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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행악자를 삼가라(3장 2절~3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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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악자를 삼가라(323)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앞 장에서는 기뻐하라는 복음에 대하여 공부했습니다. 주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복음을 전하고 나서 사도 바울은 이제 경고의 말씀을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쁨을 저해하는 일들이 많고 또 우리의 기쁨을 좀먹는 것, 우리의 은혜로운 생활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이런 것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합니다. 그래야만 그 기쁨을 지속할 수 있고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며 승리의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특별히 주장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은혜로 구원받았다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은혜로 얻은 것이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우리가 그 가치를 소홀히 여기기 쉽다는 점입니다. 수고해서 얻은 것과 공짜로 얻은 것을 생각해 봅시다. 공짜를 얻으면 당장은 감격하고 좋아할 지 모르나 그것이 몇 시간 못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보십시오.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홍해를 건넜을 때에 거기서 춤을 추고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은 불과 보름도 못 가서 원망으로 바뀝니다. 그만큼 은혜를 완전히 소유하고, 은혜의 사람이 되고, 은혜의 세계관으로 평생을 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마운 마음이 며칠 갑니까? 아니 몇 시간 갑니까? 그 순간에야 그저"고맙습니다" "백골난망입니다" 하다가도 몇 시간 지나면 그게 아닙니다. 우리가 때로는 선물을 받기도 하고 어려울 때에 물질적인 도움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돌아서서는 겨우 한다는 소리가 "자기 사는 데 비하면 이게 뭔가. 겨우 이 정도를 내게 주다니 나를 거지로 아는가?" 하고 이내 고마운 마음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조심해야 할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본문에는 은혜를 지속하기 위한 몇 가지 경고의 말씀이 있습니다. 삼가라는 것이 세 가지요,취하라는 것이 세 가지입니다. 전자는 부정적인 것이요 후자는 긍정적인 것입니다. 이제 부정적인 면부터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개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이 개를 두고 말이 많습니다. 외국 사람이 많이 오니까 보신탕이라는 말 대신 보양탕, 사철탕이라는 말을 쓰지만 그 말이 그 말입니다. 어쨌든 우리네 풍속으로는 자연스러운데도, 외국 사람들은 우리가 개를 먹는다고 하면 펄쩍 뜁니다. 문제는 개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가 외국에 가면 그 곳 사람들이 가끔 물어 봅니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개를 먹나요?" "먹습니다." "아이구, 개를 먹다니!" "우리가 개를 먹지만 애완용 개는 먹지 않아요.

식용 개를 따로 키웁니다." 서양 사람들은 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강아지 전용 비누와 샴푸로 목욕시키고, 옷 해 입히고, 미장원에 데려가고, 보험 들고, 죽으면 비석 세워 주고, 또 주인으로부터 유산까지 물려받는 개도 있습니다. 그래서 왜 그렇게 개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니개는 배신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가슴아픈 대답을 합니다. 자녀도 키워놓으면 배신하는데, 개는 주인에게 절대 충성이니 사랑할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결국 사람이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되니 얼마나 한심스러운 노릇입니까? 그러나 지금 본문에서 말하는 개는 이런 사랑받는 개가 아니요 주인 없는 개, 떼를 지어 떠돌아다니는 개를 뜻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2천 년전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마을은 떠돌이 개들의 천국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대로 개를 잡아먹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는 개들이 떼를 지어 다니며 멍멍 짖고 싸우고 야단이었습니다. 개들 때문에 집단속을 잘 해야 했고, 여행 다닐 때에는 막대기를 가지고 다녀야 했는데 이것은 성가시게 따라붙는 개들을 물리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하시면서 개들이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고 하셨습니다(16:21). 냄새가 나고 진물이 나니까 개들이 와서 물어뜯는 장면을 예수님이 아주 생생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서 가리키는 개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2천 년전 이스라엘 마을을 떠돌아다니던 저 주인 없는 개들을 염두에 두고 본문 말씀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문의 ''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떠들고 싸우는 것입니다. 만나기만 하면 서로 으르렁대고 물어뜯습니다. 욕심이 많습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법이 없습니다. 양보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5611절에 이러한 개의 특성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7:6)'고 하신 바 있습니다. 개의 특징은 싸우는 것입니다. 둘째, 개는 더럽습니다. 썩은 고기를 먹고, 시체를 뜯어먹습니다. 그리고 음란합니다. 음란하기 때문에 종교적 음란을 비유할 때에 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셋째, 개는 회개하고서 다시 옛날 죄로 되돌아가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후서 222절에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개가 기침을 하며 먹은 것을 다 토해 놓고는 잠시 후에 그것을 다시 핥아먹습니다. 뉘우치고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맹세하고 죄짓고…… 이러한 악순환 -- 예수님을 믿으면서 또다시 믿기 전의 옛날로 되돌아가는 행위를 가리켜 개와 같다고 합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26:11)"고 하는 것이 다 그런 행위를 뜻하는 것입니다. 통틀어서 ''라는 것은 이방인을 가리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방인은 떠들고, 싸우고, 욕심 많고, 더럽고, 음란하고, 도덕도 없으며, 악한 행위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개들을 삼가라'는 것은 개의 여러 특징뿐만 아니라 이방 사람들을 삼가라, 이방 종교를 삼가라는 뜻이 됩니다. 솔로몬도 이 시험에 넘어갔습니다. 많은 유대의 왕들이 이방 사람의 풍속과 종교에 넘어갔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들,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은 이런 이방 문화, 이방 풍속과 그들의 사상, 세계관, 이념들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행악자란 '카쿠스 에르가타스'라고 하는 말인데,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악한 동기로 행하는 자요, 또 하나는 행동적인 사람을 뜻합니다.

