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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간 이스라엘! (행 7:8-16)

by 【고동엽】 2023. 1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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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간 이스라엘! (행 7:8-16)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다시금 순교 직전의 스데반, 어느 때보다도 더욱 성령이 충만하
여 마지막 설교를 도도히 펴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앞에는 그를 노려보는 악
한 사람들의 살기 등등 한 시선들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은 저들을 미워하지 않습니
다. 삼엄한 시간, 생명이 경각에 묶여 있는 시간입니다 마는 그의 얼굴은 천사의 그것이었습
니다. 천사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아 주 담대하게, 조리 있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역
사를 들어 증거 하는 내 용의 주제는 그리스도입니다. 특별히 예수와 그 십자가에 대하여
설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또 구속사적인 사건,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는 변함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을 스데반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중
요한 것은 이 거룩한 사건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부득불 의인
이 죄인인 양 고난을 당하는 역사가 있어지고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때로는 철학이나 역사를 전공하는 분들이 이런 일을 가리켜서 흔히 '
만인균형의 법칙'이라고들 합니다. 죄인이 살기 위해서는 의인이 죽어야 하는 모순이 있어
야 하는 것입니다. 죄인의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서는 부득불 의인이 죄인으로 취급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죄인이 의인대접 받는 것은, 또 죄인이 의인으로 구원받는 것은 그 자체로
모순입니다. 죄 인은 죄인인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데 죄인으로 죽어 가는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그보다 먼저 있어야 할 일이 있으니 곧 의인이 죄인
처럼 죽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르크스는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이와 비슷한 이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일 안 하는 사
람이 먹고살려면 일하는 사람이 일하고 못 먹는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 안하
고 먹고사는 사람들 많지요. 그렇지만 부득불 누군가는 일을 많이 하고 땀을 많이 흘리면서
도 못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지요. 뒤집어 말한다면 땀흘려 일하는 사람이 제대로 대접을
받게 되기 위해서는 일 안 하는 사람은 굶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본문에 나타나는
중요한 교리인즉 죄인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용서받기 위해서는 부득불 의인이 죄인
인 양 고통 당하고 죽어 가는 사건이 있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의인이 죄인처럼 죽었다는 사건이 확실하다
면 죄인이 의인처럼 산다는 것도 확실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것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내
가 죄인이면서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단 말인가 - '믿음으로' '믿음으로'하면서도 우리는
종종 마음이 흔들려 이 같은 회의에 빠지곤 합니다. "나 같은 죄인, 구제불능이지, 아무짝에
도 쓸모가 없고, 실수나 하고, 잘못이나 저지르고, 게으르고……" 가끔 이렇게 자학을 하는
분도 있습니다. "목사님, 저는 새벽기도 말입니다. 저녁마다 내일 아 침에 나오겠다고 맹세
하지만 아침마다 어기고 후회합니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일생을 두고 그래요"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 같은 건 구제불능이지, 쓸만한 데는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단 말
인가 - 의심이 되십니까? 변증법적으로 다시 올라가 생각해봅시다. 전혀 죄가 없는 예수님
이 죄인인 것처럼 죽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똑바로 알면 죄인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명백한 증거인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온유하신 뜻을 인간의 죄나
인간의 불의에 상관없이 신비롭고도 초월적으로 변함없이 온유하게 계속 이루어나가신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이렇듯 중요한 테마를 설명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으로 가는
역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요셉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주제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지요? 요셉이 분명 형들의 손으로 팔렸습니다.
