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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매인 여인(로마서 7:1-6)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찌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 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
바울의 신학 사상은 한 마디로 말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신학사상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는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게되는 것은 우리 인간의 가진 바 의나 공적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루터의 말을 빌리면 '오직 은혜'란 오직 믿음이라는 말이요, '오직 믿음'이란 오직 긍휼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반복 강조되고 있는'오직'이란 말은 다른 모든 것을 배제함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다른 여타의 것은 전혀 의미나 가치가 없으며 오직 이것만이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절대적 교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오직 은혜,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이 교리는 절대적인 것이기에 그 무엇에게도 양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자고로 고집이 세다는 말을 들어왔으며 또한 그러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만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하는 것이 통하지 않는 절대적 신앙관을 갖는 것이 바로 예수 믿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성경이 말하고 있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깊은 뜻을 가장 잘 이해한 분으로 생각되는 사도 바울이 설명해 주는 기독교의 교리가 그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 대상과 환경에 따라 각기 다르게 말씀하신 다양한 내용의 말씀들을 집약하고 논리적으로 체계화하여 이것을 교리화하고 신학화한 위대한 인물입니다. 따라서 바울의 교리가 바울 자신의 독창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어디까지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러 경우,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신 말씀들을 체계 있게 정리하여 논리 정연하게 설명해 주었다는 점에서 위대한 공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내용을 두고 이 교리를 설명해 나가는 방법, 즉 소위 말하여 신학방법론을 택함에 있어서는 자신이 배우고 자라왔으며, 그리고 생활 속에 익숙해진 율법적 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선교학적인 입장으로 보아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자라나온 환경에 의해 얻어진 사고의 방법이 있으며, 그 방법을 통하여 다른 사람과 관계되어지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서양 사람들이 매사를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이성 주도적인 사고를 하는 것에 비해 우리의 생각은 항상 정에 이끌리는 감정 주도적인 생각을 하게 됩 니다. 그 때문에 판단에 앞서 "사람의 정이 어찌 그럴 수 있나?"하는 생각이 앞서게 되고, 그로 인해 외국 사람들이 보면 신기할 정도로 음식점의 카운터 앞에서는 서로 내가 돈을 내겠다며 몸싸움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광경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항상 그렇게 살고 있으므로 특별한 느낌을 갖기 못하지만 외국 사람들에게는 신기한 구경거리요, 이야깃거리가 됩니다. 그리하여 몇 번이고 이 일을 묻고 이야기하는 미국 친구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럴 때이면 "그것이 얼마나 인간적이냐?"는 주석을 달게되고 저들도 그렇다며 좋다고는 하지만 생각해 보면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우리들만이 갖는 사고의 구조와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자라온 바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막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이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 속에서 율법적으로 자라온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유대인과 율법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선교를 함에는 충분히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의 논리 전개는 철저히 율법적이며, 그리고 매우 조직적입니다. 거기에 극성이라 할 정도의 열심까지 있으니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울을 보시고, 비록 외모는 작고 볼품이 없다하더라도 참으로 쓸만한 일꾼이라 생각하시어 사도로 쓰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는 그대로 적중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완전히 율법 안에서 다시 말하면 법적 관계로 설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법적 관계로 설명한 은혜의 구원론'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법적 관계'라는 말을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만 은 우선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전부가 다 그렇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 하나를 들면 로마서 8:1-2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철저하게 율법적입니다. 여기에서 정죄를 한다는 뜻의 카타크리마라는 말은 법정에서 재판을 할때 재판장이 검사의 논고와 변호사의 변론, 그리고 증언 등 필요한 절차를 다 거친 다음 재판장이 마지막에 선고를 하면서 죄가 있다고 하면 죄가 있는 것이며, 사형이라고 하면 사형으로, 그리고 죄가 없다고 하면 죄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법적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정죄함이 없다.'라는 말은 '법이 죄가 없다라고 선언했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완전한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관계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설명해 나가는 것이 사도 바울의 논법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은 성경, 특별히 구약 성경을 율법과 은혜의 부분으로 양분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은혜! 이 양자의 긴장 관계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율법은 하나님의 왼 손이요, 은혜는 하나님의 바른 손이다."