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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덕을 세우라(롬14:13~23)
오늘의 본문은 "서로 덕을 세우기를 힘쓰라(19절)"하고 말씀합니다. '서로 덕을 세우라'-우리는 옳은 것은 다 옳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실 덕을 세워야만 옳은 일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 옳은 일이요 또 나 자신에 대해서도 옳은 일이라 생각된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꼭 옳은 일이 되고 덕이 되는 일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생각해볼 때에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나 자신에게 옳고, 그 자체가 진리요, 하나님 앞에서도 옳게 생각이 될지라도 사람에게 덕을 끼치지 못하면, 덕을 세우지 못하면 그것은 부득불 옳은 일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기준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덕만 세우겠다고 사람에게만 좋게 하려 하다가 하나님의 의가 무너져서도 안됩니다. 동시에 나 자신의 마음속에 신령한 은혜와 신령한 기쁨이 사라져버려도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이 세 가지 차원에서 온전히 합해질 때에 비로소 참 덕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선행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선하고, 나 자신에게 선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덕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고 하니, 사람은 각각 자기가 태어난 배경이 있습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자기도 알게 모르게 문화화한 인생입니다.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습관, 자기 생각에 어떤 소회(所懷)를 가지고 있습니다. frame of reference가 머리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덕이 되려면 그만의 특별한 사정, 거기에 맞추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을 이루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내게는 옳은데 다른 사람에게는 옳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분명히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 제일 좋은 예가 음식입니다. 분명히 외양도 좋은 음식이에요. 이것은 진리입니다. 또 내에는 맛이 있어요. 그런데 저 사람에게는 맛이 없어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기서 덕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에 주말이 되면 음식을 해 먹어야 할 때도 있고 사 먹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도에서 온 학생들이 방안에서 카레라이스를 해 먹는 데도 정말 질색이었습니다. 양고기를 넣고 끓여 먹는 그 음식은 굉장히 냄새가 진해서, 카레라이스를 좋아하는 편인 저도 그것은 못먹겠습니다. 그들이 같이 먹자고 해서 한번 먹어봤는데 도저히 목으로 넘길 수가 없어요. 그 냄새부터가 싫어요.
또 그들은 카레라이스를 그냥 세 손가락으로 퍼먹는데, 그 음식이 맛있어서인지 손가락을 쪽쪽 빨아요. 손가락을 빨아가면서 먹어야 맛있다고 해요. 우리는 도저히 그렇게 못합니다. 보세요. 이것이 나름의 문화 아닙니까? 어떻게 해야 덕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너는 옳고 내가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생각만 옳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옳으면 그만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서로 덕을 세우라'하고 말씀합니다. 참으러 덕을 세우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집안에 어린아이가 하나 있으면 온 집안 식구가 다 어린아이가 된다'-어른들은 '진지 잡수시오' 혹은 '식사하십시오'라고들 말합니다마는, 어린아이한테 잘 알아듣게 하기 위해서 '맘마 먹어라'라고 합니다. 다 '맘마'가 되어버려요. 아이가 좋아하는 말이니까요. 우리 집에서도 제 손자가 '할아버지'라는 말을 잘 못해서 저한테 '하부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나타나면 모두들 '하부지 온다'라고 해요. 속절없이 '하부지'가 되고 말아요.
