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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옥과 출옥(사도행전 12:1~1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 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메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오늘의 본문에는 베드로의 투옥되는 장면과 출옥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투옥과 출옥-----이 두 가지 사건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새로운 차원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헬라 파 유대인들에게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다메섹까지 따라가 예수믿는 사람들을 체포해오려고 하는 사건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라고 하는 말씀이 거듭거듭 강조되고 있는 것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봅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헬라파 유대인들끼리 빚은 일입니다.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 들에 대한 박해입니다. 이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이방땅으로 흩어 지게 되고 마침내 안디옥까지 가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지난 시간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면 차원이 다릅니다. 이제는 히브리파 유대인에 대한 핍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헤롯이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야고보는 열 한 제자의 하나입니다. 가룟 유다를 빼고 남은 열한 제자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변화 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세 제자를 데려가시지 않습니까? 그만큼 중요한 한 사람 야고보가 칼에 죽임 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제 베드로도 없애고자 감옥에 집어넣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에게 직접 박해를 가한다는 의미 의 핍박입니다. 히브리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요 교회 전체에 대한 말살정책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무슨 교리에 따른다거나 신앙적인 문제 때문에가 아니었습니다. 참 애매합니다.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2천 년 역사에 나타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엄연히 예수의 이름을 인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게 되는 구실은 정치적인 것입니다. 정치적인 죄목을 씌워서 죽입니다. 센키에비치의 작품 「쿼바디스」에도 나타나 있는바 기독교인들에 대한 네로 황제의 박해가 왜 빚어졌느냐-----확실한 것 이야 하나님께서만 아시겠지마는 그 작품의 내용이나 역사가들이 단편적으로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네로 황제가 좀 광적인 사람이라서 어느날 로마 시가를 내려다보더니 "에잇, 이거 못쓰겠다.
불질러버리자!"하고 발작을 일으킵니다. 로마를 없애버리고 깐에 예술적으로 근사한 도성을 만들겠다며 확 불질러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들은 집을 다 잃고 불에 타 죽고 했습니다. 엄청난 혼란의 와중에서 시민들은 네로가 불질렀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들끓었습니다. 마침내, 반정(反政)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네로는 당황합니다. 이 때에 교활한 신하가 생각해낸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이 불을 질렀다고 거짓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밤낮없이 "이제 예수님 재림한다, 재림 전에는 큰 핍박이 있다, 환난이 있다, 불의 심판이 있다"라고 떠들지 않는가, 그러다가 이번에는 그들의 손으로 직접 불을 질렀다, 라고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네로 황제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끌어내다 죽임으로 백성들의 분노를 무마시켰다는 것이 아닙니까? 생각하면 이런 난센스가 어디 있습니까?
역사가들이 빈정대고 하는 말도 있어요. '역사는 미치광이들에 의해서 붉게 물들여졌다'라고. 네로 황제, 미치광이지요. 도미티아누스 황제도 미치광이요, 히틀러도 미치광이요. 스탈린도 미치광이입니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지요. 이런 자들 몇 사람 때문에 온 세계가 요동을 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 문에도 헤롯왕이 있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죽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 로마사람들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위치를 굳히자는 계산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사람들의 소원은 이스라엘이 조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이제 그 제자 야고보를 죽이고 봤더니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잘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베드로를 또 체포한 것입니다. 그 의도가 얼마나 잔악하며 무모하며 불합리합니까? 도대체 기독교를 박해하는 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 한 사람 헤롯의 정치적 욕망에 의해서, 그의 정신나간 짓으로 해서 기독교는 핍박을 받습니다. 역사를 보면 그런 이야기가 너무도 많습니다. 큰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헤롯의 핍박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헤롯이라는 이름이 다섯 사람 나타납니다. 하나는 예수님 오실 때에 베들레헴의 유대 아기들을 다 죽여버린, 소위 대 헤롯입니다. 하나는 헤롯 아켈라오라고, 대 헤롯에 이어서 왕이 되었지만 주후 4년으로부터 6년에 걸쳐서만 왕 노릇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이 헤롯 안티파스, 세례 요한의 목을 벤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본문에 나타난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대 헤롯의 손자입니다. 그는 본래 갈릴리 근방의 분봉왕이었는데 정치적인 수완이 좋아서 안티파스를 몰아내고 이제는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통치하는 권한을 로마로부터 받아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사람한테 잘 보이고 유대사람들한테 지지 받아서 자기 왕권 을 굳게 하려고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순전히 정치적 욕망에서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사도행전 26장 28절에 나타납니다. 가이사랴에서 사도 바울을 재판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다섯 사람의 헤롯이 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자입니다.
