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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문에 매인 자(4장 1~7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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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문에 매인 자(417)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의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

 

본문에 보면 엄연히 유업을 이을 자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당한 후사이지만 어렸을 동안에는 부득불 초등학문 아래 있게 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초등학문에 매인 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어렸을 때에는 모두 유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전13:11)"라고 사도 바울은 그의 편지에서 고백한 바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보면 나이는 꽤 많이 먹었는데도 정신적으로 여전히 어린아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신앙생활도 어지간히 한 것 같은데 신앙적인 차원이 아직 유치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린아이 정도라면 그래도 괜찮은 편입니다. 배냇짓까지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는 유치한 짓을 한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어린아이의 수준에서 떠나지 못한 미숙아로 평생을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오늘의 본문 중에 '어렸을 동안'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자연히 시간이 지나 성장하면 훌륭한 인격으로, 하나님의 사람으로 나타나게 되겠습니다마는 아직까지는 어린아이입니다. 중생(重生)은 헬라어로 '겐네데아노덴'이라고 합니다. 본디 '위로부터 태어난다'라는 뜻입니다. 땅으로부터 난 것이 아니요 위로부터 났습니다. 영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성장하지 못했습니다. 영적으로 유아기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유감스러운 심령들이 참 많습니다. 속히 성장하여 어린 상태에서 벗어나 믿음의 장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서 당시의 이스라엘 풍습을 살펴보는 것은 본문 내용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옛날뿐만 아니라 지금도 풍습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언젠가 제가 유대 회당을 방문하였다가 마침 성인식(成人式) 장면을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매달 성인이 되는 어린아이들을 데려다가 식을 거행하는데 참으로 아름답고 굉장한 일입니다. 요즘 같은 대형 교회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마는 교인이 300여 명 정도 되는 회당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어린아이 한 명이 성인이 되는데 이처럼 정중한 예식을 거행하는 것입니다. 성인식은 열두 번째 생일이 지난 다음의 첫번 안식일에 드리게 됩니다. 이는 아주 엄격하게 지켜집니다. 난 지 8일 만에 할례 받고 열두 번째 생일이 지난 다음 첫 주일에 아버지가 자녀의 손목을 잡고 회당으로 갑니다. 여기서 율법의 아들, 히브리어로 '바르 미츠바(Bar Mitzvah)'가 되는 식을 거행합니다.

제가 본 바로 성인식은 대개 이렇게 진행됩니다. 아버지가 어린아이의 손목을 잡고 강대상으로 올라옵니다. 넓은 강대상 위에 올라와서는 둘둘 말린 히브리어 성경책 앞에 어린아이를 세웁니다. 이제 그 어려운 성경책을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열두 살박이가 읽기 시작합니다.

못 읽으면 안됩니다. 읽어야 유대사람이 됩니다. 반드시 그 자리에서 읽어내야 합니다. 그것도 아무 데나 읽는 것이 아니라 회당장이 짚어 주는 곳을 읽어야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은 미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아이들이 그 난해한 히브리어 성경을 읽어낸다는 사실입니다. 읽고 나면 다시 다른 곳을 또 읽게 합니다. 이런 방법으로 10분 동안을 계속 읽힙니다. 혹 읽는 도중에 틀리거나 막히면 회당장이 옆에서 불러줍니다. 그것으로도 안되면 아버지가 도와줍니다. 그런데도 자꾸 틀립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진 아이가 그만 엉엉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버지가 손수건을 꺼내어 닦아주고는 다시 읽게 합니다. 이렇게 10분이 지나서 성경읽기를 마치면 아이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다음으로 아버지가 큰소리로 기도문을 읽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원하는 축복의 기도입니다. ", 하나님! 나에게 이 소년을 위한 의무를 취하신 당신께 영광을 돌리나이다!" 이어서 아이가 다시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그리고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시여, 이 거룩한 날에 소년으로부터 성인이 되는 표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당신께 눈을 들어 성실과 진리로 증거합니다.

