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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언부언하지 말라(마 6:5~8)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앞에서 구제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구제는 이미 이 세상에서 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무효가 됨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기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란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 마디로 기도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생활이 잘못되면 신앙생활 모두가 잘못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랍비들의 기록에 의하면 모든 덕 중에 가장 높은 덕이 기도라고 기록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일신으로서 하나님을 인정함으로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기독교에 있는 종교행사가 이방종교에도 있는 것은 잘못될 가능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종교화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기도는 넓은 의미에서 보면, 기독교만의 것이 아니라 명상이나 고행 또 참선이라는 이름으로 종교마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기도가 없으면 종교가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기도는 어느 종교에나 다 있기에 가장 이방종교화 되기 쉽고 타락하기 쉬우며 또한 변질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기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앞 장에서는 구제란 좋지 못한 동기일지라도 좋은 행위로 나타나는 잘못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즉, 사람에게 보이려거나 또는 명예나 존경을 얻기 위한 좋지 못한 동기에서도 아름다운 선행이 있을 수 있음을 예수님은 경고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기도에 대해 두 가지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좋은 동기로 시작했다가 결국은 형식으로 빠지는 기도가 있고, 또 하나는 구제처럼 나쁜 동기이지만 경건의 형식을 갖춘 기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는 대체적으로 처음 경고처럼, 첫 동기는 좋았다가 차차로 잘못된 경향으로 빠지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방인과 같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방인들이 자신들의 신 앞에서 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방 신을 섬기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상 앞에서 중얼거리는 그런 자세로 하나님 앞에서 중얼거린다면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실, 오늘날 각 종교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것저것 서로 뒤범벅이 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가령, 불교의 절에 가 보면 대체적으로 대웅전이 있고 대웅전 바로 옆 또는 뒤에 칠성당이 있습니다. 그런데, 원래 칠성당은 불교가 아니고, 불교 속에 들어간 무당입니다. 그래서, 지금 불교의 일부분에서는 칠성당을 없애야 불교다운 불교가 된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실, 절에 가서 아들 낳게 해 달라고 빈다는 것은 본래의 불교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완전히 샤마니즘화된 불교인 것입니다. 불교는 내가 불(佛)이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인데 누구에게 무엇을 달라고 구합니까? 나밖에 없으므로 나에게 명상하고 내가 나에게 기도하는 것이므로 무엇을 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또한 칠성당에서 구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보면,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말만 없을 뿐,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과 거의 비슷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방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자기들 신께 비는 그런 내용과 태도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큰 죄가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것이므로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전도서 5장에 보면, 너희가 하나님 전에 들어갈 때에 말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어 생각나는 대로 마음대로 지껄이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의 시작부터 예수님의 이름으로 시작해서, 계속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생각하며 기도하다가 마지막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감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혹시라도 내 뜻을 주장하든지, 하나님을 우상화하여 이방종교화하는 그런 어리석음에 빠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기도가 잘못되는 경향을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형식화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어떤 내용이든지 형식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형식이 내용을 보강할 때도 있습니다. 경건한 마음이 있을 때 경건한 형식이 따르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 사랑의 형식이 따릅니다. 말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며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하면 사랑한다는 말이 있고 사랑하는 표현이있고 사랑의 증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즉 내용에는 반드시 어떤 소정의 형식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잘못되면 내용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령, 사랑하기에 선물을 주지만, 사랑 없이도 선물은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후자는 선물이 아니라 뇌물입니다. 물건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마음을 주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선물과 뇌물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도 기도의 형식이 있습니다. 