온 집안 식구가 저를 '하부지'라고 불러요. 자, 이것이 말하자면 덕을 세우는 것이에요. 그런데 누가 일부러 그렇게 하자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예요. 그 어린아이를 좋아하고 사랑하다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 어린아이와 같은 세계관, 같은 언어, 같은 관심, 같은 표현으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덕을 세우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사랑에는 세 가지 원리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랑한다, 사랑한다, 쉽게들 말합니다마는 그래, 무슨 돈 보따리를 준다든가, 먹을 것을 준다든가 하는 것도 다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사랑에는 기본적으로 아주 원리적인 것이 세 가지 있어요. 이것이 있으면 사랑이고, 이것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은 믿어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믿어지는 것이에요. 상대방은 말이 다 옳게 믿어져요. 거짓말을 해도 믿어져요. 그래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저는 며칠전에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누구에게 어떤 사람을 소개했는데, 그 분이 목사인 저와 본인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곽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만일에 곽 목사님이 도둑질을 하고 가자고 하시면 저는 따라가서 망을 볼 사람입니다. 뭐 따로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목사님이 가자면 갈 것이고 하라면 할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제 일생에 그런 이야기 듣기는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여태껏 그런 말은 들어 본 일이 없어요.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예요? '목사님이 도둑질을 하러 가자고 하면 따라가서 망보겠습니다'-아, 그것 참 좋은 말이에요. 굉장한 말이에요. 참으로 굉장한 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믿어주는 것이니까요. 그래, 설명이 필요 없어요. 여러분, 자꾸 설명하려고 하지 마세요. 설명을 하라고 하지도 마세요. 사랑이 없으면 말이 많아지는 것이에요. 사랑하면 믿어지는데 무슨 긴 설명이 필요하겠어요? 다 설명 듣고나서, 이해관계를 따지고 나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사랑하면 전부가 믿어지는 것이에요. 믿어지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면 이해가 됩니다. 어떤 처지라도 이해가 됩니다. 그렇다 하면 '아, 그렇겠다'하고, 아프다 하면 '아, 아프겠다'하고, 슬프다 하면 '아, 슬프겠다'하고, 그 처지가 충분히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사정이 곧 내가 겪는 사정인 것처럼 이해가 됩니다. under-standing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이해가 안돼요.
그것은 벽이 생긴 거예요. 거리가 멀어진 것입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머니는 아이들이 할 줄 모르는 말까지 다 이해를 해요. 사랑하기 때문에 벌써 '아'하면 알고 '어'하면 눈치채지 않습니까? 얼굴 표정만 봐도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아요. 그런데 그 많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사랑이 떠났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세 번째 원리는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혹은 기대하는 것이에요. 오늘은 좀 유치하더라도, 마음에 안 들더라도 얼마든지 기다려줍니다. 몰라서 실수를 한 것이겠지, 그런고로 내일은 안 그럴 것이다, 오늘은 이렇지만 내일은 안 그럴 것이다, 지금은 유치해서 그렇지만 이제 크면 안 그럴 것이다-이렇게, 얼마든지 기다려줍니다. 기다려주는 마음,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하게 생각을 하고, 당장 결정을 하려고 하고…… 그렇게 여유가 없어지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오래오래 기다리지 않습니까? 몇 년 도 좋아요. 얼마라도 더 기다릴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기다림이 힘들게 되면 이미 사랑의 원리를 떠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은 본문에서 보듯이 덕을 세우려면 믿어주어야 합니다. 이해해주어야 합니다. 참아주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이 이루어질 때에 덕을 세우게 됩니다. 상대방이 나와 같기를 바라는 게 아니에요. 어느 사이에 내가 저와 같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참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서로 판단하지 말고(13절)"-이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으므로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본문은 좀더 적극적으로 말씀합니다.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13절)"-상대방을 오해하거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거칠 것이 있게 하거나, 약해질 수 있는 그런 요소를 두지 말라 함입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상대방이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을 하지 말라, 그런 행동을 보이지 말라, 또 상대방이 마음 상할 이야기나 일들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을 비켜가야 한다는 것이에요. 자꾸만 마음 상할 것을 갖다놓으면서 사랑해달라고 하면 안되지요. 거기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가끔 이런 경우가 있어요. 부부간에 언짢은 일이 생겼을 때에 그 문제를 가지고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분들한테 저는 이렇게 물어봅니다. "몇 년이나 같이 살았습니까?" "20년 살았습니다." "그러면 무슨 말을 하면 남편이 기분 나빠한다는 것을 압니까, 모릅니까?" "물론 알지요." "그러면 그런 말을 왜 했습니까?" 그렇잖아요? 무슨 말을 하면 기분 나빠하고, 무슨 말을 하면 기분 좋아한다는 것을 이제는 알만하잖아요? 그런데 꼭 기분 나뿐 말만 골라서 했어요. 그러고도 무사하기를 바랍니까? 그러고도 평안하기를 바랐습니까? 이것이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이에요.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어요. 그것만 건드리면 터져요. 비켜가야 해요. 절대로 거치면 안돼요.