"기뻐하는 것을 보고"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 원문대로는 '만족하는 것을 보고'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의 죽음을 보고 유대사람들이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랬을 것 같습니까?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커져서 유대교회에 대한 도전적 세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사람들, 특히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기독교가 아주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살아 역사 하는 한 자기들의 종교는 죽은 종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행하고 있는 한 자기들은 무능한 자들이 됩니다. 저들이 유무상통하고 있으니 자기들은 부정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앙앙불락하던 차에 헤롯이 이렇게 나오니까 잘됐다 하고 박수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무교절 일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을 가리킵니다. 유월절이란 원래 애굽에 노예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는 절기가 아닙니까? 그 의미를 살려서 유월절이면 죄수를 얼마간 석방하는 일이 있었어요. 다시 말하면 방면하고 사면하는 일이 있을지언정 이러한 해방의 절기에 사람을 체포한다던가 죽인다던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지요. 그래서 무교절을 피해야겠다고 해서 저들은 체포한 베드로를 바로 죽이지는 않고 대기 상태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되어진 사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유월절만 지나면 백성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처형하리라 하고 있는데, 바로 그 시간에 천사가 와서 밤중에 베드로를 석방시킨다는 이야기가 그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신학적 교훈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왜 야고보가 먼저 죽었는지, 성경에는 분명치 않습니다 마는 마태복음 20장 22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 실 때입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마지막 길을 가시고 계시는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요샛말로 말하면 '인사 청탁'이라는 것을 합니다. '나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께서 유대나라 왕이 되시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소서'한 것입니다. 다시말 하면 아들의 출세를 위해서 예수님께 이러한 외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욕심대로 좌편과 우편에 야고보와 요한이 앉게 된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됩니까? 베드로를 소외시키고 자기의 두 아들을 좌우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모르는구나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시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성경에 누가 대답했다고 밝히지 않았으나 아마도 야고보가 먼저 대답한 것 같습니다. 마시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잔'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포도주 잔이 아닌 것입니다. 야고보가 거기까지 알고 대답했는지 모르고 대답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야고보가 결국 열두 제자 중에서 맨 먼저 순교하게 됩니다. 가끔 뼈아픈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어요.
자녀가 가출을 했는데 답답하던 나머지 나한테 와서 "목사님 어쩌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어요. 그럴 때면 제가 종종 반문합니다. 혹시 그 애가 말썽을 부릴 때에 집을 나가라든가 죽어 버리라든지 하고 소리친 적 있느냐고-----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말조심하세요.
아무리 속상하고 아무리 답답해도 할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습니다.
그 말 그대로 된다고 생각하고 말하세요. 잊지 말 것입니다. 말은 그대로가 축복도 되고 저주도 됩니다. 그대로 기도도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왜 야고보는 순교하고 베드로는 석방 되었느냐 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같은 제자인데 야고보가 목베 여 죽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더니 베드로가 잡히니까 천사를 불러 급히 나오게 만드시느냐, 그것입니다. 여러분, 불평하지 마세요. 왜 나는 죽도록 내버려두고 그 사람은 오래 살도록 내버려두느냐고 질문해서는 안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순교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아마도 내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으로 해서 벌을 주시는가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른다고도 안하고 골고다까지도 따라갔던 요한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는지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하고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거기에 과장법이 들어갑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십니다.
