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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탄한 자랑(야고보서 4:13-17)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모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허탄한 자랑'이라고 하는 말씀이 본문에 나옵니다. "이제 너희가 허탄하나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16절)." 허탄한 자랑이란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세상적인 자랑을 말합니다. 나는 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젊었다, 나는 건강하다, 나는 가졌다-이런 따위로 자기를 내세우는 어리석은 자랑이 있는가 하면, 더욱 넌센스인 것은 미래를 둔 자랑입니다. 나는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 나는 1년 후에 반드시 ~가 되겠다. 10년 후에는 어떻게 되어 있을 것이다-이런 자랑입니다. 두고봐야 알지 누가 알 것입니까?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인간의 자랑이란 한마디로 어리석음 그것입니다. 본문말씀 그대로입니다. 허탄한 것입니다. 헛된 것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말씀합니다. 인간은 저러한 헛된 자랑을 버리고 진실과 거룩함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을 근본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는 세계관과 인생관을 생각할 때에 절대로 빼놓아서는 안될 두 가지의 근본적인 명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생명 문제입니다. 생명이 먼저입니다. 살고야 모든 것에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야 무슨 이야기가 됩니까? 곧 생명 문제가 우선인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건강을 생각해봅니다. 건강할 때에야 뭘 한다 어떻다 하지만 덜컥 병이라도 들고 보면 모든 것이 무용입니다. 오늘도 제가 어떤 분을 만나보았는데, 그분이 퍽 침통하게 말해요. "별로 아픈 데가 없었는데, 다만 조금 피곤한 것 같기도 하고 찌뿌드드해서 그저께 아내와 함께 병원에를 가봤지요. 위암이라는 것입니다. 평소 이렇다할 자각증상이 없었는데도 이미 임파선까지 해서 온몸에 암이 확 퍼졌다고 해요. 수술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지 뭡니까? 그저 기다려볼 수밖에 없다고 의사는 말합디다. 참 어이없고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다. 인생 자체가 워낙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도 합리적이요 너무도 당연한 것인데, 나한테 닥치고 보면 가장 불합리한 일인 양, 잘못된 일인 양 생각들 합니다. 세상에 사람이 죽는다는 것처럼 합리적인 얘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한 얘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죽어야 될 사람이 죽은 것처럼들 생각합니다. 넌센스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생명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 문제가 최우선이요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식들에게 열심히 공부만 하라고 닦달하는 어머니들을 주위에서 가끔 봅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자녀를 보고 심지어는 "그렇게 공부하기 싫거든 차라리 나가버려!"하고 극언조차 서슴지 않는 어머니들이 있습니다. 그러다가도 정작 자식이 병이 나서 앓아 눕기라도 해보십시오. 그런 어머니들도 역시 "공부는 못해도 좋으니 제발 건강하게만 살아다오" 합니다. 이렇듯 무엇보다도 생명이 먼저인 것입니다. 이렇게 소중한 생명 문제를 망각한 채로 공부를 한다 사업을 한다 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두 번째 문제는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주님의 뜻을 앞세우고 그리고 그분의 뜻이라면 그대로 좇을 것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선행입니다. 우리는 시한부로 주어진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본문은 말씀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17절)"-자기에게 주어진 한시간 한시간을 선행으로, 가장 아름다운 최선으로, 마치 작품처럼 만들어나가야 한다고 말씀함입니다. 이 세 가지, 즉 생명과 주님의 뜻과 선행을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헛된 사람이요, 바보입니다.
잘못사는 사람입니다.