그는 12형제 중 막내로부터 두 번째입니다. 그런데 라헬이 낳았으므로 야곱은 남달리 요
셉을 사랑했습니다. 편애했으니 잘못이지만 인지상정(人之常情)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야
곱은 요셉을 드러나게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형들이 질투를 합니다. 그러나 질투가
나서 밉게 보았기로니 팔아먹기까지 할 것은 없는데, 한술 더 떠서 죽이라고까지 합니다. 일
단 노예로 팔리면 죽을 때까지 노예로 사는 것입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옛날사
람들의 기록에 보면 '당나귀와 노예는 꼭 같은데, 다만 노예는 말을 하고 당나귀는 말을 못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천덕꾸러기로 살다가 그렇게 죽는 것이 노예였습니다. 노
예는 정조 관념도 없었어요. 도덕도 없었어요. 오직 주인의 말대로 순종만 하면 되는 것이었
습니다. 도덕적 책임은 주인이 지는 것이었습니다. 짐승과 동격으로 취급받았습니다.
'말하는 짐승'이 곧 노예였던 것입니다. 한번 노예는 그 후손까지 대를 이어 노예였습니
다. 요셉의 형제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면서도 어린 동생을 노에로 팔아먹었습니다. 인간악
의 극치라 하겠습니다. 죽음보다 못한 일생을 보내게 하고 만 것입니다. 패륜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그는 오로지 하나님의 뜻을 생각했습니
다. 훗날에 그 자신이 이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대미(大尾)를 이루고 있는 대목들
은 언제나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음을 경험하곤 합니다. 형들이 양식을 사러 먼길을 왔습니
다. 총리대신 요셉이 높은 자리에 앉아 내려다보니 기가 막힙니다. 방안에 들어가 숨어서 울
고 다시 나와 이야기하고, 또다시 들어가 울고 나와서 이야기하고…… 그러다가 끝내는 참
지 못하고 형들 앞에서 펑펑 울고 말합니다. "내가 당신들이 팔아먹었던 동생 요셉입니다."
형들은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아이쿠! 이젠 큰일났구나, 우리가 팔아먹은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어 저기에 앉았으니 우
리는 이제 꼼짝없이 다 죽었다 싶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죽어 마땅하지요. 막말로 천하에
나쁜 놈들 아닙니까? 그러나 이 때의 요셉을 보십시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
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 놀라운 일입니다. 그뿐입니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
서 한탄하지 마소 서 하나님의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
45:5)."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두 요절입니다. 자세히 읽어보면 이 두 요절에서 '당신들이'
와 '하나님이'가 대조되어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팔아먹었소. 당신들은 나를 괴롭혔소. 당신들은 나를 죽이려 했소. 당신들
은 이러이러했소……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이 리로 보내셨습니다. 당신들과 나를 구원하시
기 위하여,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아니 만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를 이리로
먼저 보내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나를 괴롭혔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선으로 바꾸셨어
요.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저러한 경험을 민족적으로도 당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당합니다. 아마도 저러한
간증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 요셉의 그 마음, 그 믿음만 가진다면 우리가 당하는 일, 우
리가 겪는 사건 하나 하나에서도 우리는 선을 생각할 줄 알게 됩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
니다. 당신들은 나를 이렇게 했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하여 이렇게 역사 하셨
습니다 - 형제들은 분명 요셉을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 시간에 이렇게 생각합니
다. '나는 팔려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셔서 여기에 왔다'라고. 'be sold'와 'be sent'
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팔려왔습니까, 보냄을 받았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
오. 한 여자가 시집을 갔습니다. 알고 보니 잘못 갔어요. 가서보니 고생 죽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가슴을 칩니다. 그러나 여러분, 내가 어느 직장에 몸담고 있건 어디 가서 살 건 어떤
일을 맡았건, 사람으로 볼 때에는 팔려 다닌 것 같아도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셔서
내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보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의식입니다. 나의 나됨은 결코 팔려온 것도 팔려 다닌 것도 아닙니다. 우연인 것도 아닙
니다. 하나님의 보내셔서 나의 나됨이 여기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세운 일도 그래요. 가끔 어떤 분들은 나더러 이런 농담을 해요. "목사님은 교회
세우신 것도 잘하신 것이지만 참 목을 잘 잡았어요." 목을 잘 잡았다라니, 사실 목은 좋아야
됩니다. 요새 와서 이 자리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좋은 자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알아야 돼요. 누구도 이것 정한 사람 없습니다. 제가 올 때에는 마침 밤이
요, 수요일 저녁이라 예배드린다고 해서 왔는데, 그 때에야 이게 압구정동인지 뒷구정동인지
모르고 왔어요. 전혀 동인지 서인지도 모르는 채 코리아나호텔에서 만나 차 한잔 마시고 "
차 타십시오"해서 타고 왔더니 여기까지 온 것이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압구정동이데요. 그
러니 이 자리를 그 누가 잡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사람으로 볼 때에는 이렇게 되고
저렇게 되고, 누가 소개하고 어떻게 하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것 잊어버리세요. 하
나님께서 보내셨어요. 이것이 신앙입니다. 조금도 사람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누가
유공자고 누가 수고하고…… 수고는 누가 했단 말입니까?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하나님
께서 여러분 과 나를 이 자리에서 만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이루신 것입니
다.
