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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가장 위대한 것〈고린도전서 13장 11~13절〉

by 【고동엽】 2022. 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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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한 것〈고린도전서 13장 11~13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장로님 한 분이 한때 사업에 실패하여 본의 아니게 많은 빚을 안고 하루아침에 딱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면목이 없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괴로운 마음으로 밖에 나가 밤늦게까지 배회를 하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던 끝에 '아주 이대로 집을 나가버릴까, 아니면 그만 죽어버릴까'하는 생각까지 하다가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서야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집 안팎으로 불을 환하게 켜놓은 채 몸가짐을 단정히 한 아내가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들어서자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하고 미소를 지으며 맞아들이고는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기도를 한 다음에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죄다 당신을 보고 손가락질한다해도 나는 당신의 진실을 믿습니다. 비록 부도가 나서 많은 빚을 졌지마는 당신의 진실은 부도나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당신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옛날 욥이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일어난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당신을 가장 뜨겁게 사랑합니다."

장로님은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도 없이 아내 앞에서 그만 목을 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아내를 그지없이 고맙게 여겼습니다. 그는 아내의 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죄인으로 보더라도 당신만은 나의 진실을 믿어준다면 나는 끝내 다시 일어날 것이오." 그날 이후 이 장로님은 용기를 수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합니다. 세태도 변하고, 사람의 인심도 변합니다. 모든 것이 참으로 빠르게 변합니다. 있던 돈도 없어지고, 잘되던 사업도 기웁니다. 높게 가졌던 명예도 다 떨어집니다. 때로는 건강이라는 마지막 밑천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고통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고, 끝까지 남았어야 할 것이 없으며, 끝까지 변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 변하는 데에 우리의 고통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배가 고파서, 당장에 못살아서 고통이 아닙니다. 위로나 아래로나, 좌우 어디를 보아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기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오래, 많이도 참으며 기대해왔건마는 이제 더는 기대할 것이 없음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반대되는 것은 불신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소망에 반대되는 것은 절망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반대되는 것은 미움이라기보다도 허무와 고독입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랑이 없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랑이 식고 있습니다. 없어지고 있습니다. 있다면 거짓된 사랑일 뿐입니다. 내가 사랑할만한 사람도 없거니와 나를 사랑해 줄만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서 고독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메네이'입니다. 그 시제(時制)가 현재형입니다. 과거에 그러했다거나 미래에 그러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에 믿음이 있어야 하고, 지금에 소망이 있어야 하며, 지금 여기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없어도 이 세 가지는 있어야 하며, 다른 것이 다 있더라도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그 다른 것 모두가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가정에든 사회에든 언제나 있어야 하는 것임에도 이것이 없으니 탈입니다.

한 꼬마가 뒷일은 생각지 않고 어찌 어찌해서 담장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래놓고는 내려오지를 못해 울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 아버지가 밑으로 다가가 팔을 벌리고는 말했습니다. "자 뛰어내려라. 내가 받아 안아줄께." 그런데 아이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왜? 나를 못 믿어서 그러느냐?"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예, 못 믿겠어요." 아이의 대답입니다. "아버지가 날 잡으려다 떨어뜨리면 어떡해요?" 다시 아버지가 말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느냐? 너도 알지 않니?" 아이는 그제야 펄쩍 뛰어내리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듣자 믿지 못하는 마음도, 불안한 마음도 사라지게 되어 뛰어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랑이 있으면 믿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힘과 능력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 우리의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시는 계시의 하나님이요, 우리를 구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침내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주신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이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구원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응답이 있어야 된다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여타의 주위환경 같은 것은 돌아볼 것 없이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가 우선적으로 정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하시는 말씀은 하나같이 믿음을 조건으로 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대로 되리라"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하나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믿음 없이는 은혜에 참예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무슨 거창한 공로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의도 아닙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간단없이 설명되는 바이므로 여기서 새삼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마는, 신학적으로 요약해보면 사도 요한이 말씀한 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믿는 자가 곧 그를 영접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많은 서신을 통하여 믿음은 곧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내 앞에 핍박이 있고 시험과 환난이 있습니다마는 그 모든 것 이후에 주시는 약속과 축복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물위로 걸어오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자 무서워 빠져들어 가는 것을 보시고는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하고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진 바 믿음의 그릇 만큼 은혜를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믿음의 그릇은 크고도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소망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5장에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38년된 병자의 경우를 봅니다. 그 오랜 세월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채 버려진 환자입니다. 그를 보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환자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어느 환자가 낫기를 원치 않겠습니까 마는 38년 동안이나 버려졌던 이 환자에게는 심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무려 38년이나 누워 있었고 보면 이제는 아예 낫고자 하는 마음조차 버릴 때도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네가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십니다. 소망이 있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끔 우리에게 조금 지나친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한 예가 나사로가 죽었을 때의 일입니다. 오빠의 죽음으로 울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뵙는 순간, 예수님께서 진작 오셔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조금은 원망 어린 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상식으로야 병중에 있던 몸으로 숨이 끊어졌다면 그것으로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게다가 장례식까지 치렀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면 완전히 끝난 일입니다. 무엇을 다시 기대할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시체가 되어버렸어도 예수 안에서는 다시 기대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다 끝난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죽어도 살게 되는 그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다되었다는 소리를 쉽게 할 것이 아닙니다. 다 끝났다면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소망을 걸고 또다시 기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의 응답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라십니다. 좋은 일도 사랑으로, 고난 당하는 것도 사랑으로, 실패도 성공도, 건강도 질병도, 주님께서 특별히 나를 사랑하시기에 오늘 내게 주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격렬했던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샌디에이고의 외곽지대에 있는 화려한 어느 저택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집주인 되는 부인이 전화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엄마, 저예요. 제가 죽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아들의 음성입니다.