나는 당신의 계명을 지키고 당신을 향한 의무를 감당할 것을 맹세합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맹세의 기도를 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회당장이 나와 축복함으로써 이 어려운 성인식이 모두 끝납니다. 이제 이 아이는 성인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성원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한 사람 한 사람의 유대인이 탄생되는 것입니다. 한편 헬라사람들은 자녀가 18세가 되면 일종의 군사학교에 보내어 군사훈련을 시켰다고 합니다. 2천 년 전 로마에서는 14세에서 17세 사이에 성인이 된다고 보았고 25세가 되면 그때부터는 독자적으로 행동하고 모든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오래전부터 성인식의 통과의례(通過儀禮)가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어렸을 때가 있고 성인이 되는 때가 있습니다. 어렸을 때는 어쩔수없이 무엇에든 매여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엄연한 아들이요 유업을 이을 자이지만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없기에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 둔다고 했습니다. 모든 것의 엄연한 주인이지만 후견인의 밑에 있어야 합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의 일입니다. 여름방학 동안에 '윌리암스 포스'라고 하는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때 스물대여섯 살의 청년이 저와 함께 일했습니다. 저와 똑같이 아침 730분에 출근을 하고 저녁 4시까지 일을 합니다. 기름때가 묻은 옷을 입은 채 무척 성실하게 일합니다. 저는 그 청년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단지 이름이 윌리암스라고 하기에 윌리암스인가보다 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들이 사장님의 아들이라고 수군거립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일합니다. 도대체 얼마 동안이나 그 일을 계속하는가 했더니 5년이라고 합니다. 기술도 별로 필요치 않은 맨 밑바닥의 일을 5년 동안이나 하는 것입니다. 그 고생을 다 마쳐야 회사를 물려준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너무 쉽게 갖다주어서 감당을 못하지 않습니까? 맨 밑바닥에서부터 똑같이 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과 조금도 차이 없이 일하는 사장의 아들을 보고 많은 것을 생각했습니다. 어렸을 때에는 엄연한 주인의 아들이지만 종과 같이 되어야 하고 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후견인 밑에 두었다, 초등학문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공부한대로 몽학선생 아래 있다는 말입니다.

초등학문은 유치한 공부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책이나 교과서를 가만히 보십시오. 그림이 많습니다. 글자도 주먹만하게 큰 것들이 가끔씩 나옵니다. 어른의 책일수록 그림은 적어지고 글자가 많아집니다. 또 글자 크기가 작아집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만화만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입니다. 신령한 것만 좋아합니다. 다시 말해서 꿈꾸는 것만 좋아합니다. 만화책이 별다른 것입니까? 환상입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그림만 좋아합니다. 작은 글씨로 세세히 기록된 말씀은 읽기 싫어합니다. 말씀을 읽고 소화할 생각은 하지 않고 잠자리에 편안히 누워서 '오늘밤에도 꿈속에서 말씀해주십시오'합니다. 꿈만 좋아합니다. 그림책만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유치하기 때문입니다. 초등학문 아래 둘 수밖에 없습니다. 어린아이이기에 그림으로 보여줘야 하고, 큰 글자로 가르쳐야 합니다. 동화도 해야 하고 호랑이 담배 먹던 때의 이야기도 해주어야 합니다. 그 수준에 맞게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어린아이이기에 종노릇해야 합니다. 종들과 마찬가지로 억압받아야 됩니다. 종에게는 자유 선택이 없습니다.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합니다. 어렸을 때에 부모님은 자식을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이렇게 하라, 어머니가 저렇게 하라 하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심지어 청지기가 와서 이렇게 하라고 시켜도 순종해야 합니다. 주인의 아들일지라도 도리가 없습니다. 이처럼 어렸을 때에는 부득불 엄격한 제재를 받으면서 자유 없이 교육을 받는 과정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신앙적인 면에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은 많은 제재 하에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치하다'는 말을 좀더 심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시야가 좁다'는 뜻입니다.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종합하여 사고하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한 가지만을 생각합니다. 교회, 나라, 세계, 그리고 하나님을 다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어린아이는 앞뒤 가리지 않습니다. 현재의 것만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어린아이처럼 생각이 좁은 사람이 있습니다. 나만 위해달라-전부가 자기 중심입니다. 생각이 얕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못합니다. 이런 유치한 상태에 있으면 어린아이입니다. 금새 웃다가 금새 웁니다. 매사에 반응이 너무 빠르고 변덕스럽습니다. 조금 섭섭한 말을 들었어도 최소한 일주일은 기도하면서 생각한 다음에 말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토록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도 됩니다. 허구한 날이 있는데 그렇게 호들갑을 떨 필요가 있습니까?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두고보아야 압니다. 언제든지 좀더 깊이 상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어린아이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몹시 조급합니다. 어머니가 우유를 타서 아기에게 먹이려고 합니다. 이제 마개만 열면 제 입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 몇초를 못 참아서 울어제낍니다. 단 몇초를 못 기다립니다. 어른 중에도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집 아이가 너무 버릇이 나빠서 장래가 걱정이에요" "몇 살인데요?"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너무들 조급하게 판단하려고 합니다.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적으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의지적으로 결정하지 못합니다. 전부가 감정주도적입니다. 그러므로 유치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언제나 감정주도적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울다 웃다, 밤낮 감정에 끌려 사는 것,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아무에게나 끌려 다닙니다.

