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자기 양식을 먹으라(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12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리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사람은 일생을 두고 배우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존재입니다.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것을 깨닫습니다. 옛것을 버리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마음과 자세로 생활에 임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사람의 발전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깨달은 바가 있습니까? 새롭게 느낀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한가지라도 고쳐가기로 결심하였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옛날에 가졌던 생각과 습관을 버리고 하나하나 새롭게 다듬어가고 창조해 가는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나의 생은 정지된 것입니다.
중국 명나라 때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은 말년에 그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우리에게 귀한 지혜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네 가지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아왔다고 술회했습니다.
첫 번째로 고통스러운 것은 배고픈 것과 추운 것이었다고 합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서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절실합니다. 절대적 빈곤에 속하는 것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두 번째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냉대 받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밥도 먹고 옷도 입었는데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내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나를 냉소적으로 대합니다. 이것이 견디기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견디지 못해 반항을 하고 절망을 하고 합니다. 세 번째로 고통스러운 것은 고민이었다고 합니다. 정서적인 고통입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고민처럼 필요 없는 것도 없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백해무익한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고민을 합니다. 걱정을 합니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마음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근심과 걱정, 소용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매여서 노예가 됩니다. 불안에 떱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고통보다도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한가로움'이었다고 합니다. 한가로움이 가장 큰 고통이다----존재의 문제입니다.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습니다. 누구와 함께 일을 해보았으면 싶은데 그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누구를 도와주고 싶지만 내가 도울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가합니다. 이 한가로움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고 그는 아프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과연 어떤 사람이라야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행복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몸과 정신과 영혼이 건강해야 우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어떤 것에도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건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들고 나면 그토록 소중했던 재산과 명예가 다 소용없어집니다. 건강만 되찾으면 아무런 소원이 없겠다고 병상에 누워 고백하는 것을 우리는 흔하게 봅니다. 건강이 가장 큰 축복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또한 일이 있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내가 할만한 일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일 때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적 있는 일, 해서 보람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일하는 자된 행복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그것을 우리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잘못된 생각을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관리하는 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우리는 일을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일은 징계요 처벌이요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노예적 노동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속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혹 무슨 일을 하든지 짜증부터 나고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나' 하는 마음이 든다면 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로 받아들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임합니다. 이래야 행복한 사람입니다.
본디 사람은 일하도록 하나님께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땀을 흘리게 되었고 일한 수고가 헛되이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여자에게는 잉태와 해산의 고통이 크게 더하여 졌습니다. 범죄의 결과로 주어진 고통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혹 일하는 것은 고통이고 쉬는 것은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한번 쉬어보십시오. 하루는 쉬고, 하루는 놀고, 하루는 졸고----더는 쉬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는 것과 쉬는 것, 노동과 안식을 함께 축복으로 주셨습니다. 일하면서 즐겁고 일하고 나서 쉬면서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노동을 모르는 사람은 안식을 모르고, 안식을 모르는 사람은 일의 의미를 모릅니다. 이 둘은 창조의 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람들은 몇 가지로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오해는 일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하는 자는 낮은 사람이요, 일하지 않는 자는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봉건주의적인 세계관이요,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질을 가졌다고 할 때, 물질에 대한 소유의 복을 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노동 없이 얻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에서 참된 가치의 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가치의 복은 노동하는 자의 것입니다. 전적으로 수고하는 자의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 그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만들어놓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여러분 내 손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하여 여기저기 많이 다닙니다.
다니다가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한번보고 지나치기가 아쉬워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 덕분에 제가 사진술을 조금 배웠습니다. 사진을 찍어 와서 나중에 보면 그런 대로 또 그럴듯합니다. 지난번 금강산에 가서 찍어온 필름을 현상하여 크게 인화해서 걸어 놓고 보니 참 좋습디다. 보는 사람들마다 좋다고 그럽디다마는 그들이 찍은 사람의 기쁨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내가 찍은 것이기에 그토록 기쁜 것이요, 내 작품이기에 대단한 것입니다. 작품에서 오는 기쁨은 전적으로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 기쁨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동차를 타십니까? 자동차를 손수 운전하십니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좋은 자동차를 타고 갑니다. 그 차가 내 것이어서 기분이 참 좋습니다만, 자동차를 손수 운전해서 달리는 기쁨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내가 운전하는 기쁨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가끔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이 저를 사랑하고 염려한 나머지 "목사님, 이제는 손수 운전 그만하시고 기사를 둡시다"라고 권해옵니다마는 저는 거절합니다. 왜 운전하는 기쁨을 빼앗으려 하느냐고 반대를 합니다. 제가 20년 동안 운전을 해왔습니다.