라는 말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실로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들을 키울 때에도 보면, 너무 율법만 따져도 잘못되고 그렇다고 너무 은혜만 베풀어도 버릇이 없어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은혜와 율법 두 가지가 다 똑 같이 균형 있게 적용되어져야 그 속에서 바른 인격이 형성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바는 율법과 은혜의 중간 상태를 생각하거나, 혹은 양자간의 조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은혜의 둘 다를 완성해야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진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율법은 율법대로 완전히 충족되면서 은혜는 은혜대로 완전히 채워지는 진리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두고 그의 편지를 통해 계속 논증을 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을 은혜의 대표자로, 그리고 모세를 율법의 대표자로 내세워 모세로부터 율법이 온 것이라면 아브라함은 모세 이전의 인물이므로 율법보다는 은혜가 먼저요, 근본임을 역설합니다. 이는 곧 은혜가 율법을 이긴다는 말이며,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롬5:21)는 말도 바로 그런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죄가 많고 율법이 무섭다고 하지만 율법보다 더 큰 것은 은혜이며, 이 은혜는 실로 무한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도 바울은 율법 또한 일점일획의 가감도 없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율법과 은혜의 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로마서 1:17에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율법이 다 같이 성취되고 완전히 계시된 증거라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가 은혜만을 생각하고, 은혜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이제는 방종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은혜를 강조하면서도 그로 인해 방종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여 얼마나 걱정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에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 보면 이제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으니 그렇다면 죄를 짓겠느냐는 의미의 물음을 앞에 두고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말이 거듭거듭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율법을 강조하고 나면 절망하게 됩니다. 지켜야할 법을 못지켰으니 이제는 모르겠다는 심사에서 낙심하고 절망하며 스스로를 포기하게 되는 이것이 더욱 문제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 바울은 "율법은 사람을 죽이는 법이다."라는 표현까지도 서슴치 않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 속에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유대 사람들의 결혼 풍속을 들어 이 문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에 보면,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 아내는 법으로 남편에게 매인 바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러한 개념은 오늘의 여성들에게는 기분 나쁜 것일 수도 있겠으나 이는 2천여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법으로 매인 바 된 아내란 표현 그대로 경제적으로나 인권적인 면에서 매였거나 혹은 어떤 감정으로 매였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법적으로 남편에게 매였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남자에게 매인 바 된 아내는 일반 모든 활동은 자유롭게 할 수 있으나 단 한 가지 다른 남자와의 만남을 가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이미 법적으로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에서는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는 노골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철저히 매여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서로 서로 매여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은 한 남편에게 한 여인이 매인 바 된 것이 결혼임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를 좋아하는 여자는 결혼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말썽들입니다. 결혼이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리고 물질적으로나 감정적으로도 다 매이게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법적으로 매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법적으로 붙들려 완전히 자유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그대로 매여서 사는 길 외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철저히 매인 바가 되는 것이 바로 가정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자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적나라한 표현으로 다름 아닌 남편이 죽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요즈음도 보면, 다른 남자를 사랑한 나머지 보다 자유롭게 그와의 관계를 갖기 위해 자기의 남편을 죽이기까지 하는 아내가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가끔 남편을 잃고 혼자 지내면서 불행하게 생각하며 답답해하는 이들을 보면 이제 "자유다" 하고 한번 생각해 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그 만큼 매였으면 이제는 자유다 하고 말 것이지 꼭 그렇게 불행한 것처럼 생각할 것이 무엇이냔 말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남편이 죽으면 여자가 자유할 수 있다는 말을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인 문제로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법적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자유로운 것이며,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기 전에 다른 남자를 만나거나 몸을 허락하면, 그것은 간음이며 간음은 곧 죽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엄한 율법에 의한 것으로서 남편 외의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졌을 경우는 돌로 쳐죽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변명도 용서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엄격한 시대에 남편에게 철저하게 매여있는 