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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료 18,185편 ◑/곽선희목사 1,910편

핍박받는 자(마 5:10~12)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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핍박받는 자(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제 팔복 중에 제일 마지막 복을 공부하겠습니다. 그 동안 공부한 팔복을 되돌아보면 첫째부터 셋째까지가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었고, 넷째부터 일곱째까지가 이웃에 대한 것이며, 오늘 여덟 번째 복은 원수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좋은 이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이웃과 함께 어울려 살게 됩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칭찬 받고 지지만 받을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든지 원수는 있습니다. 유명한 성악가 마리안 앤드슨은 한 세기에 한 사람 정도 있을까 하는 귀한 재능인입니다. 그러나, 그가 맨 처음 독창회를 가졌을 때 신문사 및 여러 평론가들은 갖은 혹평을 늘어놓았고 심지어는 그의 음성이 소프라노냐 앨토냐 베이스냐 할 정도로 모욕감을 주었습니다. 이상하리 만치 어느 누구도 그가 잘 불렀다는 평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 평가에 앤드슨은 다시는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통곡을 하며 포기하려 했습니다. 이 때 그의 어머니는 "너는 어찌하여 모든 사람에게 칭찬 받기를 원하느냐 그 평가를 내린 사람들이 도대체 몇 사람이냐. 그외 많은 사람들이 네 노래를 좋아하고 있단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으려고 한다는 것은 큰 교만이야"하며 용기를 주고 달래었습니다. 어머님의 말씀에 다시 힘을 얻어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세계적인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누구에게나 칭찬 받겠다고 하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이런 교만이 어디 있습니까? 필자는 교역자적인 입장에서 한 가지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에(젊은 패기만 넘쳐 철이 없어서) "내가 앞으로 목사 되어 목회를 하면 성도 중에 한 사람만 반대해도 사표 내겠다"고 말해왔습니다. 후에 나이가 들고 철이 나서 생각하니 그것처럼 교만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데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겠다는 것입니까? 회개하고 그리고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다수가 반대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칭찬만 받고 지지만 얻겠다는 것입니까? 오만불손하기 짝이 없는 태도입니다. 나쁜 소리도 반드시 필요합니다. 어디에나 원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나쁜 소리를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원수가 없기를 바라지는 맙시다. 예수님은 좀 가혹하게 말씀하시기를 "원수가 네 집안 식구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사랑하지 않는 자가 원수 됩니까? 관심을 두고 위하고 사랑하다보니, 서로 섭섭하고 마음이 상해서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관심 없는 사람은 나를 미워해도 문제되지 않습니다. 극진히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 만큼 미워지고 원수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세상에는 부득불 나를 이해하는 자도 있고 이해하지 못하는 자도 있으며 내 사랑을 받아주는 자도 있고 내 사랑을 배신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원수가 없기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원수로 인해 내가 손해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자의 소행입니다. 그가 나를 미워한다고 내가 그를 미워할 권리는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워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손해입니다. 그가 나를 미워한다고 나도 그를 미워하면 내 마음은 그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마음을 빼앗겨도 아쉬운데, 원수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정말 억울한 일입니다. 왜 그런 바보가 스스로 되어야 합니까? 혹시 나쁜 말을 들어도 그 말을 잘 잊어버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잊어버릴 수 없다면 건강하게 살기는 틀린 것입니다. 나쁜 말로 인해 속상해서 밥도 먹지 못하고 잠도 자지 못한다면 누가 손해입니까? 원수에 대해서는 로마서 12장에 있는 말씀처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서, 나는 나의 일만 하면 됩니다. 나의 일이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그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의 주위에는 내가 사랑할 자와 불쌍히 여길 자만 존재하게 됩니다. 누구에게도 미워할 권리는 없습니다.

다만 사랑할 뿐이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은 불쌍히 여기면 됩니다. 그외 다른 원리는 없습니다. 핍박하는 자에 대해서도 할 일이 있다면 불쌍히 여기고 기도할 것뿐입니다.

