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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진 자의 행로(사도행전 8 : 1-8)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사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상 갈등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거기에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러나 주관적인 이유가 더 큰 것으로 생각을 해봅니다. 이는 왜냐하면, 자기의 마음을 자기 마음대로 다스릴 수 없는 데에서 일어나는 것이 갈등이라고 생각되어 지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기에 우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우리는 그 우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합리적인 변론을 펼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는 운다고 일이 해결되겠느냐? 혹은 살다보면 그보다 더한 일도 있다는 등, 아무튼 여러 가지로 울어서는 좋지 않다는 이야기들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우는 본인이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그것을 몰라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 알고 있지만 울음이 나니까 우는 것입니다. 우는 데에도 정리된 생각이 있어서 우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울고 싶어서 우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울어야 할 이유를 생각해 가면서 우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그러고 보면 운다는 사실과 생각은 일치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것에 마음을 두고 그렇게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느끼는 것은 느끼는 대로,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는 대로, 내 의지는 내 의지대로 하여 지식과 감정과 의지가 각각 따로 놉니다. 그 때문에 항상 복잡하고 편안하지를 않습니다. 세상에 생각해 가면서 웃고, 생각해 가면서 울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은 그 자체가 모순이기도 하고 갈등이기도 하며 심하게 말하자면 믿어볼 만한 존재가 못되기도 합니다. 음식을 두고라도 유익한 음식을 대할 때면 입맛도 잘 동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유익한 음식이 별로 맛이 없는 데다가 꼭 먹어야 할 줄을 알면서도 입맛이 내키지 않기에 끼니를 놓치고 하는 문제가 생긴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란 생각하는 대로, 이치에 맞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며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결론을 내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는 믿을 수가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 생각대로 되어져서 반드시 좋다는 보장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오히려 자기 불신을 선언해 버려야 합니다.
"내 기분, 내 욕심대로 되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믿을 것이 못된다. 더욱이 내 감정이라는 것은 참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고 말입니다. 진실로 이 선언을 해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우리가 잘 아는 말 가운데에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우리는 이 고난을 당할 때마다 그로 인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고 또한 그 고민에 대해서는 이런 저런 말이 많습니다. 우리가 읽는 교양 서적의 전부가 그런 것이요 하나 같이 고생은 사람에게 유익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어떤 사람이 실패를 했다던가, 시험에 낙방을 했다던가, 아니면 병이 들었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하면 그를 찾아가 여러 가지로 위로의 말을 하게 될 것인데 아마도 그런 일에는 다들 선생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니 다 유익한 것이라"는 등, 갖가지의 좋은 말로, 위로의 명 설교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가 그 일을 당하게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래서는 전혀 그런 이야기나, 그런 진리를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해버린단 말입니다. 고난의 맛은 씁니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는 그 진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설명하라고 하면 모두가 다 선생님들입니다. 그러나 자기 무제로 부딪치게 될 때에는 다들 엉뚱한 소리를 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지성인의 고민이 있고, 남을 가리치는 자의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초년 고생은 금 주고도 못산다는 말을 합니다. 이는 젊어서 하는 고생은 대단히 값진 것이요, 훌륭한 재산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당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에는 고난에 대한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큰 핍박"이 있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요즈음 같이 분쟁이 많고 타락된 교회라면 핍박이 있어도 당연합니다만 초대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니었습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고, 성령이 충만하며, 사랑이 충만하여 유무 상통한 교회였습니다.
오늘날 교회처럼 할 일을 안 하는 교회, 말만 하는 교회라면 또 한번 핍박이 있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행동하는 교회요, 이적과 기적이 있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동반하는 그런 권세와 능력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한 예루살렘 초대교회에 핍박이 있고 환난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참으로 납득이 가지를 않는 이야기입니다. 왜, 여기에 환난이 있어야 합니까? 이것이 죄 때문입니까? 사회 구조 때문입니까? 아니면 도덕적 문제입니까? 정치적 문제입니까? 왜, 하필이면 여기에 핍박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는 성경을 읽는 중에 핍박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면 교회에는 항상 핍박이 있었지! 하고 쉽게 넘어갑니다만 이제 그 당시 현장으로 돌아가서 한번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핍박이란 사건은 간단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재산을 몰수당합니다. 형제가 끌려나가 비참하게 죽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었고 야고보가 목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사도들이 나가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쓰러지며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옵니다. 자! 이제는 다시 잡히면 죽을 처지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흩어지게 됩니다.
집을 두고 목적지도 없이 떠나야 했습니다. 이것은 피난이 아니라 도망입니다. 도망자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온 민족이 함께 당하는 수난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당하는 수난입니다. 그것도 다른 이유가 아닌, 오직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는 그 한가지의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핍박을 당하며 죽어야 했고, 쫓겨다니는 도망자로 방랑 길에 나서야 했습니다.
