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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린도전서 13 : 1-7)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다시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한날 한날에 굳이 새날이 없겠습니다만 우리는 365일을 1년이라 정하고 그 한 해가 바뀔 때마다 묵은 해를 보낸다고도 하고 새해를 맞는다고도 합니다. 이렇게 묵은 해와 새해가 엇갈리는 시점에 서게 되면 어쩐지 생각이 착잡해 집니다. 그리하여 대체로 맨 처음 느끼는 것은 또 1년 늙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나이 좀 드신 분들께는 아주 젊어 보입니다 하는 말로 인사를 하면 비교적 기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것처럼 헛된 말이 없습니다. 젊어 보이든, 늙어 보이든, 늙은 것은 늙은 것이니까 말입니다. 사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어차피 세월은 가고 사람도 갑니다. 멀어지는 세상에 대해 아쉬워하지 말고, 더욱 가까워지는 하늘나라가 있음에 기뻐하십시다.
그리고 문제는 오늘에 있어서의 나의 모습! 나 됨에 대하여 다시 한번 결산해 볼 것입니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으며, 어느 정도 깨달았고 얼마만큼 사람다웠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한 삶은 살았는지? 진지하게 물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젠, 얼마를 벌었느냐? 얼마를 손해 보았느냐? 얼마만큼 출세했느냐는 따위의 그런 이야기는 지난 날로 족하고 적어도 금년만은 생각을 다시 해 보십시다. 무엇을 얻었습니까? 무엇을 잃었습니까? 그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 됨을 반성하는 모습을 그 편지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 반성의 기준을 어디에다 두었느냐 하면 진실에다 두었습니다. 그 때문에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충성이란 말은 헬라 원문대로 번역하면 믿을 만한 혹은 진실, 성실이란 말이 됩니다. 정말 얼마나 충성했느냐? 얼마나 성실했느냐?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자기 반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가? 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오는 평가를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 비춰진 자기 모습! 그 모습에서 자기의 실체를 봅니다. 자기 진실을 물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 또한 깊이 생각해야 될 문제입니다.
나아가 두 번째는 자기가 자기를 비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자기 이상에 의해서, 그리고 내게 주신 능력대로 내가 얼마나 진실했는가? 얼마나 최선을 다한 생을 살았는가 라며 그는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이와 같이 자기를 자책할 줄 알아야 하고 자기 인격을 객관시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기됨을 한번 앞에 내어놓고 비평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비판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그는 하나님 앞에 있는 자기 모습을 생각했습니다. 내가 나를 평한다고 하여도 거기에서 바른 평가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가서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 하나님 앞에 선 자기 모습을 종말론적으로 미리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옳다, 그르다, 잘했다, 잘못했다 하는 판단도 그렇게 쉽게 속단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날이 이를 때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주께서 심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주님의 심판 앞에 자기를 비추어 보는 그런 종말적 비판 의식이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생각하여야 할 문제입니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그 시간을 생각하면서 보다 진지하게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교육적으로 얼마나 성장을 했습니까? 득은 무엇이며 실은 무엇이었습니까? 도덕적으로, 인격적으로, 그리고 신앙적 차원에서의 성장률의 수치는 어디까지 왔습니까? 무엇이, 어디까지 성장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제 오늘은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내 손에 들려지는 물질, 또는 내가 들은바 사람들로부터의 존경이나 평판 같은 것은 좀 잊어버립시다. 나의 직위나 신분, 인기나 소유 따윈 접어 두고, 그리고 한번 진지하게 물어 봅시다. 사랑했느냐고 말입니다. 내 사랑이 어디까지 왔는가? 오직 사랑의 성장을 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계속하여 사랑을 계시하고 계시며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내가 사랑을 얼마나 알았으며, 얼마나 사랑했고, 얼마나 사랑하는 자가 되었는가?를 자문하면서 새로운 반성이 있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대단히 중요한 명제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것입니다. 기준은 오직 하나,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큰 일을 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어찌보면 너무도 극단적인 말씀을 하는 것 같습니다.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여인이 결혼을 하여 20여년 동안을 한 남편을 섬기며 가정을 위해 봉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묻습니다. 그 속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요! 바쁜 일손에 쫓기면서도 사랑과 즐거운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봉사하여야 할 것인데 어느 사이에 짜증이 나고 신세 타령만 하고 앉았다면 그 손에서 만들어지는 음식 먹고 건강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모두가 헛된 것입니다. 더는 수고라고 할 것까지도 없습니다. 사랑 없는 일은 필요 또한 없습니다.