이제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가령 남편은 대학을 나오고 부인은 국민학교 나왔다고 합시다. 이런 경우라면 무슨 말을 하든지 남편은 "무식한 것"-이 말을 하면 안됩니다. 그랬다가는 다 끝나고 말아요. 그렇지 않아요? 상대가 가지고 있는 핸디캡을 건드리면 안되는 것이에요. 절대로 안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돈 못버는 남편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본인도 괴로워하고 있어요. 자기 책임을 다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남편하고 살면서 아내가 '돈도 못버는 주제에'라고 한마디만 한다면 영락없이 끝나고 말지요. 이게 바로 거치는 것입니다. 덕을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이에요. 요새도 걸핏하면 누가 자살했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마는, 바로 이것 때문에 자살을 하는 것입니다. 돈 못버는 남편을 보고 '돈도 못 버는 것이 밥만 먹는다'라고 한마디 해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떻게 살아남겠어요? 그래, 남편이 밖에 나가서 죽은 다음에 '나는 말 한마디 한 것밖에 없는데'라고 변명하겠어요?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어요. 헛점이 있어요. 그것만 건드리면 넘어지는 것이에요. 특별히 키 작은 사람, 키 큰 사람이 있어요. 키 큰 사람보고 싱겁다고 그러면 큰일이고, 또 키 작은 사람보고 키가 작으니까 속도 작다고 그랬다가는 이제 그 사람하고 다시 만나기는 틀렸어요. 영 친해질 수 없어요.
그런고로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하고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 교인들 모임이 있을 때에나 어떤 자리에 번쩍번쩍 요란하게 차리고 가지 마세요.
다이아반지 끼고 가지 마세요. 이것도 거치는 것이에요.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방문할 때에 그렇듯 요란하게 하고, 밍크옷 걸치고 가면 되겠습니까, 안되겠습니까? 이게 바로 거치는 것이 됩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내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질로 구제하는 것만 봉사인 줄 알지만 그게 아닙니다. 덕을 세워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판단하지 말라, 뿐만아니라 형제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은 두지 말라, 그런 것은 말도 말고 보이지도 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좀더 적극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의미에서 혹 내 마음이 괴롭고 언짢은 때에라도 너무 그렇게 죽어가는 얼굴로 나타나지 마세요. 내 마음에 어두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어서 기도하는 중에 있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기분을 위해서 웃으면서 대할 필요가 있어요. 교회에 나올 때에 혹 나에게 문제가 많이 있더라도 반가운 얼굴로 나오는 것이 큰 구제입니다. 웃는 얼굴, 그것이 보통 구제가 아닙니다. 만일에 그렇지 않고 잔뜩 찌푸려 가지고 교회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만나자마자 "어디 아파요? 무슨 일 있어요?"하지 않습니까? 들어가서 '무슨 일이 있나봐'-이렇게 되면 이것도 걱정을 끼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고로 염려하지 말라, 그런 말씀입니다.
또하나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14절)"-중요한 말씀입니다.
