(嗜好)까지 고려하면서 신중하게 선택을 합니다. 그렇게 '이 사람이다' 싶어 아름답게 교제하다가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을라치면 그 부모님들의 반응이 대부분 어떤지 아십니까? 무조건 안된다고 고개부터 가로젓습니다. 아들딸들이 신중하게 선택하여 사랑하고 있는 그 당사자를 한번 만나도 보지 않고 일언지하(一言之下)"노우!" 하는 것입니다. 이 무슨 심사입니까? 이래서 시끄럽고 복잡해집니다. 때로는 우리 교역자들이 중재자가 되어 일단 만나보도록 기회를 마련합니다. 만나 보고 나서는 "좋다"고 말하는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불신(不信)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살아오면서 속고 배신당하는 동안 불신이 체질화된 것이지요. 그러한 불신 체질이 병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순간도 ",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면 자기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아니요!" 하고 철저하게 반항합니다.

반항으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려는 것---소인배들의 자기 방어요, 어리석은 자들의 체질입니다.

셋째는 초월적 인간형입니다. 초월적 존재, 초연한 사람---학술적 용어로는 트랜센덴털리즘(transcendentalism)이라고 합니다. 일이 잘된다고 교만하지 않고, 억울함을 당해도 비굴하지 않으며, 야단스럽게 떠드는 자리에 가서도 조용함을 찾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뜻과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면서 살아갑니다. 요즘흔히 들려오는 말로 '주체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체'는 어디에서 찾는 것입니까? 따라가면 주체가 생깁니까? 반항함으로 주체의식이 살아납니까? 참된 주체의식, 자기 개성, 자기 존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환경을 초월한 초연적(超然的)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격자가 됩니다. 이렇게 초월할 때에 개혁하고 창조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맹종(盲從)도 아니고, 맹목적인 반항도 아닙니다. 원수의 말이라도 들어야 할 말은 듣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갈 길은 가고, 버릴 것은 버립니다. 엄연히 가야 할 자기 길을 가는 인격,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본문을 깊이 상고해 보면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에 놀라는 제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하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주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놀랐습니다마는 참으로 놀라야 할 것은 그 능력이 아닙니다. 풍랑 속에서도 고요하게 주무시는 바로 그 모습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풍랑과는 아무 상관없이 초연하신 예수님의 모습, 그 위대한 인격, 그 놀라운 샬롬, 평화---이것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작 놀랄 것을 놀라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에 놀라고있는 것입니다. 풍랑 때문에 놀라는 것도 어리석지만 풍랑을 고요케 하시는 능력, 단순히 그 능력 때문에 놀라는 것 역시 유치한 반응입니다. 정말로 놀라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해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한다면 그밖에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을 정말로 경외하는 사람은 이제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깜짝깜짝 놀라며 사는 사람은 세상일에 놀랄 것이 한가지도 없습니다. 정말로 고민해야 할 것을 진정으로 고민하며 사는 사람은 시시한 일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본문 중에서 고요하다고 하는 것은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크심을 말합니다. 그 마음과 그 영혼, 그 몸, 그리고 그 위대한 능력이 고요함으로 나타나고있습니다. 확정되어지고 있습니다. 성서신학적 이야기입니다마는오늘의 성경 본문을 원어 성경으로 읽어 보면 '메갈레'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여러분, 영어에 '메가톤(megaton)'이라는 단어가 있지요? 영어에서 보통 큰 것을 빅(big) 혹은 그레이트(great)라고 하지만 아주 큰 것을 나타낼 때는 메가(mega)라는 말을 붙입니다. '메가'라는 것이 원래 헬라어입니다. 가장크다는 말이지요. 다시 우리들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주 크다는 뜻을 가진 '메갈레'가 어디어디에 쓰였는지 알아봅시다.