일종의 행동 부대로서 참 위험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행악자를 삼가라 한 때에는 아마도 옛날의 자기 자신을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는 극악한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죽이는 일에 가담했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으러 다메섹까지 갔습니다. 다메섹까지는 보통 여행길로 일주일이 걸리는 먼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먼 길을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오기 위해 달려간 것입니다. 얼마나 철저하게 악한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나 자기 이득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기 나름으로는 신앙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율법과 이스라엘을 위해서 저지른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아마 예수님께서는 사람은 악착같으나 방향만 돌려놓으면 쓸만하겠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과연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로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한 사람을 죽이는 사람, 대제사장 가야바 같은 사람이 행악자입니다. 가야바는 예수님을 놓고 '한 사람이 죽음으로써 온 민족이 평안할 수 있다면 죽는 것이 마땅하다(11:50)'고 무서운 이야기를 합니다. 그까짓 예수야 의인인지 죄인인지 알 바 아니요, 그 말썽꾸러기 문제의 인물을 죽여서온 민족이 조용히 살 수 있다면 죽이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이것이대제사장으로서 할 말입니까? 그러나 가야바는 이러한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예수님을 죽입니다. 공공연히 악을 행하고 악을 정당화시키는 아주 악한 사람입니다. 바울도 본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복음 전하러 다니며 이 율법주의자에게서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할 말이 없었던 것은 자기도 옛날에 그와 똑같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행악자의 예를 더 들면 사도행전 2312, 13절에 보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한 40여 명의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왜 이런 맹세가 필요했겠습니까? 저들은 바울과 별 이해 관계가 없는데도 바울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저들이 바울을 죽이지 못했는데 과연 그 40명이 먹지 않고 한꺼번에 죽었는지 궁금합니다. 이렇게 악한 목적을 위하여 맹세하는 사람들, 행동 부대, 이들이 행악자입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생활을 해나가려 할 때 우리 주위의 이런 극악한 사람들이 우리를 해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참 괴롭고 마음 아픈 일입니다. 이런 행악자를 대적하다가 나도 같은 행악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 대항하다 내가 더 악해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행악자를 삼가라는 것은 이들을 피하거나 도망가라는 뜻이 아니요, 행악자로 인하여 소중한 은혜가 피해 입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좀더 은혜롭게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꼭 이런 행악자와 부딪히게 됩니다. 이럴 때에 함께 부딪쳐끝장을 내어 버릴 수도 있지만 끝까지 잘 참아나가야 합니다.

셋째, 손할례당을 삼가라고 합니다. 손할례당-'카타토멘'을 말할 때에 우리는 먼저 할례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할례는 창세기 179, 10절에서 유래되는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을 택하시고 선민(選民)의 표로 할례 예식을 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셨다는 영원한 표지로 육체에 준 외형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의식이 그러하듯 의식과 뜻, 형식과 내용, 그리고 마음과 행위는 아주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2641절은 '할례 받지 아니한 마음'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몸에만 받은 할례는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할례 받지 못할 것은 더러움을 제하여 버리지 못한 것이요, 선민의식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또 예레미야 610절에 재미있는 말씀으로 '할례 받지 못한 귀'가 나옵니다. 귀가 할례 받지 못함으로 말씀을 듣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귀가 깨끗하지 못하고 그 안에 더러운 것이 잔뜩 끼어서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잘라 버려야 할 것을 아직 자르지 못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면 말썽 많은 눈과 입도 역시 할례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6장을 보면 숯불로 입을 지졌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손할례당은 내적 의미에서 할례 받은 것이 아니라 형식만으로 받은 것을 뜻하며, 따라서 이것은 무효입니다. 다시 말해서 손할례당이란 형식주의, 외식주의를 가리킵니다. 외식주의에 한번 유혹되거나 빠지면 여기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 잘 아는 대로 마음이 먼저 있고 의식이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사랑이 있고 선물이 있는 것이지, 사랑 없이 선물만 있다면 그것은 누가 주든지 뇌물입니다. 먼저 사랑하는 마음이 있고 그에 따르는 표지로서의 선물이 있어야 사랑을 더 크게 만듭니다. 내적인 마음과 외적인 표지는 함께 다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이 있더라도 거기에서 더이상 나아가지 않고 가만히 멈추어 있는다면 그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말이 따르면 그 사랑에 액센트가 더해집니다. 선물이 따를 때에 그 사랑이 구체화되며 점점 더 확실해집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짝사랑하는 분이 있습니까? 기왕에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이라면 사랑한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상처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짝사랑의 대상을 만나 그까짓 말이야 못하겠느냐고 말해 버리면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합니다. 지워지지 않고 마음속에 강하게 새겨집니다. 게다가 선물까지 오고 간다면 문제가 아주 복잡해집니다.

