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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운데 일어서라(마가복음 3장 1~6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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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운데 일어서라(마가복음 316)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편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가운데 일어서라 하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저희가 잠잠하거늘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어떠한 일이든 근본 목적에서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맙니다.

처음에 가졌던 목적이 다른 것으로 바뀌게 되면, 설사 외형적으로는 여전히 같은 것으로 남아있을지언정, 그 내용과 의미는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지 처음에 가졌던 그 목적으로 일관해야 합니다.

가령 우리가 선한 목적을 가지고 무슨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중간쯤에서 마음이 변하여 그 일로 돈을 벌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시작하여 끝내는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버린 것입니다.

일은 엄연히 같습니다마는 이제는 선행도 아니요 하나님을 위하는 일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어떠한 일이건 목적이 분명해야 되고, 그 목적이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경우고 그렇습니다. 주려고 마음먹었으면 주기만 해야 합니다. 어느 순간에라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들면 안됩니다. 사랑하기로 했으면 끝까지 사랑할 것입니다. 이제와서 사랑받는 데에 신경을 써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어떠한 일이든, 어떠한 선행이든 애초의 목적에서 떠나서는 안됩니다. 시작과 끝이 같아야만 그 일의 참의미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또한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방법이 잘못되어서는 안됩니다. 제아무리 선한 목적이라도 방법이 잘못되었으면 결과 역시 잘못되게 마련입니다.

더욱이 형식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숫자는 맞게 채워서 형식적으로는 됐습니다만 내용적으로는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안될 일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무엇이건 하는 체만 했습니다. 실상은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말씀 가운데도 '하와 운향과 채소 같은 것은 십일조로 바치면서 중요한 것은 바치지 않는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숫자만 맞춘 것입니다. 양을 십일조로 드린다면, 예를 들어 열 마리가 있을 경우 그 중 가장 좋은 놈을 골라서 깨끗한가, 흠은 없는가 확인한 다음에 바쳐야 진정한 십일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숫자는 맞습니다. 열에 하나를 바쳤으니 십일조가 됩니다마는 그 중 가장 나쁜 놈, 병든 놈을 바친 것입니다. 바치기는 했습니다마는 진정 바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형식주의입니다. 형식주의만큼 괴로운 것도 없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을 위하여 수고하든, 자식을 위하여 수고하든, 아내를 위하여 수고하든 마음은 없고 형식만 남았습니다. 참으로 피곤한 일입니다. 본인은 물론 상대방까지 그렇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유대사람들의 종교 의식, 특별히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그러했습니다. 목적이 변하고, 방법이 잘못되고, 형식주의에 빠졌습니다. 이 세 가지가 합쳐져서 엉뚱한 방향으로 치닫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안식일도 아닙니다. 아무 의미도 없어지고 만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것, 복음을 전하시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오늘이라도 어떤 사람이 이처럼 귀한 일을 하고 다닌다면 참으로 좋겠습니다마는 이상하게도 선한 일에는 비방이 따릅니다. 비방을 받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비방 받지 않고 선한 일을 하리라고는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다. 예수님께서도 비방을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 같은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비방 받을 것이 당연합니다. 선한 일을 좀 하는 것 같더니 이런저런 좋지 않은 말들이 나오자 얼른 그만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안 하면 그만이지' 합니다. 언제 내가 선한 일이 무엇인지 알기나 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평생 선한 일을 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선한 일 하고 좋은 말 들으려는 생각은 아예 마십시다. 좋은 말 듣고자 한다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일에 반드시 비방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지금이라도 구제를 한다, 봉사를 한다 해보십시오.