도로를 달리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운전을 안 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기분이 상쾌합니다. 그런데 기사를 두고 뒷좌석에 떡 하니 앉아서 다니라는 것입니까? 자동차를 타는 기쁨은 운전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뒷좌석에 편히 앉아서 졸기나 하는 사람은 그 기쁨을 모릅니다. 차멀미 때문에 머리만 아프고 여기저기 몸이 쑤시기만 합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잡지를 보니 운전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는 기사가 나와 있습디다. 저도 그렇게 느낍니다. 사람이라면 일을 해야 합니다. 일하는 데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어쩌나 가치관의 기준이 잘못되어서 일하는 사람은 천한 사람이요 노는 사람이 귀족인 줄로 압니다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비성서적인 이야기입니다. 결과적으로 불행을 스스로 부르는 것이 되고 맙니다.
두 번째 오해는 일하지 않아야 건강하다는 생각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또 오래 살기 위해서 몸 아끼고 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점을 잊지 마십시다. 세계보건기구(WH0)에서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놀고 있을 때에 체력이 더 소모되고, 일할 때에 그 일하는 것만큼의 필요한 힘이 생긴다고 합니다. 노는 사람이 더 빨리 늙어죽는다는 것을 의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래 사는 사람을 보십시오. 하나같이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게을러서 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주 푹 쉬게 해주십니다.
움직이기도 싫어하고 숨쉬기조차 귀찮아하면 마지막에는 아예 숨을 끊어주십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놀고 있는 사람은 감기와 전염병에 민감하고 면역성이 약해진다는 보고서도 나와 있습니다.
또한 혈액 내 혈당과 콜레스테롤의 수치도 높아진다고 합니다.
심지어 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잠만 자도 콜레스테롤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의 혈액 내 수치를 낮추기 위하여 동물성 지방을 되도록 섭취하지 말고, 달걀도 튀겨 먹지 말고 삶아 먹으라는 등 별말이 많습니다만, 다 쓸데없습니다.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이면 됩니다. 몸을 움직여서 일을 해야 합니다. 움직이지 않고 앉아만 있으니 죽을 먹어도 콜레스테롤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모름지기 움직여야 건강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이 건강합니다. 항상 건강을 조심할 것입니다. 건강의 비결은 일하는 것이요 부지런한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 밀림에서 원주민들과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95세까지 살아 역사 했습니다. 그는 만년에 가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모든 병에 대한 가장 좋은 약은 내가 할 일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뛰는 것이 best medicine '명약'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누워서 빈둥거리며 사는 게으른 사람을 건강하게 해줄 약은 어디에도 없고, 보약도 없습니다. 일함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내가 할 일은 다 남에게 맡기고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이나 매만지고 있고, 갈 데가 없어서 병원이나 들락거립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겠습니까? 돈이 있건 없건 우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돈 좀 있다고 일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사람은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 자체에 의미가 있으며, 열심히 일해야 건강하고, 장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이 이에 있습니다.
세 번째 오해는 이기적인 행복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행복은 나 홀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남녀간의 행복도 두 사람이 함께 누림으로 가능합니다. 상대방을 기쁘게 함으로써 내가 기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괴롭히면서 나 홀로 기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더불어 얻는 것입니다. 내가 봉사하고 또 봉사를 받으면서, 서로를 위하여 일하는 가운데 기쁨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사람이 본질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세 가지 있습니다.
