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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자손(누가복음 19:1-10)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가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더라 예수께서 그곳에 이르사 우러러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 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믓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세상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자기를 잃어버리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자기 상실, 곧 자아 상실에 대해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을 보면 돈이다 출세다 해서 그저 밤낮으로 뛰다가 덜컥 병원에 입원해 놓고는 건강이 이렇게 소중한 줄을 미쳐 몰랐다고 합니다. 이런 줄 알았으면 좀더 일찍부터 건강을 돌보았을 것인데 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건강이 문제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속에서 썩어가고 있는 것과 특별히 자기를 잃어 가고 있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자기가 완전히 잃어진 상태에 있다가 언젠가 큰 사건으로 터지면서 노출될 때에 이상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루아침에 된 일입니까? 있었던 일이 나타난 것뿐입니다. 자기 상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벌써 죽은 지 오래 됐습니다. 이제 육체의 길만이 남았고 썩어진 것들만 그대로 우글거리다가 좀 나타났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진작 있었던 일 아닙니까? 그리고 그 속에, 그 깊은 속에서 자기 상실의 역사는 벌써 있었던 것입니다.
소유와 존재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영어로 말하면 to have와 to be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가졌다는 것과 되어진다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을 해 봅시다. 돈이 있다고 지식을 가진 것입니까? 지식이 있다고 교양을 갖춘 것입니까? 교양이 있다고 인격이 있는 것입니까? 인격자라고 해서 그 영혼이 살아 있는 것입니까? 이것이 별개의 것입니다.
돈이 있어도 인격 없는 자가 있고, 지식은 있는 것 같은데 교양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혼돈하지도 말고 착각을 일으키지도 맙시다.
이런 세계관은 위험한 것입니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지식인과 무식인, 권력자와 피권력자를 완전히 구분하려고 드는 것은 유물사관의 평가입니다. 이런 양극화 혹은 대립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위험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돈을 가졌다고 그 사람이 인격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모두 죄인이라는 점입니다. 모두 고통 중에 살고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장님은 편안하게 앉아서 낮잠을 자는 수위를 부러워합니다. 수위는 사장을 부러워합니다.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정말 부러워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간혹 그렇게 마음이 돌아갑니다. 이것이 시험임을 알아야 합니다. 가진 자는 가진 자로서의 고통이 있고, 못 가진 자는 못 가진 자로서의 뼈아픈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 고통이 못 가졌기 때문도 아니고 가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문제는 고통 중에 있다고 하는 보다 더 존재적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소유적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모두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 귀중한 하나의 예가 나타납니다. 이 사례는 아주 대표적인 것입니다. 가졌으나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부자였으나 죄인이었습니다. 그 이름은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라는 말의 뜻은 순결하다는 뜻입니다. 이름은 좋으나 그의 평판은 좋지 못했습니다.
그는 돈은 가졌으나 존경받는 사람이 못 되었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대상이었습니다. 권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멸시를 받았습니다. 자기 양심도 자기를 정죄했습니다. 그는 결코 평안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스스로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고 말입니다. 그러나 그의 양심은 항상 평안치 않았습니다.
그는 세리였습니다. 원래 돈주러 오는 사람이 반갑지 돈 달라는 사람은 반갑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 세리는 자기 나라를 위한 세리가 아니고 남의 나라를 위한 세리입니다. 로마 사람의 앞잡이로서 세금을 포탈해 가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 중에서도 세리장입니다. 때문에 그는 이런 말을 들어야했습니다. "죄인이요 반민족주의자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멸시받는 대표자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만나러 왔습니다. 왜 예수를 만나려고 합니까? 그는 돈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돈은 넉넉합니다. 명예를 구한 것도 아닙니다. 권력을 구한 것도 아닙니다. 병고침 받으러 나온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 중에 가장 동기가 순수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병 고치러 온 사람, 심지어는 재산 나누어 달라고 온 사람 등 여러 가지 목적으로 예수님께 왔습니다만 이 세리는 가장 순수하고 깨끗하게 그 신령상 목적으로 예수를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선지자다, 기적을 나타내는 사람이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죄인의 친구다, 율법을 범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메시아다, 유대인의 왕이다, 이 엇갈린 평판과 복잡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그는 꼭 예수를 만나야 했습니다. 꼭 만나려고 했습니다. 이것은 순수한 마음입니다.