기도는 경건하게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께 내 마음을 바치는 표로 무릎을 꿇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회개하는 마음으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며 간혹 몸부림을 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좋은데, 형식이 계속 반복되는 동안 잘못하면 그 형식이 굳어져서 결과적으로 교리화가 될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형식만 남고 내용은 사라지므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내용이 있고 그리고 형식이 있는 것인데, 형식만 남고 내용이 없어지면 외식하는 자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예로, 기도할 때마다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합시다. 이것은 경건한 마음을 표시하는 형식입니다. 그런데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한 10년간 계속하다보면 이제는 무릎을 꿇지 않으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의자에 앉아서 기도하면 왠지 경건한 것 같지 않고 하나님이 들어주시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렇게 같은 형식을 계속 반복하면, 형식이 굳어져서 때로는 교리화되고 마침내 외식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쉐모네 에즈레헤"(shemoneh esreh)라는 기도문이 있는데 여기에는 18가지 간구가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기도문을 하루에 세 번씩 외우는데 되풀이하다 보니 생각 따로 입술 따로로 전혀 마음에도 없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완전히 형식화되어 내용이 빠져버린 잘못된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가 의식화 되는 잘못이 있습니다. 하나의 습관으로 기울어 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점점 형식 자체가 하나님 앞에 필요한 것처럼 착각을 하게 됩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종교개혁 때 바로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기도 모습은 대개 무릎을 꿇고 눈을 감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히브리 사람들은 두 팔을 위로 벌리고 눈을 뜨고서 기도합니다. 사실, 성경에서 눈을 감고 기도하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이 눈뜨고 기도하면 야단치면서 눈을 감기를 강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형식이요, 풍속입니다. 꼭 눈을 감아야만 한다는 기도의 형식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같은 방법으로 하다보면 종교의식화가 되고 나아가서는 외식주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잠깐 네 가지 형태의 바리새인들의 기도하는 모습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물론 좋은 의미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만 한 번쯤 짚고 넘어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보탬이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떨리는 음성으로 기도하는 바리새인입니다. 기도만 시작하면 보통 때 음성과는 달리 약간 떨리는 음성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기도할 때 나오는 음성이 따로 있단 말입니다. 기도 음성에 대해 필자의 재미있는 경험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어느 교회에 가서 부흥회를 인도하는데 사람이 많이 모였습니다. 심지어는 앉을 자리가 없어 강대상까지 차고 올라와 제가 단 위에 서기 위해서는 사람들을 헤치고 나올 정도였습니다. 부흥회에는 사람이 많이 모이면 대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생각합니다만, 많이 모이는 것과 은혜가 있는 것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 집사님 한 분이 "목사님, 목사님의 음성은 은혜가 없는데 말씀이 은혜가 있습니다"라고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은혜 있는 음성이 어떤 것이냐고 물었더니 목이 쉰 목소리, 즉 허스키 같은 목소리가 은혜의 소리라고 말했습니다. 흔히 부흥목사님들이 기도를 많이 하시고, 또한 많은 사람을 상대해서 말씀을 전하다 보니 소리를 지르게 되어 그 결과로 음성이 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목이 쉬지 않은 음성은 은혜가 안 된다고 하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많이 해도 목소리가 쨍쨍하면 아직도 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농담 같지만 더러 있습니다. 물론 기도를 많이 하고 금식을 하고 철야를 하면서 애쓰면 목이 쉬는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러나 목이 쉬지 않았다고 은혜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형식주의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경건하고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는 자세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일부러 떨리는 음성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둘째, 어깨를 젓는 바리새인, 즉 어깨를 흔들면서 기도하는 바리새인을 말합니다. 영감을 강하게 받으면 어깨가 떨리고 음성이 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영감을 받은 척하기 위해 기도할 때마다 고의적으로 어깨를 떨었으니 그야말로 형식에 치우쳐 내용이 없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셋째, 땅만 보는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죄가 눈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보는 것이 잘못이라 해서, 보지 않기 위해 그저 땅만 보고 다니는 사람은 경건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다니는 사람은 틀렸다는 것이지요. 전혀 근거가 없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땅만 보고 다니는 사람을 경건하다고 존경하다 보니, 이것이 쇼가 되었단 말입니다. 경건하게 살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땅만 보고 다니는 그 근본 마음이야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이것이 형식이 되어 외식주의에 빠지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넷째, 발끝으로 걷는 바리새인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어갈 때에 그곳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땅이므로 발끝으로 가만가만히 걸었습니다. 그런데, 이 걸음걸이가 습관이 되어 아무데서나 가만가만히 발끝으로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발끝으로 다니면 경건한 사람이고, 그냥 걸으면 경건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 네 종류의 바리새인을 보면서, 우리 한국교회도 이와 유사한 점이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기도할 때에 이상한 음성을 내어야 거룩한 것 같고, 울면서 떠들어야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단 말입니다. 형식만 남고 내용이 빠지는 것은 교회를 타락시키고 변질시키게 하는 대단히 위험한 현상임을 알아야겠습니다.
