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δεδομένα 18,185편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추천과 문안(롬16:1~4)

by 【고동엽】 2024. 3. 19.

 

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목차로 돌아가기

 

추천과 문안(롬16:1~4)

 

오늘의 말씀은 이제 로마서의 부록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로마서는 실질상 15장으로 끝나고 여기에 부록으로 문안의 글이 실려 있습니다. 이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여기에 기록된 여러 사람의 이름과, 그 성격과, 문안하는 내용 등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들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내용 못지 않게 중요한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16장을 읽어보면 많은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대략 24명 정도 나옵니다. 그 가운데 여섯 사람이 여자입니다. 어쨌든 바울은 24명의 이름을 이렇게 거론하면서 문안도 하고 천거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성격의 내용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에베소에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로마를 향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데에는 아주 심각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그는 예루살렘으로 갔다가 어쩌면 로마로 가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순교하게 될는지도 모르겠다는 예감도 있습니다. 그런고로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면 되겠지마는, 만일 못 갈 경우를 생각해서 그가 평생에 전하던 복음을, 로마에 꼭 필요한 복음을 이렇게 요약해서 편지로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은 바울의 유언장과 같은 의미도 있고, 또 그가 한평생 전하던 복음을 여기에 요약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아주 주요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귀한 로마서를 쓰는 중에, 바울은 이제 마지막에 가서 자기가 기억하고 있는, 로마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가운데는 이미 사도 바울과 다른 데서 만났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고린도에서 만난 사람,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 예루살렘에서 만난 사람…… 바울이 자기의 생에 속에서 만나고 알았던 사람들이 지금 로마에 가 있어요. 어쩌면 이 사람들이 로마교회를 세운 것 같아요. 이 사람들 중의 얼마가 로마교회를 세웠거든요. 그래서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들에게 이 사람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문안해달라 하고, 또 중요하게는 이 분들로 하여금 좀더 힘있게, 남은 생애에 힘있게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문안하고 동시에 천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이 말로만 듣고 자기 생애에서는 전혀 만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바울은 소문을 듣고 이 사람이 로마에서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이름을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세요. 이제 이 편지가 로마교회에 가서 읽히게 됩니다. 공동 서신으로 많은 교인들 앞에서 이 편지가 낭독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여기에 자기 이름이 나오는 사람들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얼마나 자랑스럽겠습니까? 그래, 이제부터 더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는 그런 열심을 한번 더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 여기에 이름이 들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나도 사도 바울을 만난 일이 있는데 어째서 내 이름은 안부르지? 분명히 나는 사도 바울을 아는데 그는 왜 나를 모를까?'-이는 참으로 섭섭한 일입니다. 분명히 그런 사람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가끔 저도 그런 경우가 있어요. 어떤 분은 길에서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나는 모르겠어요. 이러면 참 실례가 되지요. 어떤 분은 제가 조금 기억이 나는 듯도 해요. 하지만 어떤 분은 전혀 기억이 아나요. 그런 분이 "저는 소망교회 교인입니다"하고 자기를 소개합니다. 그러면 제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십니까? '어지간히 시원치 않은 교인이구먼. 그러니까 내가 모르지.' 그런데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얼굴도 한번 본 것 같지가 않아요.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눈이 좋아서 강대상이 있는 곳에서도 2층에 앉아 있는 사람까지 얼굴을 다 알아보거든요. 그러니까 여기서 자주 본 사람은 제가 다 안다는 말이에요. 그래, '얼굴이라도 많이 본 것 같다'-그 정도라도 아는데 '이 사람은 전혀 못본 사람 같다'라고 생각되는 경우가 있어요.

사도 바울은 지금 이렇게 24명의 이름을 써서 로마로 보냅니다.

이것을 읽게 될 때에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참 부끄러웠을 것이에요. 분명히 나는 바울로 인해 예수를 믿었는데, 바울을 아는데 그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거예요. 혹은 마음이 비뚤어져서 섭섭하게 여겼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여기에 24명의 이름이 있는데 이 사람들에 대해서도 각각 달라요. 같지 않아요. 어떤 분데 대해서는 바울이 길게 길게 설명을 해요. 참 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사람을 천거한다, 그는 좋은 사람이다, 그를 도와주어라, 마음대로 선교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라, 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저 사람은 나를 위해서라면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느니라, 합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입니까? 목숨이라도 바칠 그런 사람이다. 충성된 사람이다, 나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다, 하고 높이 칭찬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름만 불러요. 그에 대한 설명이 아무 것도 없어요. 바울은 대개 '이 사람은 수고한 자다, 처음 익은 열매다,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다, 우리의 동역자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은 자다……'하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름만 딱 부르고 말아요. 왜요? 설명할 말이 없으니까요.