여성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그러나 일단 남편이 죽게되면 그 여자는 자유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남자를 만나도 사관이 없으며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남편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한번 짓고 나면 그 후로는 이미 죄의 노예가 되어 죄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우리는 행위나 우리의 감정, 우리의 의지, 나아가서는 우리의 사상까지도 완전히 노예가 되어 전부가 죄스럽고 병리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기의 생각하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생각부터가 벌써 잘못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미 우리는 죄에 매여 깊이 물들어 있으며 사실은 죄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대 사도 바울도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며 죄에 끌려 다니고 있는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 속에 서원하는 선은 행할 수가 없고 원치 않는 죄만 짓게되는 이 불쌍한 인간이 처참한 나를 보라며 자신의 죄성을 객관시 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은 철저하게 죄에 매여 있는 것으로 이는 마치 한 여인이 자기 남편에게 매인 바 된 것과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 생각하는 남편은 율법입니다. 이 율법이 우리를 구속하고 협박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하였는데 살인을 했고, 도둑질하지 말라했는데 도둑질했다. 그러므로 너는 죄인이다 하고 율법이 그대로 우리를 짓누릅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 가책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으며 그 결과 두 가지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하나는 회개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차라리 반항하는 자세로서 반항하고 변명하다가 끝내는 절망하게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율법과의 관계란 율법을 조금 지키게 되면 교만에 빠지게 되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낙심하고 절망하며 결국은 자기를 포기해 버리는 타락과 자기 학대의 무서운 처지에 이르게됩니다. 그 누가 두렵다 하여도 양심을 포기하고 자기를 포기한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습니다.
언젠가 한번 밤에 택시를 타고 출발을 하려는데 어떤 사람이 앞을 가로막으면서 내가 이 손님을 불러 주었으니 돈을 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운전기사가 얼마를 주었는데 그 사람은 더 달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운전기사가 "이렇게 손님 모셔봤댔자 얼마 받지도 못하는데 이러면 되겠느냐?"고 하자 그 사람은 이제 차를 부수려 드는 것입니다. 이런 장면을 안에서 보고 있는 저로서는 그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나올 수도 없고 하여 입장이 매우 난처하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말 답답한 것은 바로 옆에 순경이 있는데도 이 행패를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저가 나가서 그 순경에게 부득불 한 마디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순경이 저에게 넌지시 하는 말이 "저 사람은 무서운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감옥을 자기 안방처럼 드나드는 사람입니다."하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 맞는 말입니다. 양심도 없고 도덕도 없으며, 윗사람 아랫사람, 순경도 감옥도 없으며 지옥까지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무서운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에 대한 가책 때문에 아예 자기를 파국으로 몰고 가면서 되는대로 마구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율법의 노예로서 방탕의 노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 세 번째로 생각하는 남편은 율법에 매여서 변질된 죄인의 모습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이 율법주의는 율법에 노예가 된 결과로서 은혜를 모르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은혜로 향하는 자유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통해서만 구원받는 줄을 알고 그 외에는 길이 없는 것으로 압니다. 그 때문에 은혜로 용서함을 받고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항상 생각하는 것은 내가 의롭게 무엇인가 공로를 좀 세워야지 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남에게 대해서나 자기에게 대해서나 마찬가지이니 그래 가지고서야 무엇이 되겠습니까? 가만히 보면, 예수를 믿는 것이 처음에는 은혜로 시작했다가 뒤에는 율법으로 끝내는 사람이 많습니다. 되도록 잘 믿어 보려고 성실하게 살면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킴은 물론 십일조를 바치고 열심히 봉사도 해 나가는 동안 어느 사이에 율법주의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제부터인가 예수는 없어지고 율법만 남아서 자기의 행위, 자기의 공로, 자기의 극기 등에 의해 죄 사함을 받겠다는 보상 행위를 하고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상까지 받겠다 고하니, 이제 예수는 멀리 사라진 것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끝내겠느냐며 매우 비판적인 어조로 힐책합니다. 이는 우리 자신들을 두고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에는 모두들 주신 바 은혜에 감격합니다. 그러나 잘 믿어 보겠다고 애쓰는 사이에 한 발자국한 발자국 율법주의자가 되어 은혜로부터는 멀어진 채 지금의 마음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는 왜냐하면 자기가 원하는 만큼의 의를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이대로는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이와 같이, 조그마한 의를 행했다고 교만해 지는가 하면 못했다며 벌벌 떨면서 괴로워하는 절망된 모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때에 "네가 무슨 천당가겠다고 그러느냐?"