생명은 온 천하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리고 생명 문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생의 문제입니다. 세상에서 가난하게 산다거나, 병이 든다 거나, 일찍 죽는다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고 장수한다고 한들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라면 부귀며 장수가 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두 술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소위 2차 3차를 하며 밤늦게까지 어울려 다니다가 끝내는 한 친구가 제집에까지 친구를 데리고 쳐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제 아내한테 술 심부름을 시킵니다. 술 내오라, 안주 내오라, 술 따르어라, 뭐해라 하고 법석을 떱니다. 그런데 그 아내는 얼굴 한번 찡그리지 않고 묵묵히 순종합니다. 따라온 친구가 그 모습을 보고 적이 감동했나봅니다. "아주머니, 밤중인데다 귀찮으실 텐데 어찌 이리도 잘하실 수 있습니까?" 그 친구의 눈에는 이상하게 비쳤던 모양입니다. "저같이도 못참을 것 같은데요. 더구나 제 아내였다면 이런 경우에 벼락이 떨어졌을 겁니다." 그 부인은 대답합니다. "깊은 뜻이 있어서 이렇게 합니다. 부담 갖지 마시고 많이 드세요." "깊은 뜻이라니요?" 친구는 더욱 궁금해져서 설명을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말해보구려." 남편 되는 사람도 재촉합니다. 부인은 차분하게 입을 엽니다.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이 이 하고는 십 년을 함께 사는데도 이 이는 도무지 예수 안 믿어요. 아무리 믿으라고 해도 안되더군요. 아무래도 이 이는 이렇게 술 마시고 다니다가 필경은 술 때문에 죽고 말 것만 같습니다. 저야 세상에서 고생 좀 한들 대숩니까? 결국에는 천당 갈 거니까요. 그러나 이 이는 아무래도 지옥 갈 것 같거든요. 그래, 불쌍한 사람이니 세상사는 동안에라도 먹고 싶은 대로 잘먹게 하자고 이렇게 시중을 드는 거예요"-호기만발(豪氣滿發)하여 갖은 객기 다 부리며 세상을 살아오던 그 남편과 그 친구, 일순 정신이 번쩍 나며 술기가 싹 가시는 듯했습니다. 말문이 막힌 채 고개만 떨구고 있던 두 사람은 그 후로 결국은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중요한 것은 '생명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건강한 것도 중요하고 오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영생입니다. 천하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라고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천하를 얻었다 해도 생명을 잃어버리면 소용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생명을 제일로 생각하면서 모든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영생 문제를 생각하면서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해야 합니다. 영생의 문제를 그르치면서까지 돈을 벌겠다는 사람은 우맹(愚盲)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말씀(눅 16 : 19-25)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사람인 것입니다. 살아서 아둥바둥 돈을 벌어 부자는 되었지만 죽어서 가게 된 곳은 지옥입니다. 그러나 거지 나사로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살아서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는 신세였지만 죽어서는 천당엘 가지 않았습니까? 영생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중요합니다. 선행이 중요합니다.
본문은 평범하면서도 교만하고 불신앙적인 인생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留)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13절)." '도시에 가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이렇게 네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되겠다는 것이 일 년 계획입니다. 치밀한 계획입니다. 그럴싸한 계획입니다. 도둑질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요 강도질을 하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결코 못할 짓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생각이 있는 계획입니다. '아무 도시에,' 우선 행선지가 분명합니다. '일 년을 유하며,' 체류 기간이 분명합니다. '장사하여,' 할 일이 분명합니다. '이를 보리라,' 목적이 분명합니다.
당시에는 대상(隊商)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장사하러 떼를 지어 다니는 것입니다. 무법천지라 강도가 들끓었기 때문에 적어도 70명 이상은 되어야 이동을 했다고 합니다. 저마다 갖가지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섞여서 이 도시로 저 도시로 옮겨다녔습니다. 거기에 끼어 다니면서 한 일년쯤 장사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벌겠다는 계획입니다. 나름으로는 완벽한 계획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중요한 문제가 나타납니다. 하나님께 대한 생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입니다. 생명 문제는 도외시했습니다. 선행이 배제되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뜻이 고려되지 않았습니다.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이 돈벌 생각만 했습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소위 저축상 시상식을 본 적이 있습니다. 남대문 시장에서 지게를 지는 사람이 한 해에 무려 오천만 원이나 저금을 했다고 은행이 상패와 상금을 주는 것입니다. 사회자가 수상자에게 묻습니다. "그 돈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수상자는 주저없이 대답합니다.