여러분, 모름지기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할 것이요, 더구나 생명문제에 있어서는 가부를 말하지 마세요. 누가 일찍 죽었다고 그를 불행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누가 오래 살았다고 그는 복 받았다 말하지도 마세요. 성경은 분명히 장수를 복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건강하게 활동하고 일할 때의 얘기지 일도 못하면서 오래 살아서 무엇하겠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생각할 것은 누가 먼저 순교를 했건 그 문제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어떤 사람은 오래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쪽은 복 받고 저쪽은 저주받았다고 말해서 는 안됩니다. 가끔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많이 봅니다. 병들어 죽는 사람도 있고 오래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갑자기 돌아가시는 분도 있습니다. 요새는 차 사고로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정말 어려운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부부를 둘 다 내가 세례를 주었고, 결혼 주례도 내가 해주었어요. 그들이 아이 둘을 낳았는데 그 아이들도 내가 유아세례 주었어요. 그런데 네 식구가 화재로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네 사람을 함께 뉘여 놓은 장례식을 집전할 때에 저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하나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왜 이래야 됩니까, 진실하고 착실한 사람들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고 저 역시 묻게 됩디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가부를 말해서는 안됩니다. 야고보가 일찍 죽었어요. 야고보는 죽도록 내버려두시고 베드로는 갇히자마자 끌어내시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베드로는 훌륭한 사람이고 야고보는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야고보는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렸고 베드로는 돌릴 사람인 것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가부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제 일등 순교자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베드로는 좀더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심으로 베드로를 감옥에서 나 오시게 했지만 뒷날 로마에 가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십니다. 순교하도록 내버려두셨어요. 로마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천사를 보내서 끌어내시지 않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 는 투옥이나 순교나 혹은 석방이나 간에 이 사건들을 하나님의 높은 선교적 섭리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옥에 안 들어가게 하실 수도 있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을 나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게도 하시고 매를 맞게도 하시고 순교 당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매를 맞고 욕을 당할 때쯤은 때리는 사람이 장님이 되던가 막대기가 부러지던가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대로 맞고, 그대로 십자가에 죽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도 밑에 앉은 사람들이 뛰어내리라, 뛰어내리면 우리가 믿겠노라-----얼마나 저주를 했 습니까? 주님은 뛰어내리실 수 있어도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이것 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사랑이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엄청난 사건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의 사건을 너무 근시안적으로 판단해서 하나님 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지마는 많은 사람이 로마에서 죽음으로 머지않아 대 로마제국이 기독교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또다시 생각할 것은 핍박이나 이 핍박으로 인한 고난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선교적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핍박이라고 하는 고난은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신앙적으로 감수하고 신앙적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 신앙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같이 당하는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당하는 작은 사건까지가 같은 차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죽을 사람입니다. 야고보가 목 베임 당하는 것을 보고 알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잠이 올 것 같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그 것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도 보초가 서 있고 두 군사와 쇠사슬에 같이 묶여 있는데 여기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이 평화, 이 평안함을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래야 진정한 의미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합니다. 12절에서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고도 합니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 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더라----나는 여기서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기도했더니 천사를 보내서 나오게 하셨다고는 보고 싶지 않아요. 기도했더니 베드로는 감옥에서 편안히 자더라---그렇게 보고 싶어요. 그 잠자는 베드로가 더 아름다워요.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고 거기에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잤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그가 감옥에 들어가 있으니까 잘 수 있지 그가 이 핍박을 피해서 도망을 했다면 어느 골방에 들어가서도 잠 못 잤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도 절실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베드로는 로마에 핍박이 있을 때에 로마를 피하여 도망을 갑니다. 도망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장소에 지금도 그 자취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전설대로는 예수님의 발자국이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로마 쪽으로 가시니까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여쭙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버린 로마를 위해서 내가 네 대산 들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란다"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제가 가겠습니다"하고 다시 로마로 들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예수님과 똑같은 모양으로 죽는단 말인가. 거꾸로 매달아다오"하고 그는 마침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를 피하려고 할 때에 엄청난 고통과 번민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각오하고, 십자가에 죽기로 결심을 하고 나니 평안합니다. 감옥에 들어가 이제 몇 시간 후면 죽을 사람인데 두 군사 틈에서 잠자더라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게 하셨을 것입니다. 앉아 있다면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테니 평안하게 자도록 만드셨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그래서인 지 베드로전서 2장 19절로 21절에 보면 베드로가 온 교회에 편지를 하는 중에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고난에 세 가지가 있는데 우선 애매한 고난이 있다, 억울하고 애매한 고난이다.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은혜로우니라, 그리고 죄가 있어서 고난 당하는 경우가 있다, 회개해야 되느니라,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자원해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 그렇다면 기뻐하라-----자원해서 선을 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당하는 고난이 라고 한다면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당해도 그는 평안할 수 있어요.