요셉의 마음이 그러했습니다. 믿음이지요. 신앙적 역사의식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
다. 'be sold'냐 'be sent'냐, 팔렸느냐 보냄 받았느냐 - 우리는 늘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은 죄악의 길로 행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의를 이루셨습니다. 이 것이야말
로 본문이 말씀해주는 소중한 은혜입니다. 흔히들 요셉을 설명할 때에 그리스도의 예표다,
그리스도의 prototype다, 혹은 그리스도의 그림자다, 그리스도의 모델이다, 하고들 이야기합
니다. 미상불 구약적으로 볼 때에 요셉은 확실히 그리스도적인 모습이 있는 인물이라고 보
여집니다. 그의 사건도 그러합니다.「팡세」를 남긴 프랑스 신학자 파스칼도 예수 그리스도
와 요셉 사이에 유사성이 많다고 다음과 같이 재미있게 비교하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도
요셉도 둘 다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는 점에서 비슷합
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아서 요셉은 형제들 의 버림을 받았고 예수님께서는 만
백성에게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비슷하지요. 둘째, 요셉도 죄 없이 팔립니다. 억울하게 말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억울할 수
가 없지요. 요셉은 은 20에 팔립니다. 예수님은 은 30에 팔립니다. 건강한 노예, 장성한 노예
한 사람의 값이 은 30이었습니다. 요셉이 팔릴 때에 열 일곱 살이었습니다. 싼값에 팔린 것
이지요. '조금 키워야 써먹으니까' 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은 20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과 요셉은 같은 값에 팔렸다고 보아야 합니다. 또한 요셉은 감옥에서 두 사람을 만납니다.
술 맡은 관원과 떡 맡은 관원이 그들이었습니다. 두 죄수 사이에 있다가 한 사람은 감옥에
서 나가게 될 거라고 예언하게 되고 한 사람은 죽을 거라고 예언하게 되는데 한 사람은 죽
고 한 사람은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두 강도 사이에
계셨습니다. 하나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셔서 구원받고 한 사람은 버려졌습니다.
이 같은 상황도 이렇듯 유사한 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몇 가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셉의 사건에서 보면
요셉의 형들이 이렇듯 악할 수 있는 것일 까 싶습니다. 그러나 이게 바로 인간의 죄를 말해
주는 극적 장면이거든요. 아시는 대로 우리 인류역사에서 맨 처음에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그야 선악과를 따먹은 죄이지만, 에덴동산 밖에서 지은 죄가 바로 형이 동생을 쳐죽이는 죄
입니다. 왜 쳐죽입니까? 질투 때문입니다. 동생이 형에게 그 무슨 해로운 짓을 했습니까? 무
엇을 빼앗았습니까? 강도질을 했습니까? 욕을 했습니까? 아무 것도 없어요. 단지 질투로 그
렇게 된 것입니다. 요샛말로 '컴플렉스' 때문입니다. 열등의식(inferiority) 때문입니다. 제가
잘못해놓고 공연히 동생을 죽이고 앉았단말이예요. 이것이 곧 인류가 범한바 아주 태고 적
부터 있었던 죄인 것입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잘못하고 아니고가 문제가 되
는 게 아닙니다. 저가 나한테 어떻게 했느냐고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모든 죄를 잘 살펴
보십시오. 그 속에는 반드시 시기, 질투가 있습니다.