첫 번째로 "큰 광풍이 일어나며"에서 광풍의 크기를 말할 때에 쓰였습니다. 원문을 보면 '메갈레 아네무'라 했습니다. 광풍 중에서도 아주 큰 메가톤급 광풍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바람에게 명령하여 바다가 고요해진 장면에서 쓰였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했는데 원문에서는 역시 '메갈레'가 쓰였습니다. '갈레네 메갈레'---- 아주 큰 메가톤급의 고요함이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로 "심히 두려워하여"'메갈레'가 쓰였습니다. '포본메간'---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사람들이 메가톤급으로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메가톤급이 세 개입니다. 큰광풍이 메가톤급이요, 고요함이 메가톤급이요, 놀라는 마음이 메가톤급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 사는 것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극에서 극으로---모든 것이 메가톤급입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 그렇게 요동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반응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풍랑 가운데에 가만히 주무시고 계셨지만 풍랑이 일고 있는 것은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너무 깊이 잠드셔서 풍랑이 이는 줄도 모르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풍랑을 알면서도 고요함을 찾아 편히 쉬실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믿음이요,주님의 마음이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보면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비행기 안에서 취하는 태도들도 참 가지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은 열세 시간씩이나 날아가면서 한잠도 못잡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꼬박 열세 시간을 버팁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식사는 그대로 밀어놓습니다. 그리고는 벌벌 떨고앉아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그런 분께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고소공포증(高所恐怖症)이 있는 분이신지 무서워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죄가 많은가 보다.'여러분, 사람의 공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죽을까봐 걱정이고, 둘째, 지옥갈까봐 걱정입니다. 사실이지 비행기 여행만큼 신나는 것도 드물지 않습니까? 저는 탈 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탑니다. 옛날에 태어났다면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것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비행기 덕분에 하늘높이 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뿐만 아니라 시간마다 음식잘 주니 좋고, 승무원들이 이모저모 신경 써주니 불편한 데 없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전화 오지 않아 제일 좋습니다. 만사 태평입니다. 비행기 타고 가다 사고 나면 어쩌냐고요? 그게 무슨 걱정입니까? 사고 나면 하늘나라로 직행할 것 아닙니까? 비행기 타고 많이 올라왔으니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모르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니 참 불행한 일입니다.

시끄러운 소리, 하다못해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도 의인에게는 단잠이 있습니다. 고요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요, 영적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826절을 보면 "믿음이적은 자들아!" 하고 꾸짖고 계십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이지 환경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 믿음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 문제도, 격동하는 사회 문제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믿음의 문제라고 우리 주님이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믿음은 도대체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믿는확실한 믿음---바로 그것입니다. 특별히 십자가로 보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오늘도 내 운명을 좌우하시고 나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안기듯이 이 풍랑 속에서도 평안과 고요함을 찾아간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632절은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 중에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고요하셨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십니다. 다음날 아침이면 저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긴장된 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눈앞에 십자가의 고통이 있습니다. 부조리하고 모순된 빌라도의 재판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도망가 버리는 뼈아픈 배신도 있습니다. 혼자 남겨지는 고독이 있습니다. 외로움이 있습니다. 이처럼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고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왜입니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결코 예수님 혼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은 평안했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큰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될 것을 믿고 계셨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풍랑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까짓 풍랑으로 해서 하나님이 손해보실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생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풍랑을 타고 목적지까지 더 빨리 갈 수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로마로 가는 중입니다. 그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사나운 풍랑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형편입니다. 짐은 다 풀어서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열 나흘 동안을 굶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가지고 말합니다. "배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7:22-25)."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다 이루어질 것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풍랑으로 인하여 괴로워하십니까? 이 풍랑 때문에 목적지까지 더 빨리 갈 수도 있습니다. 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지언정 이 격랑이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거나 하나님의 일에 한치라도 지장을 줄 수는 없음을 우리는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자---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사역을 확실히 믿는 사람한테는 아무 두려움도 없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존 웨슬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 모든 뜻이 다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내가 절대로 죽지 않는다." 내게 향한하나님의 경륜이 그 누구의 실수, 그 누구의 잘못으로도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풍랑도 하나님의 사역을 결코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이것을 믿는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경륜과 동요는 별개의 언어임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경건한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이요, 고요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사람들은 격동합니다. 벌벌 떱니다. 소란을 피웁니다. 이것이 가장 나약하고 불신앙적인 태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가 한 삼십 년 전쯤 인천에서 부목사 일을 볼 때의 이야기입니다. 원목이신 이기영목사님과 함께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신문 배달하는 소년이 신문을 던져 주고 갑니다. 그런데 신문에도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님께 먼저 신문을 드립니다. 목사님이 다 읽으신 다음에 보려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신문을 둘둘 말아쥐고 밖으로 나가십니다. 저도 지금 신문을 보아야 되겠는데요.