여러분은 남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까? 특별히 교역자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습니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교역자가 볼 때에 나는 어떨 것 같습니까? 혹은 성도들이 보았을 때에 나는 어떨 것 같습니까? 여러분도 여러 사람들을 대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주 반가운 사람이 있어요. 하루라도 못 보면 안될 것처럼 볼 때마다 반갑고 고마운 사람이 있어요.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보아도 그만, 안 보아도 그만이에요. 또 어떤 사람은 솔직히 말해서 가급적 안 보았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으로부터는 전화도 안왔으면 좋겠어요. 그 사람이 "여보세요"하는 말도 싫어요. 소름이 끼쳐요.

그렇잖아요? 이것은 못 말리는 것이에요. 그렇게 인상지어지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 나는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내가 누구를 만나든, 누구에게 전화를 걸든 간에 그 사람이 나를 반갑게 대할 수 있는, 정말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반갑게 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지요. 가능하면 안 보았으면 좋겠다 하는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서 24명의 이름이 주욱 기록되어 있는데 일일이 다 생각하지 않겠습니다마는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속에 내가 있다고 생각을 하고, 한번 내 생애를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종이자 교역자예요. 그런데 나는 어떤 인상을 주면서 오늘까지 살아왔는가, 만약 우리 목사님이 편지를 한다면 나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쓸 것인가?-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이제 오늘의 본문에 처음으로 나오는 사람의 추천장을 모십시다. "내가 겐그레아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1)"-바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지금은 겐그레아교회의 일꾼이지마는 이제 로마로 가는 데 천거한다 함입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2)"-이 뵈뵈라는 여자는 전도인이기도 하고 열심히 일하는 사함이기도 하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의 여인들 가운데는 넉넉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는데로, 예수님의 일행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전도사역을 할 때에도 예루살렘에 있는 여인들이 모여서 그 전도비를 공급했습니다. 여기서도 뵈뵈라는 여자가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하고 말씀한 것입니다. 이 겐그레아라는 곳은 고린도에 인접해 있는 항구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여집사입니다.

당시는 여자들의 공적 위치가 별로 보장되어 있지 못한 때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부터는 일찍이 여집사의 위치를 아주 높이 인정했던 것 같습니다. 여자들은 주로 환자를 방문하거나 가난한 자를 방문하는 그런 일로 봉사를 하고 공식적인 직위에는 있지 않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분명히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는 헌신적인 일꾼입니다'-이렇게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의 일꾼이라고요.

일꾼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말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리도전서 41절에서 자기를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스스로 천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일꾼-헬라어로 '휴페레테이스'라고 하는 이 말은 노예선 저 밑에서 노를 젓는 사람을 말합니다. 아주 착실한 일꾼입니다. 어디로 이 배가 가느냐고 묻지도 않고 노를 젓는 그러한 일꾼입니다.

일꾼이라고 하면, 먼저는 헌신적인 사람이요, 충성된 사람이요, 그리고 진실한 사람입니다. 충성되었다면 내가 그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진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사람의 능력을 믿을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맡기면 잘 해냅니다. 거침없이 해냅니다. 내가 하는 것보다 더 믿음직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꾼입니다. 믿지 못하면 일을 시킬 수 없습니다. , 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돈을 떼어먹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에게 아무 일도 맡길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진실이 있고 충성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일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꾼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내가 남에게 천거할 수 있은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누구에게나 소개를 합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틀림없는 사람입니다. 일을 맡겨보십시오. 확실합니다'--이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때때로 내가 일을 부탁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남에게 사람을 소개한 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있게 소개하기가 어렵습니다.

보세요. 바울이 겐그레아에 있는 이 뵈뵈를 얼마나 아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는 자신만만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충성된 사람이다. 교회의 일꾼이다. 정말 좋은 일꾼이다'-이렇게 추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합당한 예절로 맞으라'하고 말씀합니다. 뵈뵈가 여성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그를 합당한 예절로 영접을 하라 그리고 나서 무엇이든지 소용되는 대로 주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자유롭게 일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필요하다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공급하라. 틀림없으니까. 틀림없이 좋은 데 쓸 거니까 안심하고 주라. 무슨 일이든 맡기라'하는 것이지요.

