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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날 괴로움(마 6:31~3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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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날 괴로움(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저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앞 장에서 염려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염려란 행동하지 않고 생각만 하는 것이 염려입니다.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염려가 사라집니다. 염려란 지나치면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걱정하느라고 힘이 빠져 만사에 무기력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며, 모든 기능이 마비되어 지혜가 없어지며 용기가 상실되고 눈까지 멀어지는 것입니다.

걱정 속에 있다 보면 저 쪽에 열려있는 문을 보지 못합니다. 즉 불가능한 것만 생각하고 가능한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내게 부족한 것만 생각하고 이미 받은 축복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미 받은 것이 너무 많음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것 하나에 지나치게 집착한단 말입니다. 소위 소아병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자기의 작은 소원 하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머지 모든 것을 다 부정하고 모든 것이 다 틀렸다고 단정하듯이 우리들의 염려의 대부분이 이런 어리석음에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뛰면서 일하는 사람은 걱정할 겨를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염려란 한가한 사람들의 불필요한 자기 희생입니다.

앞 장에서 결론 맺기를 염려란 불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염려가 없고, 염려가 있으면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은 괴롬을 당하면 아픔은 있을지라도 염려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체적인 아픔은 있어도 정신적인 아픔은 없습니다. 가령 배가 고플 때, 배는 고파도 슬픔은 없단 말입니다. 흔히 배가 고프면 배고픈 이상으로 슬픔이 겹칩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배고픔으로 족하고 슬픔은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염려를 보다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하지말라."(6:31) 이상 세 가지는 모두 육신을 위한 것들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는 염려는 모두가 순간적이고 현재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눈에 보이는 염려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것들을 위해서는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이것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은 옷이 아니라 옷을 주시는 자를 생각해야 하고, 먹을 것을 염려할 것이 아니라 먹을 것을 주시는 자를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방법에 대한 것보다 목적에 생각을 두고 나 자신에 대한 것보다 전체에 뜻을 두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 먹느냐 못 먹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의미로 사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하여 중요한 열쇠를 주십니다.

"이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6:32) 현상적인 것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우상 앞에서 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마태 5장에서 이방인에 대한 이야기가 두 번째로 나옵니다. 이미 공부한 내용대로 마태 6:7에서 기도할 때에 이방인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말씀이 기억날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주문을 외우듯이 반복적으로 기도하여, 마치 신이 알지 못해서 들어주지 못할까봐 열심히 정보 제공을 하듯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서는 몇 시간 동안 기도했으니 들어주실 것이다 또는 고행을 많이 했으니 될 것이다 라고 기도를 공로화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처럼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을 위하여서는 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나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어느 정도의 수준이냐 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먹는 것, 입는 것, 출세하는 것을 위하여 기도한다면 이방 사람들과 같습니다. 마틴 루터는 "하나님이 하나님 되게 하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고 기도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런 하나님으로 모시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이처럼 큰 죄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기도 제목을 향상시켜야겠습니다. 하나씩 나열하지 않아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는 달리 기도 수준을 높이어 신앙의 성장을 가져와야 하겠습니다. 몇십 년을 신앙 생활해도 매일같이 달라는 기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인격의 수준이란 그의 소원에 기준됩니다.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의 인격이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먹는 것, 입는 것, 마시는 것 정도를 소원하는 자는 그 정도 인격에 머물러 있습니다. 빌립보서 3:19에 보면 "저희의 신은 배"라고 했습니다. 고작 뱃속을 하나님이라 믿어, 먹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봅니다. 우리의 소원은 어떤 수준이어야 합니까? 가령, 병들었을 때 "이 병을 고쳐주세요" 하는 것보다는 "하나님, 이대로 좋습니다. 남은 생애가 얼마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살도록 해주세요, 그것으로 족합니다" 하는 수준으로 기도할 수 없겠습니까? 죽으면 어쩌나? 죽은 다음 남은 일들은 어떻게 하지? 등 별 걱정을 다 합니다. 자신들의 우상 앞에 열심히 기도하는 이방인들처럼 저속한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소원은 좀더 높이 올려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고상한 기도를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갖추어야 할 기본 신앙은 "천부께서 알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모르실까 해서 지식을 보충하는 식으로 기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엎드려 "하나님" 하고 부르기만 해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아니, 내가 나의 필요를 아는 것보다도 더 잘 아십니다. 건강이 필요하고 옷이 필요하고 풍년이 들어야 함을 나보다 더 잘 아신단 말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 아멘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놀라운 신앙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지금 나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이대로가 내게 가장 족하나이다"라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지 이대로가 나의 믿음을 위하여, 나의 영혼을 위하여, 나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필요한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배신을 당했습니까? 내게 필요했습니다. 병들었습니까? 이것도 내게 필요한 것입니다.

