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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가를 만진 여인(마가복음 5장 25~34절)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였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 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이적들을 보면, 환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오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몸소 찾아가시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치유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어쩌면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의 모습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 여인은 여러 모로 불쌍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여인의 불쌍한 처지를 제가 하나하나 체크해서 적어보았습니다. 아홉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이 여인은 이방사람입니다. 유세비우스에 따르면 그 여인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온 이방 여자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유대인들의 그 선민연(選民然)하는 교만은 대단합니다.
이방사람이라고 하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교만이 지나친 유대인은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도 이방사람을 보면 침을 뱉습니다. 더럽다고 상대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멸시받는 이방인의 처지로 예수님을 찾아 만나는 것입니다. 유대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버려진 사람입니다. 우물가에 있던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서 물을 달라고 하시자 "유대사람이 어찌 사마리아사람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하고 거절한 적도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이방사람들은 축복권 밖에 버려진 존재로 인정받던 때입니다. 오늘의 이 여인도 바로 그런 취급을 받던 이방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쌍합니다.
둘째는 그가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자 분들에게는 섭섭하게 들리시겠지만, 그 당시에는 인구조사를 해도 남자만 인구로 쳤습니다. 군대에 나갈 수 있는 장정만을 세고 어린아이들과 여인들은 셈에 넣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여인을 천시하는 문화권이었습니다. 한낱 여자의 건강이나, 여자의 생명쯤은 대수롭잖게 여기던 때였습니다.
셋째, 이 여인은 건강을 잃어버렸습니다. 건강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다는 뜻입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건강을 잃어버릴 때는 건강과 함께 다른 것도 잃어버리게 됩니다. 어떤 수술실에 누워있는 환자 한 사람이 수술을 집도하려고 하는 의사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돈도 있고 명예도 있고, 지위도 있고 귀한 가정도 있고 자녀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가 없습니다. 건강이 없습니다. 이것 하나만 내게 돌려주신다면 내 재산을 다 드리겠습니다." 의사는 껄껄 웃으면서 대답합니다. "당신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정말로 돈도 있고 뭐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 하나를 잃어버림으로 전부를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건강 없이 재산은 소용이 없습니다. 또, 건강을 잃고 세상을 떠나는 순간에 가정이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건강을 잃었다는 것은 모든것 중 한 가지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여자가 건강을 잃었습니다. 12년 동안을 혈루증으로 고생했습니다. 친구도 이웃도 잃어버렸습니다. 많은 재산을 의원에게 갖다 바치고 허비했으나 치료받지 못한 채 악화되었다는 것입니다. 12년 동안 병중에 있었으니 무슨 재산이 남아나겠습니까? 긴병에 걸리면 재산도 없어지고 친척도 떠나고 사랑도 상실하게 됩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이 여자의 병을 혈루증이라고 밝혀놓았습니다. 누가는 의사였기 때문에 그 병을 알고 있었습니다. 피가 흐르는 병인데, 지금으로 말하면 자궁암 같은 병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여인의 몸에서 피가 그치지 않고 흐르는 병입니다. 이것 때문에 이 여자는 정말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야 하는, 모든 관계에서 다 떠나야 하는 불쌍한 운명이 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의 본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에 이 여자가 끼여들었는데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에 환자가 있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시여,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여기에 장님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 여기에 문둥병자가 따라옵니다.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라고 누가 나서서 말해주는 일은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군중 속에 들어갔을 때에는 아무도 알은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무관심 속에, 어느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는 가운데로 버려진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두 가지 본능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소유욕이요, 하나는 소속욕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알려지길 바라고, 누구에겐가 잘 보이려 하고, 또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기 바라고 관심 가져주기 바랍니다. 어린아이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울려 노는 자리에서 따돌림받으면 울지 않습니까? 울지 않는 아이는 똑똑한 아이가 아니라고 합니다.
많이 우는 아이가 눈치 있고 아이큐가 높다고 합니다. 어른들이 저한테 관심을 두지 않는 경우, 아이들은 참아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지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지금 많은 군중 속에 들어가 있어도 누구 한사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버려진 존재입니다. 군중 속에 버려진 존재입니다. 가든지 오든지 아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있어도 그만인 존재요 없어도 그만인 존재입니다.