시기, 질투 - 이거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모든 문제에서 시기, 질투만 빼버리고 한번
살아보십시오.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되 이것을 위하여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시기, 질투가 있는 한 무슨
일을 해도 되는 것이 없습니다. 항상 마음이 어지러워요. 괴로워요. 한시도 편할 날이 없어
요. 얼굴을 펼 수가 없어 요. 밝은 총명도 없어지고 지혜도 없어져요. 한번 시기하기 시작하
면 그것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사기(詐欺)는 자기자신의 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거든
요. 피해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자신 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남과 비교하면서 비
롯됩니다. 내가 부족한데, 저 사람도 함께 무너져야 되겠는데, 그렇게 안돼요. 그럴 때에 내
가 무너지는 것같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성공이 내 실패인 양 느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을 넘어뜨리는 것이 곧 자기가 일어나는 것이 라고 착각을 해요. 이래서 생기는 것입니다.
시기, 질투가 뿌리 박혀 있어서 폭발하기 시작하면 하나님도 안보이고, 도덕도 안보이고, 생
명도 안보이고, 필경에는 나도 죽어요. 스스로도 자기 죽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도 상관하지
않아요.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것이니 그렇습니다. 다 죽어버리자는 것이지요. 얼마나 무서
운 일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죄 중 가장 뿌리깊은 죄가 시기인 것입니다. 가장 무서
운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고사하고 우선 내 마음속에 시기, 질투가 조금만이라도 생기거든
회개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시기, 질투로부터 깨끗이 자유라는 심령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한번은 어느 권사님이 아들 장가를 보내는데, 장가를 보내 가지고 내보내려고 해요. 권사
님은 내보내려고 하는데 남편 되는 장로님 은 며느리를 데리고 있으려 해요. 이래서 말다툼
이 났어요. 그러다가 나한테까지 왔기에 저는 판결해주기를 "내보내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권사님이 되게 좋아하십디다. '내가 이겼다'고. 제가하라는 대로하기로 했답디다.
그렇게 되었는데 "그런데 왜 그랬소?"하고 제가 물어보았더니, 아직 결혼하기 전 약혼하고
있을 때에 신부 되는 처녀가 신랑 댁에 놀러 갔답니다. 차를 끓여 가지고, 또 과일을 예쁘게
깎아 가지고 시아버지한테 가지고 가서는 "아버님"하고 대접을 했대요. 이 시아버지가 그만
입이 함박같이 벌어져 가지고 좋아하는데, 이 광경을 본 권사님의 마음에 질투가 오더랍니
다. 아하, 이 영감이 젊은 여자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꿈틀거리더니 당장에 그 아가
씨가 나쁘게 보이더랍니다. '요것, 요부다, 안되겠구나' - 이래서 시어머니는 '안되겠다. 내
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는……'해서 내보내자 하니 장로님이 말을 안 듣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나한테까지 온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질투란 같은 또래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질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썽입니다. 아랫사람이 윗사람 질투합니다. 윗사람이 아랫사람 질투
합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질투하는 게 아닙니다. 이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보십시오. 형
들이 요셉을 질투합니다. 아무런 이해 관계가 없이 말입니다.
결국은 팔아버려요. 또,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도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들이 질투
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뭇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니 이것을 못 참는 것이었습니다.