또는 사업에 실패했습니까? 이것 역시 나에게 필요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냉정이 필요합니다.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실패를 당했고 고통을 당했어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사랑의 증거로 보는 것입니다. 어느 부인이 아주 어려운 간증을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해서 그분만 곁에 있으면 더 이상 어떤 필요를 느끼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기도할 필요는 더욱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말하기를 "제가 남편을 너무 사랑했나 봅니다. 제 우상을 하나님이 데려가셨어요"라고 대단히 어려운 고백을 하셨습니다. 얼마나 받아들이기가 힘든 사건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이 아신다는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내게 이런 형편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셔서 나를 사랑하므로 이 형편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받아들일 때 하나님의 놀라운 응답이 임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믿는 그런 신앙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내게 있어야 할 줄을 다 알고 계신다는 신앙고백과 함께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고 우리의 기도 제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의 나라"란 그리스도의 나라로써 그리스도의 주권을 말하는 것으로, 곧 그리스도의 주권의 실현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여기에 행사되고 그리스도의 뜻이 여기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을 위시하여 사회에 국가에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행사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 "그의 의"란 그리스도의 나라의 법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뜻을 이루신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자기를 위한 기도는 언제나 정욕으로 치우치기 쉽다. 가장 아름다운 기도는 남을 위한 기도다"라고 말했습니다. 남을 위한 기도 중에서도 원수를 위한 기도처럼 아름다운 기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즉 하나님의 필요를 채워드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내 뜻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면 덧붙여서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면 일일이 구하지 않아도 주실 것입니다.

오스왈드 스미스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할 때 일하는 자는 우리들 자신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도할 때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즉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일을 이루십니다.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어떤 헌신적인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섯 아이를 둔 과부였는데 열 두 아이를 더 입양해서 모두 열 여덟 명의 아이를 키웠다고 합니다. 기자가 찾아가서 묻기를 "왜 이런 일을 아십니까? 아이들을 벌어 먹이느라고 얼마나 걱정이십니까?" 하고 의아해서 질문했답니다.

그는 웃으며 "저는 하나님과 공동으로 일합니다. 그래서 피곤은 하지만 걱정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기자는 공동으로 일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해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저는 이 일을 시작할 때 '하나님, 당신께서는 내 걱정을 맡아 주십시오. 저는 일만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시작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켜주시므로 걱정없이 일할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걱정할 것 없습니다. 다만 일할 뿐입니다.

끝으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6 : 34)고 말씀하십니다. 내일 일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일 일을 염려하면 오늘 일을 못하게 됩니다. 내일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 날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염려 없는 괴로움을 당하라는 뜻입니다. 대체로 고통이란 염려 때문에 더욱 가중되고 있습니다. 병이 났을 경우, 아픈 것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죽을까 하는 염려로 인해 고통이 가중되며, 나아가서는 죄책감과 후회 또는 원망까지 겹치게 됩니다. 이렇게 점점 무거워져 아픈 것보다는 염려로 인한 고통이 더 괴롭게 되는 것입니다. 배고프면 배고픈 것으로, 추우면 추운 것으로 족해야지 여기에 더 추가되는 다른 것이 있어서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죽으면 죽는 것으로 족할 뿐 그것이 어떤 근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믿는 사람은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족합니다. 그 사건 그대로 족하고 그것이 걱정으로 옮겨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배고플 때 배고픈 것이 해결되면 족할 뿐 슬퍼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배고픈데 팔자타령 내지는 운명까지 논하며 저주라고 생각하는 데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조건이 조금만 나빠지면 저주라고 쉽게 단정을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무슨 저주입니까? 저주받았다, 화를 입었다고 말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여건 그대로를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이 모든 것을 내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고 그 사건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찾는다면 더할 나위없이 큰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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