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오직 하나의 조건(요한복음 21장 15~18절)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로 돌아가기

오직 하나의 조건(요한복음 211518)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내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현대를 가리켜 다원적(多元的) 혹은 다변적(多邊的)인 세대라고 합니다. 방향도 여럿이며 목적도 가지 가지입니다. 따라서 가치기준도 근본적으로 다르며 일에 관계된 원인도 여러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국제 문제, 사회문제, 가정문제 그리고 개인문제들이 그러하고 경제문제, 정치문제, 교육문제 그리고 심리학적인 문제들이 서로 엉켜 있어서 어디까지가 원인이며 어디까지가 결과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돈된 상태에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원적이며 다변적이고 다양한 사회이기에 그 원인과 결과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을 시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대화의 시대" 혹은 "협상의 시대"라고 하지만 사실상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철학과 전혀 다른 목적들의 대립으로 인하여 같은 말을 기록하여 조인을 하였으면서도 전혀 다른 생각들을 가지고 풀이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듣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다른 세상이라고 할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적 진리는 언제나 일변적이요, 일원적이며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목적은 언제나 하나요, 결코 둘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보여주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이 사실에 대하여는 한치의 용서도 여유도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것은 무엇이든지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곧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오직 목적은 하나 뿐입니다. 재물이나 명예나 가정이나 좀더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까지라도 목적이 될 때 그것은 곧 우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우상을 버려두지 않고 반드시 깨쳐 버리십니다. 그 무엇이든 하나님 이외의 것이 내 목적이 되고 내가 그를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를 파괴하시며 이를 심판하십니다.

목적은 하나님뿐입니다. 칼빈 선생님이 결혼을 하였을 때 그의 친구가 "자네는 왜 결혼을 하였느냐?"물었습니다. 그때 그는 선뜻 대답하기를 "사사로운 일에 매이지 아니하고 보다 더 효과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하여 결혼하였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결혼은 하지만은 그 목적도 결혼 자체에 있을 수 없으며 아내를 사랑하며 남편을 사랑하되 그 사랑이 결코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리고 모든 일에서 궁극적인 목적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길도 하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하나의 길을 말하지 않고 그 길(The way)을 말합니다. 다른 어떠한 길도 있을 수 없고 오직 성경이 보여주는 그 길,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 되신다고 증거 합니다. 목적도 하나요, 그 목적으로 향하는 방법도 하나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또한 원인도 하나라고 말합니다. 형식적으로 나타난 다양한 사건을 사건대로 말하지 않고 그 깊은 곳에 있는 원인, 즉 죄를 들어 말합니다.

모든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죄 때문이며 더 깊은 원인이 있었다면 역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된 일이라고 말합니다. 언제든지 원인은 하나입니다. 진리도 생명도 하나이며 목적이나 방법도 하나이고, 원인도 그리고 그 해결도 오직 하나 뿐이라고 증거 합니다.

예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청결이란 히브리 개념에서 볼 때에는 깨끗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단순하다는 뜻입니다. 없다는 뜻에서의 청결이 아니라 하나 뿐이라는 뜻에서의 청결입니다. 오직 하나만이 있고 하나만을 생각하는 그러한 깨끗한 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단순화되고 통일된 마음을 말합니다. 심리학적으로도 분열된 마음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비판이 끝나고 결정된 하나의 마음에 진정한 안정과 평안이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의 모습을 보십시다. 그는 말할 수 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수난을 당하실 때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도 못하였고 그는 비겁하게 예수를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으며 이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모습을 분명히 보기는 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자신을 잃었고, 요한복음 213절에 보면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고 말하게 됩니다. 이때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다"고 따라 나섭니다.

삼년간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생을 희미하게 끝내고 실의에 찬 베드로는 옛 직업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밤새 수고하였으나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첫 취업에 완전 실패한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1:7)고 하여 그리스도를 따르다가 실패하였는데 이제는 물고기 잡는 어부로서도 또 다시 실패한 것이었습니다. 몹시 피곤한 아침이었습니다. 실패의 연속이며 좌절의 계속입니다.

그에게는 아무 용기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이러한 생각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는 역시 어부였다.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겠다고 나선 것이 잘못이었지, 내가 무엇이기에 메시아 나라의 중요한 직을 맡을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 나를 찾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어부로 돌아갑니다. 나같이 비겁한 사람을 제자로 삼으시면 예수님 자신에게도 크게 불명예스럽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죄송하오나 나는 이 제자의 직을 기권합니다."라고 그는 스스로 자기 직을 떠났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신이 제자의 자격이 없음을 통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뉘우침과 후회에 찬 가슴으로 자기의 나약함과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고 봅니다. 실은 베드로는 이때에야 비로소 자기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의 비참한 모습을 스스로 발견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예수님께 찾아오시어 베드로를 부르십니다. 그를 부르실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지어 주셨던 귀중한 이름인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부르시지 않고 자연인으로의 이름, 곧 옛 이름인 시몬으로 불렀습니다. "요나의 아들 시몬아"라고 불렀습니다. 가장 강한 힘은 진실의 힘이며 가장 강한 때가 곧 진실한 때입니다. 베드로가 지금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진 것 같으나 이처럼 비참한 자기 모습을 발견하고 뉘우치고 있을 때가 그로서는 가장 진실한 때이며 또한 가장 일 할 만한 때라고 보셨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실의에 찬 베드로에게 귀중한 일을 부탁하셨던 것입니다.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깊히 생각하여 보십시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그리스도께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그런데 이 때에 이 고백을 들으시고 천국 열쇠를 주신다는 귀한 축복의 말씀이 계셨으나 사실은 두 가지 유감된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 신앙고백의 내용을 베드로 자신의 발견으로 간주하시어 칭찬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에게 알게 하신 것이라고 돌려 버리셨고 다른 하나는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셨으나 자세히 살펴보면 베드로가 세우겠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그 위에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귀한 신앙을 고백하는 "반석"이 되는 베드로에게 일을 맡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한 이후 오늘에 연속되는 실패로 인하여 좌절과 실의에 차 있는 베드로에게 귀중한 일을 맡기셨습니다. 피로 값 주고 사신 귀중한 어린양을 그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네가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큰소리치며 장담하는 베드로에게는 일을 맡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실패하고 뉘우치는 베드로에게 그 막중하고도 큰 일을 맡기셨습니다. 바로 이 때가 베드로로서는 가장 진실한 때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자기를 모르고 교만하며, 자기를 모르고 장담하며, 스스로 속음으로 자기를 믿으며 자신의 것으로써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 것같이 생각하는 그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시지 아니하십니다.