이 얼마나 좋은 얘기입니까? 이 얼마나 넉넉한 추천입니까? 얼마나 사도 바울이 뵈뵈를 믿었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유로이 일하게 하라. 일할 기회를 얼마든지 주라.' 또 그뿐이 아닙니다.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경제적으로도 소용되는 바를 주라, 이렇게까지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입니다.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는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이다, 그런고로 마음껏 일할 기회를 주고, 힘껏 도와주라, 그러면 그가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천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부러운 추천인이요, 추천받는 사람입니다. 바울도 그를 이처럼 믿었다는 것이 훌륭하고, 또한 뵈뵈도 이처럼 신임을 받았다는 것이 더욱 높이 평가되어야 될 부분입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로 바울이 소개하는 사람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입니다. 이들은 사도행전 182절에서부터 나옵니다. 본래 이 사람들은 로마에 살았는데 클라우디우스 로마황제가 유대사람들을 핍박할 때에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일단 고린도로 갔습니다. 고린도에 가 있는 동안, 이 사람들은 천막을 만드는 기술이 있어서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바울도 같은 기술이 있어서, 자기 직업이 있어서 그와 함께 천막을 만들다가 서로 알게 되고 사귀게 되어서 전도를 받고 예수믿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이들에게 자녀들은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후에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전도할 때에 그와 함께했고, 그가 에베소로 갈 때에로 따라가서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이제 바울이 먼 훗날에 로마로 갈 것이라는 말을 듣고 이들은 먼저 로마로 갔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사람들이 로마교회를 세우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쨌든 이들이 로마로 갑니다. 가서 거기서 봉사하다가 나중에 에베소로 돌아와 여기서 생애를 마친 것 같습니다.

철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특징은 무엇인가 하면, 바로 자지 직업을 기지고 있으면서 전도를 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게 full time이 아니예요. 요샛말로 전도인의 일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 교회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교회에 봉사하되, 직접 어느 교회를 섬기는 게 아니라 교역자를 섬겼어요. 그 점에 좀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은 사도 바울을 섬겼습니다.

바울의 전도비를 전부 충당합니다. 바울로 하여금 일하지 않고 열심으로 전도할 수 있도록 그를 도왔어요. 경제적으로 도왔어요. 교역자를 도우며 선교를 한 사람들이에요. 여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세 번째로, 이들은 교역자를 돕기 위해서 이사를 다녔어요. 전적으로-이 또한 중요한 점이에요.

가끔 저는 그런 분들을 만납니다. 우리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던 분들이 외국에 많이들 나가 사는데, 가서 만나게 되면 이런 말을 하는 분이 있어요. "여기에서 사는 것도 좋습니다. 그런데 아주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어요. 다름이 아니라 교회 봉사하고 살았으면 참 좋겠는데, 여기 와서 지내니까 그걸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못 견디겠습니다." 그래, 소망교회에서 나오는 tape만 열심히 듣고 있어요.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사가면 되잖아?' 여러분, 이사가 뭐 대단한 것입니까? 하지만 이사를 잘 하셔야 해요.

가끔 어떤 분들은 교회 멀리 이사해놓고는 힘들어해요. 공기 좋은 데로 간다고 이사하고서 기껏 한다는 말이 "워낙 집이 멀어서 새벽기도에 못나옵니다"해요. 그럴 때에 저는 이런 말을 합니다. "집을 팔면 되지 않습니까?" 그실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래요. 누가 거기 살라고 했습니까? 작은 집으로 줄이면 되잖아요? 교회 봉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을 못해요? 그까짓 이사하는 게 뭐 대단한 것이에요? 저는 집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 까짓 집 하나 파는 것쯤이야 쉬울 것 같아요. 여러분, 집을 조금 줄이면 되지 않습니까?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잘하도록 집 좀 옮기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이 주변에서는 조그만 집이지만 저기 가게 되면 큰집이고, 정원도 좋고…… 여러 말을 덧붙입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다른 나라로 옮겨 다녔어요. 고린도에서 에베소로, 에베소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에베소로…… 선교에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일을 돕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했어요. 바울이 로마로 간다니까 벌써 로마에 가서 준비를 했어요. 에베소로 가니까 따라갔어요. 이 얼마나 굉장합니까? 짧은 세상, 이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좋아요? 이 사람들은 전적으로 교회를 섬긴 사람들이에요. 주의 종을 섬긴 사람들이에요.