며 옆에서 유혹하고 박수치는 마귀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때문에 일찌기 사도 바울은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끝내겠느냐는 다짐을 해 왔던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 생활이 은혜로 시작하여 끝까지 은혜로 나가지 못하고 율법주의에 빠지게 될 때 엄청난 결과를 낳게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상 세 가지의 남편이 있는데 문제는 남편으로부터 자유해야 되겠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죽음이 따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로부터 자유 하려면 그 죄의 값을 지불하는 죽음이 있어져야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죽음에 내가 법적으로 연합되어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어디까지나 법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믿음이 아닌 율법으로 세우려고 하면 문제는 끝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절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는 기도를 할 때마다, 그리고 심지어는 임종시에까지 "너 같은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가겠느냐?"고 하는 마귀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달려 죽으신 십자가!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비로소 내 영혼이 죄에게서 죽게 되는 것이며, 동시에 죄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과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모든 형법이 다 그렇듯이 율법이 아무리 엄하다 하더라도 죽은 자를 감옥에 두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죽으면 자유 하게 되어 모든 법적인 관계와는 상관이 없는 몸이 됩니다. 아무리 엄한 법이라 하더라도 시체에서 벌을 내리는 법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생명이 있고 살아 있으므로 율법에 매이는 것이며, 또한 율법에 의한 형벌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었다고 할 때에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길은 원칙적으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는 율법을 다 지키는 길이요, 두 번째는 율법이 주는 형벌을 다 받는 길입니다. 그 형벌의 결국, 곧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죽어야만 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율법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깨끗이 죽을 때에 형은 정지되는 것이며, 율법은 나와 상관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나를 율법 안에서 이렇게 죽일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한 마디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나를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며, 그 십자가가 나를 완전히 죽이게 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앞에서 교만은 물론 나라는 존재도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될 때만이 가책과 공포, 율법의 협박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모든 것을 오직 십자가에만 의존할 뿐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이나 구원받음에 있어서 자기 의를 통한 공로 사상 같은 것은 완전히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면 마침내 완전히 자유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남편이 죽어야 여인이 자유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와 같은 비유적인 입장에서 그 다음의 말씀을 보면 매우 재미있는 표현을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4절 중반에 보면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곧 부활하신 예수에게 가서라는 말씀이며, 그 의미는 예수에게 시집을 가서라는 것으로 해석이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있었던 율법과의 관계는 사별이나 이혼을 한 것처럼 깨끗이 청산을 하고 우리를 위하여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에게로 다시 출가를 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열매란 자식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생각할 것은 결혼에 앞서 옛 사람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한 다음에 결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보면, 과거를 청산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해 놓고 결혼 후에도 옛날 애인을 찾아다니는가 하면, 신혼 여행을 가서도 옛날 애인의 꿈만 꾸었다는 한심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과거가 청산되지 않은 가운데서 사람과 만나게 되면 계속 옛 사람에게 매이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다름 아닌 간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십자가 밑에서 완전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새 사람이 되고 새 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갈라디아서는 율법의 질서에서 완전히 벗어나, 은혜에서 시작하여 은혜로 끝내야함을 그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비록 은혜로 시작했다하더라도 중간 어느 사이에서라도 율법이 살아나면, 또 다시 율법에 매이는 것이며 "나"라는 존재와 나의 의가 고개를 들면 여전히 무서운 율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아직도 여러분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괴로움과 고통이 있으며, 가책과 나약함이 있습니까? 이 이유는 아직도 율법에 매여 있기 때문이며, 또한 매여 있는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완전히 죽어 율법과의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고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생활 시작했다면 이제는 꿈을 꾸어도 그리스도의 꿈을 꾸며, 앉으나 서나 그 무엇을 하든 예수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면서 그 은혜에 충만한 생을 삶으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풍성히 맺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은혜․예수그리스도․성령 곧 새로운 신랑에 매여 은혜와 성령에 충만한 삶을 살게됨으로 완전히 자유 하게 되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6절 말씀을 보면,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찌니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죽었고 이 하였으며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낡은 율법에 의해서가 아닌 성령의 새로운 법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옛 것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며, 그럴 때에 완전한 자유함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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