한편, 마음은 없으면서 입으로 사랑한다고 말한다면 창녀나 다름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없는데 말만 있고, 형식과 선물만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것이 얼마나 악한 것입니까? 그런데 본문에는 마음은 제쳐놓고 육체에 받은 할례만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는 할례 받은 백성이다'라고 큰소리치고 싶은 위선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빠지기 쉬운 큰 함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에 교회에 나오기도 하고 기쁘게 헌금도 봉사도 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없이 이 일을 형식적으로 한다면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있어 교회에 나온다면 이것처럼 힘든 일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마음이 있고 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마음은 없고 의식만 있다면 이런 사람이 바로 손할례당인 것입니다.

설날 같은 때에 어린아이한테 예쁜 색동옷을 입혀 놓고 "이 아이는 착해서 싸우지도 않고 절대로 옷을 더럽히지도 않는다"고 한번 칭찬을 해봅시다. 말귀를 알아듣는 아이 같으면 그 말을 듣고서 모른 척할 수가 없습니다. 치마꼬리를 딱 잡고 나가지도 못하고 들어가지도 못하고, 앉지도 서지도 못합니다. 그 옷을 입은 채로 며칠이고 계속 있는다면 이 아이는 아마도 병이 나고 말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어린아이란 모름지기 싸우고 터지고 말 안 듣고 옷을 더럽히는 것이지, 옷을 깨끗이 입는 것이 어린아이입니까? 칭찬을 하니까 할 수 없이 그 칭찬에 보답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도 그렇습니다. 신앙이 있어서 봉사하는 것은 좋지만, 믿음 없는 사람도 어쩌다 기분으로 봉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주위 사람들이 칭찬을 합니다. 아무개는 착하고, 새벽기도 잘 나오고, 교사로도 열심이고, 성가대에도 잘 서며 헌금도 잘 한다고 칭찬을 해대면 그는 믿음도 없이 이것을 지며 보려고 합니다. 열심히 이것저것을 해보려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런 사람이 집에 가면 부부싸움을 많이 합니다. 그것이 위선이라는 것을 그 부인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터집니다. 하기야 집에서라도 터져야지 거기서 안 터지면 그는 정신병원에 가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해묵은 위선자가 있습니다. 몇십 년 된 위선자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속은 엉뚱하여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면 근사하고 의젓합니다. 사람 보는 데서는 모든 일에 다 끼어 들고, 사람 안 볼 때에는 쑥 들어갑니다.

이름 내는 곳에는 다 나타납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렇게 되면 결국은 영이 병들고 몸이 병들고, 인간 관계가 다 병이 듭니다. 언젠가는 크게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위해 절대로 위선자가 되지 맙시다. 진실하게,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나는 이렇습니다.' 할 때에 그처럼 편할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 있는 손할례당처럼 특별히 종교 예식이나 거룩한 의식을 형식적으로나 외식적으로 하는 일은 참 위험합니다. 손할례당이란 바리새인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삼가할 것 세 가지를 이야기한 후에 사도 바울은 취할 것 세 가지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 첫째가 성령으로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봉사는 서비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도 영어로는 서비스(service),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봉사'는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우리말 성경은 번역에 약간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봉사를 헬라서 원문으로 보면 예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보충 번역을 하면 '성령 안에서 예배하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것은 예배로 표현되고 사람 앞에 봉사하는 것은 봉사로 표현됩니다. 그러면 다시 생각해 봅시다. 성령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성령이 알게 하는 대로, 성령이 깨닫게 하는 대로, 성령이 감화하는 대로 조금도 거역함 없이 성령 안에서 그대로 예배하라, 신령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신령과 진리로 예배하고, 영으로 하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설교 중에 여러분이 귀로는 제 음성을, 눈으로는 제 얼굴을 보고 있지만 영의 귀로 하나님의 음성을, 영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으로 예배하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라 말씀합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잘 나가다가도 예수님께 돌려야 할 자랑을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궁극적 영광은 반드시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자기 자랑을 해버리면 그 순간에 은혜가 없어집니다. 모처럼 받은 은혜를 다 쏟아내 버리게 됩니다.

셋째,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만 의뢰하라는 뜻입니다. 과거도 은혜요, 현재도 은혜요, 미래도 은혜입니다. 자기 의를 신뢰하지 말고 잘난 척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의에 빠지면 반드시 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3:3)"고 책망합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구원 얻었는데 나중에는 행위로 얻으려 합니다. 그래서 헌금해야 복을 받고 선한 일을 해야 기도의 응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본문 말씀은, 은혜의 생활을 하려면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는 말이요 율법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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