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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야고보서 1 : 16-18)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그가 그 조물(造物)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사도 야고보는 지금 흩어져 있는 만방의 유대인들을 향하여, 30년 목회생활에서 경험하고 깨달은 바를 알차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회서신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동시에 무르익은 목회철학을 진지하게 개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서신에서 야고보가 이해하고 믿는 하나님, 그가 믿는 그리스도께 대하여 자상하게 듣고 배울 수가 있습니다. 지나간 여섯 주의 강해를 통하여 우리는 시험에 대하여, 기도에 대하여, 가치관에 대하여, 그리고 시험의 종말론적 의미에 대하여 사도 야고보가 가르쳐주는 바 귀한 교훈을 받아 배워왔습니다. 시험의 근본 동기는 어디까지나 복된 것이라고 그는 깨우쳐주고 있습니다. 시험의 결과도 역시 복된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다만, 잘못된 사람, 정욕에 이끌려 사는 사람, 욕심의 노예가 된 사람들에게는 시험이 불행이 되는 것이라고--욕심이 잉태해서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해서 사망을 낳게 되는 것이라고, 그는 경고합니다.
중요한 것은, 무시로 당하는 그 숱한 시험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어디로부터 오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힘은 바로 하나님께로서 오는 선물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께 대하여 바른 신관(神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께 대하여 바른 신앙고백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고 있느냐에 핵심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떻다 인간이 어떻다, 네가 어떻다 내가 어떻다가 아니라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님을 누구로 믿고 있느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나의 신앙고백이 무엇이냐-바로 이것을 묻고 있습니다. 바른 신앙고백이 있을 때에 비로소 모든 시험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시험의 뜻도 알 수 있고 시험의 결과도 환하게 내다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의 중요한 의미가 그것입니다. 야고보는 지금 그의 신관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런 신관 속에서 좋으신 하나님, 하나님의 선하심을 술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술회하고 있습니다.
그 좋으신 하나님을 바로 깨닫고 고백하며 사는 사람은 어떠한 시험을 당한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로서 오는 복임을 알고, 하나님께서 좋은 뜻으로 나에게 주시는 것임을 믿기 때문에 그를 이겨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문제는 인생관이 아니고 신관입니다. 세계관이 아니고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 해결의 토대가 된다고 함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 (Giving God) 이요 은혜로우신 하나님 (Goodness)이라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의 신관은 철학적이라기보다는 철저하게 실제적이요 성서적이요 히브리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구약적인 맥락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속지 말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속기 쉽다는 말씀입니다. 시험에 덜미를 잡히는 것은 속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한 하나님이신데 악한 하나님으로, 내게 잘하시는 하나님인데 나를 괴롭히는 하나님으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인데 모르시는 하나님으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도록 해주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풍부하게 하십니다. 복된 생활로 이끄십니다.
내가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나에게 괴로움과 고통을 주신다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슬픔을 주신다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가난과 질병을 주신다고 하는 착각에 빠집니다. 나를 그렇게 몰아세움으로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턱도없이 원망합니다. 잘못되어도 엄청나게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속지 말라고 야고보는 다짐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6절)"라고 타이릅니다.