"저금해야죠. 그리고 금년에도 오천만 원을 벌어 저금할 겁니다. 그래서 일억을 만들랍니다." 사회자가 또 묻습니다. "그 일억으로 뭘 하시려구요?" "계속 저축해서 일억오천만 원을 만들랍니다." 이사람, 기막힌 사람이다 싶었습니다. 물론 지게를 져서 오천만 원을 저금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하기야 돈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는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 돈버는 재미라는 것이 있고 돈을 붙들고 지키는 재미도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꼭 있어야 할 재미, 마지막 재미가 없습니다. 모름지기 쓰는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쓰는 재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다할 목적도 없이 그저 돈을 벌겠다고만 합니다. 돈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이(利)를 보겠다고만 했지, 그것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 없습니다. 목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명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은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시작이 있듯이 끝도 있는 것입니다. 생명에 대해서만은 절대로 가부를 말하지 말 것입니다. 아까 만났던 그분에게도 제가 부탁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제가 이런 경우를 많이 봐왔습니다마는, 대체로 이런 일을 당했을 때 보니까 살겠다는 사람은 죽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살더군요. 기도 많이 하시고 생명에 대한 애착을 버리십시오. 마음으로부터 참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세요. 오늘 죽어도 좋고 내일 죽어도 좋습니다. 오직 주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제 생사의 문제는 온전히 주님께 맡깁니다-이렇게 죽음의 공포로부터 깨끗이 벗어날 때에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꼭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자꾸 가지면 병이 더 안 낫더군요. 이 점 하나 조심하세요." 그렇게 말해주었더니 "알았습니다" 하고 돌아갔는데, 모르겠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생명 문제에 관해서는 가부를 말하지 말 것입니다.
어느 때에, 몇 살에, 어떤 모양으로 가든지 주님께서 부르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데야 연기 신청이 가당합니까? 불평도 원망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내 생명이건 남의 생명이건,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이 아니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 10 : 29)고 주님께서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생명이겠습니까? 생명에 관한 한 No comment, 전혀 다른 소리를 하지 맙시다. 시작이 있었으니 끝이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끝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가끔 물어봅니다마는 여러분, 여러분은 꼭 몇 살까지 살았으면 좋겠습니까?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나의 죽음을 두고 기도해보신 적 있습니까? 어디서 죽는 것이 좋겠습니까? 자동차 안에서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비행기 안에서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집에서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병원에서 죽었으면 좋겠습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죽음을 위해서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에게 이러한 죽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에 맞으면 이렇게 이렇게 해주십시오'-이렇게 기도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오래 살게 해주세요, 120세까지만 살게 해주세요'-이런 기도는 하지 말 것입니다. 아름답지 못하니까요. 바람직한 기도가 못됩니다. 중요한 충고이니 명심해두시기 바랍니다. 20여년 전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에 차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목사님이 한 분계십니다. 얼마 전 그곳에 갈 기회가 있어 사모님을 만나 뵙고 안부를 물어봤더니 그분이 아직도 살아 계시다고 합니다. 20여 년이라면 식물인간의 시중을 들기에는 엄청나게 긴 세월입니다. 그 사모님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모름지기 사람은 제 때에 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덮어놓고 오래 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시작이 있으니 끝이 있습니다. 이 끝은 불확실한 세계가 아닙니다. 미지의 세계가 아닙니다. 내 앞에 엄연히 있는 것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살 것인지, 이것은 불확실하다 해도 죽는다는 그 사실은 확실합니다. 저도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장담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길어야 70년이 지나면 이 자리의 우리는 아마도 거의가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엄연한 사실에서부터 생각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하거늘 지금도 보니 그만하면 모을 만큼 모아놓았는데 더 모아들이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꽉 움켜잡고 못 놓습니다. 보아하니 며칠 안 남은 생명인데 그토록 집요합니다. 참으로 억세게도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14절)"-정말 잠깐입니다. 연세 높은 분들은 실감을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어제가 얼마나 빨리 가고 말았습니까? 눈 한번 꿈벅이면 한 주일이 후딱 지나가 버립니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뭣합니다마는 제가 목사가 된 것은 스물일곱 살 때입니다. 너무 일찍 목사가 되고보니 젊다는 것이 적이 괴롭더군요. '아기목사'라느니 '병아리목사'라느니 하고 애송이 취급을 받기 일쑤이니 괴롭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에잇, 어서어서 늙어버려야지 못쓰겠구나, 이거!' 혼자서 안타까워했었습니다. 일껏 열심히 준비를 해서 설교를 하는데도, 돌아오는 반응이라고는 '은혜 받았다'는 소리가 아니라 '유망해'-이런 소리뿐이었습니다. "어서 늙어야지." 절로 푸념이 나오곤 했는데, 보십시오. 어느 결에 이렇게 늙어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아이들도 저더러 "할아버지" "할아버지"하고 어른들도 저보고 한다는 인사가 "늙으셨군요"입니다. 생각해보면 눈 깜짝할 사이였습니다.