사실 깊이 생각해보면 거룩함과 속된 것, 성속(聖俗)의 문제에 확실한 형식적 구별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자, 우리가 웃을 입었습니다. 어떤 옷을 입는 것이 거룩한 것입니까? 빨간 옷입니까? 노란 옷입니까? 검은 옷입니까? 우리네 교회에서는 목사님들이 검은 가운을 많이 입습니다마는, 태국에서는 절대로 검은 옷은 안 입습니다. 푸른 옷을 입습니다. 제가 볼 때에는 꼭 죄수 옷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는 검은 옷은 상복이에요. 검은색만 보면 죽은 사람이 생각난다고 해요. 그래서 푸른 옷을 입어요.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는 푸른 옷은 죄수 옷 같아요. 자, 어느 쪽이 거룩하고 어느 쪽이 속된 것입니까? 이것은 각각 자기네 나름대로 가진 세계관이기 때문에 비판은 할 수 없습니다. 다양하고 문화적이고 복잡해요. 그런고로 스스로 속된 것은 없다고 말씀합니다. 음식으로 말해도 이것은 깨끗한 음식이고 저것은 더러운 음식이다, 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속되게 먹는 사람에게는 속된 것이고, 감사함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유익한 것이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성경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14절)"라고 말씀합니다.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중립입니다. 중립적 존재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소유하면 깨끗한 것이고, 더러운 마음으로 보고 듣고 만지면 더러워지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고로 문제는 사람입니다. 사랑으로 행할 때에만 좋은 것이에요. 사랑에서 떠날 때에는 악이 되는 것이고, 부덕함이 되는 것이고, 속된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성경에는 인간 관계에 대한 대단히 중요한 요절이 있습니다. 이 본문은 기독교 윤리에서는 핵심적으로 생각하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15절)."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관계를 대략 세 가지로 구분하여 생각합니다. 그 하나가 내가 살아감에 있어서, 혹은 내가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수단화하는 것입니다. 유대인 출신 철학자인 마틴 부버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I AND IT'의 관계라고 말했습니다. 유명한 그의 저서「I and You」에서 한 말입니다. 'I AND IT'---IT은 물건이에요. 상대방을 물건으로 생각하는 것이에요. 상대방을 내가 돈벌기 위한 수단으로 치부하는 것이에요. 내가 돈을 벌자면 저가 물건을 사줘야 하니까 친절하게 대합니다. 친절이 수단이에요. 웃음도 수단이에요. 심지어는 봉사를 한다 하더라도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명예를 얻으려고 한다면 그것 역시 수단이에요. 웃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웃음이 수단이 되면 창녀예요. 흔히들 '웃음 파는 여자'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쨌든 내가 기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설사 자기 아내와의 관계라 해도 사랑이 없는 행위라면 간음이다.' 결국은 상대방을 수단으로 하는 것입니다. 나 기쁘기 위해서 이용하는 것입니다. 나 즐겁기 위해서 상대방을 수단으로 사용한다고 하면 그것은 죄가 되는 것이에요.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에는 이것에 한계를 긋기가 참 어려워요.
제가 인천에서 목회를 할 때, 이름을 대지는 않겠습니다마는 장로님이면서 외과의사인 분이 있었습니다. 수술을 잘 하시기로 유명한 분이었어요. 언젠가 그 집에 가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부인이 자꾸 남편한테 돈을 달라고 합니다. 용돈이 필요하다고, 꼭 쓸데가 있다고요. 돈이 없다고 해도 자꾸만 부인이 돈을 달라고 조르니까, 나중에는 남편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 말을 두고두고 잊지 않아요. "내일 가서 하나 째고 줄게." 내일 병원에 가서 수술하면 수술비용이 나오니까 그 돈을 주겠다는 거예요. 자, 수술이라는 것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까? 돈벌기 위해서 한다면 이것, 야단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분한테 노골적으로 물었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됩니까?" 그랬더니 "어느 선에 가서는 그런 고민을 할 때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분의 이야기인즉, 수술해야 되느냐, 안해야 되느냐-그럴 때가 있다고 해요. 지금 수술 안하고 그냥 낮게 할 수도 있어요. 언젠가는 다시 재발해서 다시 수술할 때가 있을지 몰라도 좌우간 당장은 수술 안해도 됩니다. 그러나 수술해서 나쁠 것은 없어요. 나 돈벌고, 저 안전하니까요. 또 어느 시간에 가서는 반드시 수술해야 할 때가 있어요. 어쨌든 수술할까, 그럴 때는 눈앞에 돈이 왔다갔다 한답니다. 보세요. 환자를 치료하는 데도 돈벌기 위해 치료한다면 얘기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수단이 되면 안됩니다. 상대방을 수단화하는 거예요. 나 돈벌기 위한 수단이요, 나 즐겁기 위한 수단이요, 내 향락을 위한 수단이요, 내 기쁨을 위한 수단으로 상대방을 대하게 될 때에 그 인간관계는 잘못된 것입니다.
