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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서로 지라(6장 1~5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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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서로 지라(615)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인간은 언제나 세 가지의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요, 둘째는 나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셋째는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사람은 모름지기 이 세 가지의 관계에서, 그 상황 안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습니다. 날 때부터 혼자가 아닙니다. 일생을 통하여 줄곧 이웃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을 다 이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나와 하나님과의 직선적인 관계가 가장 우선적입니다. 그 다음이 나 자신의 성실성입니다. 다시 우리는 성도의 교제라 하여 성도로서의 이웃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갑니다.

성도와의 관계에는 좋은 교우 관계도 있지만, 때때로 우리를 시험에 빠뜨리게 해서 문제가 되는 관계도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바로 되면 참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서로서로 격려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고, 혹 내가 넘어지거나 나약해질 때에 나를 일으켜 세우기도 합니다. 나를 위로해서 힘을 주기도 하며, 나태해지려고 할 때에 의욕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성도의 교제가 지닌 힘입니다. 우리 교회에 이런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열심히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분들인데 한 분이 차를 몰고 나오면서 중간 중간에서 한 사람씩 여러 명을 함께 태워 가지고 교회로 온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면 서로 격려가 됩니다. 어쩌다 꾀가 나서 하루 빠지고 싶어도 어느 한사람 그럴 수 없게 됩니다. 서로가 자신에게 책임을 지게 되어 다같이 나올 수밖에 없어집니다. 차를 가진 분은 피곤해서 일어나기 싫을 때가 있지만 이 새벽에도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을 교우를 생각하고는 피곤을 이기고 일어납니다. 차를 함께 타고 다니는 교우도 그렇습니다. 차를 몰고 와서 자기가 나오기를 기다릴 텐데 어찌 그냥 누워서 쉴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 약해지려고 할 때에 서로 격려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래서 다함께 개근을 합니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관계 때문에 시험에 빠집니다. 실은 넘어질 만한 게 아니었는데 잘못된 교우를 알고 나서는 그만 넘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교우가 나에게 힘이 되지 못하고 격려가 되지 못합니다. 차라리 몰랐던 것이 좋을 뻔했습니다. 그 교우와 사귀었기 때문에 내 신앙도 잘못되고 교회관도 잘못 정립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 전반적으로 병들고 말았습니다. 마음까지 황폐해지는 등 전혀 내게 도움이 안됩니다. 알아야 할 것은 반드시 알아야 하지만 몰라도 될 것은 차라리 모르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쓸데없이 많이 알아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만날수록 좋은 관계로 발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신앙생활이나 교회나 모두 '광야교회'입니다. 광야교회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우는 상당한 수준의 성화를 이루고 있는가 하면 어떤 교우는 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신앙의 토대가 처음부터 잘 잡힌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작부터 잘못된 사람이 있습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비교해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자마자 열심으로 교회에 나옵니다. 주일과 삼일저녁, 새벽기도에도 매일 빠지지 않고 나옵니다. 시간, 시간 틈나는 대로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주일조차 소홀히 합니다. 이제 시작인데 그렇게까지 열심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일주일에 한번 나가면 충분하고 다른 일로 바쁘면 그마저 그만둡니다. 자기를 인도한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를 믿으면서 우상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사주도 택일도 하지 않고 깨끗하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꽤 오래 믿은 사람이 자녀들 혼사 때면 궁합을 보고 사주팔자를 점치고 날을 받습니다. 그런 사람하고 교제하면서 예수를 믿게 되면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오리엔테이션이 잘못되었습니다. 어디서 배우느냐, 누구에게서 배우느냐가 중요합니다. 먼저 믿은 사람, 그 이웃을 잘못 만나서 문제가 된 것입니다. 좋은 모델을 만났어야 되는데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참 그리스도인을 만나야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나에게 다 좋을 수는 없습니다. 좋기를 바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분처럼 되어봤으면' '세상에 저런 분이 계시구나' '죄많은 세상에 복 주시는 것은 저런 분 때문일 거야'-이런 생각이 드는 사람을 한사람이라도 만났으면 나에게는 복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를 존경하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을 닮아갑니다. 그런데 모처럼 가까이서 만난 사람이 삐딱한 사람이었다고 하면 망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일생의 신앙생활이 통째로 잘못됩니다.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교인이라고 하여 다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다 완전할 수도 없거니와 이제 그 도상에 서 있는 상태입니다. 조금 먼저 출발한 사람, 그 뒤에 선 사람, 막 시작한 사람-여러 형태의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학교공부로 말할 것 같으면 유치원생에서 대학생, 대학원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학생들이 모여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심지어 아직까지 유치원에도 입학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교인 중에는 이렇듯 다양한 수준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럴진대 내가 만난 한 사람에 의해서 기독교인 전체를 비판할 수 있습니까?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튼 이로 인하여 내가 시험에 들 수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어도 신앙의 형태나 스타일은 다를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식으로, 저사람은 저런 식으로-다 옳은 것이라 해도 방법상에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책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내용입니다. 중세기의 카톨릭 교인들은 두 손바닥을 마주 모으고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을 할 때에 루터교에서는 카톨릭의 기도하는 모습이 싫어서 손을 깍지끼게 했습니다. 카톨릭교와 루터교의 차이는 요만큼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그렇게 하니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가려 합니다. dissimilation-부동화(不同化)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나 저렇게 하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문화 나름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하든 서서 기도하든 그 방법이 크게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저마다의 스타일이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도 이해하고 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요컨대 이러한 여러 문제로 우리가 시험에 들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찍이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19 : 3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중요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그렇다는 말이라기보다도 먼저 된 자는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경우가 많겠다고 예수님께서 이미 경고하셨습니다. 가만히 보면 오래 믿는데 오히려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으로 신앙의 깊고 얕음이 좌우되지 않습니다. 처음 믿는 사람 중에 오히려 더 열심이고 더 진실된 사람이 많습니다. 수십 년 믿어 왔는데도, 그 동안 어떻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형편이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먼저 믿은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경우가 많으리라고 경고하시지 않았습니까? 먼저 된 자의 책임이 참으로 막중합니다. 여러분, 내가 친구를 교회로 처음 인도했을 때에 내 책임은 큽니다. 예배를 끝내고 현관으로 나와 인사를 나눌 때면 가끔 이런 경우를 봅니다. "제 친구인데 오늘 처음 나왔습니다"하면서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 자기 친구를 소개하는 분이 있습니다. "교회가 뭔지도 모르고 나왔습니다"하고 본인도 인사합니다. 그러면 제가 농담 반 진담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인도해온 분만큼만 믿으세요." 제가 이런 말을 하는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인도해온 분이 펄쩍 뜁니다. "안됩니다. 저만큼 믿으면 안되요"-겁이 납니다. 새삼 열심을 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인도해온 친구, 처음 믿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게으르게 믿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먼저 믿은 자는 뒤따르는 자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믿게 되고, 뒤따르는 자는 먼저 믿은 사람 따라가느라고 열심히 믿게 됩니다. 둘 다 열심히 됩니다. 먼저 믿은 자와 나중 믿은 자 사이에 이런 문제가 가끔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3대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이해할 의무가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 동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둘째는 용서하는 의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용서하심과 같이 우리도 남을 용서해야 됩니다. 셋째는 사랑하는 의무입니다.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사랑해야 됩니다. 본문 1절의 "형제들아"라는 말씀은 헬라어로 '아델포이'인데, 이는 형제애를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나도 너도 같은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는 형제다-철저한 형제애를 근거로 하여 권면을 시작하는 대목입니다.