보세요. 이들은 Layman ministry-평신도로 일했고, 직업을 가지고 일했고, 교역자를 도왔고, 집중적으로 사도 바울을 위해서 일했고, 또 다른 나라에 이사를 다니면서까지 바울을 따라 일을 했어요. 아주 철저한 사람들입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을 하겠습니까?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놓았나니(4)"-이렇듯 바울 대신에라도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이에요. 까짓것 죽으면 어떠냐, 사도 바울이야말로 일을 많이 해야 할 사람이니까 내 목이라도 내어놓겠다는 사람들이에요. 이 얼마나 굉장한 이야기입니까? 아마도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직접 이 말을 했다면 별 가치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을 앞에 놓고 '우리가 당신을 위해서라면 목이라도 내어놓겠습니다'했다면 글쎄요. 두고보자고 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말씀이에요. 바울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 사람들은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다-충분히 그렇게 생각할만한 일이 있었는가봐요. 그런 위험한 일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때마다 이들이 대신 고난을 받으려고 했어요. 그런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들을 자신있게 추천을 하는 것이에요. 나를 위해서라면 목이라도 내어놓을 그런 사람들이라고요. 그렇듯 철저하게 나를 위해서 일해준 분이라고 사도 바울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금도 로마에 가면 성 브리스가교회가 있습니다. 거기에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묘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아굴라와 브리스가-아굴라는 남편이고 브리스가는 아내예요. 내외간이에요. 이들의 이름이 성경에 여섯 번 나옵니다. 그 때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다 나옵니다. 그런데 네 번은 '브리스가와 아굴라'로 나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은 '아굴라와 브리스가'라고 했어요. 여섯 번 중 두 번은 아굴라와 브리스가, 네 번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입니다.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사도 바울의 생각에는 어느 .때에는 아굴라가 마음이 더 좋고, 어느 때에는 브리스가가 믿음이 더 좋고…… 그렇게 기억되었던 것 같아요. 뭐 이렇게 계산해가면서 사도 바울이 편지를 썼겠습니까마는, 그러나 그때그때 바울은 마음은 그랬어요. 누가 더 중요하게 떠올랐느냐, 바로 이 말입니다.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렇듯 저들은 사도 바울을 위해서 일한 평신도 선교사요, 사업가요, 바울의 동역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도 보니까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4)"-이방인의 교회들이, 여러 교회들이 다 이 사람들의 신세를 졌습니다. 어떤 교회는 아마 아굴라와 브리스가가 세운 교회인지도 모르지요. 이들은 소문난 사람들이에요.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어요. 그렇게 철저하게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라고 다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이렇게 감사하고, 이렇게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것이지요.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편지를 썼는데 누구라도 이 편지를 받고 '그게 아닌데'하는 사람이 있으면 되겠어요? 누가 이것을 아니라고 할 사람이 있으면 되겠어요? 그는 확실해요. 그래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보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이렇게 확실하게 자신있게 추천하고 있어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교인이 많아도 그 교인이 다 충실한 것은 아니예요. 교회를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는 교인은 언제나 10%라고 합니다. 10%만이 responsible member, 책임교인이에요. 우리 교회도 교인이 3만 명이라고 하지만 사실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은 한 3천 명 될 거예요. 그 중에서도 또 전적으로 봉사하는 분이 있어요. 생명, 목숨, 재산, 명예…… 다 이 교회와 함께 바치겠다고 생각해요. 이미 바친 사람들도 있어요. 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저는 옛날에 인천에서 목회를 할 때에 예배당을 지었는데 돈이 없어 가지고 참 애를 많이 썼어요.

짓다가 쉬었다가, 짓다가 쉬었다가…… 그렇게 6년이 걸렸어요. 어떤 때에는 빚 독촉을 받아서 건축비를 빨리 주어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

인건비를 주어야 하는데 돈이 없어요. 너무 답답해요. 이럴 때에 교역자가 어느 장로님이나 어느 집사님에게 거서 '이런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돈을 좀 꾸든지 얻든지 해야겠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해야 할 텐데 사실 이것을 의논할만한 사람이 몇 없어요. 교역자가 마음놓고 이 어려운 점을 이야기할만한 사람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잘 아는 분 가운데 한 장로님이 계셨어요. , 이 분이 사정을 알고는 자기네 집문서, 땅문서를 다지고 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것은 안 된다고 했어요. 결국은 집문서는 놓아두고 땅문서를 팔아 가지고 예배당 짓는 데 보탰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이야기를 할까요? 지금 우리 교회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을 살 때에 예산이 그리 넉넉하니 못했어요. 하지만 꼭 사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주문을 했습니다. 이제 다섯 번에 걸쳐서 돈을 보내야 하는데 교회 앞에 광고하고 '이것 합시다'-그렇게 할 성격은 못되는 일이었어요. 열심히 반대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모금을 했는데, '자 이번에 얼마를 주시면 좋겠다, 얼마를 주시면 좋겠다'하고 제가 찾아다니면서 이야기를 했어요. 그래가지고 이 파이프 오르간을 산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어떤 분이 저한테 그래요. "왜 나한테는 달라고 안했습니까?" 그래서 제가 "안줄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내가 마음이 내키지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내 마음이 어디로 열리느냐 하는 게 중요한 것이지요.