그래서 "목사님, 신문을 가지고 어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목사님은 신문을 펴들고 큰 글자만 보여주십니다. "이게 이렇게 됐어."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서 신문을 펴놓고 "하나님, 이것 보십시오" 하면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들 떠드는 것입니까? 떠든다고 해결이 됩니까? 이 동요와 격동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밑으로 내리달을 뿐입니다. 이 격동, 이 격랑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조용히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이 닥쳐올 때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시다가 체포되는 순간베드로는 칼을 휘두르고, 횃불을 든 사람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도망을 가고 맙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예수님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 : 11)."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당신께서 마셔야 할 십자가의 잔을 생각하실 때에 예수님의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죄인은 당황합니다.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 믿을수록 점점 더 두려움이 앞섭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정말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내가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 말마따나"천당 지옥을 믿지는 않지만 만일에 있다면 틀림없이 지옥일 것"이라고---믿거나 말거나 정말 천당 지옥이 있다면 내가 갈 곳은 지옥이지 별수 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불 신앙의 사람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언제든지 최악의 경우만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언제나 최선의 경우를 생각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바라봅니다. 내 생각이나 내 지혜와는 다르지만 이 풍랑이 결국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큰 뜻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이 비상 사태가 발생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풍랑을 꾸짖으십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꾸짖는다는 말을 원문에서 찾아 보면 '에페티메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귀신을 내쫓을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25절의 '꾸짖어 가라사대'를 원문에서 찾으면 역시'에페티메센'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타협적인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격랑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명령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내가 격랑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고요함으로 격랑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격랑을 밀어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초연한 모습입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 터툴리안은 말했습니다. "교회는 배요, 세상은 격랑하는 바다이다." 항해 중에 배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침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뜻이 그 배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힘은 고요에 있고, 그 속에서 확증됩니다. 오히려 그 격랑 때문에 예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가 만 주의 주되심이 거기에서 확증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 풍랑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믿음을 가지고 다음에 오는 격랑 속에서 고요함을 찾아나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평화, 이 지혜, 이 고요함 속에 능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성공하려면 3P(three P)가 있어야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P자로 시작되는 세 가지---페이션스(patience), 프랙티스(practice), 피스(peace)가 있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인내가, 둘째는 실천력이, 그리고 셋째로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인내와 실천력이 있어도 평화가 없으면 헛일입니다. 학생들이 시험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이 평화로워야 합니다. 고요해야 합니다. 무슨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마음의 안정과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요한 중의 고요가 아니라 격랑 속의 고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랑 속에서도 조용함을 찾아 쉬시던 주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고요함 속에 고요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에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현장에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은 어디에나 고요함이 있습니다. 풍랑 속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면 고요하고, 고요한 바다에도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폭풍과 전쟁과 어려운 역경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계신 곳에 참고요가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평생 칼빈을 연구한 어느 분이 말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어찌나 두려워했던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정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격랑 속에서 초연한 고요를 가질 때, 여기에 승리의 생활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633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격랑 속의 고요함(마가복음 43541)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저희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부딪혀 배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더라.