이 권면은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것입니다. 이어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이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먼저 범죄라는 말을 해석해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범죄'의 뜻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은 '하마르티아'입니다. 이는 '과녁이 빗나갔다'는 뜻인데 죄를 말합니다. 그리고 '불법'을 말할 때는 '아노미아'라고 합니다. '하마르티아''아노미아'는 결정적인 죄를 뜻합니다. 범죄행위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쓰인 '범죄'라는 말은 '파라프토마티'입니다. 이 말은 '미끄러져 넘어졌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실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음판 위를 가다가 발을 잘못 디디면 그만 미끄러지지 않습니까? 넘어지고 싶어서 넘어진 것이 아닙니다.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해서 넘어진 것입니다. '파라프토마티'는 그런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고의적이 아닌 과실(過失), 실수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책임 있는 범죄가 되고 말았습니다. 목적은 나빴던 것이 아닙니다. 방법이 잘못되어서 목적까지 잘못되어버렸습니다. 본래의도는 좋았습니다마는 중간에 잘못되어 결과까지 못쓰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동기까지 나빴다고 물을 수밖에 없어졌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범죄란 바로 그런 행위를 가리킵니다. 다음에 이 실수가 '드러나거든'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 '프롤렘프데'라고 하는데 재미있는 말입니다. '현행범'을 뜻합니다. '발각되었다'는 뜻입니다. 숨겨졌다, 누구만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다 드러났다는 말입니다. 확실한 현행을 말합니다. 심증이나 소문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몇 사람만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이럴까 저럴까 생각하고 있고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물적 증거가 있고 이미 폭로된 사실입니다. 이런 경우 교회는 덕을 위해서 드러난 일이 아닐 때에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본인만이 아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으면 다릅니다. 전체에 파급되는 문제는 교회 차원에서 문제로 삼을 수밖에 없어집니다. 숨겨진 사건이 아니요 이미 널리 알려진 사건입니다. 실수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미 교회 안에서 덕스럽지 못한 사건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교회의 실덕이 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대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합시다. 여기서 그것을 이야기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돌아가면서 들추어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조사해서 발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교회는 덕을 위주로 합니다.