이른바 'three essential elements of happiness'입니다. 첫째로 'something to do'----일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something to hope for'----바라는 바, 소망
셋째로 'something to love'--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노동과 사랑에 가치가 더하여질 때, 여기에 창조가 있습니다. 행복에는 창조적 기쁨이 수반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창조의 질서에 의거하여 육체노동을 중시하고 신성시합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것은 더럽고 추하며 정신적인 것만이 신성하다는 이원론적인 헬라사상이 교회 안에 스며들어온 나머지 일하지 않는 것이 더 종교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여기에 종말론적 사상까지 결부시켰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 가운데 주인이 올 때에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복되겠느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가운데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습니다 마는, 헬라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한 채, 흰 옷 입고 손들고 앉아서 명상하는 가운데 주님을 맞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헬라사상으로 인하여 걸식 전도사들이 수 없이 생겨나 일하지 않고 얻어먹으면서 돌아다닙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는 것이 가장 잘 믿는 것이라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걸식 승단이니 수도사니 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본문은 무위도식하는 무질서한 생활을 강력히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일하지 아니할 때에 비생산적인 사람이 됩니다. 규모 없는 사람, 질서 없는 사람이 됩니다. 남의 짐이 됩니다. 나아가서는 정력과 시간과 은사를 낭비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내가 일하지 않았으니 남의 것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것을 먹는 것은 다른 말로 해서 도적질입니다. 또한 본문말씀은 일하지 않으면서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로마 속담에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면 악을 배우게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할 때에 아니해야 할 일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나갑니다. 프랭클린도 '일하는 농부는 앉아 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모름지기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청교도의 중심사상은 한마디로 '노동의 신성'입니다. 부지런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청교도적 근면은 지극히 성서적입니다. 그 사상이 오늘의 사회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만, 현대인의 노동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기는 하는데 노예적 노동입니다. 가치가 잘못되었고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일하여 돈 좀 벌고 먹고살 만하면 일손을 놓으려듭니다. 여러분, 우리가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일은 일대로 의미가 있고 보수는 보수대로 은사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노동이 잘못된 것은 'ego-gratification'----내 기쁨만 추구하려드는 자기중심주의 때문입니다. 'personal-satisfaction'--자기만족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self-actualization'--자기실현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욕망, 나의 명예, 나의 기쁨만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그래서 허무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노동의 참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는 일의 소명론과 천직론을 말하였습니다.
칼뱅은 여기에 축복론을 더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부르심을 입었고 그 부르심에 따라서 직업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직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직업을 통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정 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노동 자체를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하게 하신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노동관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간결하게 명령적으로 말씀합니다. '일하라, 일하지 않는 자는 격리시켜라,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나님께서 이대로 실천하십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굶게 만드십니다. 소련이나 중국을 비롯한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하나같이 가난합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못삽니다. 그렇게 가난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가 사람을 동등하게 만드는 것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습니다마는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드는 동기부여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주체사상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면서 열심히 교양교육을 했지만 사람을 부지런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게으르니 가난할 수 밖에요. 아침 9시 30분에 차를 타고 집단농장을 지나가면서 보니 사람들이 나와 있기는 한데 일을 하지 않고 논두렁에 앉아서 담배만 피우고 있습니다. 관리자가 나와서 일하라고 해야 일하는 체할 작정입니다. 이렇게 게을러서 되겠습니까? 일하지 않아서 가난한 것입니다. 요즘 들어 사회주의 세계가 개방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만, 그 사람들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잘살게 되는 것은 좋은데 일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생활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사는 나라에 가보십시오.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릅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엄하게 말씀합니다.
또한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자녀에게 노동을 가르치지 아니하는 것은 도적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일하여 먹지 않으면 남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내가 일하지 않고 먹으니 일하고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본을 보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본을 보입시다.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가끔 제게 잠을 얼마나 자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시간 안자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섯 시간 반 잡니다. 평생 그렇게 해왔는데도 이만큼 건강합니다. 많이 자야 건강하리라는 생각은 틀립니다. 적게라도 깊이 푹 자면 됩니다. 양적으로 많이 자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좋은 잠을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루종일 빈둥거리고 놀다가 잠자리에 드니 잠이 제대로 오겠습니까? 여러분, 부지런한 모습을 보입시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분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게 되면서부터 모든 것이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니 좋고, 운동이 되니 좋고, 집에서는 자녀들 앞에 권위가 서니 좋다고 합니다. 일찍 일어나라고 자녀들을 깨울 때에도 권위가 선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좀더 자겠다, 일어나라 하면서 아침부터 실랑이를 벌이다가 조반도 못 먹고 나가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새벽기도회에 나오면서부터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게을러서는 자녀들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말발이 서야 공부하라고 이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본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돈벌자고, 먹고살자고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 자체가 즐거움이요, 일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가담하여 마땅한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일은 축복이요 은사입니다. 일하면서 기쁨을 얻고 일하면서 행복을 찾고 일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일하면서 건강을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문제로 시비를 벌이자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일하십니다. 음식 잡수실 겨를도 없이 일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참 행복, 참 기쁨이 거기 있으며 그리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참으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자기 양식을 먹으라(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12절)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리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주어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사람은 일생을 두고 배우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공부하는 존재입니다.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새로운 것을 깨닫습니다. 옛것을 버리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마음과 자세로 생활에 임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사람의 발전적인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깨달은 바가 있습니까? 새롭게 느낀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한가지라도 고쳐가기로 결심하였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옛날에 가졌던 생각과 습관을 버리고 하나하나 새롭게 다듬어가고 창조해 가는 그것이 무엇이냐, 그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나의 생은 정지된 것입니다.