어머니는 한시바삐 그 아들이 보고 싶어 볼멘소리를 합니다. "당장에 달려오지 않고 전화는 무슨 전화냐!" 그러자 아들은 자못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가겠습니다. 그런데 불쌍한 내 친구와 함께 갈까 합니다. 이 친구는 함께 싸우던 전우인데 지금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으며, 다리 하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는 친구라서 저와 같이 있으려고 데려왔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며칠동안만 같이 있으려므나."

그러자 아들이 말합니다. "아니예요. 오랫동안입니다." 어머니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한 일년 함께 있으려므나. 처음에는 그러구러 함께 지낼 수 있겠지만 세월이 가면 무거운 짐이 되어 괴로울 것이다." "아니예요. 일생동안 같이 살 겁니다." 이것이 아들의 대답이었습니다.

"너, 전쟁에 나가더니 감상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런 사람을 길게 사랑하기가 쉬운 줄 아느냐?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얼마간 지내보면 싫증이 나고, 그리고 나중에는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이 말에 "그럴까요?"하고 아들은 수화기를 놓고 맙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군 본부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자살했습니다. 시체를 찾아가십시오." 어머니는 허겁지겁 달려가 시체를 확인해보았습니다. 시체는 틀림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고, 다리 하나가 없었습니다. 이토록 불구자가 된 나를 어머니가 어떻게 사랑해줄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았건만 결국은 짐이 될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아들을 누가 죽인 것입니까? 그는 사랑 하나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아도 장차는 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용기로 살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이 있어서 은사를 받고, 소망 중에 기뻐하며, 사랑하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사랑하기에 사명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부인한 제자에게도 복잡하게 묻지 않으시고 오직 한 가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는 자, 누구든지 교회를 사랑하는 자, 누구든지 이웃을 끝까지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가리켜 입버릇처럼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다고 말합니다. 죽으신 것이 사실인데 어째서 승리란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요한복음 18장의 말씀대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하시며 아버지의 사랑을 끝까지 믿고 죽으셨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저 골고다 언덕 너머 빛나는 부활의 환한 아침을 내다보셨습니다. 소망 중에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할 때면 저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며 침을 뱉는 등 갖은 비난과 저주를 다하고 있는 저들을 향하여 "어디 두고보자 이놈들!" 이렇게 한 말씀 하셨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사실이 그러하였다면 모든 역사는 그 한마디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고통 중에도 저 무지하고 포악한 무리들을 내려다보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하고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마침내 승리하신 것입니다. 나의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여기 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에도 믿음과 소망, 사랑이 있음으로 의미가 있고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뿌리가 되고 원천이 되고 그 마지막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대를 겁니다.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올시다.

