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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로마서 5:12-2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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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아담과 둘째 아담(로마서 5:12-21)

 

우리는 예수님께서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나니"(13:34)라고 할 정도의 많은 비유들을 복음서를 통하여 대할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의미 전달 방법은 사도들에게도 발견되어지는 현상인바 특별히 신약성서 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 나타나고 있는 사도 바울이 사용한 비유들을 찾아 그 뜻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 사람들이 교육을 함에 있어서 어떤 내용을 전달하거나, 진리를 설명하는 방법에는 몇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나 내용을 결코 추상적이거나, 신화적인 방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실생활 속의 구체적인 사건이나 가능한의 경험을 들어서 설명하고자 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방법을 두고 우리는 상징적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본래적인 사건은 사건 자체대로, 진리는 진리 자체대로 있는 가운데 어떤 실제적인 한 사건을 예로 들어 크고도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보다 확실하고 가깝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 조심할 것은 말씀이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좋은 일이나, 자칫 잘못하면 그 사건의 비유됨을 잊어버리고, 비유로 등장된 사건 자체의 의미에 매여 들어갈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되면 크고 영원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한 작은 예 안에 큰 진리가 갇히고 마는 결과가 되므로 이는 매우 위험한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요, 상징은 어디까지나 상징일 뿐이라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진리를 설명하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는 이 세상의 순간적인 그 무엇을 들어 말씀하게 될 때 진리가 그것으로 전부인 줄 알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사건으로서의 한 비유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각은 비유는 비유로만 생각하는 가운데 기 비유가 가르쳐 주는 그 영원한 진리의 세계로 우리의 관심과 생각을 높여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사도 바울의 비유를 생각하게 될 때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도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는 달리 실 생활 속의 사건보다는 구약적인 맥락을 들어서 설명하려는 의도가 강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는 실생활 속의 사건을 예로 드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주로 구약의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은 바울일 뿐 그는 그리스도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언제나 자신을 한 계단 낮춘 자리에서 성서적 근거를 통하여 설명해야 하는 입장에 있었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도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구약 성서는 하나의 계시적인 역사요, 상징적인 역사인 것이며, 그리고 그 역사성을 통하여 오늘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은 하나의 그림자요, 예수는 그 실체이며, 구약은 예언과 약속이 있었고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그 예언과 약속이 성취된 사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언제나 그 약속과 성취의 관계를 두고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 구체적인 예로서 사도 바울은 특별히 창세기 156절에 기록된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하는 말씀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가 기록한 모든 서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계속 모세나 선지자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율법을 앞세우려 하므로 그 보다 훨씬 이전에 있었던 아브라함을 들추어 모세나 율법이 있기 전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으며, 또한 그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을 약속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어쩌자고 아직도 모세와 율법을 앞세우려 하느냐는 것이 사도 바울의 논법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위한 것임을 역설하고 있습니다(4:23). 뿐만 아니라 출애굽기나 민수기 등에 나타난 사건들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경고임을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0:10).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주제가 되고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인정받게 된다는 이 진리에 대한 설명도 결코 독창적인 것으로 말하려 하지 않고, 구약 성서로 돌아가 아브라함에서부터 그 맥락을 찾아내어 역사적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도 하나의 거울로 보면서 이를 구원론적으로, 교회론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사성으로 이해했다는 점입니다. 예수를 볼 때 능력이 많으신 분, 혹은 모든 병을 고치시는 분, 지혜가 많으신 분, 죄인과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신 분 등 다른 여러 말로도 설명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속죄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 앞에 제물로 바쳐졌다.'고 하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레위기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그렇게 복잡한 죄상과 그에 따르는 제사법이 다르고, 특별히 죄를 지였다면 죄를 지은 본인이 그때마다 회개를 하고 해당 제물을 마련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 당연한데 어떻게 예수 한 분이 한번 죽은 것으로 그 효능이 계속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는 질문을 낳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제사란 사건마다, 회개할 때마다 그 종류도, 형식도 다르게 진행됩니다. 그러니까, 제사를 드릴 때에 이것은 누가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무슨 제사를 드린다는 것이 하나하나 다르게 정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아버지의 무슨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요, 이것은 어머니의 어떤 죄 때문에 드리는 제사며, 또한 이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라는 것이 세세하게 구분되어 집니다. 