중국 명나라 때의 유학자 왕양명(王陽明)은 말년에 그의 일생을 회고하면서 우리에게 귀한 지혜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는 일생을 살아오면서 네 가지의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받아왔다고 술회했습니다.
첫 번째로 고통스러운 것은 배고픈 것과 추운 것이었다고 합니다.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해서 당하는 육체적인 고통입니다. 절실합니다. 절대적 빈곤에 속하는 것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두 번째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은 냉대 받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밥도 먹고 옷도 입었는데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습니다. 사람들이 내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나를 냉소적으로 대합니다. 이것이 견디기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견디지 못해 반항을 하고 절망을 하고 합니다. 세 번째로 고통스러운 것은 고민이었다고 합니다. 정서적인 고통입니다.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고민처럼 필요 없는 것도 없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백해무익한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고민을 합니다. 걱정을 합니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마음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근심과 걱정, 소용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매여서 노예가 됩니다. 불안에 떱니다.
그러나, 그 어떤 고통보다도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한가로움'이었다고 합니다. 한가로움이 가장 큰 고통이다----존재의 문제입니다. 할 일이 없는 것입니다. 할 일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습니다. 누구와 함께 일을 해보았으면 싶은데 그에게 내가 필요하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누구를 도와주고 싶지만 내가 도울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는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가합니다. 이 한가로움이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고 그는 아프게 술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괴로워하고 있습니까? 과연 어떤 사람이라야 행복한 사람이겠습니까? 행복에는 조건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행복합니다. 몸과 정신과 영혼이 건강해야 우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어떤 것에도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건강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병들고 나면 그토록 소중했던 재산과 명예가 다 소용없어집니다. 건강만 되찾으면 아무런 소원이 없겠다고 병상에 누워 고백하는 것을 우리는 흔하게 봅니다. 건강이 가장 큰 축복이요 행복인 것입니다.
또한 일이 있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내가 할만한 일이 있어야 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일 때에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적 있는 일, 해서 보람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일하는 자된 행복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신 뒤에, 그것을 우리 인간에게 맡기셨습니다.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끔 잘못된 생각을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서 일을 하게 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것을 관리하는 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우리는 일을 죄의 대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일은 징계요 처벌이요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노예적 노동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구속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혹 무슨 일을 하든지 짜증부터 나고 '내가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나' 하는 마음이 든다면 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로 받아들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임합니다. 이래야 행복한 사람입니다.
본디 사람은 일하도록 하나님께 지음 받았습니다. 그런데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땀을 흘리게 되었고 일한 수고가 헛되이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되었고, 여자에게는 잉태와 해산의 고통이 크게 더하여 졌습니다. 범죄의 결과로 주어진 고통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혹 일하는 것은 고통이고 쉬는 것은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한번 쉬어보십시오. 하루는 쉬고, 하루는 놀고, 하루는 졸고----더는 쉬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일하는 것과 쉬는 것, 노동과 안식을 함께 축복으로 주셨습니다. 일하면서 즐겁고 일하고 나서 쉬면서 행복합니다. 그러므로 노동을 모르는 사람은 안식을 모르고, 안식을 모르는 사람은 일의 의미를 모릅니다. 이 둘은 창조의 질서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사람들은 몇 가지로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오해는 일하지 않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일하는 자는 낮은 사람이요, 일하지 않는 자는 높은 신분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봉건주의적인 세계관이요, 잘못된 가치관입니다. 우리가 어떤 물질을 가졌다고 할 때, 물질에 대한 소유의 복을 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노동 없이 얻어진 것이라면 우리는 거기에서 참된 가치의 복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가치의 복은 노동하는 자의 것입니다. 전적으로 수고하는 자의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 그것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만들어놓으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여러분 내 손으로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여행을 좋아하여 여기저기 많이 다닙니다.
