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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능히 살겠느냐(에스겔 37장 1절~6절)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하시고 그 신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하더라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영국의 경제사가(經濟史家) 아놀드 토인비는 12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 「역사의 연구」에서 미래를 아주 어둡게 전망하고 있습니다. 세계의 역사는 흥망성쇠의 역사요, 죽고 죽이는 역사이지만 그 흐름과 맥락에는 상당한 인과윤리적(因果倫理的) 도덕성이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토인비는 죄가 있기에, 그 속 깊이 악이 숨어 있기에 멸망과 심판이 올 수밖에 없다는 인과윤리적 관점으로 온 세계의 역사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멸망할 수밖에 없는 여건을 가지고 있는 암담한 세계를 내다보고, 그 세계 역사를 향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토인비는 어두운 미래를 조망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 가닥 빛을 제시합니다. 인과윤리적 심판이 있을 어두운 세계 역사를 전망하다가 돌연 그는 기독교가 각성하면 그래도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죄악에서 오는 인과응보의 굴레에서 헤어나 구원받을 길이 있다고 말합니다. 은총이 그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기자들이 "분명히 당신은 책에서 더 이상 소망은 없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비약을 하셨기에 다시 소망은 있다고 하십니까? 어떻게 이런 비약적인 결론을 맺게 되셨습니까?"하고 신랄하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토인비는 자신의 앞에서 천진스럽게 놀고 있는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습니다. "내가 이 아이에게 너희 사는 세대에는 소망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역사를 어떻게 보고 있습니까? 도대체 흥망성쇠의 역사는 어떤 맥락으로 전개되어왔으며, 오늘 이 시대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입니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생태계는 어떻습니까? 요새 들어 부쩍 오존층에 구멍이 뚫렸다, 이대로 가면 온 생태계가 질서를 잃어버리게 되고 말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뿐입니까? 이 지구가 온통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더는 쓰레기를 버릴 데가 없습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게다가 이에 맞추어 인간의 마음도 황폐해져가고 있습니다. 날로 사악한 인간성으로 변모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인간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지식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하나님을 대신할 것처럼 신봉하던 그 과학 이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점점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낙관적으로 보고 있습니까, 비관적으로 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세상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낙천주의자입니까, 염세주의자입니까? 여러분, 세상 이야기는 잠시 멈추고, 먼저 우리 자신을 놓고 생각해봅시다. 나 하나의 인격, 나 하나의 양심, 나의 이 모든 상태를 놓고 볼 때에 과연 소망은 있습니까? 여러분은 마음에 원하는 선을 얼마나 이루어보았습니까? 이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이런 말 이런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 이 결심을 얼마나 실천해보았습니까? 내가 바라고 이상(理想)하는 대로의 그 고상하고 귀하고 신령한 생활을, 그 굳건한 결심을, 얼마나 실천에 옮겨보았습니까? 여러분의 선행이 얼마나 진실한 것이었으며, 그 의가 얼마나 성실한 것이었습니까?
여러분, 로마서 7장을 읽어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얼굴도 보지 못한 로마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솔직하게, 너무나도 정직하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진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이렇듯 진실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성격, 인간성, 인격, 영혼의 상태에 대하여 얼마나 자신이 있습니까? 어느 정도 믿고 있습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여기 소망이 있습니다. 자신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가능성 있는 존재입니까, 구제불능한 존재입니까? 깊이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대나라와 그 백성이 2백여 년 동안에 걸친 수많은 선지자들의 경고와 심판적이고 종말적인 메시지를 외면하고 계속해서 죄악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사야를 비롯한 예레미야, 그밖에도 많은 선지자들이 200여 년 동안 유대와 그 백성을 향하여 줄기차게 "정치적으로 회개하라, 경제적으로 회개하라, 계급을 의지하지 말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하고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또한 재난, 한발, 기근과 같은 많은 환난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경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지켜보는 예레미야같은 선지자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그렇게도 간절하게 종말론적 메시지를 외쳤건만 회개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유대나라와 유대 백성은 하나님의 예언대로 징계를 받고 말았습니다.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이 쳐들어와 유대를 완전히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5대 비극이 있습니다. 먼저 나라가 망했습니다. 유대의 왕은 두 눈이 뽑힌 채 쇠사슬에 묶여서 개처럼 바벨론으로 끌려가 죽었습니다. 나라를 상징하는 왕은 이렇듯 비참하게 죽고, 온 나라는 초토화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렇게도 소중하고 화려한 솔로몬 성전이 불타버리고 말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은 그것을 지을 당시보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짓기 위하여 돌과 돌 사이에 보화를 넣고 지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보화를 찾기 위해서 그랬는지 벽돌과 벽돌이 이어 붙어 있는 것이 하나도 없게 깨끗이 헐어버렸습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드리던 제사, 절기를 따라 모이던 그 귀한 전통, 하나님 앞에 드리던 예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강론을 듣던 그 아름다운 종교생활과 모든 규례가 다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수만 명의 쓸만한 사람들은 서너 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습니다. 그 자손들까지도 잇달아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백성들은 그 끔찍한 모습을 보았기에 고국을 버리고 산지사방에 흩어져 되는대로 비참하게 살아가고 맙니다. 그야말로 종교, 정치, 민족, 국토가 모조리 망해버렸습니다. 절망적인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태로 70년을 보냈습니다. 70년이란 참으로 긴 세월입니다.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겠습니까?