살아도 그만이요 죽어도 그만인 존재였다는 말입니다.
다섯째, 이 사람은 미(美)에 마음을 쓰는 본능을 지닌 한 '여자'라는 사실입니다. 여자들은 미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대하여 본능적으로 관심이 많은 존재입니다. 역시 여인에게는 아름다움이 중요한 모양입니다.
가끔 보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여자교인들 중에 병이 조금 심해지면 사람 만나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병으로 초췌해진 모습을 남에게 보이기 싫어서 입니다. 그것이 여자의 본능입니다. 그럴진대 오늘의 이 여인은 다 버린 지 오래입니다. 인기고 사랑이고 매력이고 다 사라진지 오래됐습니다. 얼굴에 화장하는 재미도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 여인은 여자로서의 자기 위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이 여인이 스무 살에 그 병을 얻었다면 지금 서른 두 살입니다. 12년이나 되는 긴 병을 앓고 살았으니 가장 아름다울 시절, 인생의 꽃다운 시절이 허망하게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여섯째, 이 여인은 인륜(人倫)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사람이란 서로 모여 살게 마련입니다. 인간관계를 맺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아무도 만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만나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누가 가까이 오려고 하더라도 '가까이 오지 말라,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손을 저어서 피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풍속이 그렇습니다. 누가 가까이 오지 않아서 괴로운 게 아니라 가까이 올까봐 괴로워합니다. 가까이 오면 몸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썩어 가는 냄새가 납니다. 이 냄새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봐, 나쁜 인상을 주게 될까봐 '부정하다, 부정하다' 소리치고 손을 흔들면서 오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친척도 방문할 수 없고 친구도 만날 수 없고 번잡한 시장에도 가면 안됩니다. 인간관계를 완전히 포기한 사람입니다. 홀로 살아야 합니다. 홀로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도 반가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일곱째, 종교적으로도 버림을 받았습니다. 레위기 15장 25절로 27절에 보면, 이런 사람은 회당에 들어가도 안됩니다. 다시 말해 예배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썩은 냄새가 진동을 하니까요. 지금도 그렇습니다마는 그 옛날의 중동에는 물이 귀했습니다. 목욕을 못합니다. 요즘은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매일같이 목욕을 합니다마는 나이 많으신 분은 다 알겠지만 옛날에는 한겨울 동안에는 목욕을 안 했습니다. 기껏해야 일년에 한두 번 목욕하면 잘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들 살았습니다. 중국에 가보니까 거기도 그렇습니다. 목욕이라는 게 없습니다. 더구나 추울 때는 그냥 지냅니다. 오늘의 이 여인이 그런 형편입니다. 더구나 병든 여인입니다. 또 옷이라는 것도 귀한 때여서 한 벌로 삼대가 입었습니다. 얼마나 지저분했겠습니까? 옷을 철철이 갈아입던 때가 아닙니다. 게다가 피를 흘리고 삽니다. 몸에서 악취가 진동합니다. 설상가상으로 더운 지방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전에 들어오면 온 성전이 악취로 찹니다. 이리하여 하나님 앞에 제사도 못 드리고 신령한 집회에도 참석할 수 없게 된 이사람, 불쌍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입니다.
여덟째, 이 사람은 부끄러운 병을 앓고 있습니다. 남에게 이야기하기조차 수치스러운 병입니다. 예수님께 다가갔다고 하지만 예수님 앞에 갔다 해도 예수님께서 '네가 어디 아프냐'하고 물으시면 부끄러워서 대답도 제대로 못할 병입니다. 그런 부인병이었습니다. 여자들끼리도 그렇지만 남자에게야 병명조차 말할 수 없는 병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자랑스러운 고통도 있습니다. 병중에도 자랑스러울 건 없어도 부끄러울 것도 없는 병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병은 참으로 부끄러운 것입니다.