이 본문은 핍박하는 자에 대해서는 일단 잊어버리고, 핍박을 받는 입장에다 초점을 두어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핍박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실감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역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령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등 모두가 역설적인 진리입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이 본래 역설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기뻐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대해서는 적어도 외인이라야 참된 교인일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기뻐하는 대로 같이 기뻐하고, 그들이 슬퍼한다고 같이 슬퍼한다면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들이 기뻐할 때에 슬퍼하고, 그들이 슬퍼할 때에 기뻐할 수 있는 멋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들은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따르는 유행에 똑같이 아니, 먼저 나서고 그들이 좋아하는 부귀안일을 함께 누리며, 그들이 땅 치고 울 때 함께 울지는 않습니까? 기독교는 처음부터 역설적입니다.

오늘 본문의 뜻은 세상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는 것과 내가 복되다고 하는 것은 하나란 의미입니다. 얼마나 역설적인 진리입니까? 디모데후서 3 : 12에 보면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받도록 되어있는 세상입니다. 아니 핍박 없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입니다. 죽은 자에게 핍박이 있습니까? 문제는 살아있기 때문에 핍박을 당하고, 의롭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소가 없으니 외양간이 깨끗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소가 없는데 외양간이 더러워질 이유가 있습니까? 이와 같이 가정에서나, 동네에서나 교회등 어디서나 일을 하는 자에게 비난이 있습니다. 좋은 소리만 들으려고 한다면 아예 일을 시작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진리가 핍박을 받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큰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적당히 살려는 사람에게는 핍박이 없지만 거슬려 올라가는 사람에게는 핍박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진실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핍박이 있습니까? 요한일서 3 :12에 보면 "가인같이 하지 말라, 저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찐 연고로 죽였느뇨,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니라" 가인이 동생을 죽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도 받지 않으셨다면 그런대로 형제간의 의는 좋았을지도 모릅니다. 나도 죄인이지만 너도 죄인이면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생 아벨은 의인으로 그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으니, 가인은 죄인임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질투가 생기고 핍박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예배시간에 지각하신 분의 심리상태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좀더 서둘렀으면 좋았겠지만 어쨋든 5분 정도 늦어서 맨 뒷좌석에 고개 숙이고 앉습니다. 미안하고 후회되는 마음으로 다음부터는 좀더 일찍 오리라고 결심을 합니다. 그러던 중에 나보다 더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도 늦었지만 더 늦은 사람도 있구나"하고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이 왠지 반갑습니다. 혹시 늦은 분이 장로님이나 권사님이면 더욱 반갑고 어느새 자기 지각은 "그래도 괜찮다"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이 심리를 조금 비약하면, 악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악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악한데 한 사람이라도 선한 사람이 있다면 그 악이 분명해지니까요. 그래서, 악은 반드시 선을 질투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거짓투성이라면, "인간이란 그런 것이다"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한 사람이 진실하면 어찌합니까? 내가 실패하면 모두가 실패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못한다고 제쳐 두었던 일을 한 사람이 하겠다고 열심을 내면, 못하겠다고 말한 사람들은 어떻게 됩니까? 게으른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래서 게으른 사람이 부지런한 사람을 질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은 핍박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거짓된 자가 진실한 자를 핍박하고, 악한자가 선한 자를 핍박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핍박을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하는 자"라고 핍박의 종류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과연 내가 당하는 핍박의 종류는 어떤 것입니까? 핍박이라고 해서 모두가 좋은 핍박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핍박을 당할 때마다 핍박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가끔 나의 잘못으로 인해서 어렵게 고통 당하는 것을 십자가 진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말입니다. 나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은 십자가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까? 베드로전서 2 : 18이하에 보면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으로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벧전 2 : 18-20), 선한 주인은 물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복하여 애매한 고난을 받고 이것을 참으면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서 당하는 고난은 의미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6에서도 이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도적질한 자나 살인한 자가 핍박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악을 행해서 고난 당하는 것, 그 고난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한 괜히 남의 일에 참견을 해서 고난을 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남의 일에 간섭을 해서 욕을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핍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서양사람들은 이 점에 대해서는 상당히 분명합니다. "내 일이 아니다" (It's not my job)라고 할 때는 간단하게 돌아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은 너무 인정이 많아 오다가다 남의 일에 참견하여, 하지 않아야 할 말을 해서 구설수에 오르고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지금까지 생각해 온 고난을 정리하면 세 가지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첫째는 내가 죄를 짓고 나의 잘못 때문에 당하는 고난으로, 이것은 의미가 없는 고난입니다. 둘째는 애매하게 당하는 고난입니다. 나는 분명히 불조심을 했는데, 이웃집에서 불조심을 못해 내 집이 불탔습니다. 이것은 정말 애매하지 않습니까? 나는 운전을 똑바로 잘했는데 옆사람이 한눈을 팔다가 내 차를 받았습니다. 이것 역시 애매한 사고로 세상에는 이런 일이 허다합니다. 나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연쇄적으로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럴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이미 베드로전서에서 본대로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은혜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까? 셋째는 진짜 고난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0-21) 진짜 고난이 어떤 것인가를 확실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고난은 자원적이며, 선택적이며, 사랑함으로 당하는 것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입니다. 부득이 당한 고난은 의미가 없으나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를 위하여 선택하는 그 고난, 그 핍박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면, 핍박당하는 자에게 어떤 복이 주어집니까? 첫째, 심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악한 사람으로부터 핍박을 당한다는 것은 바로 내가 의롭다고 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나의 의로움이 핍박을 통해 나타내어진다는 말입니다. 만일, 악한 사람이 나에게 와서 친구라고 한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영락없이 나도 악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핍박을 받지 않는다면 나도 악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거짓된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과 그대로 친할 수 있다면 나 역시 거짓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악한 사람과 거짓된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받는다는 사실은 내가 진실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로부터 당연히 핍박을 받아야, 나는 진실 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 대립되어 있으므로 만일 핍박이 없다면 나와 죄는 하나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 : 18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핍박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핍박이 바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증거 해주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핍박을 당함으로 우리는 악으로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악과 타협하면 악에 빠집니다. 그러나, 핍박을 당하면 나는 점점 강해집니다. 바꾸어 표현해서, 악으로부터 도전을 받으면 나는 정말 의로와 진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때로 울적해서 그저 막연하게 눈물을 흘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 누군가가 옆에 와서 왜 우느냐고 하면, 여기서부터 울어야 할 이유가 생각이 납니다. 또한 어떤 사건에 대해서도 별 생각 없이 옳다 그르다고 말했는데, 누군가가 와서 도전을 하면, 그때부터 내가 한 말에 대해 옳다고 증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본래부터 준비된 이야기가 아니고 도전을 받으면, 그 때부터 점점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이런 도전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나를 악하다고 하면, 나는 선하다고 열심히 증거 하는 것입니다. 믿음에서도 이와 같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시원찮게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누군가가 하나님이 없다 라고 말하면 그때부터 그는 열심히 하나님의 실존을 설명합니다. 아는 것을 총동원해서 증거 하다가, 문득 내가 이렇게 예수를 잘 믿는 줄을 미처 몰랐다고 놀라기도 합니다. 아마 이런 경험들은 한두 번씩 겪었으리라 믿습니다. 도전을 받아야 강해지고 생각도 정리되며 보다 확실하게 됩니다.