이것은 결코 본의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잘 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그 누가 믿겠습니까? 그런데 저 예루살렘 초대교인들은 복 받는 것은 두고라도 예수를 믿자마자 이렇게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됩니다. 예수를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살아남기 위해서 부득불 도망을 해야 했습니다. 원치 않는 곳, 원치 않는 남의 나라 땅에서 유리 방황하며 쫓기는 나그네가 된 것입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고, 여기에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저들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흩어져야 했고, 흩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흩어져야 하는지? 당시에 그 뜻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고통의 이유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왜 핍박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흩어졌다는 사건이 있을 뿐입니다. 흩어졌다는 현실과 그 사실만이 엄연히 존재할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이 고난을 새로운 기회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서 상기되는 맥아더 장군의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안정은 없다. 다만 기회가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정은 없습니다. 전쟁이 없다고 해서 안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벌었다고 안정도 아닙니다. 어디에나 큰 싸움이 있고, 진통이 있으며, 재난이 있고, 환난이 있습니다. 다만 또 하나의 기회가 있을 뿐입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참으로 신비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쌔"라고 하였습니다. 흩어졌다는 말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수동적인 것입니다.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 억지로 된 일입니다. 죽이려고 하니까 도망간 것이요, 그럴 수밖에 없기에 불가피하게 되어진 일입니다.
이것은 피동적이요, 수동적이요,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두루 다닙니다. 두루 다니는 것은 자율적인 것입니다. 이는 능동적이요, 자원적입니다. 억지로가 아닌 자의와 자율로, 무의미한 방랑의 생활이 아니라 의미를 찾는 것입니다. 기왕에 집은 떠났고, 사업도 망했으며, 홀홀 단신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자유롭게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세계관입니다. 주어진 사건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저들은 정든 고향과 자기 집을 두고 쫓기는 신세가 되어 남의 땅에 가서 살게 되었지만 세상을 원망하지도 않았고 신세를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왜, 누구 때문이냐며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속담에 떡 본 김에 제사 드린다는 말이 있듯이 기왕에 집은 떠났으니 차라리 홀가분해진 이 기회에 이제는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일을 했습니다. 바로 거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당하고 있는 현재의 이 엄청난 고난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고 새로운 은총의 계기로 받았습니다. 그 고난을 새로운 기회로 창조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요셉이라고 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이 요셉은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열 한 번째 아들로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랍니다. 그 때문에 형들로부터는 시기와 미움을 사게 되는데 한번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먹을 것을 가지고 멀리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길고 요셉은 형들에게 붙들려서 죽음의 위기를 당하게 되고 결국은 형들의 손에 의해 멀리 애굽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이렇게 한번 팔려가게 되면 이제는 종신토록 노예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한 아버지의 아들들인 사랑하는 형님들에 의해 팔려 가는 요셉의 그 모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애걸하며,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이는 생각할수록 분한 일이요, 원망하기로 든다면 세상에 이렇게 답답한 일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형님들에 의해 팔려 가는 열 일곱 살의 요셉! 그는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중에서도 충실하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 마침내 13년 후에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 권좌에 앉게 됩니다. 이 때에 대 흉년으로 인해 양식이 떨어지자 애굽으로 양식을 사러온 요셉의 형님들이 애굽의 총리 앞에 꿇어 엎드렸다가 마침내 알고 보니 자기들이 팔아버렸던 그 동생이더란 말입니다. 그래서는 이제 죽었구나 하고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요셉은 다음과 같이 위로의 말을 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창 45:5) 이는 아무 때에 읽어도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는 말입니다. 지난 일은 다 잊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나를 앞서 이리로 보낸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무슨 일을 당하든 그 누구도 탓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흩어졌다는 말은 하나님이 떠나게 하심으로 소화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이요, 하나님께 기도한 기도의 응답이요, 약속의 성취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이나 누가복음 24장 49절에 보면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성령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을 받았으니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행전 1장 8절에 의하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안주하려 하였고 현재에 만족하려 했습니다. 예루살렘에다 낙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며, 또한 재림주를 맞이하여 거기서 즐기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복음을 받지 못한 이방 사람들에게는 시선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이방으로 떠나야 할 사람들이 이방으로 떠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전하여야 할 사람들이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평안한 가운데 안일한 만족과 자기 중심적인 것에 도취되어 그 자리에 머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저들을 보내십니다. 보십시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도 행하지 않을 때에 남은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제는 무서운 채찍이 있을 뿐입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자를 무엇으로 가르칩니까? 