제가 아는 분 하나가 어느 날 아침 같이 이를 닦는데 어금니가 생으로 빠져 나와요.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쿠, 당신 지금 뭘 그렇게 빼는거요?" 물었더니 "다 내 죄지요" 하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분 하는 이야기인즉 젊었을 때에 죄 많이 지어서 못된 성병에 걸렸었답니다. 지금은 나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니까 그 후유증이 나타나 그렇게 생으로 잇몸이 상하면서 이빨들이 맥없이 스르르, 스르르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이런 병, 부끄러운 병입니다. 이가 스르르 빠져나가도 왜 빠진다는 말을 하기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이가 아파도 무엇 때문에 아프다는 말을 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살이에도 이런 경우는 얼마든지 많습니다. 때로 우리는 엄연한 사건을 놓고도 그 원인이 부끄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냉가슴 앓으며 유구무언(有口無言)인 경우를 봅니다.
더러 기도를 해달라 해서 "어디가 편찮으세요?"하고 물을라치면 "아이구 목사님, 그건 묻지 말아주십시오"하고 겸연쩍어합니다. 그러면서 그저 기도만 해달라고 하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미안한 얘깁니다 마는 어느 목사님 한 분이 불면증으로 보름 동안 고생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번 방문을 했더니 눈이 충혈 되어 있더군요. 아무리 약을 먹어도, 심지어는 수면제 주사까지 맞았는데도 잠이 안 온다는 것입니다. 보름 동안이나 잠을 못 잤으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까닭인즉 그 목사님 딸이 집을 나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격을 받았는데, 그 때문에 잠을 못 자다가 마침내는 잠 못 자는 게 병이 되었다고 합니다. 저를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가 예수를 어떻게 믿었기에 잠 못 자는 병에 걸렸나 싶어 부끄럽습니다." 사실입니다. 목사는 병을 앓아도 골라가면서 앓아야 되겠구나 싶었습니다. 아무 병이나 다 앓아서는 안되겠습디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신경성 같은 병도 부끄러운 줄 알아야 됩니다. 도대체 예수님을 어떻게 믿기에 신경성입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렇게 안 좋은 병 앓아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의 이 여자는 여자로서 부끄러운 병을 앓고 있습니다. 말할 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는 병을 숨어서 앓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홉째, 이 여자가 앓고 있는 병은 내적인 병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병이 아닙니다. 여자는 앓아 누웠을 때가 제일 예쁘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핏기가 없어서 그래 보이는지 결핵환자가 예쁘게 보인다고 하는 말도 있어요. 그러나, 오늘의 이 여인은 외모로 봤을 때에 어떠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속은 썩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여자의 고민이자 고통이었습니다. 마치 이것은 죄와도 같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생긴 병, 죄라고 하는 병, 때때로 이런 병이 있습니다. 이런 죄가 있습니다. 부끄러운 죄, 부끄러워서 드러낼 수조차 없고 마음대로 회개도 할 수 없는 죄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회개하는 동안에 많은 사람들에게 덕을 끼치지 못하니까요.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니 그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을 실제로 본 적이 있습니다. 남편이 아주 존경받는 교수였습니다. 교수인 남편한테는 알고 보니 7년 전부터 다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일곱 살 난 아이까지 있더라는 겁니다. 이걸 알고 난 다음에 여자도 만나보고 아이도 만나보았답니다. 기가 막힌 일이지요. 자기 집에 있는 아이들은 지금 삼 형제인데, 그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를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고 훌륭한 분으로 알고 있으니 소문을 내서 전부 뒤집어 놓을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 저에게 참 눈물겨운 이야기를 합디다. "목사님, 전 회개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구요, 울고 싶을 때에 울지도 못합니다. 부부싸움도 마음대로 못합니다." 아이들을 위하여, 남편의 명예를 위하여 그런 것입니다. 이런 것이 속병입니다.
여러분, 회개의 자유가 있습니까? 나는 여기가 아픕니다, 나는 이런 고통을 당합니다 라고 마음놓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말도 할 수 없는 것이 그야말로 딱한 사정입니다.
이 여자는 아주 비밀한, 깊이 숨어 있는 부끄러운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나아왔지만 "예수님, 내 병을 고쳐 주세요" 할 수가 없습니다. "어디가 아프냐?" 물으실 때에 어디가 아프다고 선뜻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마도 예수님께 말씀드렸겠지요.