오히려 자기를 알고 진실하며, 죄된 자기와 나약한 자기를 알고 스스로 겸손하며 자기 스스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만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나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되어진 때가 가장 진실하며, 가장 강한 힘이 있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오직 약한 것을 자랑하였으며, 가장 약한 때에 가장 강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의 조건입니다. 예수께서 그 하나의 조건을 물으셨습니다. 과거를 일체 묻지 아니하시고 오직 현재를 물으셨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사랑은 유일한 조건입니다. 매우 심각한 물음이라고 봅니다. 헬라 원문에는 첫 번째와 두 번째 물음은 '아가페(Agape)의 사랑을 하느냐'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이 때에 베드로의 대답은 '필리아(Philia)의 사랑을 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었습니다. 아가페는 희생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헬라 고전 문헌에는 별로 없는 문자인데 성경에는 매우 귀중한 단어로서 많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 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아가페라고 묘사하였고 따라서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도 역시 아가페입니다. 이 말은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그러한 희생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필리아는 헬라말에서 흔히 쓰여지는 사랑이란 말로서 친구를 사랑하거나 형제를 사랑하는 보편적인 사랑의 뜻을 가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아가페의 사랑을 하느냐?'고 물을 때에 베드로는 '친구의 사랑을 합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세 번째 물으실 때에는 '그러면 그 친구의 사랑은 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때에 당황하게 됩니다. 친구의 사랑도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하는 것이 마땅한 것인데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모른다고 부인해 버렸으니 이제 그는 대답할 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중에도 베드로는 다시 그의 진실을 말합니다. 비록 그가 그리스도를 부인하였으나 그 마음속 깊이에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소유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었고 또한 진실이었기에 "주는 모든 것을 아시오니 내가 주를 친구의 사랑 정도로는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말하게 됩니다. 심각한 물음이요, 대답이었다고 봅니다.

예수님의 판단은 이러합니다. 지난 날 실패의 원인도 사실은 오직 하나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실패의 원인을 자기의 나약한 성격이나 의지적 결단의 부족, 혹은 사회적 여건에 돌릴 문제가 아니라 다만 사랑 그 한 가지가 없었기 때문이었고 그 결과 이처럼 비겁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세번이나 모른다고 해야만 했던 그 원인도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며 갈릴리로 물고기 잡으러 오게 된 그 원인 역시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믿는 성도의 신앙고백은 여기에 이르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원인은 사랑이라고 말입니다. 없어서도 아니며 못 가져서가 아니요 약해서도 아니며 몰라서도 아닙니다. 오직 사랑의 결핍 때문에 이 세상에는 고난이 있고 슬픔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 앞에서 진실과 의와 겸손이 있으며, 사랑에는 순종이 따르고 사랑에는 놀라운 능력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뜨거운 사랑만 있다면 못할 일이 참으로 없습니다. 거짓되게 된 원인도 사랑에 있고, 나약해진 이유도 사랑이 식어서요, 믿지 못하고 의심하며 불안해하였던 원인도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께서 이를 섭리하십니다. 즉 사랑하게 하십니다. 고난이 있는 이유는 사랑이 귀함을 알게 하고자 하심이며 또 사랑하게 하고자 하심입니다. 환난을 통하여 사랑하게 되고 역경을 통하여 화목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542절에 예수님께서 불신의 세대를 향하여 그 원인을 설명하실 때에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회다, 가정이다, 세계다, 탓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내 속에 뜨거운 사랑이 없기 때문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다시 좀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이제 그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그의 어린 양을 내가 또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를 사랑한다면 그가 사랑하는 자를 나도 사랑하게 되며, 사랑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이치가 아니겠습니까? 남편을 지극히 사랑하면서 그 남편을 낳아주고 키워준 시어머니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찌 그 사랑이 참된 것이겠으며, 아들을 사랑한다면서 그 아들이 사랑하는 아내인 며느리를 사랑할 수 없다면 그 또한 참 사랑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죄인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그의 양을 쳐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다만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요한복음 1226"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를 사랑하거든 그를 따를 것이며 그가 있는 곳에 나도 있어야 하고 그가 사랑하는 자를 나도 사랑해야겠으니 실상은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믿음을 주며, 사랑은 소망을 주고, 사랑은 능력을 줍니다. 사랑은 모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은사 중에도 제일 큰 은사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뜨거운 사랑, 곧 처음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이기지 못할 시험이 없고 감당하지 못할 일이 없으며 내가 진정 그를 사랑할 때 나로서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진지하게 물어 보십시다.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느냐?. 이 물음에 "!"라고 할 수만 있다면 놀라운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사랑을 진단하고 계속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그가 사랑한 자를 사랑하고 그가 하신 일을 내가 하며 실천적 사랑으로 그리스도께 다시금 사랑을 확실히 고백해 나아가십시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