거기에는 환난과 핍박 외에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를 치셔서 몇 사람 죽고 난 그 때에 가서야 다 흩어져 선교사로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그렇게 편안하게, 감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업이 좋아 보이고, 하나님의 사람이 영광스러워 보이기에 따라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엄청난 사건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사람의 이상이나 이념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그 누구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 하나님의 작전 계획은 이렇게 환난과 핍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가야할 길을 가지 않았기 때문에 가게 했고, 끊어야 할 일을 끊지 않았기 때문에 끊게 했으며, 하여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교회에 내리신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개인이든, 교회이든 일을 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때로는 그러한 심판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을 때에 빼앗기게 됩니다. 가야할 길을 가지 않을 때에 하나님께서 가게 하십니다. 거기에 아픔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땅, 낯선 곳으로 보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교만하여 사마리아 땅은 지나다니지도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자면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가까운 길인데도 더러운 길이니 밟지 않겠다 하여 멀리 돌아서 다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 앞에 핍박이 있고 보니 사마리아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날 업신여기던 사람과 이제 친하게 되었습니다. 전에 미워하던 사람, 전에 무시하던 사람들을 이제 사랑하는 사람으로 맞아들이게 됩니다. 지난날 저들은 이방 사람들의 집에는 들어가지도 않았으며, 음식을 나누지도 않았고, 물론 그 집에 들어가서 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워낙 핍박이 심하고 보니 이방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저들은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여러분! 사랑하여야 될 사람을 미워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아니면 혹 내가 남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엄청난 사건이 낯선 사람을, 바로 그 사람을 친한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6․25때에 그 큰 사건을 한번 당하고 보니 양반,상놈 할 것이 없이 다 친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고고하고 도도하던 양반이 다 어디로 간 것입니까? 이 사건이 아니고는 몇백 년을 두고 인도주의를 가르쳐도 양반과 상놈은 친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워낙 큰 사건이었기에 꼼짝 못하고 다 섞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이 핍박과 환난을 통하여 그 협소한 민족주의가 깨어져 나가고 자기 우월감과 교만의 높은 담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 저들을 이방의 세계로 보내십니다. 복음을 전할 것이라며 선교사 파송식을 하고 간 것이 아닙니다. 오직 환난과 핍박을 통하여 주의 역사는 이루어졌고, 그렇게 하여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생각해 보면 이들이 전한 복음은 순수한 복음이었습니다. 가족도 없고 재산도 없이 알몸으로 쫓겨다니며, 이 집 저 집 숨어 지내는 처지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저들은 무엇이라고 하였겠습니까? 만약 저들이 "예수 믿으면 복을 받습니다"라고 하였다면 아마도 듣는 쪽에서는 "당신이나 복 받으시오" 했을 것입니다. 지금 알거지로 쫓겨다니는 신세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환난 속에서 전해지는 복음은 순수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그리스도! 종말론적인 그리스도를 전하게 됩니다. 핍박과 환난 속에서 전해지는 복음만이 잡된 것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복음입니다.
여러분은 아프리카의 성자라고 하는 리빙스톤(Livingstone) 선교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선교사가 한번은 아프리카 밀림을 지나다가 큰 사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선교사는 자기를 보며 마주앉아 으르렁거리는 사자를 앞에 놓고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하여 하나님께 자기의 영혼을 부탁하는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후에 사자가 앞발로 이 선교사를 내치는데 그대로 딩굴면서 정신이 나갔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정신을 차려서 보니 바로 그 사자가 그대로 여전히 내려다보고 있더랍니다. 이상한 것은 그러면서도 그 사자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인즉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노는 것 같더랍니다. 그럴 수밖에 별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더니 이 사자가 선교사를 물지도 않고 어슬렁 어슬렁 그냥 가버리더랍니다. 이렇게 사자가 간 다음에 그 원주민들이 쫙 모이더니 "이 사람은 사자가 보고서도 죽이지 않은 것으로 보아 특별한 사람"이라며 이 사람의 말은 믿어야겠다고 하여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묻기를 "사자 발 앞에 있을 때에 당신의 기분이 어떠하였느냐?"고 하였더니 껄껄 웃으면서 하는 말이 이 사자가 내 몸 중 어느 부분부터 먼저 먹을 것인가 하는 그 생각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무 걱정이 없었습니다. 아무 염려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사건이 기적이 되고, 이 기적이 복음의 문을 열어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 빌립이라는 사람은 예루살렘 교회에 의해 선출된 집사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루살렘을 떠나고 보니 구제할 것도 도울 것도 없습니다. 이제는 오직 복음을 전했고 그럴 때에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가 만나는 실패와 성공, 환난과 핍박이 하나의 기적을 생산하고, 하나님의 그 크신 역사는 바로 그 현장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런 고생을 하여야 하고, 우리는 왜 흩어져야 하며, 무엇 때문에 이 엄청난 사건에 부딪쳐야 하는가! 그 원인, 그 뜻을 몰라도 좋습니다. 다만 주님의 뜻에 순종할 것입니다. 내게 있는 이 현실, 이 사건 이 흩어짐을 통하여 주님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제는 자원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십시다. 흩어졌습니까?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러노라면 언젠가 멋 훗날에 하나님께서 내게 향하신 이 사건들이 크나큰 축복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어려운 위기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기회가 되고 새로운 출발이 될 것입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아버지여! 우리는 안정을 구하나 불안이 있고, 우리는 평안을 원하지만 세상은 이렇게 소란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주님의 크신 뜻과 그 역사를 믿고 있습니다. 주님! 저 흩어졌던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한 것처럼 우리도 이 현실 속에서 주의 뜻을 알고, 주의 뜻을 이루어 나가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주님께서 이루고 자 하시는 그 뜻이 어디에 있음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 그 역사에 순종하게 하옵소서. 이 흩어짐의 기회를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이루는 창조적인 기회로 다져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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