"속지 말라"-우리가 속아넘어간다면 어떤 때에 속아넘어가겠습니까? 첫째로, 내가 괴롭고 어려울 때에는 으레 시험하는 자가 다가옵니다. 마귀 사단이 틈을 노리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시험하는 자가 일단 미끼를 던집니다. "너는 아무래도 죄가 많은 것 같다"라고 양심을 건드리는 것입니다. 내 양심이 자책(自責)에 빠집니다. '내 죄가 많아서 이 꼴이 되는 거야'하고 탄식합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에 본 일입니다. 아들딸을 서넛 둔 집사님이 무슨 부인병에 걸려서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받고 잘못되고, 다시 또 그렇게 되고 해서 거푸 수술을 받게된 것입니다. 의사가 최선을 다하는데도 까딱 실수를 하는 것인지, 한 번 수술도 견디기 벅찬데 세 번이나 하게 되었으니 환자고 의사고 할 것 없이 얼마나 시달렸겠습니까? 이 집사님은 결국 반년이 넘도록 입원해 있다가 퇴원했는데 심신이 다 허약해져서 그 뒤로도 수개월을 두고 요양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토록 어려운 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에 하루에 한 권사님이 그 집으로 집사님을 방문했습니다. 권사님은 슬하에 자녀를 두지 못해서 남의 아이 하나를 얻어다 키우는 부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중에 있는 집사님을 위로하겠다고 심방을 갔던 이 권사님, 예배를 보는 중에 그만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죄가 많았으면 남들은 한 번도 받지 않는 수술을 세 차례나 받았을꼬?" 순간, 집사님은 낯빛이 싹 가십니다. 이 언짢아하는 표정을 보고도 권사님은 설상가상으로 한마디 더 했습니다. "회개해야겠수!"-집사님은 여기서 그만 시험에 말려듭니다. '그렇지 않아도 괴로워죽겠는 판에 뭣하러 공연히 찾아와 가지고 요 방정을 떨어댄담!' 이렇게 속이 뒤집힌 나머지, 끝까지 참았으면 좋았을 것을 참아내지 못하고 '장군' 에 불쑥 '멍군' 을 놓아버렸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죄가 많았으면 남의 집 대(代)를 끊었수? 아이도 못 낳고 쏘다니는 주제에……" 얼굴이 화끈 달도록 무안해져서 권사님은 정신없이 그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그 뒤로 이 두 사람은 서로 원수같이 지내게 되었고, 그 바람에 저는 화해를 붙이느라 고생깨나 했었습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사기꾼 마귀가 때를 놓칠세라 찾아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를 이간질합니다. "너는 죄가 많구나"하고 들쑤셔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만듭니다. '내게 죄가 많아서 벌을 주시나보다'하고 하나님을 매질이나 하시는 하나님으로 보게 만듭니다. 무서운 하나님으로 보게 만듭니다. 고약한 하나님으로 보게 만듭니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하고 원망을 하게 만듭니다. 여기에 속으면 하릴없이 나는 시험에 빠지고 맙니다.
좋으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심방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방할만한 사람이 심방을 가야 합니다. 바른 신관을 가진 사람이 심방을 하는 법입니다. 쓸데없는 말짓거리로 공연히 말썽만 일으키는 심방이라면 참으로 문젯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전하는 것, 바로 이 복음이어야만 고통받는 자에게 참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 제대로 된 신관을 가지지 못한 사람, 신앙고백이 바로 되어 있지 못한 사람-이런 사람이 섣불리 심방을 한답시고 들락날락 쏘다니게 되면 생사람 참 많이 잡습니다. 애꿎은 사람을 시험에 빠뜨리고 넘어지게 합니다. 그러므로 무릇 심방이라고 능사로 알 것이 아닙니다. 참으로 조심할 것입니다.
보십시오. 마귀의 이간질은 우리가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간교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하나님께서 오직 한 그루의 나무만 금하셨다는 것을 알고도 사단은 일부러 그 범위를 넓혀 "동산 모든 나무의……"라고 실눈 뜨고 말할 만큼 간교한가 하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라고 여자가 대답했을 때는 사단 이 무엇이라고 속삭입니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5)"-이토록 '머리 좋은' 사단인지라 나중에는 언감생심으로 예수님까지 꾀려들었던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조심하고 또 조심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내 욕심을 끌리면 속임을 당하게 됩니다. 내게 욕심이 승(勝)하면 으레 시험하는 자가 다가와 속이고 넘어뜨립니다. 내 마음에 은혜가 부족한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급기야 하나님이 인색해 보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 잘해주시면서 나에게만 못해주시는 것만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웃어주시면서 나에게는 눈을 부라리시는 하나님으로 보입니다. 나에게는 나쁜 하나님이시다. 나에게는 폭군이시다-욕심 많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이런 모습으로 보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나는 할말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할말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이래주세요 저래주세요,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졸라댈 염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를테면 제 연배의 사람들은 한번 돌이켜보십시다. 세세년년 한 많은 보릿고개를 겪어온 우리들, 그런 우리가 지금은 자가용을 타고 다니게 되었다. 이렇게라도 한번 더듬어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무슨 할말이 있습니까? 6․25전쟁 같은 신고(辛苦)를 겪어보지 못한 세대들, 말하자면 먹고 살만한 이 시대에 태어나서 이 시대에 자라는 세대들로야 이보다도 좀더 바라는 게 있겠지만, 정말이지 우리들 연배의 세대로야 오늘 죽는다 해도 할말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좋은 음식을 대할 때이면 가끔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것 못 먹어보고 죽은 사람들은 참 억울하겠다'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지금 예삿복을 누리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것도 모자라 합니다. 기도하는 것도 '주세요'가 주제입니다. 돌고 돌아서 또 '주세요' 입니다. 달라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런 욕심 끝에는 필경 불평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속임을 당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관이 빗나가게 됩니다. 유혹하는 자 마귀의 시험에 풍덩 빠지고 맙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속아넘어가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기에 이릅니다. 감사의 마음을 잃고 맙니다. 생각할수록 분하기만 합니다. 원통하고 억울하여 못살겠다-이렇게 됩니다. 속았기 때문에 마음이 이렇게 돌아갑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씀합니다. 다짐이자 경고입니다.