어떤 분은 꼭 줄 것 같아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거절한 사람이 없어요. 왜요? 기도 많이 하고 가거든요. 어떤 사람한테는 두 번이나 부탁을 했어요. 그렇게 일을 마쳤지요.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아굴라와 브리스가는 아주 생명을 바친 것입니다. 일생을 다 바친 것이에요. 사도 바울은 자신만만하게 지금 저들을 추천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저들은 나를 위해서라면 목숨이라도 내어놓았으리라'-자기 목이라도 내어놓았으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하나,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5)"라고 말씀합니다. 저의 교회에게-자기 집에 지금 교회가 있어요. 다시 말하면 open house했다는 말입니다. 자기 집 문을 열어버렸어요. 자기 집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이에요. 초대교회는 다 그랬어요.

요새는 중국에 이런 교회가 많아요. 예배당은 많지 못하지만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데가 많습니다. 이런 교회를 처소라고 불러요. 예배당 건물이 있는 교회는 교회요, 가정에서 예배드리는 곳은 처소입니다. 그런데 이런 핍박과 어려움이 있을 때에는 세 가지를 극복해야 합니다. 하나는 시설을 극복해야 됩니다. 예배당을 지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아무데서나 예배를 드리는 것이에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에요. 또 목사님이 계셔야만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예요. 집사님만 있어도 돼요. 또 집사님이 없어도 좋아요. 평신도끼리도 예배드릴 수가 있습니다. 또하나, 예배는 꼭 주일날 11시에 드리는 게 아니예요. 그러면 더 좋지요.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면 월요일에도 좋고 화요일에도 좋고, 낮에도 좋고 저녁에도 좋고, 어느 때라도 정기적인 규칙적인 시간을 초월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핍박이 심할 때, 공산 치하에 있을 때에 언제나 저녁 예배를 드렸어요. 낮에는 나와서 일하라고 하니까 일하고, 밤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 기록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 그러면 오늘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집을 열었어요. 자기 집을 열어 가지고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먼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손님을 잘 대접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에요.

손님 대접하는 마음이 있고야 이제 가능한 것이에요. 또 그리스도만을 섬기기로 한 것이에요. 자기 집에서 식구끼리 오붓하게 재미있게 잘살려고만 하는 생각은 없어요.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요. 우리도 소망교회 처음 시작했을 때에 어느 장로님 댁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당시에도 그랬어요. 거실에 응접세트가 있잖아요? 이것을 놓고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다 치워버렸어요. 응접실을 그냥 훤하게 넓게 만들어놓았어요. 그래, 어떻게 하려고 다 치웠느냐고 물으니까 장로님이 "예배당을 지어서 나가게 되면 그 때에 가서 응접세트를 마련하지요. "라고 대답하십디다. 그렇게 훤하게 해놓고 예배를 한 9개월 동안 드렸습니다. , 이제 다 희생이에요. 이러면 사생활은 다 없어지는 것이에요. 가정의 즐거움이 다 없어지는 것이에요. 그렇듯 교회로 사용하게 되면 말이에요. 바로 이런 희생을 아굴라와 브리스가의 집에서 하고 있습니다. open house, 완전히 집을 열어서 교회를 만들었어요. 왜요? 교회가 더 중요하니까요. 교회를 위해서 사는 것이니까요. 교회가 최우선적이니까요. 그것이 목적이니까요. 이것이 아굴라와 브리스가였습니다.

그 다음에 본문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다. 이는 수고한 자다, 처음 익은 열매다,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다, 우리의 동역자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는 자다…… 각각 이름을 들어가면서 그 사람의 성격과 그의 업적과 그에 대한 사도 바울이 가지는 인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름만 불러놓고 아무 것도 없어요.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남아야 하겠습니까? 정말 주님 앞에 가서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입니까?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주 안에서 교회 생활을 하되 좀더 충실하게, 좀더 절실하게 추천 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그런 일꾼이 도어야 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