이에 대하여 초기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표현한 바 재미있는 한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치 가마의 행렬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앞에 가는 가마꾼이 가마를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갑니다. 뒤에 있는 가마꾼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가마채를 들고 앞의 사람이 인도하는 대로 열심히 따라갑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에 가는 가마꾼은 소망이요, 뒤에 가는 가마꾼은 믿음이며 가마 안의 신부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소망은 다 이루었기에 더는 필요치 않으며, 믿는 바도 다 성취되었으니 가마채는 물립니다. 그래서 이제 사랑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참으로 재미있는 비유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그 누구인들 사랑이 좋은 것인 줄 모르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 사랑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서 은사로 받아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은 은사(恩賜)의 장입니다. 12장 마지막 절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사랑 장이 이어집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사랑은 은사입니다. 이 사랑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모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사랑의 힘을 얻어야 하고 사랑의 영을 받음으로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진정 가장 귀한 선물이며 가장 큰 은사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어린 두 형제가 다투고 있습니다. 동생인 꼬마가 자꾸만 말썽을 부리자 형이 나무랍니다. "너 정말 그렇게 못되게 놀면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시지 않는단 말야." 동생이 주춤합니다.

저만치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아버지가 두 아이를 불러서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너희들이 좋은 아이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고 못된 아이가 되면 아픈 마음으로 사랑한단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선하게 살면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면 아픈 마음으로, 또다시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사랑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를 믿어주시고, 끝까지 기대해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네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처음도 사랑이요 마지막도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 하십니다.  

가장 위대한 것〈고린도전서 13장 11~13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장로님 한 분이 한때 사업에 실패하여 본의 아니게 많은 빚을 안고 하루아침에 딱한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자식들에게도 면목이 없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하루는 괴로운 마음으로 밖에 나가 밤늦게까지 배회를 하면서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하던 끝에 '아주 이대로 집을 나가버릴까, 아니면 그만 죽어버릴까'하는 생각까지 하다가 통행금지 시간이 다 되어서야 힘없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집 안팎으로 불을 환하게 켜놓은 채 몸가짐을 단정히 한 아내가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들어서자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하고 미소를 지으며 맞아들이고는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기도를 한 다음에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죄다 당신을 보고 손가락질한다해도 나는 당신의 진실을 믿습니다. 비록 부도가 나서 많은 빚을 졌지마는 당신의 진실은 부도나지 않았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당신은 결코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나는 당신이 다시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 옛날 욥이 다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일어난 것처럼 당신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언젠가는 다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의 당신을 가장 뜨겁게 사랑합니다."

장로님은 체면이고 뭐고 가릴 것도 없이 아내 앞에서 그만 목을 놓아 울고 말았습니다. 아내를 그지없이 고맙게 여겼습니다. 그는 아내의 두 손을 맞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죄인으로 보더라도 당신만은 나의 진실을 믿어준다면 나는 끝내 다시 일어날 것이오." 그날 이후 이 장로님은 용기를 수습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업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 모든 것은 변합니다. 세태도 변하고, 사람의 인심도 변합니다. 모든 것이 참으로 빠르게 변합니다. 있던 돈도 없어지고, 잘되던 사업도 기웁니다. 높게 가졌던 명예도 다 떨어집니다. 때로는 건강이라는 마지막 밑천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고통은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없고, 끝까지 남았어야 할 것이 없으며, 끝까지 변하지 말았어야 할 것이 변하는 데에 우리의 고통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배가 고파서, 당장에 못살아서 고통이 아닙니다. 위로나 아래로나, 좌우 어디를 보아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기대를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토록 오래, 많이도 참으며 기대해왔건마는 이제 더는 기대할 것이 없음에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믿음에 반대되는 것은 불신이라기보다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소망에 반대되는 것은 절망입니다. 그리고 사랑에 반대되는 것은 미움이라기보다도 허무와 고독입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사랑이 없습니다. 날이 갈수록 사랑이 식고 있습니다. 없어지고 있습니다. 있다면 거짓된 사랑일 뿐입니다. 내가 사랑할만한 사람도 없거니와 나를 사랑해 줄만한 사람도 없는 것 같아서 고독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메네이'입니다. 그 시제(時制)가 현재형입니다. 과거에 그러했다거나 미래에 그러할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에 믿음이 있어야 하고, 지금에 소망이 있어야 하며, 지금 여기에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른 것들은 다 없어도 이 세 가지는 있어야 하며, 다른 것이 다 있더라도 이 세 가지가 없으면 그 다른 것 모두가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 가지는 가정에든 사회에든 언제나 있어야 하는 것임에도 이것이 없으니 탈입니다.