당장에 이런 말들이 나올 것입니다. 살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나다닌다는 둥, 돈도 없는 사람이 돈 쓰고 다닌다는 둥, 좋은 일 좀 해서 국회의원에라도 출마할 모양이라는 둥, 별아 별소리가 다 나옵니다. 더구나 경건한 체한다. 잘 믿는 체한다는 소리까지 듣게 됩니다. 여러분, 비방이 따르지 않는 일이 없습니다. 심지어 권세의 예수님께서도 비방을 받으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시고, 병을 고쳐주심에도 비방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비방 받아야 할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그런데도 비방을 받으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선한 일이라고 하여 만사가 합리적이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반드시 무리가 따릅니다. '소가 없으면 외양간이 깨끗하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소를 먹이려면 외양간이 있어야 하고 외양간이 있으면 냄새가 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무슨 일에든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어려운 일이 따른다는 말입니다. 이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아가야 합니다. 밀고 나아가야 합니다마는 하나같이 피하려고만 합니다. 이쪽도 좋고 저쪽도 좋게만 하려고 해보십시오. 아마 모르긴 해도 다 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남녀 관계에서 그렇다면 시집 장가 갈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두 여자가 나를 좋아하는데 결혼하려면 부득불한 사람을 버려야 합니다. 더구나 내가 두 사람 모두를 좋아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이 사람은 인물이 잘났고, 저 사람은 학벌이 좋고-단점이 다 다르다는 말입니다. 어느 쪽 하나는 포기해야 합니다. 결혼식이라면 다들 좋아합니다 마는 생각만큼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일로 적어도 몇 사람이 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짝사랑하던 사람이 숨어서 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모두에게 좋게 할 수는 없습니다. 부득불 큰 것을 놓고 그쪽으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일,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런데 그날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셔서 시비가 된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팔 년 동안 귀신들려 있는 여자를 고치시자 회당장이 안식일에 병 고침을 분 내어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말 것이니라(14)."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하여 안식일에도 병을 고치십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 문제와의 충돌만이라도 피하셨더라면 적어도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는 않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문제로는 한 발짝도 양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사람들이 아예 병 고치는 일을 하지 말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당장 고치지 않으면 죽게 될 사람조차 그냥 두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죄로 치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당장 고치지 않아도 죽지 않을 사람, 곧 오늘의 본문에 등장한 손 마른 사람쯤이야 한 달 뒤에 고친들 그 사이에 죽기야 하겠습니까? 어차피 오래 앓아온 환자인데 몇 달 더 불편하게 지낸다고 대수겠습니까? 하필이면 안식일에 고쳐서 말썽을 일으킬 것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보면 예수님은 참 답답한 분이십니다. 구태여 충동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까? 요즘도 좋은 일을 하려면 꼭 그렇습니다. '굳이 힘들이면서 왜 하느냐'고 말들이 많습니다. 사실 안 하면 그만입니다. 저도 목사된 입장에서 뭣 좀 하려고 하면 꼭 난관에 부닥칩니다. 좋게 좋게 하려고만 하면 잘 안됩니다. 그렇다고 안 하면 영영 아무 일도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예배당을 증축할 때에도 참 문제가 많았습니다. '왜 자꾸만 증축하려고 하느냐'하고 많은 사람들이 제동을 걸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지금도 예배당이 차고 넘쳐서 걱정입니다 마는 그나마 증축하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까짓 것 안 하면 그만이지'하고 포기하면 저로서는 편합니다마는 밀고 나가려니까 문제가 됩니다. 사실 교인이 많으면 힘들기만 합니다. 소가 없으면 외양간도 깨끗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이 다 그러합니다. 예수님께 한번 물어보십시다.

왜 안식일에까지 병을 고치시면서 말썽을 일으키셨습니까? 가만히 쉬면서 안식일을 지키셨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신 예는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 일곱 번입니다. 마가복음 1장에서는 귀신들린 사람과 베드로의 장모를, 3장에서는 손 마른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5장에서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이나 누워 있던 환자를 고쳐주십니다. 며칠 후에 고쳐주셔도 될 일을 하필이면 안식일에 고쳐주셔서 말썽이 됩니다. 9장에서는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누가복음 13장에서는 18년 동안 귀신들린 여자를, 14장에서는 고창병 들린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이 일곱 가지의 경우가 모두 며칠 더 있다가 고쳐 주어도 괜찮을 병들입니다. 그런데 왜 안식일에 고치셔야만 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그 깊은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환자를 보셨습니다. 환자가 눈에 보이는데 다음날에 고쳐야 합니까? 안식일이라고 내일로 미루지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에 보셨으면 안식일에, 월요일에 보셨으면 월요일에 고치셔야 한 것입니다.

오늘 선한 일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그 즉시로 해야 합니다. 내일 하자하고는 돌아서면 못하게 됩니다. 끝내 천추의 한으로 남고 맙니다.

저는 목사로서 늘 마음에 괴로운 것이 있습니다. 병들어서 자리에 눕게 된 교인들이 한번 와달라고 청하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그때마다 일이 있어 수첩에 기록해놓고 차일피일 미루다보면 그만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옵니다. 장례식에 참석을 합니다만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아픈지 모릅니다. 자리에 누웠다는 소식을 듣는대로 가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죄송한 일입니다. 선한 일은 직감적이고 즉행적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십팔 년 동안 사단에게 매인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치 아니하냐(13 : 16)"-한시바삐 풀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문제로 부딪힌 것은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그 뜨거운 마음은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안식 일이어서 안 된다는 관습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시비가 없도록 해야겠다는 타협적인 마음을 용납하시지 않은 것입니다. 환자를 매임에서 풀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깊은 마음, 그 뜨거운 사랑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에는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많았습니다.

십계명에는 안식일에 관한 조항이 간단하게 나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며 거룩히 지키라(20 : 8)." 이어 한두 가지의 금기 사항이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성경에는 이 정도였습니다마는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가르치던 교재에는 무려 39가지의 금기 사항이 있습니다.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는 것이 39가지입니다.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번 보십시다.