더욱이 대제사장까지도 자기를 위한 제사를 먼저 드리고 난 후에 백성을 위한 제사를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구약의 제사법은 사람마다, 사건마다를 위해서 드려야 했으며, 그 결과 제사는 매일 끊임없이 반복되어졌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은 매일 드리는 제사 외에 일 년에 한 번씩 백성들을 위한 속죄의 제사를 특별히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비추어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한번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사건이 어떻게 모든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더욱 궁금한 것은 내가 나기도 전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는데 어떻게 그 제사가 나의 죄를 사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을 직접 뵈옵고 죄를 고백한 후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제사를 드린 것이라면 그것은 맞는 이치입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을 만난 일도 없이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예수가 어떻게 오늘의 내 죄까지, 아니 온 인류의 죄를 단번에 다 사할 수가 있으냐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죽어 주신 한 번의 십자가 사건으로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사하신다고 하는 이 복음 자체가 만족한 구원이 교리로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기는 믿지만 그 예수만 믿어 가지고는 아무래도 구원이 될 것 같지가 않으니, 율법도 좀 지키는 것이 안전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에서는 두 가지를 다해 나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는 예수대로 믿고, 율법은 율법대로 지켜야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그에 대한 해답을 주고자 합니다. 이 본문의 내용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지 순수한 인간적인 판단으로 이 본문의 내용을 보는 학자들 가운데에는 역시 사도 바울은 종교적인 천재였다며 감탄해 하기도 합니다. 그 내용이란 아담을 예로 들어서 제 1아담과 제 2의 아담을 비교 설명해 나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죄와 죽음이 미치게 된 것처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이 또한 온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14절 말씀에 보면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표상이라는 말을 헬라 원어로 '투포스' 라고 하며 그 뜻은 타입(type)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담은 앞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아담이 아담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담을 오실 자의 표상이다라는 전제를 해 놓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제사로서 모른 사람을 속죄하고, 구속하는 일이 충분하다는 사실을 설명해 나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설명함에 있어서 유감스럽게도 좋은 예를 들지 못하고 부득불 좋지 못한 예를 들어 설명하게 됩니다. 이러한 경우는 예수님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으로 누룩과 같다는 것이나,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난 이야기 같은 것이 그 예라 하겠습니다. 이는 좋지 못한 사건이나 내용을 통하여 밝은 면의 진리를 설명하려는데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문제를 두고 생각할 때, 이에 대한 좋은 예를 찾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 말하자면 훌륭한 한 학생이 있어서 많은 다른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는 이야기는 아무리 찾으려 하여도 찾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어떤 못된 사람 하나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간단하게 설명이 되어지고 또한 그 예도 얼마든지 찾을 수가 있습니다. 쉬운 예로서 한 사람의 부주의한 실수가 온 도시를 불태우게 되고 거대한 임야를 불사르게 하는 것이나, 한 사람의 전염병 보균자로 인해 많은 사람이 병을 앓게 되는 것, 그리고 속된 유행어들이 삽시간에 퍼져 나가는 것들이 그 예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상도 그리하여 온 세계의 두 문제아라고 하는 칼 막스와 프로이드가 끼친 영향으로 칼 막스에 의해서는 온 세계가 머리를 앓고 있는 공산주의가 생기게되었으며, 프로이드에 의해서는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성에다 귀착시키고마는 극단적인 경향의 사상을 낳게 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한사람의 사상, 한 사람의 악한 영향이 온 세계를 흔들어 놓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인하여 되어지는 사건도 문제 될 것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속에서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함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말하기 위하여 아담을 들어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그러면,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이 무엇인가 할 때, 그 첫 번째는 한 사람으로 부터 시작되어진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온 인류 전체에게 영향을 준 것, 그리고 세 번째는 영향만 끼친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양상이나 결과는 정반대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범죄하므로 모든 인류는 그 안에서 다같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의를 행하심으로 온 인류는 의롭다함을 얻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조심해야 될 것이 있으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유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온 인류가 죄에 빠졌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모든 인류가 자동적으로 의인이 되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만인 득구설과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리학적이거나 유전학적인 이야기가 아닌 비유로서의 한 예를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아담의 비유는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설명하는 것뿐 절대적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자동 케이스이며, 상당한 면에서 유전적인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자동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해 예수와 연합된 자에게만 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실생활 속을 들추어보아도 아담의 후예로, 아담처럼 사는 것은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쉬우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는 것은 계속 채찍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농사일을 하면서 보아도 잡초는 심지 않아도 잘 나서 거름을 주지 않아도 또한 잘 자랍니다. 