"속지 말라."
이어서 본문 말씀의 적극적인 자세를 일깨워줍니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17절)"-좋으신 하나님임을 바로 믿고 살 때에 우리는 속임 당하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일깨우려 함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세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주시는 하나님'-'Giving God'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색하시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게 필요한 것을 나 자신보다도 더 잘 아시고 또 다 아십니다. 가난이든 질병이든, 성공이든 실패든 간에 그 모든 것은 나에게 있어야 하기에 있는 것이요, 이것이 있어야만 그 다음이 있는 것입니다. 거듭거듭 실패만 하면서도 그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분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못된 성깔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하오이다. 저는 이만큼 얻어맞아야 겸손해집니다. 하나님께서 조금만 고삐를 늦추셔도 저는 별수 없이 못된 사람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도 이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감사드립니다."그분의 기도가 이러했습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다 아시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절)"-앞서 공부한 말씀입니다. 후히 주시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넉넉하게 주시되 가장 소중한 지혜를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면 시험에 말려들고 빠져버릴 턱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요, 나는 모든 것을 받은 사람입니다. 자격도 없는데 받았습니다. 받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으며 하나라도 있습니까? 생명에서부터 물질에 이르기까지 건강에서부터 지혜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한가지도 받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부모님에게도 불효자식이게 마련입니다. 자식된 도리로서 부모님에 대하여 생각해봅시다. 내가 부모님한테서 받지 않은 것이 있습니까? 신체발부는 말할 것도 없고, 먹고 입고 자는 것까지 다 받았습니다. 사랑을 받았고 입맛까지도 길들여졌습니다. 나의 세계관도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못된 사람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에게서 받은 것만 있고 남에게 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받은 것이 없는데 사람들은 나에게 어찌하여 달라고만 하는가, 나는 남에게 주는 것밖에 없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바른 신앙고백 위에서 생각하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받은 것뿐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받았습니다. 형제로부터, 이웃으로부터, 낯모르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로부터도 나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받고 삽니다. 신세를 많이 지고 삽니다. 일생을 두고 꼬박 갚아나간다 해도 다 갚을 길은 없습니다. 하늘에도 신세지고 땅에도 신세지고-참으로 많은 신세를 지고 살아갑니다. 다 받은 것뿐이다-이런 마음, 이런 고백으로 살아가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살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는가--성경에 나타난 대로 보십시다. 어찌 다 헤아리겠습니까마는 모든 것을 한마디로 드러낸 요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바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이만큼이나, 이토록이나 주셨습니다. 다 주신 것입니다.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응답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 8 : 32)." '독생자'를 주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무도 엄청난 은사(恩賜) '영생' 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그리고 '말씀' 을 주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요 17 : 8)." 바로 예수님의 기도(祈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소중한 은혜인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保惠師)를 너희에게 주사(요 14 : 16)"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엡 2 : 8)"-'구원'을 주셨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엡 2 : 8).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은사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였으며, 심지어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보면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이런 은사까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에 필요한 은사를 다 주십니다.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도 주셨습니다(엡 4 : 11).
모든 것을 다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에 대하여 그 성격을 세 차원에서 분석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각양 좋은 은사'라고 하였습니다. 다양하게 주심입니다. 똑같은 것으로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남과 똑같은 것을 받지 못했을 때에 불만을 품게 됩니다. 불만을 품고 불평을 하게 되면 내가 받은 바를 모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는 각양각색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것을 주고 저 사람에게는 저런 것을 주십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가르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이리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勸慰)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롬 12 : 6-8)."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그들과 함께 공부도 해보고 합니다.