한 가지 그가 알고 있는 예수는 부자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수를 통해서 돈을 벌 수는 없습니다. 그가 병들지 않았으니 예수를 통해서 병고침 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를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까?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서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세요. 그렇지 않아도 키가 조그마한 사람에다가 세리여서 많은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는 사람인데, 뽕나무에 올라가는 모습이 오죽이나 보기에 흉했겠습니까? 얼마나 멸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짓을 다시금 했느냐 말입니다.
"저런 죄인이 예수는 만나서 무엇을 하겠다고 뽕나무에까지 올라가니? 주책없이 노네" 그럴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이 문제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예수를 한번 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모든 일에는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회를 붙잡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기회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놓치면 안 됩니다. 기회는 대머리라고 하는 헬라 격언이 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잡으면 잡을 수 있지만 한번 지나간 다음에는 잡을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진실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면 진실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회개도 기회가 있으며 만사에 기회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는 소중한 기회를 바로 포착했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실 듯한 그 길가의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를 기다리는 이 삭개오를 보세요. 얼마나 훌륭합니까? 예수를 만나려고 애썼기에 이제는 예수께서 이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삭개오야 내려오너라." 예수는 삭개오를 개인적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 중에 이처럼 애타게 만나려고 하는 사람을 예수는 만나 주십니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를 옹위했습니다만 옷자락을 만진 여자 한 사람을 찾아 만나 주신 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어쩌다가 가면서 오면서 옷자락이 스쳤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만나는 사람, 믿음으로 만지려는 한 사람을 찾아서 개별적으로 만나 주셨습니다. 여기에 구원의 은혜가 있고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 많은 사람 중에 멀리 뽕나무에 올라간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칼 힐티의 「행복론」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람의 행복이란 세 가지다. 그것은 서로 그리워하는 것이다. 서로 마주 보는 것이다. 서로 자기를 주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서로 그리워하는 것, 이것이 사랑일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을 보는데 저 사람은 딴 사람을 보면 짝사랑입니다. 이것은 괴로운 것입니다. 서로 마주 본다는 것, 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모릅니다. 또 자기를 완전히 상대방에게 주면서 기쁨을 얻는 마음, 그럴 때면 자기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런고로 그 앞에는 비밀도 없고, 그 앞에는 욕심도 없습니다. 그 앞에는 피곤도 없습니다. 자기가 완전히 사라져 없어지고 맙니다. 그 극치를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이런 행복이란 일생에 단 한 번만 있고 죽어도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삭개오, 그를 가만히 보세요. 지금은 그에게 얼마나 귀중한 시간입니까? 예수를 만나, 예수를 쳐다보고, 예수는 삭개오를 쳐다봅니다.
그 순간 그는 완전히 자기가 없어지고 맙니다. 그는 온갖 뜻을 다 주께 바쳐 버리고 그대로 행복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설교할 때 목사가 교인을 보지 않으면 교인은 목사를 안 본다고 합니다. 목사가 설교하느라고 원고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교인들은 목사를 쳐다보지 않고 존다는 말입니다. 서로 마주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한 가지 소중한 진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는 예수를 보고 동시에 또 하나 본 것이 있습니다. 자기를 보게 된 것입니다.
저는 컴퓨터에 대해서는 전혀 무식합니다. 그러나 항상 놀라는 것이 컴퓨터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성적표를 떼러 갔던 일이 있습니다. 수만 명 졸업한 사람들이 있는데 내 이름 석 자를 찍어 넣으면 즉각 내 성적표가 툭 떨어집니다. 그 수많은 이름 가운데서, 그 수많은 기록 중에서 어떻게 내 것을 찾아서 즉각 내어 주느냐 말입니다.
저는 언젠가 「죽음과 죽어지는 일」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600명을 상대로 죽어 가는 사람들을 조사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하며 또 어떤 모양으로 죽는지를 모두 조사한 후 통계를 내놓고 분석해 놓은 것인데 아주 재미있는 말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한 가지를 말씀드리면 사람이 의식이 없어져서 일단 죽었다가 또 살아나는 사람이 있답니다. 이런 사람이 목사님을 괴롭힙니다. 왜냐하면, 임종 기도 다 했는데 또 살아나거든요. 그 임종 기도를 취소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어쨌든 죽었다 살고 살았다 죽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이런 사람들이 죽었다가 며칠만에 살아나서 공통적으로 하는 말을 전부 기록해 놓았는데 그 내용은 전부 다음과 같습니다.