두 번째가 'I and You'--'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너'입니다. 이것은 인간 대 인간, 인격 대 인격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을 키우면서도 '이 아이를 크게 키워서 내가 늙은 다음에 덕을 좀 봐야겠다'하면 그게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격 대 인격으로 대할 때에만 진정한 바른 인간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humanism입니다. 인간 대 인간-그의 피부색도 보지 말고 그의 지위도 보지 말고, 돈도 보지 말고, 명예도 보지 말고, 어디까지나 일 대 일, 인간 대 인간으로서만 대하는 것이에요. 아름다운 관계예요. 여기에는 남녀노소가 없습니다. 다만 인간 대 인간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렇게 대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바른 관계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본문에서는 이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인간관계를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15절)." 이웃을 나와 너의 관계에서 보는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로 보는 것이에요.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이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어요.
이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저를 대하라는 거예요.
그리스도께서 엄청난 값을 지불하셔서, 십자가의 값을 지불하셔서 저를 구속하셨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소중합니까?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두 자기를 생각합니다. 하나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이냐'입니다. 우리 인간이 얼마나 큰 죄인이기에 그가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까? 또한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느냐'입니다. 얼마나 사랑하시면 저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바로 거기에 우리의 삶의 가치가 현존하는 것이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대할 때에도 저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저를 사랑하시고,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엄청난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 사람을 대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비판할 것 없어요. 나무랄 것도 없어요. 저를 아주 소중한 존재로 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윤리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로, 이웃을 그리스도로, 그리스도께 십자가에 죽으신 그 엄청난 값을 지불한 구속받은 인간으로 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저를 위해 죽으셨는데 내가 함부로 대해서야 되겠습니까? 주께서는 저를 살리기 위해 죽으셨는데 내가 저를 시험거리로 해서야 되겠습니까? 낙심하게 만들어서야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여기에 기독교의 윤리가 있습니다.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대단히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오늘의 본문은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16절)"라고 말씀합니다. 동기가 좋아요, 그러나 방법이 잘못되면 비방을 받아요. 행위는 정직해요. 그러나 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 결과는 또 빗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선한 일,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해서 한 일도 결과적으로는 잘못될 때가 많아요.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지혜가 없었어요. 그리고 깊은 사랑이 없었어요.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사랑한다고 하고, 좋은 일 한다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가 나쁠 때도 있습니다. 바로 이 두 가지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은 17절로부터 결론적인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먼저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간단하게 말씀합니다마는, 철학적으로 설명하다면 여기에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번영도 아니요, 풍요도 아니요, 성취의 문제도 아닙니다. 흔히 말하는 '성공'도 아니에요. 자유, 평등, 평화도 아니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잘사는 것이다, 연못가 언덕 위에 좋은 집을 짓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다-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성경에 대해서 참 간단명료하게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다, 못 먹고의 문제가 아니다, 부하고 가난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함입니다.
그 옛날 고대로마같은 도시는 참으로 굉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무려 2000년 전에 그 화려한 도시를 세워놓았어요. 그 유적만 보아도 능히 짐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노예 문화입니다. 이 문화를, 이 집들을, 이 성을 쌓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몰라요. 저는 언젠가 만리장성에 북경대학 대학원생하고 같이 올라갔는데, 절로 감탄의 소리가 나옵니다.