누구를 심판하자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정죄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 다 알려져 있는 그 덕스럽지 못한 문제를 교회 전체의 덕을 위해서 취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가, 본문에 보면 네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바로잡으라고 합니다. 헬라어 '카타르티제테'는 탈골이나 위골되었을 때 바로잡아준다, 정골(整骨)한다는 뜻입니다. 교정한다는 것입니다. 교정이지 정죄나 심판이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를 정죄할 권리가 없습니다. 심판할 권리가 없습니다. 심판주는 하나님뿐이십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심판 정죄하러 든다면 이는 곧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는 짓입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심판하려 하면 안됩니다. 정죄나 심판이 아닙니다. 바로 잡으라, 그것도 '온유한 심령으로'라고 바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온유-부드러운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바로잡아라, 교정하라 말씀합니다. 사랑과 긍휼, 덕과 온유를 절대로 잃지 말고 바로 잡으라 합니다.

둘째는, 네 자신을 돌아보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또 시험받을까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접하게 되면 불식간에 그 사건 자체에 말려들어가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남이 잘못한 것만 열심히 생각하고, 그것을 머리에 두고 있어 내 잘못은 까맣게 잊습니다. 남 심판하려다 자기 심판하기를 잊어버립니다.

얼마전 미국에서 온 제 친구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미국에 유명한 내과의사가 있었는데, 유명한 만큼 환자도 많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어느 날 보니 자기 아내가 쿨럭쿨럭 기침을 합니다. 감기려니 싶어 약을 지어먹게 했으나 낫지를 않습니다. 한동안 신경을 쓰지 않고 내버려두었다가 후에 생각이 나서 정밀 진찰을 해봅니다. 폐결핵 3기더랍니다. 이 내과의사, 다른 사람은 곧잘 치료할 줄 알았지만 자기 아내가 중병으로 죽어 가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런 데에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문제나 다른 사람의 문제에 대해서는 열심히 알려 하고 또 알고 있으나 정작 자신의 문제는 모릅니다. 그런고로 본문에서는 다른 사람이 실수하는 것을 보거든 내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차릴 뿐만 아니라 두려워하라고, 매우 강렬한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남 실수하는 것을 보면서 내가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실수를 보고 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미있어합니다. 남이 실수한 것을 보고 그럴 수 있느냐고 나무라면, 남 이야기하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그럽니다. 나와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 잘못입니다. 결코 상관이 없지 않습니다. 네 자신을 돌아 보라, 그리고 두려워하라-다시 한번 새겨야 합니다.

자동차 운전을 예로 들어봅시다. 앞에 가던 차가 고장이 났습니다. 혹은 수렁에 빠져서 꼼짝을 못하고 있습니다. 뒤에 가던 차는 그것을 보고 조심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고속도로 여행을 하면서 종종 보아온 일인데 차가 좀 심하게 속력을 내며 달립니다. 워낙 거의가 규정보다 빨리 달립니다. 요즘은 시속 60마일이 규정입니다마는 제가 여행할 때는 55마일이 규정이었습니다. 그런데도 65마일 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게 보통입니다.

교통경찰도 65마일까지는 눈감아주지만 70마일을 넘어가면 적발을 합니다. 주말에 여행을 하다보면 반드시 한두 건의 사고를 만나게 됩니다.