필자가 열여덟살 때 쯤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었습니다.

얼마나 극성을 부렸는지 핍박을 많이 받아, 감옥에 끌려가서 매도 맞고 광산까지도 끌려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생각해 보면 반드시 신앙만 가지고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것 같지 않습니다. 한창 나이에 교회가지 말라고 붙드니 더 부지런히 갔고, 예수 믿지 말라니 더 믿고 싶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른 고백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이 보기에는 신앙심이 대단해서 거의 순교적인 것으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도 신앙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확실해집니다. 저들이 계속 핍박하니 상대적으로 더욱 강해졌단 말입니다. 또한 제가 신학대학 다닐 때에 같이 공부한 사람 중에서 곽씨의 성을 가진 분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기를 자기는 앞으로 목사가 되면, 아내 때문에 큰 일이라고 늘 걱정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결혼 초에는 자기가 방탕하여 아내가 눈물로써 늘 기도하여 이제 아내 덕분으로 신학까지 하게 되었는데, 막상 전도사가 되고 나니, 이제는 반대로 아내가 교회를 잘 안나간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핍박을 할 때는 기를 쓰고 교회를 다니더니 지금은 밤 예배는 거의 안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성도들에게는 핍박이 좀 필요하기도 합니다. 그래야 의가 구체화되고 정리되고 강해지니까요.