그야말로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 이것이, 천년만년 살 것만 같았던 우리들의 인생인 것입니다. 나이도 그치고 건강도 쇠하고 지위도 떨어져나갑니다. 모든 것에 필연 끝이 있습니다. 머리 좋다고 자긍할 것이 아닙니다. 잠깐사이에 기억력이 쇠합니다. 눈 좋다고 자신할 것이 아닙니다. 금방 돋보기를 껴야 합니다. 맛사지를 해대건 다림질을 해대건 주름살은 저 생길 대로 생깁니다. 머리를 깡그리 벌초한다 해도 흰머리가 안 나지 않습니다. 자식들이 속을 썩이면 "내가 너 때문에 지레 늙는구나, 이 흰머리 좀 봐라, 이놈아"하고 짜증을 부리는 어머니들이 간혹 있습니다. 말이 안됩니다. 속을 안 썩이면 흰머리도 안 나고 주름살도 안 생긴답니까? 다 쓸데없는 소리지요. 나이가 먹으면 주름살이 생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흰머리도 나고 허리도 구부러집니다. 심지어는 키도 작아집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쓸데없는 싸움을 하고 서로 미워하고 욕심을 부려야 합니까? 왜 목적 없이 헛된 생을 살려고 하는 것입니까?
모름지기 생명 문제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생명은 반드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시간이 가면 따라 늙는 것이 사람이요, 앞서거니 뒤서거니 너나할것없이 끝나는 것이 지상에서의 인생입니다. 끝나는 싯점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주시기도 하고 거두어 가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경륜을 믿습니까? 그 경륜 안에 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유익한 때를 정하시어 필요한 곳으로 데려가십니다.
여러분, 사람은 살아서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러나 죽어서 더 큰 일을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사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죽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죽는다는 것으로써 이루어진 크고 놀라운 역사를 우리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살아서 역사 했지만, 스데반은 죽음으로써 큰 역사를 이루어 남겼습니다. 많은 순교자들 역시 죽는다는 그 사건을 통해서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이 어떤 모양으로 어느 때에 끝나든지 이에 대해서는 가부를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고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사랑이 있습니다. 죽음이란 완성이요 안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아멘'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잠깐이기 때문에 오히려 소중한 것입니다. 나는 그 때를 모릅니다.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요 내 뜻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뜻을 그대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순종할 뿐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불평 없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받아들이되 은혜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직 준비된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삶과 죽음, 부와 가난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건강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병드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일을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일들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추상적인 것이요, 하나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의도 진리도, 화평도 사랑도, 은혜도 용서도, 모두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하게 사는 것, 진리에 사는 것, 의리에 사는 것이 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저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이 장사를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이 사업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처한 현실 그대로가 무릇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들의 삶 전반에 걸쳐 구체적인 하나님의 경륜과 뜻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뜻이라면'-이렇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몇 차례 없이 같은 말씀을 합니다. '주님의 뜻이면 가리라' '주님의 뜻이면 오리라' '주님의 뜻 안에서 내가 너에게 가기를 바라노라'-언제나 이처럼 겸손하게 주님의 뜻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갈 것이다' '목이 부러져도 갈 것이다' '죽어도 갈 것이다'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고집은 부리지 말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면' '주님께서 허락하시면'-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렇듯 겸손하게 임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이면 성공할 것이요, 실패한다 해도 주님의 뜻임을 알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뜻 안에서 겸손하게 행하는, 이런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지 말 것입니다. 인간의 힘이나 능력이나 지위나 계획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은 더구나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이러한 자랑은 모두가 허탄한 것이요 악한 것입니다. 불신앙적인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할 문제가 선행입니다. 내 인생의 짧은 때가 주님의 뜻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동안에 내가 해야 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젊었을 때에는 젊었음으로 해서 할 일이 있습니다. 열심히 할 것입니다. 나이들이면 나이 들었음으로 해서 할 일이 있습니다. 나이 들어 젊은 사람의 일을 하겠다고 덤비는 것은 주책일 뿐입니다. 제가 결혼주례를 한 사람으로 저보다 나이가 더 든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미국에 살면서, 늘그막에도 운동을 한다기에 무슨 운동인가 했더니 테니스였습니다. 나이 들고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어서 배웠는데, 열심히 하다보니 젊은이들보다 더 잘 치게 되었다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속으로 꺼림칙했습니다. 젊은 사람이 할 운동이 따로 있고 나이든 사람이 할만한 운동이 따로 있는데, 테니스는 그분께 조금 무리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나다를까, 그런 자랑을 들은 지 며칠도 지나지 않아서 그분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테니스를 하던 중에 "아이쿠, 가슴이야!" 하면서 쓰러지더라는 것입니다. 심장마비로 죽은 것입니다. 그 나이에 테니스는 아무래도 과격했던 모양입니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운동도 나이에 맞게 선택해서 할 것입니다. 자기 분수에 넘치는 운동을 하겠다고 마음만 한창이어서 대중없이 덤벼드는 것은 주책입니다.