여러 대의 차가 부딪쳐 불이 나고 시커먼 연기가 피어오릅니다. 도로가 꽉 막혀 속도가 떨어집니다. 사고 현장을 지나가면서 그 참상을 확인하고 나면 모두가 45마일 속도로 천천히 달립니다. 그러나 그도 잠깐이요, 5분만 지나면 다시 65마일로 올라갑니다. 5분 동안입니다. 45마일 속도로 계속 달리려면 5분마다 사고가 나야 된다는 말이 됩니다. 여러분, 사람이 이처럼 간사합니다. 앞차가 사고 났으면 뒷 차는 절대로 조심해야 됩니다. 앞사람이 실수하는 것을 보았으면 뒷사람은 모름지기 스스로를 살펴 조심해야 합니다. 남의 실수를 보면서 강 건너 불 보듯 재미있어하면 못씁니다.

자신을 살피라는 또 하나의 이유는 '내게도 같은 잘못이 있다'하는 뜻에서입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질적으로 같은 실수가 내게도 있으니 내 자신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자상한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를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간혹 이런 일이 있습디다. 남의 집 아이들이 잘못되었을 때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기도 열심히 하고 잘 가르쳤으면 그런 일이 없을 텐데……" "우리 집 아이들은 아무 일도 없지 않느냐"-가만히 있으면 좋을 텐데 꼭 한마디합니다. 내가 워낙 잘 가르쳐서 내 아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없다고 자랑하고 다닙니다. 남의 집 아이들이 잘못되어 가출한 것을 보아도 동정할 줄을 모릅니다. 자신한테는 그런 일이 없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 집 아들이 잘못되는 것을 보고 나더니 두 번 다시는 남의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합디다. 남의 집 사건도 내 사건입니다. 남의 집 아이가 가출하면 내 집 아이도 가출을 한 것입니다. 남에게서 실수가 보이거든 내게도 실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웃집 남편이나 친구 남편이 실수를 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내 남편에게도 실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내 남편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 사람이 실수했으면 나도 실수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렵다면 나에게는 죄지을 용기와 기회가 없었다고 보면 됩니다.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이지 마음은 같았다, 단지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라고 생각합시다. 겉으로 드러난 형태는 달랐지만 같은 실수가 내게도 있다고 인정하고 나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남이 실수하는 것을 보며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에서 그의 실수를 기뻐하지는 않았는가, 자비함이 없는 자가 되지는 않았는가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성경을 통해 여러 차례 말씀하십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고 악인이 망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지 말라'-남이 실수하는 것을 보고 무자비한 자가 되어 기뻐하지는 않았는가, 혹 조소하는 마음이나 비난하는 마음이 없었는가를 살펴보십시다. 또 하나는 남의 실수를 보면서 나도 이미 시험에 빠져들고 있지 않는가, 나약해지고 있지 않는가, 같은 죄를 짓고 있지 않는가 생각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사람은 남의 실수를 비난하지 못합니다. 남을 정죄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나를 전혀 돌아보지 않기에 남을 비난하게 되고 문제를 삼게 된다는 말입니다. 남의 실수를 보며 나 자신을 바르게 성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셋째는, 짐을 서로 지라고 합니다. 아픈 마음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짐을 지고 말은 없이 그 결과에서 오는 고통까지 똑같이 당하라, 비난도 함께 당하는 마음을 가져라-고통에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목수 요셉이 어려운 문제에 맞닥뜨렸습니다. 약혼녀인 마리아가 임신을 했다고 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요셉은 드러내지 아니하고 깊이 생각합니다.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하며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참 훌륭합니다. 짐을 함께 진 것입니다. 책임을 함께 지는 것보다 좋은 일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22 : 39)"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네 몸과 같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또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었으면 좋겠습니까?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사람들은 대체로 상대방에 대해서 세 가지를 원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기를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남편이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자녀들도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부모도 이웃도 나를 이해해 주었으면 합니다. 이처럼 이해를 바라는 마음이 첫째요, 둘째는 믿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무엇이든 상대방이 믿어주기를 바랍니다. 제일 불쾌한 일이 남에게 의심받는 것입니다. 불신 당하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습니다. 그런고로 모든 사람들은 상대방이 나의 진실을 알아주고 나를 믿어주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덮어주기를 바랍니다. 용서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의 실수를 용서해주고 덮어주기를 바랍니다. 비난 없이 이 비밀을 지켜주었으면 합니다. 이상의 세 가지 소원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웃으로부터 우리가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그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이웃을 이해해야 하고, 믿어야 하며, 잘못이 있을 때에 덮어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짐을 함께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짐 지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이 책임을 같이하는 것입니다.