한 꼬마가 뒷일은 생각지 않고 어찌 어찌해서 담장 위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래놓고는 내려오지를 못해 울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아이 아버지가 밑으로 다가가 팔을 벌리고는 말했습니다. "자 뛰어내려라. 내가 받아 안아줄께." 그런데 아이는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왜? 나를 못 믿어서 그러느냐?"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예, 못 믿겠어요." 아이의 대답입니다. "아버지가 날 잡으려다 떨어뜨리면 어떡해요?" 다시 아버지가 말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느냐? 너도 알지 않니?" 아이는 그제야 펄쩍 뛰어내리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듣자 믿지 못하는 마음도, 불안한 마음도 사라지게 되어 뛰어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이, 사랑이 있으면 믿어질 뿐만 아니라 엄청난 힘과 능력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바 우리의 하나님은 당신을 계시하시는 계시의 하나님이요, 우리를 구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마침내는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주신 사랑이십니다. 우리는 이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구원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에는 하나님 앞에서의 바른 응답이 있어야 된다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여타의 주위환경 같은 것은 돌아볼 것 없이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가 우선적으로 정립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하시는 말씀은 하나같이 믿음을 조건으로 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믿음대로 되리라"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쳐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믿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하나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믿음 없이는 은혜에 참예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무슨 거창한 공로가 아닙니다. 도덕적인 의도 아닙니다. 믿음에 대해서는 교회에서 간단없이 설명되는 바이므로 여기서 새삼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마는, 신학적으로 요약해보면 사도 요한이 말씀한 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믿는 자가 곧 그를 영접하는 자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믿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많은 서신을 통하여 믿음은 곧 기다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가 하면 야고보서에서 말씀하는 믿음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내 앞에 핍박이 있고 시험과 환난이 있습니다마는 그 모든 것 이후에 주시는 약속과 축복을 생각하면서 기뻐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마 15:28)"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물위로 걸어오던 베드로가 바람을 보자 무서워 빠져들어 가는 것을 보시고는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하고 책망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가진 바 믿음의 그릇 만큼 은혜를 받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 믿음의 그릇은 크고도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절대적인 소망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5장에서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있던 38년된 병자의 경우를 봅니다. 그 오랜 세월을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채 버려진 환자입니다. 그를 보신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십니다. 환자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어느 환자가 낫기를 원치 않겠습니까 마는 38년 동안이나 버려졌던 이 환자에게는 심각한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무려 38년이나 누워 있었고 보면 이제는 아예 낫고자 하는 마음조차 버릴 때도 되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네가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십니다. 소망이 있어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끔 우리에게 조금 지나친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한 예가 나사로가 죽었을 때의 일입니다. 오빠의 죽음으로 울고 있던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뵙는 순간, 예수님께서 진작 오셔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며 조금은 원망 어린 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라고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상식으로야 병중에 있던 몸으로 숨이 끊어졌다면 그것으로 인생은 끝난 것입니다. 게다가 장례식까지 치렀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다면 완전히 끝난 일입니다. 무엇을 다시 기대할 것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시체가 되어버렸어도 예수 안에서는 다시 기대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다 끝난 것 같습니다. 그렇더라도 죽어도 살게 되는 그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다되었다는 소리를 쉽게 할 것이 아닙니다. 다 끝났다면 절망할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소망을 걸고 또다시 기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사랑의 응답입니다. 사랑은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 받아들여주기를 바라십니다. 좋은 일도 사랑으로, 고난 당하는 것도 사랑으로, 실패도 성공도, 건강도 질병도, 주님께서 특별히 나를 사랑하시기에 오늘 내게 주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랑에 대한 믿음을 가지기를 원하십니다.

격렬했던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갈 무렵, 샌디에이고의 외곽지대에 있는 화려한 어느 저택에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집주인 되는 부인이 전화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이러합니다. "엄마, 저예요. 제가 죽지 않고 살아왔습니다." 전쟁에 나갔던 아들의 음성입니다.

어머니는 한시바삐 그 아들이 보고 싶어 볼멘소리를 합니다. "당장에 달려오지 않고 전화는 무슨 전화냐!" 그러자 아들은 자못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이제 가겠습니다. 그런데 불쌍한 내 친구와 함께 갈까 합니다. 이 친구는 함께 싸우던 전우인데 지금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으며, 다리 하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갈 데가 없는 친구라서 저와 같이 있으려고 데려왔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며칠동안만 같이 있으려므나."

그러자 아들이 말합니다. "아니예요. 오랫동안입니다." 어머니는 다시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한 일년 함께 있으려므나. 처음에는 그러구러 함께 지낼 수 있겠지만 세월이 가면 무거운 짐이 되어 괴로울 것이다." "아니예요. 일생동안 같이 살 겁니다." 이것이 아들의 대답이었습니다.