다니다가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 한번보고 지나치기가 아쉬워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 덕분에 제가 사진술을 조금 배웠습니다. 사진을 찍어 와서 나중에 보면 그런 대로 또 그럴듯합니다. 지난번 금강산에 가서 찍어온 필름을 현상하여 크게 인화해서 걸어 놓고 보니 참 좋습디다. 보는 사람들마다 좋다고 그럽디다마는 그들이 찍은 사람의 기쁨을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림도 없습니다.
내가 찍은 것이기에 그토록 기쁜 것이요, 내 작품이기에 대단한 것입니다. 작품에서 오는 기쁨은 전적으로 그 작품을 만든 사람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 기쁨을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동차를 타십니까? 자동차를 손수 운전하십니까? 가만히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좋은 자동차를 타고 갑니다. 그 차가 내 것이어서 기분이 참 좋습니다만, 자동차를 손수 운전해서 달리는 기쁨과는 비교가 안됩니다. 내가 운전하는 기쁨이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가끔 장로님들이나 권사님들이 저를 사랑하고 염려한 나머지 "목사님, 이제는 손수 운전 그만하시고 기사를 둡시다"라고 권해옵니다마는 저는 거절합니다. 왜 운전하는 기쁨을 빼앗으려 하느냐고 반대를 합니다. 제가 20년 동안 운전을 해왔습니다.
도로를 달리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운전을 안 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기분이 상쾌합니다. 그런데 기사를 두고 뒷좌석에 떡 하니 앉아서 다니라는 것입니까? 자동차를 타는 기쁨은 운전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뒷좌석에 편히 앉아서 졸기나 하는 사람은 그 기쁨을 모릅니다. 차멀미 때문에 머리만 아프고 여기저기 몸이 쑤시기만 합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잡지를 보니 운전하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는 기사가 나와 있습디다. 저도 그렇게 느낍니다. 사람이라면 일을 해야 합니다. 일하는 데에 즐거움이 있습니다. 어쩌나 가치관의 기준이 잘못되어서 일하는 사람은 천한 사람이요 노는 사람이 귀족인 줄로 압니다만, 잘못된 생각입니다.
비성서적인 이야기입니다. 결과적으로 불행을 스스로 부르는 것이 되고 맙니다.
두 번째 오해는 일하지 않아야 건강하다는 생각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또 오래 살기 위해서 몸 아끼고 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점을 잊지 마십시다. 세계보건기구(WH0)에서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놀고 있을 때에 체력이 더 소모되고, 일할 때에 그 일하는 것만큼의 필요한 힘이 생긴다고 합니다. 노는 사람이 더 빨리 늙어죽는다는 것을 의학적으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래 사는 사람을 보십시오. 하나같이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게을러서 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아주 푹 쉬게 해주십니다.
움직이기도 싫어하고 숨쉬기조차 귀찮아하면 마지막에는 아예 숨을 끊어주십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놀고 있는 사람은 감기와 전염병에 민감하고 면역성이 약해진다는 보고서도 나와 있습니다.
또한 혈액 내 혈당과 콜레스테롤의 수치도 높아진다고 합니다.