셋째로, 핍박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복이 있습니다. 핍박이 없으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가 없습니다. 시험이 없다면 우등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시험을 보아야만 우등생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핍박이 있어야 의가 얼마나 귀하며 믿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가 노출이 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하여, 심지어는 순교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순교사에서도 보지만 그 많은 순교자들이 얼마나 큰 영광을 돌렸습니까? 핍박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그런고로 핍박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본문은 핍박이 어떤 성격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태 5:11-12) 핍박은 첫째,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핍박이라야 하며, 둘째는 "거짓으로", 즉 내 잘못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모략하여 당하는 핍박이라야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역설적인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까? 첫째,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이래저래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죽게 되어 있는데, 이왕이면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수 있으면 얼마나 귀한 죽음이겠습니까? 필자는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마지막에 생명이 오락가락 할 때에 거의 다 죽은 상태에서 오직 주사로 얼마간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봅니다. 때로는 죽지 않겠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어느 목사님은 일단 돌아가셨는데 다시 잠깐 의식이 회복되었습니다. 눈을 떠서보니 자기 팔에 피 주사가 꽂혀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 당시는 625직후라 피가 병원마다 부족할 때였습니다. 목사님은 젊은 사람들이 지금 피가 없어서 죽어 가는 지경인데 왜 나같이 다 죽은 사람에게 피주사를 놓느냐고 호령을 하시며 주사바늘을 빼게 하여 주사를 빼자마자 바로 돌아가셨습니다. 얼마나 훌륭하신 어른이십니까? 한 번 죽는 죽음을 정말 잘 죽어야 합니다. 깨끗하고 보람되게 죽을 수 있도록 늘 간구해야 합니다. 어차피 당하는 고난이고 죽음이라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과 그리스도를 위한 죽음으로, 내가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둘째로 즐거워해야 할 일은, 이 고난 다음에 오는 상급이 크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 받을 상이 있습니다. 그 상급을 생각하며 지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핍박을 당하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기회요, 믿음의 실력을 기를 때이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순교자의 대열에 동참하는 영광이 있으므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전에 있던 너희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으니 지금 너희가 핍박당하는 것은 순교자의 틈에 끼이는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소속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내가 좀 희생하고 손해보았는데,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구속사역에 동참했다면 얼마나 즐겁고 영광된 일입니까? 흔히 교회를 건축할 때에 무리해서 헌금을 하는 사람과 또한 조금 여유 있는 돈을 바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다 완성되어 아름답게 지어진 다음, 출입할 때마다 느끼는 바는 서로 다릅니다. 무리하게 애를 쓰신 분은 정말 감격하고 감사하게 되지만 성의 없이 바친 분은 부끄럽게 됩니다. 사실 이 창피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을 미리 생각해 보세요. 이 거룩한 수고에 동참하고 순교자의 반열에 끼인다는 것은 큰 기쁨이요, 영광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읽다보면, 이 복음은 순교할 사람들을 위해 격려하는 말씀입니다. 필자가 3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이 계시록을 가르쳤는데, 여기서 느끼는 것은 순교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 설 때 대단히 부끄러울 것 같은 생각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순교자만 높이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일이라도 의를 위하여 욕을 먹고, 의를 위하여 손해보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당한다면, 비록 순교자는 못된다 해도 그 대열에 소속은 될 것입니다. 이 거룩한 자리에 동참하는 이 기쁨, 이 영광을 느낄 수 있어야 진실로 신앙의 사람입니다. 로마서 8:18"그런고로 앞에 받을 영광과 현재 받는 고난은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정말 비교가 안 되는 일입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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