"너, 전쟁에 나가더니 감상주의자가 되었구나. 그런 사람을 길게 사랑하기가 쉬운 줄 아느냐? 처음에는 괜찮은 것 같아도 얼마간 지내보면 싫증이 나고, 그리고 나중에는 무거운 짐이 될 것이다." 어머니의 이 말에 "그럴까요?"하고 아들은 수화기를 놓고 맙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군 본부로부터 발송된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습니다. 전보의 내용은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호텔 12층에서 투신자살했습니다. 시체를 찾아가십시오." 어머니는 허겁지겁 달려가 시체를 확인해보았습니다. 시체는 틀림없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은 눈 하나가 없고, 팔 하나가 없고, 다리 하나가 없었습니다. 이토록 불구자가 된 나를 어머니가 어떻게 사랑해줄 것인가를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았건만 결국은 짐이 될 것이라고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그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만 것입니다.

여러분, 이 아들을 누가 죽인 것입니까? 그는 사랑 하나를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렇더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아도 장차는 짐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무슨 용기로 살수가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이 있어서 은사를 받고, 소망 중에 기뻐하며, 사랑하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사랑하기에 사명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부인한 제자에게도 복잡하게 묻지 않으시고 오직 한 가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주님을 사랑하는 자, 누구든지 교회를 사랑하는 자, 누구든지 이웃을 끝까지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될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가리켜 입버릇처럼 십자가에서 승리하셨다고 말합니다. 죽으신 것이 사실인데 어째서 승리란 말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요한복음 18장의 말씀대로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하시며 아버지의 사랑을 끝까지 믿고 죽으셨습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다.

저 골고다 언덕 너머 빛나는 부활의 환한 아침을 내다보셨습니다. 소망 중에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셨고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할 때면 저는 가끔 이런 상상을 해보곤 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며 침을 뱉는 등 갖은 비난과 저주를 다하고 있는 저들을 향하여 "어디 두고보자 이놈들!" 이렇게 한 말씀 하셨더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사실이 그러하였다면 모든 역사는 그 한마디에 의하여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시 한번 그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 참혹한 고통 중에도 저 무지하고 포악한 무리들을 내려다보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하고 용서하는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다.

마침내 승리하신 것입니다. 나의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여기 이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위에도 믿음과 소망, 사랑이 있음으로 의미가 있고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믿음, 소망, 사랑 중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뿌리가 되고 원천이 되고 그 마지막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대를 겁니다.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올시다.

이에 대하여 초기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이 표현한 바 재미있는 한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치 가마의 행렬과 같다고 비유했습니다. 앞에 가는 가마꾼이 가마를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갑니다. 뒤에 있는 가마꾼은 앞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가마채를 들고 앞의 사람이 인도하는 대로 열심히 따라갑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굉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에 가는 가마꾼은 소망이요, 뒤에 가는 가마꾼은 믿음이며 가마 안의 신부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면 소망은 다 이루었기에 더는 필요치 않으며, 믿는 바도 다 성취되었으니 가마채는 물립니다. 그래서 이제 사랑만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참으로 재미있는 비유입니다.

사랑은 영원합니다. 사랑은 은사입니다. 그 누구인들 사랑이 좋은 것인 줄 모르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 사랑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서 은사로 받아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고린도전서 12장, 13장, 14장은 은사(恩賜)의 장입니다. 12장 마지막 절에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저 유명한 사랑 장이 이어집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사랑은 은사입니다. 이 사랑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모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사랑의 힘을 얻어야 하고 사랑의 영을 받음으로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는 진정 가장 귀한 선물이며 가장 큰 은사입니다.

어느 가정에서 어린 두 형제가 다투고 있습니다. 동생인 꼬마가 자꾸만 말썽을 부리자 형이 나무랍니다. "너 정말 그렇게 못되게 놀면 아버지가 너를 사랑하시지 않는단 말야." 동생이 주춤합니다.

저만치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아버지가 두 아이를 불러서 이야기합니다. "나는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너희들이 좋은 아이가 되면 기쁜 마음으로 사랑하고 못된 아이가 되면 아픈 마음으로 사랑한단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선하게 살면 하나님께서는 기쁜 마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 살면 아픈 마음으로, 또다시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사랑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가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입니다. 그는 우리를 믿어주시고, 끝까지 기대해주시고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네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처음도 사랑이요 마지막도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라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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