 

'고요한 가운데의 고요는 참 고요가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함을 얻어 와야 비로소 이것이 타고난 마음의 참 경계인 것이다'---동양인의 지혜를 모았다고 하는 중국의 고전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고요한 환경 속에서의 고요는 참 고요가 아닙니다. 사람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번화하고 소란한 환경 속에서 마음의 고요를 얻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참 고요인 것입니다. 소란한가운데서 고요함을 찾을 줄 알고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자기만의 고요함을 찾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야만 진정 고요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환경에 대처하는 스타일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환경에 좌우되는 종속적 인간입니다.

학술적인 용어로는 이렇게 되는 것을 어시밀레이션(assimilation)이라고 합니다. 문화인류학에서는 어컬처라이제이션(acculturiz-ation)이라고도 합니다. 동화(同化)라는 뜻이지요. 환경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되는 사람은 곧 동화적(同化的) 존재인 것입니다. 언제나 남을 따라가면서 동화하기를 잘하는 체질입니다.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섞이면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슬퍼합니다. 남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그를 미워하고, 한 대 맞으면 한대 때리고, 격한 가운데에 들어가 욕을 당하면 나도 욕을 보이는 타입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존재란 아예 없는 사람입니다. 그 인격은 오로지 환경의 산물(産物)일 따름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산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항거(抗拒) 체질의 인간형입니다. 환경에 늘 반항하는 역설적 인간이라 하겠습니다. 학술적인 용어로는 이런 체질을 디시밀레이션(dissimila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부동화(不同和)내지 이화(異化) 작용을 뜻합니다. 언제나 거스르고 퉁깁니다. 반항해야만 되는 줄 압니다. 반항이야말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다할 이유도 없고 뜻도 모르면서 일단 반항부터 하고 봅니다. 그래야 자기가 살아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순히 나오면 자기가 지는 줄로 압니다. 덮어놓고 '노우' 해야 됩니다. '아니요!' 해야만 자기가 살아남는 줄 아는 이 철저한 반항심------현대의 젊은이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보이는 현상입니다. 남의 말을 다 들어 보지도 않고, 깊이 생각해 보는 법도 없이, 무조건 '노우'입니다. 반드시 젊은이들만 나무랄 일도 아닙니다. 소위 기성 세대들도 오십보소백보(五十步笑百步)올시다. 이를테면 혼사(婚事) 문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 있습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 얼마나 똑똑한지 아십니까?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줄 아는 분별력과 사고력을 지닌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배우자를 택할 때에도 서로의 장래문제나 부모님의 기호(嗜好)까지 고려하면서 신중하게 선택을 합니다. 그렇게 '이 사람이다' 싶어 아름답게 교제하다가 부모님께 결혼 허락을 받을라치면 그 부모님들의 반응이 대부분 어떤지 아십니까? 무조건 안된다고 고개부터 가로젓습니다. 아들딸들이 신중하게 선택하여 사랑하고 있는 그 당사자를 한번 만나도 보지 않고 일언지하(一言之下)"노우!" 하는 것입니다. 이 무슨 심사입니까? 이래서 시끄럽고 복잡해집니다. 때로는 우리 교역자들이 중재자가 되어 일단 만나보도록 기회를 마련합니다. 만나 보고 나서는 "좋다"고 말하는 부모님들이 많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불신(不信)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잘 믿지 못하는 사람들한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는 합니다. 살아오면서 속고 배신당하는 동안 불신이 체질화된 것이지요. 그러한 불신 체질이 병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순간도 ",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면 자기 존재가 완전히 소멸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조건 "아니요!" 하고 철저하게 반항합니다.

반항으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려는 것---소인배들의 자기 방어요, 어리석은 자들의 체질입니다.

셋째는 초월적 인간형입니다. 초월적 존재, 초연한 사람---학술적 용어로는 트랜센덴털리즘(transcendentalism)이라고 합니다. 일이 잘된다고 교만하지 않고, 억울함을 당해도 비굴하지 않으며, 야단스럽게 떠드는 자리에 가서도 조용함을 찾습니다.