그야말로 peace, 그야말로 샬롬인 것입니다. 여기 진정한 평안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피하려 하고 십자가에서 도망가려고 할 때에는 겉잡을 수 없는 불안에 떨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천사가 신인(神人) 동형론적으로 표현됩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므로 베드로는 지금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어쨌든 그는 천사를 희미하게나마 알아본 것은 같은데 이성적인 말로는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붙들어서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본문에 보니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합니다. 옆구리를 쳐서 잠자는 것을 깨웠어요. 일어나라, 따라 오라-----밖으로 나가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더라"합니다. 꼭 꿈꾸는 것 같아요. 그러나 실제로 나오고 있었어요.
감옥 밖에 나온 뒤에야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참으로 주께서 천사를 보내어 나를 출옥시키셨구나----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환상을 보는가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되도록 기도를 한 것도 아니었어요. 다만 이제 와서 깨달았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참인 줄을 알지 못하다가 뒤늦게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때때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역사 하시는 줄 압니다. 저는 이 성경 본문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어요. 제 생애에 귀한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에 광산에 끌려갔다가 도망을 해서 산에 숨어 있었어요. 몇 달 동안 숨어 있었는데 6․25전쟁 때입니다. 나 혼자 산 속에 들어갔지마는 이 산골짜기 저 산골짜기 다니면서 굴에서도 자고 들에서도 자고 하면서 지내보니 나처럼 산으로 도망 온 사람이 많습디다. '동지'들이 많아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이래저래 모여 22명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입니다. 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비몽사몽간에 "빨리 산을 내려가라"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귀가 따갑도록 강하게 들렸어요.
지금 밑에는 공산당이 있고 인민군이 있는데 산을 어떻게 내려가 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려간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도 "그러면 나도 가지 뭐"하고 따라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자는 없어요. 자신 있게 어떻게 해야 살 것인지, 어디로 가야 좋을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튼 내려간다니까 하나씩 하나씩 다 따라 내려옵디다. 산 중간쯤 내려왔는데 보니 길가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있습디다. 바로 국군에 밀려 산으로 도망 오는 공산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전혀 모르지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요. 더 무서웠던 것은 우리가 있던 바로 그곳에 인민군 패잔병 500명이 올라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쪽으로 내려가지 않았으면 꼼짝못하고 거기서 죽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잠깐 사이로 살았거든요. 뒤에 깨닫고 보니 실로 아슬아슬해요. 그러나 거기 연락이 있습니까, 전화가 있습니까? 그냥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500명의 인민군이 들어오면 우리는 속절없이 죽는 것입니다.
이같이 비상한 시간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에 내 귀에 들려온 소리, 그것 덕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산을 내려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소망교회 목사 만드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하셨나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늘 그런 일이 있고 항상 그런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것을 기대해서도 안돼요.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방법으로 역사 해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 모여서 기도하더니 이 기도와 함께 베드로는 감옥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베드로를 깨워서 밖으로 나가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뿐이지 인간의 이야기는 조금도 여기에 섞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확실한 믿음, 순교적 결단만이 우리에게 필요할 따름입니다.
투옥과 출옥(사도행전 12:1~1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 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오라 한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메 천사가 곧 떠나더라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오늘의 본문에는 베드로의 투옥되는 장면과 출옥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투옥과 출옥-----이 두 가지 사건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예루살렘교회에 새로운 차원의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는 사건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헬라 파 유대인들에게 큰 핍박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사도 바울이 다메섹까지 따라가 예수믿는 사람들을 체포해오려고 하는 사건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라고 하는 말씀이 거듭거듭 강조되고 있는 것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봅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헬라파 유대인들끼리 빚은 일입니다.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 들에 대한 박해입니다. 이래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이방땅으로 흩어 지게 되고 마침내 안디옥까지 가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지난 시간까지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보면 차원이 다릅니다. 이제는 히브리파 유대인에 대한 핍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선 헤롯이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 야고보는 열 한 제자의 하나입니다. 가룟 유다를 빼고 남은 열한 제자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 제자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변화 산에 올라가실 때에도 세 제자를 데려가시지 않습니까? 그만큼 중요한 한 사람 야고보가 칼에 죽임 당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제 베드로도 없애고자 감옥에 집어넣었다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제자에게 직접 박해를 가한다는 의미 의 핍박입니다. 히브리 유대인들에 대한 핍박이요 교회 전체에 대한 말살정책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무슨 교리에 따른다거나 신앙적인 문제 때문에가 아니었습니다. 참 애매합니다. 순전히 정치적인 이유로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2천 년 역사에 나타난,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풀 수 없는 수수께끼입니다. 엄연히 예수의 이름을 인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죽게 되는 구실은 정치적인 것입니다. 정치적인 죄목을 씌워서 죽입니다. 센키에비치의 작품 「쿼바디스」에도 나타나 있는바 기독교인들에 대한 네로 황제의 박해가 왜 빚어졌느냐-----확실한 것 이야 하나님께서만 아시겠지마는 그 작품의 내용이나 역사가들이 단편적으로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네로 황제가 좀 광적인 사람이라서 어느날 로마 시가를 내려다보더니 "에잇, 이거 못쓰겠다.