그러나, 좋은 곡식은 잘 나지도 않거니와 잘 자라 주지도 않으므로 부지런히 가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한번은 2년 동안 월남에 가서 일하다가 오신 장로님을 환영하는 파티석상에서 그 장로님에게 "월남말이 어떤 것인지 월남말로 몇 말씀 해 보십시오"하고 부탁을 드렸더니 이 장로님께서 뒤통수를 긁적거리며 하시는 말씀이 "쌍소리 몇 마디 밖에 모르는데요."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못된 말은 배우지 않아도 잘 배워지고 기억도 잘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만약 팝송을 하는 것처럼 영어 단어를 외운다면, 잠깐이면 영어에 능통한 실력자들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좋은 말씀, 좋은 습관을 알기도, 익히기도, 그리고 지키기도 힘이 드는 것이란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르며 그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연적이거나 자동적이 아닌 것으로 오직 말씀과 성령의 강한 역사에 의해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담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든 사람이 죄의 왕노릇함에 속박됩니다. 그 결과 죄를 한번 짓고 나면 죄가 주장하여 회개하지 않는 한 그 죄가 주장하는 세계에 살게 됩니다. 죄가 왕 노릇하는 세계! 여기에서는 내 양심, 내 진리, 나의 가냘픈 의지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철저히 율법 안에 속박되고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하는 이 무서운 세계가 바로 아담이 우리에게 물려준 세계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서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을 때에 왕노릇 하던 죄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아담이 물려준 것은 사람으로 모두들 그 사망이 주장하는 공포의 그늘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옥이 있는지 없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양심은 알고 영혼은 알고 있는 것이기에, 지옥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틀림없이 지옥에 가겠으니 죽음이 두려운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죽음 자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죽은 이후의 형벌이 두려운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죄와 사망의 종노릇을 하면서 어두운 그늘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해방시켜 생명과 영생의 세계로 옮겨 놓으심으로 우리는 영생을 약속 받은 생명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아담이 물려준 것에는 불순종과 불순종으로 인해 얻어지는 죄악적인 쾌락이 있어서 오늘도 믿음 안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불순종해야만 자기의 정체가 드러나고 살아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렇게 행동하는 것을 봅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을 두고 보아도"이렇게 하라."고 하면 ""하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하라고 하면 하지 않고 하지 말라면 하는 아이가 있으니 이것이 곧 아담의 후예인 것입니다.

에덴 동산의 그 많은 과일 중에 왜 하필이면 먹지 말라고 하신 그 과일을 기어이 따먹고는 말썽이냐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지 말라는 짓만을 하면서 거기에서 쾌감을 느끼는 이것이 아담의 후손된 증거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짓고도 잘못 된 줄 모르고 변명하고 핑계하는 것이 또한 아담의 기질입니다. 언제는 자기의 배필인 여자를 만들어 주시자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며 미칠 듯이 좋아하더니 죄를 짓고 나서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며 그 책임을 여자에게 전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먹으라며 전하더라도 먹지 않았으면 그만일 것을 왜 먹어놓고 야단이며, 그 책임은 또 왜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느냐는 말입니다. 이처럼 잘못은 자기가 저질라 놓고 책임은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이런 것들이 회개하지 않는 자의 지혜이며, 아담의 지혜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회개하지 않으려고 이모저모로 변명하고,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키면서 자기는 빠지려고 하는 이런 마음들은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뿌리깊은 저주받은 마음들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명하고 있는 도안은 진실을 잃어버리는 것이며, 회개를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때에는 순종 안에서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그리하여 순종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복종을 행복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일을 하지 않음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일을 함으로 행복하고, 위하여 희생을 하게되는 거기에서도 기쁨을 얻는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바의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다시 말하지만 아담은 우리에게 죽음을 물려주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을 주셨습니다. 여기에서는 결과와는 상관없이 양자 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꼭 같은 처지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예수 한 분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며 묻는다면, 아담으로 인한 영향과 그 결과를 보면 알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어 사망으로 이끄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의 말씀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쳐 다시금 생명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매우 강하게 강조합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들어왔으며,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지고,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지배하에서 종노릇을 하다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같이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많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죄가 많다하더라도 그 보다 더 큰 것은 은혜라는 말입니다. 이는 아담이 우리에게 물려준 타락성이 심히 악하고 추하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 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두려워할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아담의 후예된 것을 탓하거나, 잘못된 자신의 본성을 자학하며 걱정하지 말 것입니다.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쳐다보십시오. 거기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그로 인한 능력을 힘입어 그의 자유, 그의 기쁨, 그의 구원, 그의 영생에 이른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고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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