자기 나름대로 뜻과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면서 살아갑니다. 요즘흔히 들려오는 말로 '주체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주체'는 어디에서 찾는 것입니까? 따라가면 주체가 생깁니까? 반항함으로 주체의식이 살아납니까? 참된 주체의식, 자기 개성, 자기 존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합니까? 환경을 초월한 초연적(超然的)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격자가 됩니다. 이렇게 초월할 때에 개혁하고 창조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맹종(盲從)도 아니고, 맹목적인 반항도 아닙니다. 원수의 말이라도 들어야 할 말은 듣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라도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갈 길은 가고, 버릴 것은 버립니다. 엄연히 가야 할 자기 길을 가는 인격,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본문을 깊이 상고해 보면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에 놀라는 제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하고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주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놀랐습니다마는 참으로 놀라야 할 것은 그 능력이 아닙니다. 풍랑 속에서도 고요하게 주무시는 바로 그 모습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풍랑과는 아무 상관없이 초연하신 예수님의 모습, 그 위대한 인격, 그 놀라운 샬롬, 평화---이것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작 놀랄 것을 놀라지 않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문제에 놀라고있는 것입니다. 풍랑 때문에 놀라는 것도 어리석지만 풍랑을 고요케 하시는 능력, 단순히 그 능력 때문에 놀라는 것 역시 유치한 반응입니다. 정말로 놀라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해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한다면 그밖에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을 정말로 경외하는 사람은 이제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깜짝깜짝 놀라며 사는 사람은 세상일에 놀랄 것이 한가지도 없습니다. 정말로 고민해야 할 것을 진정으로 고민하며 사는 사람은 시시한 일에 고민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본문 중에서 고요하다고 하는 것은 초월하신 그리스도의 크심을 말합니다. 그 마음과 그 영혼, 그 몸, 그리고 그 위대한 능력이 고요함으로 나타나고있습니다. 확정되어지고 있습니다. 성서신학적 이야기입니다마는오늘의 성경 본문을 원어 성경으로 읽어 보면 '메갈레'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여러분, 영어에 '메가톤(megaton)'이라는 단어가 있지요? 영어에서 보통 큰 것을 빅(big) 혹은 그레이트(great)라고 하지만 아주 큰 것을 나타낼 때는 메가(mega)라는 말을 붙입니다. '메가'라는 것이 원래 헬라어입니다. 가장크다는 말이지요. 다시 우리들의 본문으로 돌아와서 아주 크다는 뜻을 가진 '메갈레'가 어디어디에 쓰였는지 알아봅시다.

첫 번째로 "큰 광풍이 일어나며"에서 광풍의 크기를 말할 때에 쓰였습니다. 원문을 보면 '메갈레 아네무'라 했습니다. 광풍 중에서도 아주 큰 메가톤급 광풍이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바람에게 명령하여 바다가 고요해진 장면에서 쓰였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했는데 원문에서는 역시 '메갈레'가 쓰였습니다. '갈레네 메갈레'---- 아주 큰 메가톤급의 고요함이라는 뜻입니다.