불질러버리자!"하고 발작을 일으킵니다. 로마를 없애버리고 깐에 예술적으로 근사한 도성을 만들겠다며 확 불질러버렸다고 하는 것입니다. 로마 시민들은 집을 다 잃고 불에 타 죽고 했습니다. 엄청난 혼란의 와중에서 시민들은 네로가 불질렀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들끓었습니다. 마침내, 반정(反政)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네로는 당황합니다. 이 때에 교활한 신하가 생각해낸 것이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누명을 씌우자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이 불을 질렀다고 거짓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밤낮없이 "이제 예수님 재림한다, 재림 전에는 큰 핍박이 있다, 환난이 있다, 불의 심판이 있다"라고 떠들지 않는가, 그러다가 이번에는 그들의 손으로 직접 불을 질렀다, 라고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네로 황제는 로마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끌어내다 죽임으로 백성들의 분노를 무마시켰다는 것이 아닙니까? 생각하면 이런 난센스가 어디 있습니까?
역사가들이 빈정대고 하는 말도 있어요. '역사는 미치광이들에 의해서 붉게 물들여졌다'라고. 네로 황제, 미치광이지요. 도미티아누스 황제도 미치광이요, 히틀러도 미치광이요. 스탈린도 미치광이입니다. 아무래도 정상이 아니지요. 이런 자들 몇 사람 때문에 온 세계가 요동을 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침묵을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오늘의 본 문에도 헤롯왕이 있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죽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서 로마사람들에게 충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위치를 굳히자는 계산이 있는 것입니다. 로마사람들의 소원은 이스라엘이 조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이제 그 제자 야고보를 죽이고 봤더니 유대인들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잘했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베드로를 또 체포한 것입니다. 그 의도가 얼마나 잔악하며 무모하며 불합리합니까? 도대체 기독교를 박해하는 데 이렇게 해도 되는 것입니까? 그런데 이 한 사람 헤롯의 정치적 욕망에 의해서, 그의 정신나간 짓으로 해서 기독교는 핍박을 받습니다. 역사를 보면 그런 이야기가 너무도 많습니다. 큰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라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헤롯의 핍박이 본격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헤롯이라는 이름이 다섯 사람 나타납니다. 하나는 예수님 오실 때에 베들레헴의 유대 아기들을 다 죽여버린, 소위 대 헤롯입니다. 하나는 헤롯 아켈라오라고, 대 헤롯에 이어서 왕이 되었지만 주후 4년으로부터 6년에 걸쳐서만 왕 노릇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이 헤롯 안티파스, 세례 요한의 목을 벤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본문에 나타난 헤롯 아그립바 1세입니다. 대 헤롯의 손자입니다. 그는 본래 갈릴리 근방의 분봉왕이었는데 정치적인 수완이 좋아서 안티파스를 몰아내고 이제는 유대와 사마리아까지 통치하는 권한을 로마로부터 받아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로마사람한테 잘 보이고 유대사람들한테 지지 받아서 자기 왕권 을 굳게 하려고 야고보를 죽이고 베드로를 죽이려 하는 것입니다. 순전히 정치적 욕망에서 기독교를 박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 헤롯 아그립바 2세는 사도행전 26장 28절에 나타납니다. 가이사랴에서 사도 바울을 재판하는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다섯 사람의 헤롯이 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자입니다.