여러분! 지난 1년 동안 어떻게 살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랑은 심판적 요소가 있습니다. 아무도 혼자만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해서 태어났고, 사랑과 함께 살다가 마침내는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 안기는 것이 인간입니다. 실패하고 성공하고의 기준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제 다시 묻습니다. 사랑했느냐고요. 진정 사랑을 알았느냐? 사랑을 얼마나 터득했느냐고 묻습니다. 이는 여기에 사람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를 두고 쓰다듬으면서 "나는 너를 미워한다" 고 하면 개는 좋아라고 꼬리를 친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를 향해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 며 소리를 지르면 문다고 합니다. 사랑한다, 미워한다, 이는 결코 언어의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과 마음이 문제입니다. 세상에 사랑이란 말처럼 흔해 빠진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한번 물어 보십시다. 나의 모든 행사, 나의 모든 거동에, 그 마음가짐에 사랑이 있었느냐고 말입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벌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어서 친구를 잃어버렸다면, 사랑을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실패입니다. 내가 아무리 출세를 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었다면 그의 출세는 고독합니다.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홀로 불안합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교만에 빠집니다. 아무에게도 성원을 받지 못하는 괴로운 길을 가야 합니다. 이것 또한 비참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중에 참으로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지식도 있고, 비판력도 있으며, 진실과 성실, 그리고 인내와 거룩함도 있다. 그만하면 종교적인 성결도 갖추어진 셈이다만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회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는 것입니다. 다 가졌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충고를 하든 구제를 하든 심지어는 몸으로 땀 흘리며 봉사를 하더라도 거기에 사랑이 빠지고 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 말씀 중에서 다시 한번 두려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즉 산을 옮길 정도의 엄청난 기적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과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속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것입니다. 죽을 사람을 살려도 사랑이 없다면 소용이 없는 일이요, 뿐만 아니라 있는 재산으로다 구제하고 심지어는 자기 몸을 불사르게 제물로 내어 줄지라도, 일생을 다 바쳐 제물이 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에게도 유익이 없고 다른 사람에게도 유익함이 없습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행사는 어떠한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1년 동안 많은 구제를 했습니까? 사랑이 없는 구제는 빼앗긴 것입니다. 그것은 구제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는 봉사는 허영이요, 위선입니다. 사랑이 없는 수고는 한갓 노예 생활에 불과합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이 기준이요, 또한 문제입니다.
다시 한번 깊이 물어 보십시다. 범사에 사랑이 있었느냐고요. 내 손길에 사랑이 있었고, 내 마음에 사랑이 있었으며 내 눈빛에 사랑이 있었느냐고! 만일에 그러지를 못했다면 그 모든 일, 그 모든 수고는 헛것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피곤하고 왜 이렇게 지치는 것이겠습니까? 왜 이렇게 조그만 일에도 짜증이 납니까?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가야 합니까? 그 모든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누구에게 억울한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것이 문제되는 것도 아닙니다. 지위의 고하도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문제는 사랑하는 마음이 어느 사이에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기쁨을 줍니다. 벅찬 감격을 줍니다. 행복을 주며 유익하게 합니다. 삶의 힘을 줄 뿐만 아니라 소망에 넘치게 합니다. 그리고 보람과 긍지에 살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해서 이렇게 지친 것입니까? 왜 이렇게 피곤한 것입니까? 그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낙심하는 이유도, 절망하는 이유도, 사랑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온유해야 될 줄도 알고, 겸손해야 할 것도 배웠습니다. 하지만 온유해지지도 않고 겸손하지도 못합니다. 사랑이 없기 때문에 온유하고 겸손한 것을 마음대로 못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 앞에서는 온유해지고 겸손해지기 마련입니다.