세 번째로 "심히 두려워하여"'메갈레'가 쓰였습니다. '포본메간'---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사람들이 메가톤급으로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메가톤급이 세 개입니다. 큰광풍이 메가톤급이요, 고요함이 메가톤급이요, 놀라는 마음이 메가톤급입니다. 이 세 가지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사람 사는 것이다 그런 것 같습니다. 극에서 극으로---모든 것이 메가톤급입니다. 깜짝깜짝 놀라면서, 그렇게 요동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반응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풍랑 가운데에 가만히 주무시고 계셨지만 풍랑이 일고 있는 것은 알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너무 깊이 잠드셔서 풍랑이 이는 줄도 모르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풍랑을 알면서도 고요함을 찾아 편히 쉬실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믿음이요,주님의 마음이요, 영혼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가다보면 여러 모양의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비행기 안에서 취하는 태도들도 참 가지가지 입니다. 어떤 사람은 열세 시간씩이나 날아가면서 한잠도 못잡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꼬박 열세 시간을 버팁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식사는 그대로 밀어놓습니다. 그리고는 벌벌 떨고앉아 있는 것입니다. 한번은 제가 그런 분께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고소공포증(高所恐怖症)이 있는 분이신지 무서워서 그런다는 것입니다. 그때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죄가 많은가 보다.'여러분, 사람의 공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죽을까봐 걱정이고, 둘째, 지옥갈까봐 걱정입니다. 사실이지 비행기 여행만큼 신나는 것도 드물지 않습니까? 저는 탈 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탑니다. 옛날에 태어났다면 사람이 하늘을 난다는것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비행기 덕분에 하늘높이 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뿐만 아니라 시간마다 음식잘 주니 좋고, 승무원들이 이모저모 신경 써주니 불편한 데 없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전화 오지 않아 제일 좋습니다. 만사 태평입니다. 비행기 타고 가다 사고 나면 어쩌냐고요? 그게 무슨 걱정입니까? 사고 나면 하늘나라로 직행할 것 아닙니까? 비행기 타고 많이 올라왔으니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좋은 것을 모르고 잠을 이루지 못한다니 참 불행한 일입니다.

시끄러운 소리, 하다못해 폭탄이 터지는 소리에도 의인에게는 단잠이 있습니다. 고요함이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이요, 영적 생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826절을 보면 "믿음이적은 자들아!" 하고 꾸짖고 계십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이지 환경 때문에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풍랑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 믿음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세상 문제도, 격동하는 사회 문제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믿음의 문제라고 우리 주님이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믿음은 도대체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믿는확실한 믿음---바로 그것입니다. 특별히 십자가로 보증된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오늘도 내 운명을 좌우하시고 나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안기듯이 이 풍랑 속에서도 평안과 고요함을 찾아간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632절은 고통스럽고 고독한 시간 중에도 예수님께서 어떻게 고요하셨는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십자가를 바라보십니다. 다음날 아침이면 저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긴장된 순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서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 눈앞에 십자가의 고통이 있습니다. 부조리하고 모순된 빌라도의 재판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도망가 버리는 뼈아픈 배신도 있습니다. 혼자 남겨지는 고독이 있습니다. 외로움이 있습니다. 이처럼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고난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왜입니까?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결코 예수님 혼자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에 주님의 마음은 평안했습니다. 또한 주님은 하나님의 경륜을 믿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큰 역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될 것을 믿고 계셨습니다. 본문에서 제자들이 두려워했던 풍랑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까짓 풍랑으로 해서 하나님이 손해보실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지장이 생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이 풍랑을 타고 목적지까지 더 빨리 갈 수 있을 뿐입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로마로 가는 중입니다. 그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사나운 풍랑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형편입니다. 짐은 다 풀어서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열 나흘 동안을 굶었습니다. 이제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가지고 말합니다. "배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젯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 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27:22-25)."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다 이루어질 것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풍랑으로 인하여 괴로워하십니까? 이 풍랑 때문에 목적지까지 더 빨리 갈 수도 있습니다. 더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질지언정 이 격랑이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거나 하나님의 일에 한치라도 지장을 줄 수는 없음을 우리는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자---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사역을 확실히 믿는 사람한테는 아무 두려움도 없습니다. 감리교의 창시자존 웨슬리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 모든 뜻이 다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내가 절대로 죽지 않는다." 내게 향한하나님의 경륜이 그 누구의 실수, 그 누구의 잘못으로도 결코 무너질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풍랑도 하나님의 사역을 결코 방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이것을 믿는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경륜과 동요는 별개의 언어임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경건한 마음은 기다리는 마음이요, 고요한 마음입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사람들은 격동합니다. 벌벌 떱니다. 소란을 피웁니다. 이것이 가장 나약하고 불신앙적인 태도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제가 한 삼십 년 전쯤 인천에서 부목사 일을 볼 때의 이야기입니다. 원목이신 이기영목사님과 함께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신문 배달하는 소년이 신문을 던져 주고 갑니다. 그런데 신문에도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님께 먼저 신문을 드립니다. 목사님이 다 읽으신 다음에 보려고 기다립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신문을 둘둘 말아쥐고 밖으로 나가십니다. 저도 지금 신문을 보아야 되겠는데요.