끄는대로 끌려갑니다. 이사람 말도 그럴듯하고 저사람 말도 옳은 것 같습니다.

부흥사가 와서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가면 당장에 그 부흥사를 닮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모양이 그 부흥사를 그대로 닮습니다. 일년에 부흥회를 두 번 하면 기도하는 모양이 두 번 둔갑합니다. 부흥사가 올 때마다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모양도 옳은 것 같고 저 모양도 옳은 것 같아서입니다. 이리로 저리로 천방지축 끌려다닙니다. 어린아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스스로 판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는 부득불 억압 밑에 두어야 하고, 초등학문 밑에 두어야 하고, 심지어 청지기와 후견인 밑에 두어야 한다고 본문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거들어주어야 됩니다. 누군가에게 끌려가야 됩니다. 어느 정도 끌려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4절에 "때가 차매"라고 했습니다. 기한이 차서 주님이 오셨다고 합니다. 때가 찼다는 말은 성경이 예언한 때가 찼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경륜에 때가 찼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마는 보편적으로 많은 학자들이 인정하는 설은 이렇습니다. 당시의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없었습니다. 복음 전하기에 알맞은 시기입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도 바울로서는 온 세계를 거침없이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백성들이 억압받기는 했지만 그런 대로 로마적인 평화가 있던 시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른바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마의 평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바로 그때에 주님이 오셨습니다. 문화적으로는 헬라 문화가 온 세계에 통용되는 때입니다. 헬라어와 헬라 문화가 통용되는 때라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에 이러한 언어적인 준비가 없었더라면 제아무리 재주가 많은 사도 바울이지만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각 나라마다 마을마다 언어가 전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곳을 가든지 헬라어로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미 헬라 문화가 온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가 찼다는 것은 이것을 말합니다. 한편 종교적으로 유일신을 믿는 히브리적인 종교가 자리잡고, 메시야 대망사상이 충만해 있는, 그런 때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때를 택하여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주셨는데, 여기에 두 가지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되었다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사람의 몸을 입어 오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호 로고스 사르크스 에게네토'-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성육신의 교리입니다.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하나는 "율법 아래 나게 하신"-율법 아래 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율법의 모든 법을 다 지키는 자리에 계셨다는 말입니다.

또한 주님께서 오신 데에는 두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속량(贖良)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5)" 하심입니다. 먼저 속량하셨다 하는 말을 상고해봅시다. '구원''속량'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늘 구원한다 구원한다 라고 말합니다마는 구원은 건진다, 무엇으로부터 해방한다는 말입니다. 약간은 소극적인 맛이 있는 동시에 자유와 해방의 개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하여 속량(贖良)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당시의 문화를 보면 이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노예를 살 때에 노예의 몸값을 지불합니다. 속량은 값을 지불했다, 댓가를 치렀다는 뜻입니다. 건져낸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이것이 곧 십자가의 뜻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죽어야 할 나를 대신하여 그가 죽으셨다, 피의 값을 치르셨다, 우리를 구원하셨다, 속량하셨다 하는 것을 능히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속량하시려고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로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는데 율법을 다 지키셨습니다. 아들은 이 법을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법에 매입니다. 율법을 완성하시고자 함입니다. 심지어 주님께서는 세례까지 받으십니다. 순결하고 죄 없으시면서도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 모두가 율법을 대신 지킨다는 의미의 행위입니다. 완전히 율법을 지키십니다.