저는 목사인 까닭에 결혼식 주례를 자주하게 됩니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세 번씩이나 하게 되는데 신랑 신부가 이제 결혼식을 마치고 팔짱을 끼고 걸어나가는 뒷모습을 볼 때마다 축복하는 마음과 더불어 "무사히 살아다오"하는 걱정이 되고는 합니다. 이는 왜냐하면 요즈음 사람들은 비단 젊은이들 뿐만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은 곧잘 하는데 진정으로 사랑하지를 않습니다. 이에 대한 시금석은 간단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자기 자랑을 하지 않는 대신 상대방을 높이고 자기를 낮춥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신부 예쁘다고 칭찬하면서 장가 잘 갔다고 하면 어찌된 영문인지 신랑이 좋아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하는 소리가 "노처녀 하나 구제했지요 뭐"하고 나오는데 이게 어디 제대로 된 것이겠습니까? 이 마음 가지고 살아갈 것 같습니까? 곧잘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팽팽히 맞선 채 긴장 관계에 삽니다. 누구 머리가 더 좋으냐? 누구 가문이 더 훌륭한가? 하며 장군 멍군 하는데 이건 도토리 키 재기지 암만 그래 보았자가 아니겠습니까?
사랑 안에는 자랑이 없습니다. 자기 자랑 대신 오히려 상대방을 자랑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가정에서 아이들이 말썽을 부린다고 "용케 네 아비" 아니면 "네 어미 닮았구나"할 것이 아니라 칭찬 받을 일을 했을 때에 "너는 역시 너의 아버지" 아니면 "어머니를 닮아서 훌륭하구나"하고 좀 이렇게 나와야 되겠는데 어쩐지 그런 사람 만나 보기가 힘이 듭니다. 그 심보가 대단히 고약하고 못됐어요. 이러고도 사랑한답니다. 거 무슨 사랑이 이런 사랑이 있답니까? 사랑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나 보다도 저를 칭찬할 때 기뻐지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라는 겁니다.
여러분! 깊이 회개하여야 합니다. 정말 내 아내가 칭찬들을 때에 내 마음이 기뻤는가? 내 남편 존경받는 것을 나의 존경처럼 생각했던가? 말입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겸손해집니다. 사랑하므로 자기가 소멸되고, 자기 자랑은 다 없어지게 됩니다. 질투하지 않습니다. 시기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진실하게 합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서 거짓말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불안하고, 두려우며, 형벌이 무섭고, 비판이 두렵기에 거짓 지혜가 발동하는 것이지 저쪽에서 사랑하고, 다 용서하며, 모두를 받아 주는데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만약에 거짓말을 많이 하는 자녀가 있다면 그는 분명 사랑 결핍증에 걸린 것입니다. 진정 넓은 마음으로 저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면 굳이 거짓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끝마다 거짓말이 나온다고 하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한 마디로 사랑 받지 못하고 살아서 이렇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거짓이 있을 필요도 없고, 거짓을 지킬 수도 없어요. 오직 진실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습니다.(벧전 4 : 8) 진정 사랑하는 자에게는 단점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좋은 점만 보이고 좋게만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저 상대의 나쁜 점, 어두운 점만 보며 그것만 들추어 말합니다. 모처럼 입을 열었다 하면 비판과 허물뿐이니 이것 또한 보통 병이 아닙니다. 참으로 고치기 힘든, 병 중에서도 큰 병입니다. 사랑하는 자는 밝은 면을 보고, 장점을 말하며 삽니다.