그래서 "목사님, 신문을 가지고 어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목사님은 신문을 펴들고 큰 글자만 보여주십니다. "이게 이렇게 됐어." 그리고는 성전에 들어가서 신문을 펴놓고 "하나님, 이것 보십시오" 하면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들 떠드는 것입니까? 떠든다고 해결이 됩니까? 이 동요와 격동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밑으로 내리달을 뿐입니다. 이 격동, 이 격랑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조용히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이 닥쳐올 때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산에서 내려오시다가 체포되는 순간베드로는 칼을 휘두르고, 횃불을 든 사람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제자들은 뿔뿔이 도망을 가고 맙니다. 바로 그러한 순간에 예수님은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8 : 11)." 하나님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당신께서 마셔야 할 십자가의 잔을 생각하실 때에 예수님의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죄인은 당황합니다.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왜입니까? 사랑 받을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면 믿을수록 점점 더 두려움이 앞섭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고, 하나님이 정말 공의로 심판하신다면 내가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 말마따나"천당 지옥을 믿지는 않지만 만일에 있다면 틀림없이 지옥일 것"이라고---믿거나 말거나 정말 천당 지옥이 있다면 내가 갈 곳은 지옥이지 별수 없다는 사실을 본인이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려운 것입니다. 불 신앙의 사람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언제든지 최악의 경우만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언제나 최선의 경우를 생각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바라봅니다. 내 생각이나 내 지혜와는 다르지만 이 풍랑이 결국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큰 뜻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이 비상 사태가 발생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일어나 풍랑을 꾸짖으십니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꾸짖는다는 말을 원문에서 찾아 보면 '에페티메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귀신을 내쫓을 때 사용된 용어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25절의 '꾸짖어 가라사대'를 원문에서 찾으면 역시'에페티메센'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타협적인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격랑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명령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내가 격랑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고요함으로 격랑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격랑을 밀어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초연한 모습입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 터툴리안은 말했습니다. "교회는 배요, 세상은 격랑하는 바다이다." 항해 중에 배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침몰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뜻이 그 배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힘은 고요에 있고, 그 속에서 확증됩니다. 오히려 그 격랑 때문에 예수님의 위대하심과 그분의 하나님 되심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도가 만 주의 주되심이 거기에서 확증되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주님께서 풍랑을 다스리는 분이심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그리하여 이 믿음을 가지고 다음에 오는 격랑 속에서 고요함을 찾아나가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평화, 이 지혜, 이 고요함 속에 능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사람이 성공하려면 3P(three P)가 있어야한다고 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P자로 시작되는 세 가지---페이션스(patience), 프랙티스(practice), 피스(peace)가 있어야한다는 말입니다. 첫째는 인내가, 둘째는 실천력이, 그리고 셋째로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인내와 실천력이 있어도 평화가 없으면 헛일입니다. 학생들이 시험칠 때도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이 평화로워야 합니다. 고요해야 합니다. 무슨 사업을 하든 정치를 하든, 무엇을 하든지 마음의 안정과 평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요한 중의 고요가 아니라 격랑 속의 고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랑 속에서도 조용함을 찾아 쉬시던 주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찾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고요함 속에 고요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에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그 현장에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은 어디에나 고요함이 있습니다. 풍랑 속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면 고요하고, 고요한 바다에도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폭풍과 전쟁과 어려운 역경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계신 곳에 참고요가 있음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평생 칼빈을 연구한 어느 분이 말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어찌나 두려워했던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정말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며 격랑 속에서 초연한 고요를 가질 때, 여기에 승리의 생활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633절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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