그것이 몇 시간인지 몇 분인지 모르지만 숨이 딱 넘어가는 시간에 번쩍하면서 번개처럼 일생 동안 산 것이 확 보이더라고 합니다. 컴퓨터 생각하면 되겠지요. 우리 사람들이 만든 컴퓨터도 번쩍하면 다 나타나는데, 하나님의 컴퓨터에 인간의 일생이 비추어진다는 게 그렇게 이상할 것이 없지요. 번쩍 하는데 자기의 죄스러운 생이 확 들어오더라고 합니다.
오늘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의 얼굴을 딱 보는 순간 자기 모습이 확 드러납니다. 그 동안에 그는 변명도 많았습니다. 내가 왜 죄인이냐,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하는 것이 아니냐, 내가 세리 노릇을 한다고 하기로서 내가 어째서 죄인이냐는 등등의 말로 스스로를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은 그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왜 도둑이냐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보니 내가 도둑입니다. 그대로 자기 모습이 확 드러나는 대로 그는 고백합니다. "내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십일조가 아닙니다. 절반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자기 욕심, 자기를 위하던 마음이 그대로 깨져 나갑니다. 그리고 누구의 것을 토색했으면 4배를 갚겠습니다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2:1을 보면 4배를 갚으라고 했거든요. 도둑한 물건에 대해서는 4배를 갚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을 따라서 4배를 갚겠습니다고 했습니다.
"있으면"이란 말은 헬라 원문대로 하면 "있다"는 말입니다. 없는 얘기를 가지고 하는 말이 아니고 있다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토색한 것에 대해서는 그대로 4배를 갚겠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회개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순간 삭개오는 그대로 자기 모습이 다 드러났습니다.
그대로 자기 욕심이 다 무너지면서 완전히 회개하고 깨끗이 청산을 합니다. 그리고 이웃을 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감사했으면 "예수님께 재산 절반을 드리겠습니다" 해야지 왜 "가난한 자에게 주겠습니다" 했습니까? 그는 벌써 예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예수께서는 이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주님의 마음에 부응하여 그대로 '주겠습니다' '갚겠습니다' '회개합니다' 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입니까? 이제 하나님을 보면서 나를 보고, 이웃을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나를 보고 이웃을 보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바른 관계에 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느니라"고. 이 얼마나 귀중한 말씀입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왔노라. 이런 사람을 찾아 구원하러 왔노라." 그는 가졌으나 죄인이요, 부자였으나 고통 중에 살았습니다.
불편한 것 없는데 이 사람은 불편한 중에 살았습니다. 좌절과 두려움 중에 살았습니다. 이제 주님은 그를 풀어 주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했는데 이 구원이란 소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없던 사람이 부자 되었다는 얘기도 아니고 병든 사람이 건강해졌다는 얘기도 아닙니다. 그것은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였습니다. 얻느냐 잃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가진 바를 내놓는 순간입니다. 자유의 문제입니다.
부끄러움과 죄와 고독과 허무와 사망과 허탈로부터 벗어나서 자기를 찾는 순간입니다. 잃어버린 자리를 찾는 순간 주님은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잃어버린 삭개오를 찾아주셨습니다. 새 의미, 새 가치, 세 자랑을 지니고 새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제는 누가 날더러 손가락질해도 문제가 아닙니다. 세리라는 직업의 콤플렉스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그 시선 속에서 새 자기를 찾았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기도 : 자기를 잃어버린 삭개오를 도로 찾아 주신 주님, 이제 자신을 잃어버리고 지금 쓸데없는 것만 손에 움켜지고 있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구원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옵나이다. 가졌느냐 못 가졌느냐, 얻었느냐 잃었느냐에 신경을 쓰던 저희들로 하여금 이제 시선을 돌려서 주님의 얼굴을 뵙게 하시고, 주를 보면서 자기를 보고 내 운명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나를 향하여 기다리며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구원이 가정마다 이르게 해 주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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