셋째, 기도가 잘못되는 것은 시간규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섯째 시간, 세째 시간, 아홉째 시간, 이렇게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했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말하면 대략 아침 9시, 정오 12시, 오후 3시가 기도의 시간입니다. 그들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들에서 양을 치다가도 이 시간이 되면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좋습니다만 되풀이하는 동안 기도가 형식이 되어 마지막에 가서는 이 시간만 되면 그 어떤 일도 중단하고 땡 하는 소리와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대단히 귀중한 일이면서도 문제가 됩니다. 필자가 언젠가 한번 어느 권사님 댁을 심방 했었습니다. 식모가 나와서 "지금 권사님 기도시간이니 기다리세요"해서 밖에서 30분을 기다렸습니다. 이 권사님은 12시부터 30분간은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기도하는 시간을 정해놓고 최우선으로 기도한다는 것, 정말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쳐서 마침내는 길거리에서도 기도해야 된다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이런 시간적인 규례가 또 한번의 형식주의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새벽기도에 대해서도 어떤 분은 여름이면 날이 훤해서 기도의 맛이 안 난다고 불평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새벽기도는 깜깜해야 잘 된다니 문제 있지 않습니까?
필자가 담임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주일날 새벽기도가 없습니다. 물론 저는 집에서 혼자 기도를 합니다만 전체적으로는 새벽집회를 모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주일1부 예배가 7시 30분에 시작되기도 하고 또한 도시생활의 패턴이 토요일은 늦게까지 가족들과 즐기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모습입니다. 그런데 새벽에 나와 새벽기도하고 또 주일예배에서 저녁 예배까지 하고 나면 모두가 지쳐서 제대로 예배에 정성을 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일날 새벽은 편히 쉬고 깨끗하고 맑은 정신으로 주일예배를 드리기를 원하기 때문에 새벽기도를 없앴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빠지지 않겠다는 생각은 좋습니다만 이것이 형식주의가 되어 무슨 큰 공로가 되는 줄 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바에는 아예 고쳐야 합니다. 부흥회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흥회는 은혜를 받는 때이므로 철야기도를 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필자는 부흥회하기 전에 미리 철야기도 하고, 집회 도중에는 하지 말 것을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여러 교회를 다니며 부흥회를 경험해 보니, 철야한 사람은 그 다음날 집회시간에 거의 졸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기도했으니 낮에 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밤에 철야기도하고 말씀 듣는 시간에 졸려면, 부흥사는 무엇 때문에 떠들어야 합니까? 꼭 그래야만 한다는 시간적인 규례에 얽매여서 그 내용을 잊어버리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넷째로, 긴 기도입니다.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는 기도의 길이가 경건의 척도라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한 시간씩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예배시간에 기도가 길면, 사람들은 기도에 지쳐서 설교가 잘 들리지 않게 되고 자연히 은혜가 없어집니다. 예배시의 대표기도는 5분을 넘어서면 곤란하다는 생각입니다. 한 때는 기도의 길이가 경건을 측정하는 바로미터로 생각했다고 교회사가 말하고 있습니다만 성경에서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고 잘못 인식하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아이들이 부모에게 무엇인가 요구할 때 말을 많이 해야 들어줍니까? 긴 설명보다는 바른 자세로 구해야 들어 주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짧은 기도가 옳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기도를 너무 길게 해서 이것을 공로로 생각하여 많이 했으니 들어주실 것이다 라는 생각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섯째,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인데, 때로는 사람의 귀에 신경을 써서 "은혜스러운 기도였다" 또는 "기도 잘했다"는 소리를 듣고자 미사여구를 붙이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대표기도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같은 마음으로 구하게끔 하는 은혜로운 기도가 필요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람에게 보이려는 기도는 잘못된 것이므로 이런 외식과 형식을 벗어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형식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만 형식이 지나쳐서 하나님께 향한 형식이 아니고 사람을 의식한 형식이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기도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 "네 골방에 들어가", 남의 골방이 아니라 나의 골방입니다. 