리고 나아가서는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20년 전에 지나간 것 잔뜩 벼르고 있다가 툭 하면 다시 한번 들춥니다. 이처럼 그 허물과 그 약점을 그냥 쑤시고 있습니다. 이러고도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이런 마음, 이런 자세로 평생을 같이 살자니 정말 고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과거의 잘못이 생각나지 않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불길하며 잘못되었던 일만 기억이 되살아난다면 이는 분명 무엇인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도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요일 4 : 18) 사실입니다. 공해가 심하고, 기아와 전쟁이 있으며, 처처에 테러(terror)가 있고, 지진이 있습니다. 실로 그치지 않는 재난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오늘, 당장에 죽어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형제를 사랑하기에 그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모든 두려움의 뿌리는 바로 미움에 있었으며, 사랑 없음에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사랑은 인내를 생산합니다. 왜 그렇게 참기가 힘드느냐고요? 그 이유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참기가 쉬워집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했기에 7년을 봉사하며 기다리면서도 그 7년을 수일 같이 여겼다(창 29 : 20)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하루가 천년 같습니까?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인내! 참는다는 것! 이것 역시 사랑하는 자에게는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탈무드에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친구 셋이 있었는데 한 친구는 하루도 못보면 안 될 것 같은 아주 가까운 친구이고, 두 번째 친구는 그저 덤덤한 친구요, 세 번째 친구는 별로 달갑지 않은 친구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세 친구들 둔 이 사람이 어느 날 왕으로부터 호출을 받고 입궐을 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신에게는 죄가 많은데 도대체 무슨 책망을 하시려고 부르셨나 생각하니 겁이 나서 혼자는 갈 용기가 생기기 않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친구에게 찾아가 자기하고 같이 가 줄 것을 원했더니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 다음에는 덤덤한 친구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더니 이 친구는 같이 가 주기는 하겠는데 궁궐 대문까지만 같이 가고 궁궐 안에는 혼자 들어가라고 하더랍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별로 반갑지도 않은 친구에게 찾아가서 함께 가 주기를 바랬더니 첫마디에 "그럼 같이 가야지 그리고 왕에게 자네는 아무 죄도 없다고 말해 주겠네"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제 설명을 드리면, 첫 번째 친구는 돈입니다. 아무리 가까워 봤자 여러분을 돕지 못합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에는 일언지하에 거절할 것입니다. 두 번째 친구는 친척입니다. 가족과 친척! 제 아무리 사랑스럽고 정들었다 하더라도 장례식 날까지 따라오면 그만입니다. 그 이상을 따라오지 못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친구는 별로 반갑지도 않았지만 이것은 자선이요 사랑이었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사랑은 끝까지 동반합니다. 거절도 중단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사랑을 점검하여야 하겠습니다. 어디에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겠습니다. 경제를 생각하고, 인기, 지위, 명예도 생각해 보겠습니다만 이제 우리는 범사에 사랑이 있었느냐고 물어야 하겠습니다. 어느 선배 목사님이 신학대학 채플(chapel)에서 간증하는 말씀을 들어보았습니다. 그 부인되시는 사모님이 8년 동안 병중에 있었다고 합니다. 대단히 어려운 고생을 하면서 수술도 많이 받고 했으나 낫지를 않고 여전히 병석에 누워 있게 되었는데, 이제는 꼭 나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매일 정성을 다해 약을 달여 대접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8년째 되는 어느 날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아내에게 줄 약을 들고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이상한 생각이 나더랍니다. 아주 나쁜 생각이 드는데 "아이고 이제 그만 죽지! 왜 이렇게 오래 살아서 이 고생을 시키나" 하는 못된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나서는 "아! 그러면 안 되지" 하고 자기 생각을 꾸짖으면서 약을 대접했는데 바로 그 약을 잡수신 후 사모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목사님이 그렇게도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내가 8년 동안 사랑으로 했는데 왜 마지막에 가서 이런 못된 생각을 했을까? 하는 탄식입니다.
여러분! 8년, 아니 10년을 수고했더라도 사랑이 없는 일은 실패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 없는 행위는 절대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사랑으로 행했다면 혹 실수가 있고 잘못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 행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잃고라도 사랑을 얻었으면 적자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지 맙시다. 진정한 사랑으로 한 일이라면 절대 실패라고 말하지 맙시다. 사랑을 알았으면 그것으로 완전한 성공입니다. 스데반이 세상을 떠날 때에 원수를 사랑하고 죽어갑니다. 돌무더기 속에서 천사의 얼굴로 죽어갑니다.
그것은 절대로 실패가 아닙니다. 사랑했기에 그는 성공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안다 (요일 4 : 7)고 하였습니다. 사랑으로 하나님을 보고, 사랑으로 하나님을 알며,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됨을 형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 사랑! 이 거룩한 사랑에서 새해, 새 아침의 출발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사랑을 모르는 저희들을 끝까지 사랑해 주신 놀라운 은혜를 감사합니다. 우리의 범사, 모든 행위 속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사랑이 있었는지? 이를 자문하고 깊이 반성하며 결단하는 계절이 되게 하옵소서. 이제는 사랑을 알게 하시고, 오직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람됨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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