"기뻐하는 것을 보고"라고 되어 있는데 헬라 원문대로는 '만족하는 것을 보고'라는 뜻입니다. 야고보의 죽음을 보고 유대사람들이 만족했다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랬을 것 같습니까? 그것은 이미 기독교가 커져서 유대교회에 대한 도전적 세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사람들, 특히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기독교가 아주 골치 아픈 존재였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살아 역사 하는 한 자기들의 종교는 죽은 종교가 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능력을 행하고 있는 한 자기들은 무능한 자들이 됩니다. 저들이 유무상통하고 있으니 자기들은 부정한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앙앙불락하던 차에 헤롯이 이렇게 나오니까 잘됐다 하고 박수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보니 "무교절 일이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무교절은 유월절을 가리킵니다. 유월절이란 원래 애굽에 노예 되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해방되는 절기가 아닙니까? 그 의미를 살려서 유월절이면 죄수를 얼마간 석방하는 일이 있었어요. 다시 말하면 방면하고 사면하는 일이 있을지언정 이러한 해방의 절기에 사람을 체포한다던가 죽인다던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의미지요. 그래서 무교절을 피해야겠다고 해서 저들은 체포한 베드로를 바로 죽이지는 않고 대기 상태에 있게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때에 되어진 사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유월절만 지나면 백성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하여 공개적으로 처형하리라 하고 있는데, 바로 그 시간에 천사가 와서 밤중에 베드로를 석방시킨다는 이야기가 그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신학적 교훈을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왜 야고보가 먼저 죽었는지, 성경에는 분명치 않습니다 마는 마태복음 20장 22절을 봅시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 실 때입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마지막 길을 가시고 계시는데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요샛말로 말하면 '인사 청탁'이라는 것을 합니다. '나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예수님께서 유대나라 왕이 되시면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주소서'한 것입니다. 다시말 하면 아들의 출세를 위해서 예수님께 이러한 외교를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세 제자를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욕심대로 좌편과 우편에 야고보와 요한이 앉게 된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됩니까? 베드로를 소외시키고 자기의 두 아들을 좌우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모르는구나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시겠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성경에 누가 대답했다고 밝히지 않았으나 아마도 야고보가 먼저 대답한 것 같습니다. 마시겠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잔'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포도주 잔이 아닌 것입니다. 야고보가 거기까지 알고 대답했는지 모르고 대답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야고보가 결국 열두 제자 중에서 맨 먼저 순교하게 됩니다. 가끔 뼈아픈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있어요.
자녀가 가출을 했는데 답답하던 나머지 나한테 와서 "목사님 어쩌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어요. 그럴 때면 제가 종종 반문합니다. 혹시 그 애가 말썽을 부릴 때에 집을 나가라든가 죽어 버리라든지 하고 소리친 적 있느냐고-----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말조심하세요.
아무리 속상하고 아무리 답답해도 할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습니다.
그 말 그대로 된다고 생각하고 말하세요. 잊지 말 것입니다. 말은 그대로가 축복도 되고 저주도 됩니다. 그대로 기도도 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문제는, 왜 야고보는 순교하고 베드로는 석방 되었느냐 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같은 제자인데 야고보가 목베 여 죽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더니 베드로가 잡히니까 천사를 불러 급히 나오게 만드시느냐, 그것입니다. 여러분, 불평하지 마세요. 왜 나는 죽도록 내버려두고 그 사람은 오래 살도록 내버려두느냐고 질문해서는 안됩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순교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아마도 내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것으로 해서 벌을 주시는가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모른다고도 안하고 골고다까지도 따라갔던 요한은 어떻게 될까 궁금했는지 요한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삽나이까?"하고 여쭙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거기에 과장법이 들어갑니다.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십니다.