그래서 보느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머리 (talent)'도 각양입디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기억력이 놀랍도록 비상해요. 한자리에서 전화번호를 3백 개도 넘게 외는 친구가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컴퓨터 같아 보였습니다. 사람 이름도 그만큼 잘 외어요. 아무튼 기억력이 얼마나 놀랍던지, 저는 이런 사람 볼 때마다 '아, 저사람 기억력의 10분의 1만이라도 내게 주었으면 좋겠다'하고 선망하게 됩니다. 제 기억력이라고 하면 도리없이 '0점'이거든요. 사람 이름은커녕 얼굴 기억하는 것도 먹통이랍니다. 참으로 면목없는 고백입니다마는 여기 헌금봉사 하시는 집사님들, 나와서 죽 서 계신 것을 뵙다보면 '저분도 우리 교회 교인이었던가?' 싶도록 기억에 어정쩡한 얼굴이 있습니다. 제가 이 모양입니다.
기막힌 노릇이 아닙니까?
그런데 가끔 가다 그처럼 기억력이 아주 좋은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자신있게 말하건대, 기억력 좋은 사람치고 창의력이 풍부한 사람이 없습니다. 흔히 발명가라고 하는 사람들,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사람들, 기억력이 아주 나쁩니다. 자기 나이도 모르는가 하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아마 에디슨같은 사람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뉴턴(Newton, Isaac)에게도 일화가 있습니다. 하루는 뉴턴이 난로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자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참다못해 가정부를 소리쳐 부릅니다. "뜨거워 죽겠으니 냉큼 불 좀 죽여라." 야단을 합니다. 그러자 가정부가 말합니다. "선생님, 의자를 뒤로 물리시면 됩니다." "오, 그렇지 참.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제야 알겠다는듯이 의자를 뒤로 물리더랍니다. 세계적인 과학자 뉴턴도 이 모양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사람은 이렇게 각양입니다. 자녀들 보고 공부 못한다고 나무랄 것이 아닙니다. 에디슨의 아이큐(IQ)가 두 자리수, 90이었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여러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은 발명을 하지 못합니다. 기억력이 좋은 사람은 창의력이 없습니다. 또 창의력이 있는 사람은 기억력이 없습니다. '머리'만 놓고 보더라도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가 다양합니다. 저마다 한 가지씩의 재능을 주신 것입니다.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공부해서 성공할 사람이 있고 장사해서 성공할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사해서 성공할 아이에게 학자가 되라 하고, 음악에는 관심조차 없는데 음악가가 되라고 하니 문제입니다. 거기에 망조(亡兆)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필경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은사(恩賜)는 각양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은사를 부러워하지 말고 내게 주신 은사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 하나를 놓고 보아도 이렇듯 다양한 은사일진대, 전체를 놓고 보면 말할 것도 없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은사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못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남과 다른 것을 받았을 뿐입니다. 나는 남과 다른 것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직시할 때에 비로소 내가 가진 것을 알게 됩니다. 내게 주신 은사는 볼 줄 모르고 남의 것만 쳐다보니 원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내게 남과 같은 것이 없다고 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얼굴을 보십시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은 참 재주가 좋으시다 싶습니다. 어떻게 하시기에 그리도 다르게 만드시는지 모릅니다. 얼굴도 다르고, 마음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머리의 구조도 저마다 다릅니다. 같은 법이 없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가 또 다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diversity of the gift-'은사의 다양성'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에게 있는 것은 내게 없고 또한 내게 있는 것은 저 사람에게 없다, 이것을 알아야 되겠는데 내게 주어진 것은 모르고 남의 것만 쳐다보면서 내게 그것과 같은 것이 없다고 불평을 합니다.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쪼록 '다양한 은사'를 아시기 바랍니다.
또한, 은사는 선(善)합니다. All giving is good.-하나님께서 주신 바 모든 것이 선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근본적으로 선하고 종말론적으로 선합니다. 당장은 이해가 안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나중에 보십시오. 반드시 선합니다. 합동하여 선을 이룹니다. 신앙으로 알 수 있고, 우리의 실제 경험에서 고백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은사'-은사는 좋은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은사는 온전합니다. '온전한 은사' 입니다. 본디 카리스마는 온전한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사를 바로 알고 비로 소화하고 바로 깨달으면 다른 것을 부러워할 이유가 없다-온전함이란 이것을 말함입니다.