질투, 시기지요.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는 일입니다. 질투, 시기가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기
까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마음에서 꿈틀거리는 이 시기, 질투를 예사로 생각했다가는
큰일납니다. 어느 사이에 엄청난 죄를 짓게 됩니다. 꿈틀거리기 시작할 때부터 회개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요셉은 그 부조리한 형편 중에도, 있을 수 없는 사건 속에서도 원망도
불평도 없습니다. 끝까지 성실했습니다. 본문 9, 10절에 보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은총과 지혜를 주셨습니
다.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감옥에서 고생하고 여러 가지로 고통을 겪었지만 그래도 그
는 꾸준하게 성실했어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고 은총과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유혹이
있었습니다.
아름답고 권력 있는 보디발의 아내, 이 여자가 이 젊은 남자를 유혹합니다. 유혹에도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마는 아무래도 20대에 있는 이성에 대한 유혹이 가장 무섭거든요. 30대가
되면 사업이나 재물 이 문제라고 합니다. 40이 넘으면 명예가 문제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유혹인데, 혈기가 왕성할 때에는 아무래도 이성에 대한 유혹이 제 일 무섭습니다. 이런 때에
보디발의 농염한 아내가 요셉을 유혹합니다. 유혹을 해도 아주 집요하게 유혹합니다. 날마다
유혹합니다. 창세기 39장 12절에 보면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라고 했어요. 이 같
은 유혹을 요셉은 어떻게 해서 물리칠 수 있었을까요? 성경을 보면 몇 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 이것은 큰 악입니다. 죄입니다. 요셉에게는 죄의식이 분명했습니다. 두 번째로, 주인이
내게 모 든 것을 맡겼습니다. 나를 믿어주는데 주인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남의 아내, 주인의 아내니까요. 그 주인에 대하여 배신행위를 할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
로, 하나님 앞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런 죄를 범할 수가 없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전설
이 있습니다. 요셉이 여자보고 하나님 앞에서 이런 일 할 수 없다고 하니까 보디발의 아내
가 스커트를 벗어 가지고 우상에다 씌워놓더니 "이래놓으면 신이 못 보지 않느냐"라고 합니
다. 이 때 요셉은 말합니다. "저런 우상은 못 보지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지금도 보시고 계
십니다"하고 대답했다는 전설입니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는 의식, 이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요셉은 시험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이렇듯 성실하게 살았는데 도 감옥으로 갔습니다. 감옥으로 가는 이 과정
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감옥에 가서도 그는 성실했습니다. 끝까지 진실
했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높이어 총리대신이 되지
않습니까? 그리고 형들이 왔을 때에 그 들을 용서하지 않습니까?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주신 은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했기 때문이요,
심판을 해도 하나님께서 하시지 내가 어찌 하나님을 대신하겠는가 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
다. 여러분, 아무쪼록 조심할 것입니다. 내가 누구를 심판하고, 내가 누구를 버릇 고쳐 주고,
내가 보복하고, 내가 원수갚고…… 쓸데없는 소립니다. 적어도 신앙의 사람은 내가 할 일만
합니다. 내가 할 일은 용서입니다. 내가 할 일은 사랑이요, 원수갚는 일은 하나님께 있습니
다. 악을 벌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내가 미워할 것 없고 손에 피를 묻힐 필요
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내가 대신합니까? 요셉은 그래서 용서할 수 있었습니
다. 또한 요셉은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고로 이제 와서 누구를 탓
하고 시비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에도 당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위탁하십니
다. 하나님께 다 맡기십니다. 더욱이 십자가를 지우는 원수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인간의 악 은
극치에 도달했습니다. 극치 중의 극치가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다시 맨 처음 드린 말씀으로 돌아갑니다. 이 악
한 세대, 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깨끗한 의인이 죄인으로 죽어가야 했습니다. 지금
스데반은 바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을 보라, 그와 같이 오늘도 주님께서 만
백성을 위하여 이렇게 죽어 가시고 그리고 부활하셨느니라 - 이를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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