여러분, 모름지기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만 생각할 것이요, 더구나 생명문제에 있어서는 가부를 말하지 마세요. 누가 일찍 죽었다고 그를 불행하다고 말하지 마세요. 누가 오래 살았다고 그는 복 받았다 말하지도 마세요. 성경은 분명히 장수를 복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건강하게 활동하고 일할 때의 얘기지 일도 못하면서 오래 살아서 무엇하겠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생각할 것은 누가 먼저 순교를 했건 그 문제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어떤 사람은 오래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쪽은 복 받고 저쪽은 저주받았다고 말해서 는 안됩니다. 가끔 우리는 어려운 일을 많이 봅니다. 병들어 죽는 사람도 있고 오래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갑자기 돌아가시는 분도 있습니다. 요새는 차 사고로 죽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는 정말 어려운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부부를 둘 다 내가 세례를 주었고, 결혼 주례도 내가 해주었어요. 그들이 아이 둘을 낳았는데 그 아이들도 내가 유아세례 주었어요. 그런데 네 식구가 화재로 한꺼번에 죽었습니다. 네 사람을 함께 뉘여 놓은 장례식을 집전할 때에 저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몰라요. 하나님, 어떻게 된 것입니까, 왜 이래야 됩니까, 진실하고 착실한 사람들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있습니까 하고 저 역시 묻게 됩디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가부를 말해서는 안됩니다. 야고보가 일찍 죽었어요. 야고보는 죽도록 내버려두시고 베드로는 갇히자마자 끌어내시고 하시는데, 그렇다면 베드로는 훌륭한 사람이고 야고보는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야고보는 하나님께 영광을 못 돌렸고 베드로는 돌릴 사람인 것입니까?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서 가부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제 일등 순교자가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베드로는 좀더 살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심으로 베드로를 감옥에서 나 오시게 했지만 뒷날 로마에 가서는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십니다. 순교하도록 내버려두셨어요. 로마감옥에 들어갔을 때에도 천사를 보내서 끌어내시지 않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 는 투옥이나 순교나 혹은 석방이나 간에 이 사건들을 하나님의 높은 선교적 섭리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옥에 안 들어가게 하실 수도 있고 감옥에 들어간 사람을 나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게도 하시고 매를 맞게도 하시고 순교 당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감옥에서 매를 맞고 욕을 당할 때쯤은 때리는 사람이 장님이 되던가 막대기가 부러지던가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그대로 맞고, 그대로 십자가에 죽었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도 밑에 앉은 사람들이 뛰어내리라, 뛰어내리면 우리가 믿겠노라-----얼마나 저주를 했 습니까? 주님은 뛰어내리실 수 있어도 그러시지 않았습니다. 이것 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 속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고 사랑이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엄청난 사건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의 사건을 너무 근시안적으로 판단해서 하나님 의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지마는 많은 사람이 로마에서 죽음으로 머지않아 대 로마제국이 기독교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또다시 생각할 것은 핍박이나 이 핍박으로 인한 고난은 죄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선교적 의미를 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핍박이라고 하는 고난은 신앙적으로 해석하고 신앙적으로 감수하고 신앙적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 신앙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나 요한이나 야고보같이 당하는 사건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당하는 작은 사건까지가 같은 차원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 베드로는 두 군사 틈에서 잠자고 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죽을 사람입니다. 야고보가 목 베임 당하는 것을 보고 알고 감옥에 들어갔는데 잠이 오겠습니까? 잠이 올 것 같습니까? 여러분, 그런데 그 것도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도 보초가 서 있고 두 군사와 쇠사슬에 같이 묶여 있는데 여기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이 평화, 이 평안함을 여러분 이해하시겠습니까? 이래야 진정한 의미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무엇이라 말씀합니까?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합니다. 12절에서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고도 합니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 있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더라----나는 여기서 이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기도했더니 천사를 보내서 나오게 하셨다고는 보고 싶지 않아요. 기도했더니 베드로는 감옥에서 편안히 자더라---그렇게 보고 싶어요. 그 잠자는 베드로가 더 아름다워요. 거기에 아름다움이 있고 거기에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잤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시는 대로 그가 감옥에 들어가 있으니까 잘 수 있지 그가 이 핍박을 피해서 도망을 했다면 어느 골방에 들어가서도 잠 못 잤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입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도 절실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베드로는 로마에 핍박이 있을 때에 로마를 피하여 도망을 갑니다. 도망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장소에 지금도 그 자취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전설대로는 예수님의 발자국이 있거든요. 예수님께서 로마 쪽으로 가시니까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여쭙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네가 버린 로마를 위해서 내가 네 대산 들어가 다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란다"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제가 가겠습니다"하고 다시 로마로 들어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예수님과 똑같은 모양으로 죽는단 말인가. 거꾸로 매달아다오"하고 그는 마침내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십자가를 피하려고 할 때에 엄청난 고통과 번민을 겪어야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각오하고, 십자가에 죽기로 결심을 하고 나니 평안합니다. 감옥에 들어가 이제 몇 시간 후면 죽을 사람인데 두 군사 틈에서 잠자더라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자게 하셨을 것입니다. 앉아 있다면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테니 평안하게 자도록 만드셨어요.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그래서인 지 베드로전서 2장 19절로 21절에 보면 베드로가 온 교회에 편지를 하는 중에 고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을 봅니다. 고난에 세 가지가 있는데 우선 애매한 고난이 있다, 억울하고 애매한 고난이다.