여기서 잠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멸망은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떠맡겨진 운명도 아닙니다. 이것은 피의 결과입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세상살이가 이렇고 운명이 이렇고 하니 망할 때도 있고 흥할 때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멸망은 운명의 문제가 아니라 심판의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서운 징계가 여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의 한 사람인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환상으로 주시는 계시가 오늘의 본문말씀에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 유대는 바벨론 포수생활을 겪고 있습니다. 누가 이 형편에 소망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아무 기대도, 아무 생각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연명하는 데 급급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골짜기로 이끌어 저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시는대로 골짜기 가운데로 가서 본즉 사방에 마른 뼈가 가득합니다. 지금 에스겔은 뼈가 가득한 골짜기 가운데에 서 있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은 마른 뼈를 통하여 여러 상징적인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뼈는 말랐습니다. 사방에 널려 있는 뼈는 말라 있습니다. 뼈가 있기 전, 분명히 주검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매장되지 않고, 흩어져 뼈가 드러나도록 내버려두었을까요? 모두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죽었기에 장사를 지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체가 그냥 버려진 것입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이 버려진 시체를 짐승이 뜯어먹고, 독수리가 뜯어먹고, 까마귀가 뜯어먹습니다. 이렇게 해서 앙상해진 뼈가 이제는 비바람에 말라 버립니다. 그렇게 70년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진행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제 더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버려졌을 뿐입니다. 아무 기대감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2절)"----유대의 분열과 멸망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듯 아무 생명력도 희망도 느껴지지 않는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3절)?" 인간의 생각으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우리 인간이 무슨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살리라(4, 5절)"----참으로 넌센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뼈가 능히 살겠느냐"하고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에 에스겔은 고백적인 대답을 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3절)." 그렇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생각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서만 아십니다. 여러분, 욥기를 보십시오. 잘 아시다시피 욥이 얼마나 어려운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까? 그 많은 재산을 다 잃고, 자식들을 잃습니다. 아내마저 욥을 저주하고 떠나가버립니다. 친구들도 그를 조롱하고 괴롭힙니다. 게다가 그의 몸은 병들어 죽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서 욥은 고백합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나의 갈 길, 나의 운명은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는 엄청난 신앙, 엄청난 소망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각, 에스겔도 하나님의 물으심에 진실하게 대답합니다. "주께서 아시나이다"---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 그 속에만 희망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절망적인 생을 살고 죽을 수밖에 없는 문둥병자가 있습니다. 어느날, 그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하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원하시면, 곧 주님의 뜻이 문제입니다. 주님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인간은 잘못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약속을 어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절대적 약속이 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은 믿을 수 있습니다. 에스겔, 욥, 문둥병자는 모두 하나님의 절대적 약속과 하나님의 능력을 믿었기에 '주께서 아시나이다, 오직 그가 아시나니, 주여 원하시면'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역사를 보십시오. 그 많은 사람들이 언제나 더 나은 세상을 이루기 위하여 노력해왔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하여 가르쳐도 보았으며, 배워도 보았습니다. 또한 "잘살아보세"하며 부지런도 떨어보았습니다. 많은 운동도 해보았으며, 개혁도 해보았습니다. 그런가하면 피비린내나는 혁명도 치러보았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세상은 점점 어두워만 갑니다. 이제, 우리 인간의 노력은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에 기대하고 있습니까? 오직 믿음뿐입니다. 이제 더는 낙관할 것도 비관할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기대할 것이 없으니까요. 이제는 믿음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외치고, 믿음으로 행할 따름입니다.
베를린의 주교였던 디벨리우 박사는 나치와 공산주의자들의 그 핍박 속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고 사람들에게 그 고귀함을 고취시켰던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언젠가 그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미래를 낙관적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비관적으로 보십니까?"라고 그분이 질문을 하시기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낙관도 비관도 모두 세속적인 말입니다. 이 세상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소망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리하셨다고 말할 수 없었다면 저는 벌써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오직 믿음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만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적으로는 망할 것도, 비관할 것도, 낙관할 것도 더는 없습니다. 앙상한 뼈, 그것이 인간입니다. 마른 뼈를 어찌 생명이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이미 끝난 것입니다. 과거의 영광도, 그 윤택함도, 그 화려함도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날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물으시기를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십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소망이 있는지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소망은 오직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영혼에 생명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유일한 삶의 길이 있습니다.
다시, 본문말씀을 보십시오. 주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마른 뼈들을 향하여 "너희가 살리라"하고 외치라 명하십니다. 에스겔은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그렇게 행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오라고 소리치셨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수의에 싸인 채로 걸어나왔습니다. 모름지기 우리에게는 뼈를 향하여 외칠 수 있는 그 믿음과 주님의 말씀만 믿고 따라 행하는 절대적 순종이 필요합니다.
마음의 생각과 의지와 결단력과 세계관, 이 모두를 주님께 바치는 전적인 순종을 우리는 지녀야 합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 간소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말씀으로 루터는 독일을, 웨슬리는 영국을, 무디는 미국을 살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마른 뼈와 같은 나라일지라도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 가해질 때에 생명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학을 논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말론을 말합니다.
우리는 인간적 지혜로 미래를 전망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아직까지도 자신에 대해서나 세계에 대해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습니까? 깨끗이 잊어버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복을 주셨기에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사랑하시기에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속하셨기에 내가 있고, 하나님께서 내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기에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외치고 믿음으로 행할 것입니다. 오직 부활이 우리의 소망이요, 부활신앙이 현실화할 때에야 소망과 생명이 싹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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