심지어 죽을 먹고 침대에 누워 잠만 자도 콜레스테롤이 올라간다고 합니다. 콜레스테롤의 혈액 내 수치를 낮추기 위하여 동물성 지방을 되도록 섭취하지 말고, 달걀도 튀겨 먹지 말고 삶아 먹으라는 등 별말이 많습니다만, 다 쓸데없습니다. 많이 먹고 많이 움직이면 됩니다. 몸을 움직여서 일을 해야 합니다. 움직이지 않고 앉아만 있으니 죽을 먹어도 콜레스테롤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합니다. 모름지기 움직여야 건강합니다. 부지런한 사람이 건강합니다. 항상 건강을 조심할 것입니다. 건강의 비결은 일하는 것이요 부지런한 것입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 밀림에서 원주민들과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95세까지 살아 역사 했습니다. 그는 만년에 가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모든 병에 대한 가장 좋은 약은 내가 할 일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뛰는 것이 best medicine '명약'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누워서 빈둥거리며 사는 게으른 사람을 건강하게 해줄 약은 어디에도 없고, 보약도 없습니다. 일함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만히 보면 내가 할 일은 다 남에게 맡기고 화장대 앞에 앉아 얼굴이나 매만지고 있고, 갈 데가 없어서 병원이나 들락거립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니 하나님께서 건강을 주시겠습니까? 돈이 있건 없건 우리는 일을 해야 합니다. 돈 좀 있다고 일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사람은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 자체에 의미가 있으며, 열심히 일해야 건강하고, 장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결이 이에 있습니다.
세 번째 오해는 이기적인 행복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행복은 나 홀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더불어 누리는 것입니다. 남녀간의 행복도 두 사람이 함께 누림으로 가능합니다. 상대방을 기쁘게 함으로써 내가 기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을 괴롭히면서 나 홀로 기쁠 수는 없습니다. 진정한 기쁨은 더불어 얻는 것입니다. 내가 봉사하고 또 봉사를 받으면서, 서로를 위하여 일하는 가운데 기쁨을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사람이 본질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이 세 가지 있습니다.
이른바 'three essential elements of happiness'입니다. 첫째로 'something to do'----일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둘째로 'something to hope for'----바라는 바, 소망
셋째로 'something to love'--사랑의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노동과 사랑에 가치가 더하여질 때, 여기에 창조가 있습니다. 행복에는 창조적 기쁨이 수반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초대교회에 있었던 문제에 대한 해답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유대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창조의 질서에 의거하여 육체노동을 중시하고 신성시합니다. 그런데 물질적인 것은 더럽고 추하며 정신적인 것만이 신성하다는 이원론적인 헬라사상이 교회 안에 스며들어온 나머지 일하지 않는 것이 더 종교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극단주의자들은 여기에 종말론적 사상까지 결부시켰습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 가운데 주인이 올 때에 부지런히 일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복되겠느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가운데 주님을 맞이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습니다 마는, 헬라사상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한 채, 흰 옷 입고 손들고 앉아서 명상하는 가운데 주님을 맞이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헬라사상으로 인하여 걸식 전도사들이 수 없이 생겨나 일하지 않고 얻어먹으면서 돌아다닙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면서 전도하는 것이 가장 잘 믿는 것이라고 착각을 한 것입니다. 걸식 승단이니 수도사니 해서 이 마을 저 마을로 돌아다니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본문은 무위도식하는 무질서한 생활을 강력히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일하지 아니할 때에 비생산적인 사람이 됩니다. 규모 없는 사람, 질서 없는 사람이 됩니다. 남의 짐이 됩니다. 나아가서는 정력과 시간과 은사를 낭비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내가 일하지 않았으니 남의 것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것을 먹는 것은 다른 말로 해서 도적질입니다. 또한 본문말씀은 일하지 않으면서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로마 속담에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면 악을 배우게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아니할 때에 아니해야 할 일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엉뚱한 방향으로 나갑니다. 프랭클린도 '일하는 농부는 앉아 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모름지기 부지런히 일할 것입니다.
청교도의 중심사상은 한마디로 '노동의 신성'입니다. 부지런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청교도적 근면은 지극히 성서적입니다. 그 사상이 오늘의 사회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만, 현대인의 노동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기는 하는데 노예적 노동입니다. 가치가 잘못되었고 목적이 잘못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일하여 돈 좀 벌고 먹고살 만하면 일손을 놓으려듭니다. 여러분, 우리가 먹고살기 위한 수단으로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일은 일대로 의미가 있고 보수는 보수대로 은사적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노동이 잘못된 것은 'ego-gratification'----내 기쁨만 추구하려드는 자기중심주의 때문입니다. 'personal-satisfaction'--자기만족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self-actualization'--자기실현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나의 욕망, 나의 명예, 나의 기쁨만을 위해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곤합니다. 그래서 허무와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노동의 참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마르틴 루터는 일의 소명론과 천직론을 말하였습니다.