내가 온전한 것을 쥐고 있으면 다른 것을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제 개인적인 이야기라 좀 외람됩니다마는, 제가 좋은 카메라를 하나 가지고 있습니다. 값으로 따지면 그리 비싼 것은 아니지만 지금부터 한 25년 전, 전국사진작가협회 회장직에 계시던 어느 장로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 카메라가 처음 나왔을 때, 두 개를 구해 오셔서 그 하나를 저에게 주셨습니다. "참 좋은 카메라입니다. 목사님을 위하여 하나 구했으니 잃어버리지 마시고 팔아버리지도 마시고 꼭 가지고 계십시오." 수집하는 물건으로 상점에서도 쉽게 살수가 없는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독일제 카메라인데 손안에 알맞게 드는 작은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카메라를 소중히 여겨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데, 실외에서 찍은 사진은 그것으로 찍은 것만큼 잘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어디를 갈 때면 늘상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데 좋은 것이 눈에 띄면 한 장씩 찍어둡니다. 이 카메라를 가지고 있으니 더는 부러운 카메라가 없습니다. 더 좋아보이는 카메라를 보아도 '내 것만 못해. 그 까짓것 아무 것도 아니야' 라고 자긍합니다. 다른 좋은 카메라가 있으면 시험해보자 하여 한 장면을 두 카메라로 찍어봅니다마는 역시 제것만은 못합니다. 그러니까 제 카메라가 제일 인 것입니다. 지금은 카메라점을 다 뒤져도 살수가 없다고 합니다. 비싼 것은 아니지만, 독일에서 더 생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결론짓겠습니다. 요컨대 온전한 것을 가진 사람은 상대적으로 부러운 게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세상것을 부러워하고 계십니까? 다이아몬드를 보면 탐이 나서 발이 안떨어지고, 누가 좋은 옷을 입고 지나가면 '나는 언제가야 저런 옷을 입어보나' 하고 부러워하십니까? 남의 것을 부러워하면 아직 온전한 은사의 그 깊은 뜻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옳게 예수 믿는 사람은 더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그 어떤 것을 보아도 다 시시하고 너절하고 별것이 아닙니다. 세상것에 대하여 아직도 부러운 게 많다면, 그것은 온전한 은사의 깊고 소중한 가치를 모르는 데에 기인합니다. 온전한 은사, 하나님께로서 오는 이 은사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선물로 주어진 소중한 것이기에 그 가치로 여타의 모든 가치를 다 부정하게 됩니다. 하늘 아래 부러운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온전한 은사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은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시는 하나님이요 좋으신 하니님이요, 그리고 또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본문은 '변함없으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변함없으시다(God's constancy)------하나님의 은혜의 지속성을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에는 변덕이 없습니다. 여러분, 혹 '하나님께서 변덕을 부리시면 어떻게 될까?' 하고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사람이 변덕을 부리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변덕을 부리시면 그야말로 큰일이 납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하나님은 변덕을 부리지 않으십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에 보면 뭘 좀 해보겠다고 열심을 내다가 며칠도 안되어 변덕을 부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창 열심을 내기에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했는데, 그것이 얼마를 못가더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하려거든 좀 꾸준히 하십니다. 시작을 했으면 끝을 봐야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변덕부리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절대적 사랑입니다.
은사는 수직적 관계에서 일방통행으로 내려오는 은사입니다. 아이들이 변덕부린다고 어른도 덩달아 변덕부릴 수 있습니까? 그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아이가 울고 떼를 쓴다고 해서 그 아이를 내다버리지는 않습니다. 그가 아직 어리기에 그렇습니다. 그가 아직 문리를 모르기에 그렇다고 너그러이 봐주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수직적으로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아이들이 어찌하건 그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변하지 않D쵹TXT+ 습니다. 공부를 잘해도 사랑하고 못해도 사랑합니다. 잘하면 좋아서 사랑하고 못하면 아픈 마음으로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도 이렇게 수직적입니다.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 변함없으신 은사입니다. 이것은 철학적 부동성이 아닙니다. 인격적 부동성이요 확실성입니다. 마치 좋으신 아버지의 사랑과 같이 우리에게 은혜와 은사 주심에 변함이 없으신 것입니다. 주시는 그 마음에 변함이 없으신 것입니다.