씨뿌리지 말라, 밭갈지 말라, 추수하지 말라, 단을 묶지 말라, 타작하지 말라, 곡식을 까불지 말라, 곡식을 씻지 말라, 곡식을 바수지 말라, 곡식을 가리지 말라, 반죽하지 말라, 떡을 굽지 말라, 양털을 깎지 말라, 빨래하지 말라, 타격하지 말라, 염색하지 말라, 실 잣지 말라, 실을 뒤틀지 말라, 두 끈을 묶지 말라, 두 실을 맞추어 짜지 말라, 짜여진 실을 풀지 말라, 매듭짓지 말라, 매듭 풀지 말라(곧 옷고름을 풀지도 매지도 말라), 두 조각의 베를 깁지 말라(곧 바느질하지 말라), 깁기 위하여 베 조각을 찢지 말라, 노루를 잡지 말라, 죽이지 말라, 동물의 껍질을 벗기지 말라, 껍질을 소금에 담그지 말라, 가죽 만드는 일을 하지 말라, 머리털을 밀어내지 말라, 머리털을 깎지 말라, 두 글자를 쓰지 말라, 두 글자를 쓰려고 다른 글자를 지우지 말라, 건축물 짓지 말라, 부수지 말라, 망치질하지 말라, 불을 끄지 말라, 불을 켜지 말라(꺼져 있으면 켜지 말고 켜져 있으면 끄지 말라), 이사하지 말라-이상이 안식일에 금한 39가지의 조항입니다.

이제 보십시다. 이 규례 대로 한다면 죄인 아닐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문제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저것 많은 조항을 덧붙여 놓은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 보면 이 사람들은 어떠한 근거로든 간에 예수님을 송사 할 생각만 합니다. 선한 일 하시는 예수님을 왜 송사 하려고 합니까? 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까? 가장 큰 이유가 질투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질투입니다. 제일로 치사한 죄입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고민이 있는 것도 이 질투 때문입니다.

어느 책에서 보니 승부욕이 강한 사람에게는 운동하는 것이 하등 도움이 안 된다고 합니다. 운동을 하면서도 남보다 잘하려는 생각만 합니다.

이겨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런 사람은 운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잘못하면 죽기 십상입니다. 운동도 적당히 하며 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지면 어떻고 이기면 어떻습니까? 남한테 이기려고 바락바락 애쓰다가 그만 과로로 죽고 심장마비로 죽습니다. 제가 골프 치러 가서 보니 충분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이 사람도 잘 치고 저 사람도 잘 치는데 나만 변변치 못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다 비웃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잘 치려고 정신통일 하다가 그만 머리가 터져서 죽습니다.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들어 있는 그것이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부부간에 질투 때문에 문제가 많습니다. 내가 잘났느니 네가 못났느니 하면서 팽팽하게 맞서서 뒤로 물러날 줄을 모릅니다. 시기와 질투-에덴동산에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족보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음속에서 빼어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 하나, 예수님으로 인하여 저들의 위치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저들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는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시는 한 저들은 무능한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견디기 힘드는 것입니다. 남이 칭찬 받는 동안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 되는 것 같지 않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 저들의 죄인된 모습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것입니다. 가야바가 그렇고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시기 전에는 저들이 거룩하고 존경받는 종교인이었습니다 마는 예수님이 등장하시면서 저들은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형식주의자요 위선자요 돈만 아는, 형편없는 인간으로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추해졌습니까? 당연히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무서운 말을 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50)"-의인이건 죄인이건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평안할 수 있다면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말은 이렇게 했습니다마는 사실 속에는 딴마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있으면 저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죽이고 내가 살아야겠다고 한 것입니다. 형식적으로야 온 민족을 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다보면 혁명이 일어날 것이고, 로마를 반대하는 혁명이 일어나는 날에는 민족적으로 시끄러울 것이니 불순세력을 미리미리 제거해야 한다고 민족적 차원에서 거창하게 말합니다. 또한 덧붙여 하는 말이 더 재미있습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49)." 아주 아는 체합니다 마는 정말 바보스런 사람이 가야바입니다.

의인 하나가 죄 없이 죽으면 그 땅이 망한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합니까? 오늘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여러 모로 의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기에 걸려든 것이 바로 안식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시비가 될 것을 다 아시면서도 안식일에 계속하여 병을 고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그 뜨거운 정열과 사랑하심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절의 '송사하려'라는 말은 원문에서 '엿보다'의 뜻입니다. '파레테룬'-못된 의도를 가지고 올무에 걸려들기만을 예의(銳意) 관찰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일에 대해서는 대충 보아 넘어갑시다. 걸고 넘어가겠다는 듯이 눈에 쌍심지를 돋우고 볼 것이 아닙니다.