도대체 왜 이런 고난을 당해야 하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은혜로우니라, 그리고 죄가 있어서 고난 당하는 경우가 있다, 회개해야 되느니라, 그러나 선을 행함으로 자원해서 당하는 고난이 있다, 그렇다면 기뻐하라-----자원해서 선을 행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당하는 고난이 라고 한다면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 당해도 그는 평안할 수 있어요.
그야말로 peace, 그야말로 샬롬인 것입니다. 여기 진정한 평안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자가를 피하려 하고 십자가에서 도망가려고 할 때에는 겉잡을 수 없는 불안에 떨어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천사가 신인(神人) 동형론적으로 표현됩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므로 베드로는 지금 사람에게 끌려가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어쨌든 그는 천사를 희미하게나마 알아본 것은 같은데 이성적인 말로는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붙들어서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본문에 보니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합니다. 옆구리를 쳐서 잠자는 것을 깨웠어요. 일어나라, 따라 오라-----밖으로 나가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더라"합니다. 꼭 꿈꾸는 것 같아요. 그러나 실제로 나오고 있었어요.
감옥 밖에 나온 뒤에야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이 아닙니까? 참으로 주께서 천사를 보내어 나를 출옥시키셨구나----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환상을 보는가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되도록 기도를 한 것도 아니었어요. 다만 이제 와서 깨달았어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닫고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참인 줄을 알지 못하다가 뒤늦게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장면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때때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로 역사 하시는 줄 압니다. 저는 이 성경 본문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어요. 제 생애에 귀한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에 광산에 끌려갔다가 도망을 해서 산에 숨어 있었어요. 몇 달 동안 숨어 있었는데 6․25전쟁 때입니다. 나 혼자 산 속에 들어갔지마는 이 산골짜기 저 산골짜기 다니면서 굴에서도 자고 들에서도 자고 하면서 지내보니 나처럼 산으로 도망 온 사람이 많습디다. '동지'들이 많아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이래저래 모여 22명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밤입니다. 꿈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야말로 비몽사몽간에 "빨리 산을 내려가라"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귀가 따갑도록 강하게 들렸어요.
지금 밑에는 공산당이 있고 인민군이 있는데 산을 어떻게 내려가 요?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려간다"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도 "그러면 나도 가지 뭐"하고 따라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인도자는 없어요. 자신 있게 어떻게 해야 살 것인지, 어디로 가야 좋을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튼 내려간다니까 하나씩 하나씩 다 따라 내려옵디다. 산 중간쯤 내려왔는데 보니 길가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 있습디다. 바로 국군에 밀려 산으로 도망 오는 공산군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전혀 모르지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거든요. 더 무서웠던 것은 우리가 있던 바로 그곳에 인민군 패잔병 500명이 올라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쪽으로 내려가지 않았으면 꼼짝못하고 거기서 죽은 것입니다. 그야말로 잠깐 사이로 살았거든요. 뒤에 깨닫고 보니 실로 아슬아슬해요. 그러나 거기 연락이 있습니까, 전화가 있습니까? 그냥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500명의 인민군이 들어오면 우리는 속절없이 죽는 것입니다.
이같이 비상한 시간에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때에 내 귀에 들려온 소리, 그것 덕분이었습니다. 그 시간에 산을 내려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소망교회 목사 만드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하셨나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돼요. 늘 그런 일이 있고 항상 그런 일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런 것을 기대해서도 안돼요.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에 필요한 시간에 필요한 방법으로 역사 해주실 것입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 모여서 기도하더니 이 기도와 함께 베드로는 감옥에서 순교를 각오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자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할 일이 많기 때문에 베드로를 깨워서 밖으로 나가게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뿐이지 인간의 이야기는 조금도 여기에 섞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확실한 믿음, 순교적 결단만이 우리에게 필요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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