칼뱅은 여기에 축복론을 더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부르심을 입었고 그 부르심에 따라서 직업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 직업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 직업을 통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불안정 속에서 방황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하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는 노동 자체를 축복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일하게 하신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적 노동관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간결하게 명령적으로 말씀합니다. '일하라, 일하지 않는 자는 격리시켜라,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나님께서 이대로 실천하십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굶게 만드십니다. 소련이나 중국을 비롯한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은 하나같이 가난합니다.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못삽니다. 그렇게 가난한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사회주의가 사람을 동등하게 만드는 것에는 어느 정도 성공을 했습니다마는 사람을 부지런하게 만드는 동기부여에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주체사상이니 이데올로기니 하면서 열심히 교양교육을 했지만 사람을 부지런하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게으르니 가난할 수 밖에요. 아침 9시 30분에 차를 타고 집단농장을 지나가면서 보니 사람들이 나와 있기는 한데 일을 하지 않고 논두렁에 앉아서 담배만 피우고 있습니다. 관리자가 나와서 일하라고 해야 일하는 체할 작정입니다. 이렇게 게을러서 되겠습니까? 일하지 않아서 가난한 것입니다. 요즘 들어 사회주의 세계가 개방의 문을 열고 있습니다만, 그 사람들 힘들어서 못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잘살게 되는 것은 좋은데 일이 힘들다는 것입니다. 게으른 생활이 몸에 배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잘사는 나라에 가보십시오. 얼마나 부지런한지 모릅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엄하게 말씀합니다.
또한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자녀에게 노동을 가르치지 아니하는 것은 도적질을 가르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일하여 먹지 않으면 남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으로 문제가 됩니다, 내가 일하지 않고 먹으니 일하고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본을 보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본을 보입시다.
기성 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일찍 일어나야 합니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가끔 제게 잠을 얼마나 자느냐고 물어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 시간 안자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저는 다섯 시간 반 잡니다. 평생 그렇게 해왔는데도 이만큼 건강합니다. 많이 자야 건강하리라는 생각은 틀립니다. 적게라도 깊이 푹 자면 됩니다. 양적으로 많이 자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좋은 잠을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 건강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루종일 빈둥거리고 놀다가 잠자리에 드니 잠이 제대로 오겠습니까? 여러분, 부지런한 모습을 보입시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분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이 있습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게 되면서부터 모든 것이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부부가 함께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니 좋고, 운동이 되니 좋고, 집에서는 자녀들 앞에 권위가 서니 좋다고 합니다. 일찍 일어나라고 자녀들을 깨울 때에도 권위가 선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좀더 자겠다, 일어나라 하면서 아침부터 실랑이를 벌이다가 조반도 못 먹고 나가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새벽기도회에 나오면서부터 부모 노릇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게을러서는 자녀들을 가르칠 수가 없습니다. 말발이 서야 공부하라고 이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본을 보여야 합니다.
우리에게 일하지 않을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돈벌자고, 먹고살자고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 자체가 즐거움이요, 일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가담하여 마땅한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일은 축복이요 은사입니다. 일하면서 기쁨을 얻고 일하면서 행복을 찾고 일하면서 깨달음을 얻고 일하면서 건강을 찾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문제로 시비를 벌이자 폭탄선언을 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일하십니다. 음식 잡수실 겨를도 없이 일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뒤를 따라 열심히 일할 것입니다. 참 행복, 참 기쁨이 거기 있으며 그리함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를 참으로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자료 18,185편 ◑ > 곽선희목사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들이 능히 살겠느냐(에스겔 37장 1절~6절) (0) | 2023.09.09 |
---|---|
야곱의 실존적 고민(창세기 32장 1절~12절) (0) | 2023.09.09 |
지혜로운 소원(잠언 30장 5절~9절) (0) | 2023.09.09 |
첩경을 평탄케 하라(누가복음 3장 1절~6절) (0) | 2023.09.09 |
성령을 좇아 행하라(갈라디아서 5장 16절~26절) (0) | 2023.09.0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