저들은 예수를 핍박하고 송사하기 위하여 행동이나 말씀 하나, 하나를 자세히 관찰했습니다. 나쁜 마음으로 들여다본 것입니다. 범죄 하도록 조건을 만들어놓고는 편견이라는 거울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동정과 이해는 없습니다. 오로지 예수님이 올무에 걸려들기만을 바라는 악의뿐입니다.

그러던 차에 안식일에 회당에 가니 한 손 마른 사람이 있습니다. 저들은 옳다구나 싶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을 보고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잘 걸려들었다'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상대로 예수님은 그 사람을 고쳐주십니다. 그들은 이 일을 기화로 삼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오른손이 말랐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교부 제롬은 이 사람이 본디 석수장이였다고 말합니다. 오른손을 사용하여 먹고살던 사람인데 그 손이 말라버렸다는 것입니다. 병신이 되어 생계가 어렵게 된 이 사람을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어 고쳐주신 것이라고 전설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문제로 여러 번 충돌하십니다. 그때, 그때 대답하신 말씀을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해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주 중대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로 지나가다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일이 있습니다. 이를 바리새인들이 문제삼습니다.

안식일에 타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12 : 34)." 예외가 있습니다. 악의로 한 일이 아닙니다. 먹어서는 안될 것이지만 먹지 않으면 굶어죽을 지경입니다. 그 지경이기에 제사장들이나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 가운데 예외가 있음을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형식적으로 지킬 것이 아니라 동기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둘째로, 안식일에도 제사장들은 일을 합니다. 교회에서 교인들에게는 안식일을 가족과 함께 편히 쉬라고 합니다마는 목사들은 하루종일 일을 해야 합니다. 이렇듯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난 지 8일 된 아이들에게 할례도 베풀어야 합니다. 제사장들은 안식일에도 일을 한다, 곧 예외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셋째로, 호세아 6장의 말씀을 거론하여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仁愛)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비로운 마음이지 제사 같은 형식적인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넷째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예수님께서 대답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신 것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법입니다. 억지로 율법을 지켜서는 안됩니다.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살인하지 말라-누구를 위해 지켜야 합니까?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누구를 위해 지켜야 할 법입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합니다. 이 모든 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법입니다. 벌받을까봐 지키고 저주받을까봐 억지로 지키는 것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왜 하나님을 나쁘게 만들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감사함으로 지켜야 할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나오는 일도 그렇습니다. 주일을 주시고, 교회를 주시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는 은혜를 베푸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얼마나 좋습니까? '주일날이니 갈 데도 못 가고 할 일도 못하는구나'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안 하자니 욕들을 것 같고 하자니 마음에 걸리고…… 그래서 늘상 늦게 오거나 하곤 합니다. 망설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십니다. 가장 중요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시니 당신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엄청난 말씀입니다.

이 문제가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 하시는 말씀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안식일은 천국의 예표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법의 결정체입니다. 은혜의 근본입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며 말씀을 듣고 강의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은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온 예배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려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주인인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그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실 때에 충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저들의 의도를 아시면 서도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이 자세를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이 손 마른 사람을 고치기만 해봐라. 안식일을 범한 것이니 당장 끌어다가 돌로 쳐죽여야 한다'하고 잔뜩 벼르고 있는 저들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시고도 병을 고쳐 주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은 안식일이니 내일 보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굳이 충돌할 필요가 없지 않겠느냐 하고 뒤로 물러서기가 쉽겠습니다마는 예수님은 절대 양보하지 않으셨습니다. 한치의 양보도 없습니다. "한가운데 일어서라." 안식일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손 마른 자를 세워놓고 저들에게 공개적으로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스스로 판단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담대하신 분입니다. 그때 저들은 잠잠했다고 합니다. 당연히 할말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저들의 입을 막아놓고 저들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을 내밀라" 하시자 그 사람, 손을 쑥 내밉니다. 마른손이 회복됩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더욱 완악해졌습니다.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 이미 완악해진 줄 아셨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핍박과 고난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구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이 뜨겁고 간절한 마음, 이 엄청난 용기를 마음에 새깁시다. 우리에게는 타협이 너무 많습니다. 남의 눈치를 많이 봅니다.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이요 불신앙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에 한치의 양보도 없으십니다. 이 일로 당장 돌에 맞아죽을지언정 양보하지 않으십니다. 당장 이 일부터 해야 하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핍박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결국 십자가에 돌아가셔야 했습니다마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은 선한 일을 하면서 얼마나 용기 있게 나아가 보았습니까? 진정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까? 나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 그분만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뒤로 재고 앞으로 재고 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14 : 38)"입니다. 해놓은 일없이 그러구러 세월만 가버린 것입니다. "한가운데 일어서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네 손을 내밀라"-예수님의 이 귀한 말씀과 용기를 깊이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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