가장 무거운 짐은 의의 짐입니다. 다시 말해 비밀을 지켜주는 것입니다.

남을 위해 내가 죄인이 됩니다. 의를 지킵니다. 이 짐은 참 어려운 짐입니다. 짐을 서로 지라-서로 봉사하라는 것만이 아니라 책임을 함께 지고 아픔을 함께 나누라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다른 사람이 실수한 것이 있으면 내가 실수한 것 같은 마음으로 덮어주고 이해해주고 믿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서로 짐을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라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5:12)."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짐을 서로 지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넷째는,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4)." 그 다음에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5)" 합니다. 후에 한 말은 적극적인 표현으로 강조를 하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한 것을 보면서 자기 짐을 져야 한다,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일일뿐이지 결코 내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이 되어 심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나서서 바로잡을 수도 없습니다. 나는 나대로 행할 부분이 있습니다. 그 할 수 있는 부분만 하라는 말입니다. 자기 짐을 지라-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합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알아서 해주십니다. 간혹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까지 자기가 하려고 듭니다. 다른 사람의 일까지 합니다. 그러다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를 상실하고 맙니다. 자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가 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되고 더 많은 잘못을 범합니다. 대체로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면서 자기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의 일에 지나치게 신경을 쓰다보면 자기 일에는 신경을 덜 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은 남의 일에는 둔합니다. 그리 민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기 짐을 지라 하는 말의 뜻은 묵묵히 자기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충실에 힘쓰라, 내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힘쓰라 하는 말입니다.

제가 언젠가 대학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교수에 대한 비난이 하나같이 많습디다. 실력이 없고 교수방법이 틀렸고 인간성이 어떻고 하면서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두 가지의 대안을 알려주었습니다. 하나는 참는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시시한 강의를 듣는 것도 몹시 어려운 일이니 그 기회에 인내력이라도 키워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내가 빨리 공부해서 교수가 되어 잘 가르쳐보겠다는 생각을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교수가 되면 저렇게 안 하겠다, 후배 학생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교수가 되리라 마음 다지면서 앉아 있으라고 말입니다. 그랬더니 그것은 자신이 없다고들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다른 사람이 잘못하는 것을 보면 먼저 비난부터 하려고 듭니다. 이제는 그러지 맙시다. 나는 나의 짐을 지겠다, 내 할 부분을 하겠다고 마음먹읍시다.

용서하는 것, 이해하는 것, 덮어주는 것, 사랑하는 것까지가 내 할 일입니다. 그 다음 일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언제나 내가 할 수는 없습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부모로서 꼭 해야 할 일만 하고 나머지는 내버려두십시오. 그러나 우선은 밝은 얼굴로 대합시다. 자꾸 얼굴을 찌푸리고 있으면 자녀들의 얼굴에 그늘이 집니다. 걱정하는 부모님을 대하는 것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할 일까지만 하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일단 내 일에 충실하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를 생각합시다.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 책임에 충실해야 합니다. 내 짐을 바로 지는 것이 다른 사람의 짐을 더는 것이 되듯 내가 내 짐을 지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떠맡게 됩니다. 내가 내 짐을 바로 질 때에 다른 사람에게도 근심을 끼치지 않게 됩니다. 남을 구제하는 것이 우선이 아닙니다. 선행이 우선이 아닙니다.

먼저 나로 하여금 남에게 근심을 주지 않아야 합니다. 잔뜩 찌푸린 얼굴로 한숨을 푹푹 쉬고 다니면 보는 사람이 무슨 큰일이 났는가 하여 걱정을 합니다. 내 짐을 남에게 지우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하면서 명랑하게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큰 구제가 됩니다. 큰 봉사가 됩니다. 나의 짐부터 집시다.

무릇 사람은 사회성을 띠고 살아갑니다. 교회생활도 그렇습니다. 실수가 보일 때마다 온유한 마음으로 바로잡도록 힘써야 합니다. 나 자신부터 돌아보고 내가 대신 질 수 있고 거들 수 있는 짐이라면 서로 나누어 져야 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남의 실수로 인하여 내가 한 걸음 더 성장하고, 좀더 귀한 존재로 발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남의 잘못을 보면서 나도 넘어지는 것은 소극적인 자세입니다.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잘못된 것을 보면서 더 바른 성찰의 사람이 되고 더 온전한 사람,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나 먼저 진실 되고 충실하여야 합니다. 그리하여 마음 깊은 곳에 내밀한 자랑을 가지고, 그 긍지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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