둘째로 율법을 완전히 지켰으므로 그는 죽지 않아야 합니다. 죽을 필요가 없고 당연히 죽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 아래 매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점은 논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죄인이 아니면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죄인인 사람이 죄인이 아닌 사람처럼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는 죽을 필요가 없는데 죽었습니다. 이는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다 지키셨습니다. 그러면 의인이 아닙니까? 의인이므로 죽지 말아야 하는데 그는 죽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을 못 지킨 죄인된 우리가 율법을 지킨 자처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 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을 지키고, 죽지 않으실 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습니다. 값을 치르고 사셨습니다. 거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감상적으로 '내가 너를 용서하마'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단순히 '내가 너를 사랑한다'가 아닙니다.

네가 치를 것을 내가 대신 치렀다, 네가 죽을 것인데 내가 대신 죽었다, 네가 져야 할 십자가를 내가 대신 졌다-이것입니다. 속량하기 위해서 주님은 오셨습니다.

두 번째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고자 오셨다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과 도대체 이 세상에서 무엇들 이루었는가 하는 것은 예수님 생애의 절정에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다음 막달라 마리아에게 처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그지없이 거룩한 순간에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20:17)"-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아주기 위하여, 잃어버린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되돌려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셨다는 말은 아들의 위치를 찾아주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나의 신분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데 하나님의 자녀임을 가르쳐 주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른 말로 비유하여 '양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옛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합니다. 또한 여기에는 수반되는 의무도 있고 특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얻은 것이 하나님의 자녀됨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볼 때마다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 하나님의 자녀되는 자기의 존재 의미를 끊임없이 확인해나가야 합니다. "모든 기도의 응답은 하나로 통한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기도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재확인하는 행위가 된다는 뜻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 내가 너를 지극히 사랑한다-무슨 기도를 하였든지 마지막에 내게 주시는 응답입니다.

혹 내가 병들었거나 실패했더라도 이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온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소화하고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의 명분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율법과는 무관합니다. 어렸을 때에는 율법에 매이나 성숙하면 율법을 초월합니다. 보십시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하지 말라는 소리를 귀가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금지하는 것이 많고 복잡했습니다. 한대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유치하게 배우며 자랍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성숙하면 달라집니다. 네 마음대로 하라-그리고는 간섭이 없습니다. 얼마전만 해도 미국에서 많이 일어나던 일인데 요즘은 우리 나라에서도 그런 일이 종종 있다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치다가 이혼하게 되는 불상사입니다. 운전이 미숙한 사람에게 "마음대로 해보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하면 안돼, 저렇게 하면 안돼 하며 냉정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잘못이라도 생기면 "그렇게 하면 죽어!"라고 소리치며 한대 때립니다. 생전 처음으로 남편한테 얻어 맞고나니 '내 남편이 저렇게 무자비할 줄 몰랐다, 살고 싶지 않다'-이런 생각이 듭니다. 운전을 처음 배울 때에는 어지간히 문제가 많습니다. 옆에서 잔소리를 하도 해대니까 운전대를 잡고서는 '운전 좀 한다고 재네'하며 뾰루퉁해집니다.

그러나 잔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잔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시간입니다. 때로는 한대씩 얻어맞을 수도 있지만 그것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느 정도 능숙해지면 누가 잔소리를 하겠습니까? 잔소리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아직 어립니까? 어리다면 부득불 매를 맞아야 되고, 권고도 들어야 되고, 책망도 들어야 되고, 속박을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같은 놈은 좀 맞아야 돼, 아직도 비뚤어진 것이 많아' '나같은 놈은 성질이 못돼서 좀 어려운 일을 당해야 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완전히 성숙한 사람이기에 전혀 간섭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내버려두어도 상관없겠습니까? 깊이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어린아이일 때에는 매여 있으나 어른이 되면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어른이 되면 율법에 매이지 않습니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성령이 간섭합니다. 하나님이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에 보내셨습니다. 이제는 성령에 이끌리어 살게 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습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를 말씀에로 인도합니다. 우리 마음 안에 말씀과 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에 이에 이끌리어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영과 말씀에 이끌리어 사는 것입니다. 누가 간섭하고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사람은 남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남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나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위에서 부르신 상을 바라보면서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어떠한 간섭도 없습니다. 자유롭습니다. 성령에 이끌리어 사는 사람은 최대의 자유를 누립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는 율법의 지배를 받지만 성숙하면 성령의 지배를 받습니다. 오직 성령의 지배 아래 다스림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나를 다스립니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기에 유업을 이어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이 다 유업이요 축복입니다. 이 유업을 이어가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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