여기서 기도를 위해서는 특별한 장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잘못을 고쳐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산에 가야만 기도가 되고, 기도원에 가야만 기도가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풍수설적인 나쁜 고정관념입니다. 예수님은 이상하게도 밖에 있는 장소를 지적하지 않으시고 네 골방이라 하셨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광야에 나가면 이상한 종파들이 많았습니다. 에쎄네스파, 금욕주의자등이 굴속에 자리잡고 그곳에서 기도하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기도하러 광야에 나갔다가 그들에게 감염될 가능성을 염려하시어 네 골방에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둘째는 "문을 닫고"기도하라 하십니다. 기도한다는 것을 소문내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바깥과 관계를 끊고 열심히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십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내가 만나는 순간이므로 누구와도 상관없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비밀스럽게 만나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과 딸의 관계,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로만 만나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와의 관계 외에는 어떠한 관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나와 직선적인 관계로써 다른 어떤 것이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청년이 예수를 잘 믿다가 자기 아버지께 전도를 해서 아버지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예배를 볼 때마다 아들이 기도를 했더니, 어느 날 아버지께서 "나도 기도 좀 하자. 왜 너만 매일 기도하니?" 하시며 기도를 자청했답니다. 아들은 너무 좋아서 "아버님이 기도하세요" 하고 아버지께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아버지는 눈을 감으시자마자 "하나님 형님이시여" 하고 기도를 시작하니, 아들이 깜짝 놀라 "아버님, 왜 하나님 형님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아버지는 "너는 족보도 모르느냐? 네가 아버지, 아버지 하니까 나에게는 형님이시지" 하더라는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만 생각해야 합니다.
비슷한 이야기로 어느 시어머니는 "우리 며느리 아버지시여"라고 하나님과 자기와의 사이에 며느리를 개입시키더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내가 직선적인 관계로써 아무도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넷째는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의 원 뜻은 재갈재갈 하지 말라는 의미로써 반복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문 외우는 식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열람식으로 하지 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기도를 수십년 하다보니, "하나님 아버지!" 하고 시작하면 하나도 틀리지 않고 일사천리로 나가는 기도를 말합니다. 잘못 생각하면 중언부언이 주는 글자 의미대로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그런 뜻이 아닙니다. 주문 외우듯이 하지 말고, 열람식으로 하지 말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끝으로 "이방인과 같이"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즉 기도를 공로화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을 많이 해야 될 것으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다 아시므로 구해서 받되, 주시지 않는 것은 내게 이유가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해도 주시지 않는 것은 내게 고칠 바가 있거나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하고, 고칠 것은 고쳐서 받을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것이 바른 자세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하나님은 오직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여 역사 하신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성도의 기도에 응답하여 역사 하시므로 우리의 간구가 없으면 허락치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죤 낙스는 "하나님이여, 스코틀랜드를 나에게 주시옵소서 그렇지 않으면 내게 죽음을 주시옵소서"라고 생명을 건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되,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잘 아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므로, 열람식 기도나 중언부언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더 잘 아시므로 구구한 이야기가 필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자세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넘치도록 우리에게 주시고, 구하지 않은 것도 주시고, 또 구하기 전에 응답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인 관계만을 생각하고 바른 자세로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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