본문은 이것을 비유하여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오묘한 표현입니다. 여러분, 그림자가 어떻게 생깁니까? 어떠한 물체가 태양빛을 가리어 나타나는 검은 형상이 그림자입니다. 태양빛이 바로 머리 위에서 비추면 그림자가 생기지 않습니다마는 비추는 각도가 생기면 그림자가 나타납니다. 각도가 커질수록 그림자도 길어집니다. 그러므로 이 그림자는 지구에만 있는 것이지 태양 그 자체에는 없습니다.
지구가 자전하면서 그림자가 생기고, 또 그러는 과정에서 그 형상이 변하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변함이 없으신데 우리의 마음이 변덕스러워서 어떤 때에는 '좋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하고, 어떤 때에는 '나쁘신 하나님, 섭섭합니다'라는 둥 별소리를 다하는 것입니다. 좋으신 하나님께 대하여 우리는 좋지 못한 반응을 보이는 것입니다. 천문학적 표현으로 말씀합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에게는 그림자가 너무 많습니다. 이것을 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바로 응답하여야 하겠습니다.
또한,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흔히들 '야고보서에는 복음이 없다'라고 말합니다마는, 알고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으로 나았다' '말씀으로 출생케 했다'----이것이 복음입니다. 진리의 영을 말씀함이요 생명을 말씀함이요 중생을 말씀함입니다. 참복음이 여기에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재창조의 역사도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한 첫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낳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첫열매가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에 보면 첫열매는 첫자식이요, 곧 하나님의 것입니다. 첫것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것에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하여 바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첫열매가 되었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의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께 바쳐진 존재다'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쳐진 관계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첫열매가 맏아들을 가리키는 것이며, 뒤에 오는 자녀들에 대하여 선도적 입장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믿은 사람은 나중 믿은 사람의 선배가 되는 것입니다.
모범이 되어야 하고 본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먼저 믿은 사람은 나중 믿은 사람의 표본이 됩니다. 가끔 교인들이 처음 믿는 사람을 인도하여 교회에 나옵니다. 함께 나와서는 저에게 소개를 해줍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입니다." 그럴 때에 저는 악수를 하면서 말합니다. "축하합니다. 귀한 일입니다. 시작했으니 끝까지 잘 믿어봅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한 6개월 나오다보면 그럭저럭 알게도 되고 깨닫게도 됩니다. 그러니 서두르지 말고 꾸준하게 나오십시오." 마지막으로 옆에 서 있는 집사님을 가리키면서 한마디 더 합니다. "인도해주신 이 집사님 만큼만 나오십시오." 그러면 인도해오신 그 집사님, 펄쩍 뛰며 손을 가로젓습니다. "저처럼 하면 안됩니다." "아닙니다. 물은 수위 이상 올라가지 못합니다." 오랫동안 목회를 하면서 가만히 보아오니 처음 믿는 사람은 그를 인도한 사람 만큼밖에 못믿습니다. 인도한 사람의 스타일대로 믿어요. 인도한 사람이 낮예배에만 나오면 그사람도 낮예배에만 나옵니다. 또 인도한 사람이 새벽기도회에 나오면 그사람도 새벽부터 시작합니다.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사람이 인도했으면 그사람은 한달에 한 번밖에 안나옵니다. 그래서 맏아들의 역할이 중요한 것입니다.
첫열매가 중요합니다.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복음의 진리 안에서 태어난 첫열매로의 책임이 크다. 정신을 차리고 후배들을 위해서도 열심히 믿어라'------이렇게 말씀하시는 줄로 압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생각해보십시다. 시련 중에 신관은 새로워집니다.
많은 시험을 당하면서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고백이 새로워지고 온전해지고 바로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바른 신관을 가지고 있어야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시험에 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모자라서 넘어지는 것도 아니요 인간관계가 잘못되어서 넘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께 대한 신관이 잘못되어서 넘어집니다.
좋으신 하나님, 내게 특별히 좋으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세상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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