"야, 이것 정말 굉장하다. 어떻게 산 속에다 이렇게 만들 수 있었나?" 그랬더니 이 젊은이의 첫마디가 이렇습니다. "이것은 노예문화입니다.
이것을 만드느라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아십니까?" 저는 깜짝 놀랐어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에요. 로마 인구의 삼분의 일이 노예였어요. 그 많은 노예들을 죽여가면서 도성을 쌓고, 화려한 집을 짓고, 풍요를 누렸어요. 이게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단지 몇 사람에게만 즐거움이지요. 그래, 가만히 생각하면 옛날 왕들이나 귀족들은 참 살맛 나겠어요. 그러나 그 노예의 입장을 생각해보세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비참하게 죽어갔습니까? 또 때때로 우리는 화평이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기 쉬어요.
아직도 서로 싸우고 있어요. 끝도 없는 싸움을 해요. 중동에서는 지금도 싸우지 않습니까? 모처럼 평화가 찾아왔다 했더니 또 테러가 있고……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런고로 평강이 있어야 되고, 하나님의 의가 있어야 됩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 이 세 가지가 함께 해야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만 빠져도 안됩니다. 다 온전히 성취되어야 합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의로움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평강이라는 것은 서로서로 화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샬롬입니다. 조금도 불편이 없는 화해, 온전한 화목-이것이 평강입니다. 또 희락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마음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기쁨이 없으면 안돼요. 나 자신에게 먼저 기쁨이 있어야 돼요. 여러분, 봉사를 하십니까? 남에게 봉사할 때에 봉사 받는 사람에게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또 그 자체가 의로운 일이요,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도 기뻐야 됩니다. 나도 기뻐야 봉사지, 나는 슬프면서 하나님의 나라 운운하는 것은 잘못이에요. 가만히 보면 그런 경우가 많아요. 나는 어차피 희생하는 것이니 너나 잘 먹어라, 너나 기뻐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슬픈데 누구를 기쁘게 하겠습니까? 먼저 내가 기뻐야 되는 거예요. 내가 즐거워야 됩니다. 세상에 가끔 보면 그런 일이 있습디다. 음식 먹을 때, 자기도 맛있게 먹으면서 "아, 참 맛있습니다. 같이 잡수세요. 맛있지요?"-이렇게 하면 좋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기는 입도 안대면서 "많이 잡수세요. 맛있게 잡수세요"-이러면 상대방은 영 재미가 없어요. 먹어보았자 맛도 없어요. 그 음식 권하는 사람의 얼굴도 중요해요. 본인도 맛있게 먹으면서 같이 먹고, 같이 즐겨야 진짜예요. 자기 자신은 음식을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권하는 이런 것은 옳은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 세 가지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희생한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때부터 벌써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것입니다. 나는 너를 위해서 희생한다, 나는 온 가정을 위한 제물이다, 속죄양이다-쓸데없는 소리예요. 그런 것 없어요. 나 자신이 먼저 기뻐야 됩니다. 나 자신이 행복하고야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예요. 이 세 가지가 함께 이루어지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는 의가 되고, 이웃에게는 화목이 되고, 모두에게 은혜가 되고, 내 마음에도 충만한 기쁨이 있고-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하나님의 나라예요. 그런고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출세나 번영의 문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의요, 지위의 문제가 아니라 화평이요, 이기(利己)의 문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즐거움이요, 기쁨인 것입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그리스도의 마음 안에서입니다. 결코 물질로 인한 것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다-본문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말씀 18절로 돌아가봅니다. 과연 이렇게 사는 사람은 어떤지 보세요.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 칭찬을 받느니라."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영광, 자신에게는 기쁨,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게 된다 함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결론에서 말씀합니다.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서로 덕을 세우라-그래서 나보다 이웃을 생각하고, 내 의견보다 하나님의 사업을 먼저 생각하고 더 큰 것을 생각하는 그 속에 진정한 나의 기쁨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서로 덕을 세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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