교수님들을 보면 하루빨리 은퇴를 해서 조용히 책이나 쓰고 싶다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보면 저는 으레 말합니다. "은퇴하거든 낚시질이나 다니세요." 책을 쓰는 것도 나이 들어서 할만한 일은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쉬어빠진 머리로 제대로 된 책을 쓰기도 어려울 뿐더러, 써놓아 보았자 읽어줄 사람 별로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통해서 늘그막에 붓을 들어 불후의 저작(著作)을 남긴 탁월한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는 역시 머리가 잘 돌아가는 젊은 시절에나 할 일들인 것입니다. 그런 모양으로 허탄한 자랑을 하려고 덤빌 것이 아니라, 때에 맞는 일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겸손히 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선한 일입니다.
공부하는 젊은이들, 공부해야 할 그때를 허송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공부해야 하는 때를 딴 일에 허비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가 학교에 나가 가르치다보면 환갑도 넘은 이가 공부하러 오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런 분들이 신학교에 들어와 신학을 공부하겠다는 것, 말릴 수야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런 분들이 젊은이들보다도 더 열심인 것입니다. 시험을 칠 때만 해도 다른 학생들은 다 자리를 뜨는데도 끝까지 앉아서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아주 성실해요. 백점짜리 답안을 내놓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진작 저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젊었을 때에 저토록 열심히 좀 할 것이지……' 어찌되었든 이제는 별수 없이 '막물'인 것입니다. 열심히 할만한 때가 다 지나버린 지금에 와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하니, 때맞지 않아 선하지 못한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17절)"-아무 도시에 가서 일 년을 유하며 돈을 번 다음에 그 때가서 생각해보고 선한 일을 하겠다는 것은 죄라고 말씀함입니다. 오늘 해야 될 일을 내일로, 일 년 뒤로, 돈을 번 뒤로 미루는 것, 이것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선을 행하기는 하겠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용없습니다. 오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돼지가 젖소를 보고 투덜거립니다. "나는 살아서야 이렇게 많이 먹고 살이 찌지만, 죽어서는 내 고기와 뼈를 고스란히 주인한테 바친다. 그런데도 왜 자꾸 나더러 "돼지야, 먹고 놀기만 하는 돼지야"하고 놀리는지 모르겠어." 젖소도 한마디합니다. "나는 살아서도 주인한테 우유를 주고, 죽어서도 고기와 뼈와 가죽을 고스란히 내준다. 그렇지만 너는 죽어서 고기고 뼈고 다 필요 없어졌을 때에나 내주지 않느냐?" 여러분, 이것을 아셔야 합니다. 늙어서까지 붙들고 있다가 죽을 때에 내놓는 것, 반갑지 않습니다. 자기한테는 이제 소용없게 되었으니 내놓는 것이 아닙니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때에 내가 안 쓰고 선한 일을 위하여 내놓는 것 이것이 의미있는 일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있을 때에 행해야 됩니다. 할 수 없을 때에 가서 하겠다고 덤빌 것이 아닙니다. 쓸데없는 짓입니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는 것, 오늘 하지 아니하고 돈을 벌어서 일년 뒤에 하겠다는 것은 악한 것으로 좇아난 것입니다. 생명은 짧습니다. 인생은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그대로 기회 있을 때에 미루지 말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회개도 때가 있고 진실도 기회가 있습니다. 겸손도 기회가 있고, 봉사와 선행도 해서 마땅한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오늘 했어야 했는데 '다음에 하지' 하고 미루었더니 그만 기회가 지나가 버려서 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그것이 죄가 된다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인생의 근본은 생명 문제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며, 선행은 행해야 할 기회가 엄연히 있다는 것을 알고 겸손히 받아들여 행하고 살아갈 때에, 우리는 비로소 참그리스도인이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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