그러나 말씀드리기 부끄러운 병입니다. 어디다 안수해 달라고 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 정면으로 나타날 수도 없었고 병을 고쳐달라고 시원하게 구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 실존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딸아 평안히 가라"하고 칭찬하십니다.
이 여인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신구약 성경을 안다는 것이겠습니까? 삼위일체의 교리를 안다는 것이겠습니까? 요즘의 우리처럼 베델 공부를 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의 믿음이란 교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계율적인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이 십계명을 지켜온 것도 아닙니다. 사실은 십계명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사람이 가진 믿음은 가장 소박한, 겸손한, 행동적 믿음이었습니다. 우선, 소문을 듣고 예수님께 왔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부터 가버나움까지 왔습니다. 소문을 믿고 희망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병 고치신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 수 있다.' 이런 소문을 들었을 때, '다 고쳐도 내 병은 못 고쳐. 12년 동안이나 애썼는데도 못 고쳤는걸……' 이렇게 생각하고 체념했다면 못왔을 겁니다. 12년 동안 갖가지 방법을 다했겠지요. 미신도 많이 섬겼겠지요. 우리네로 치면 푸닥거리도 많이 했고 점쟁이도 많이 찾았겠지요. 많은 의사를 찾아가고, 갖은 약을 다 먹었을 것입니다. 재산을 다 허비할 만큼 12년 세월에 무슨 짓을 안 해봤겠습니까?
그렇게 다 실패했지만 예수님께만은 새로이 소망을 겁니다. 이것이 대견합니다. 우리가 종종 볼 수 있습니다마는 흔히 사람이 못하는 것은 하나님도 못하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데서 못한 일이면 예수님께서도 못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을 더러 보았습니다. 남편이 하도 부정해서 그것 때문에 별거생활을 하는 부부인데, 이제 남편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 부인을 만나서 "당신 남편 이제 예수 믿으니, 다시 합치지요"했습니다. 부인은 "예수가 누군지 모르지만 그 사람, 사람 안됩니다. 내가 10년을 두고봤는데 사람되기는 틀린 사람입니다" 그럽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됐는지 안됐는지 계약적으로 한 달만 같이 살아볼 수 없겠느냐고 겨우 설득시켜서 다시 만나게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이렇게 저렇게 절망을 했고 모든 것이 다 불가능했지만 예수님께만은 가능하다-오늘의 여인은 이 위대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감히 예수님의 길을 막고 나설 용기는 없습니다. "내 병을 고쳐주십시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겨우 예수님의 뒷전에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됩니다. 겸손한 마음입니다. 출애굽기 3장 11절에 보면 모세가 말합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건져내리이까?" 그리고 시편 8편에서는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라고 겸손할 줄 압니다. 언제나 우리는 은혜 앞에 나를 적게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을 것입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은혜 앞에 초라한 모습에 대하여 사실을 시인하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마침내 이 여인은 기회를 포착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게 된 것입니다. 가까이, 가까이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 가까이 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예수님'하고 소리를 질러야 할지 어떻게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가까스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회개의, 진실의, 충성의, 헌신의 기회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기회를 잘 포착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좀더 가까이, 좀더 가까이. 여러분, 우리는 어떤 면에서든지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만나는 만남의 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멀리서 듣고 보는 것이 아니라, 멀리서 앙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로 만나는 역사가 있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만졌다'고 하는 말은, 헬라어로 '합토'인데 '손을 대었다'고 하는 뜻입니다. 단순한 'touch'가 아닙니다. 'seize'입니다.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스쳐지나간 것이 아니고 옷자락을 잡아당긴 것입니다.
옷에 손이 닿았다, 손이 옷에 닿았다는 말이 아니라 옷을 붙잡았다는 말입니다. 일부러 붙잡은 것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깊은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예수님의 옷자락 한 가닥을 붙들고 잡아당긴 것이지요.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목적이 있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스친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생각과 뜻을 두고, 마음을 두고, 믿음으로 만진 것입니다. '믿음으로 만졌다'-이의 뜻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일생에 한 번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믿음으로 보고 믿음으로 듣고 믿음으로 만지는 사람, 믿음으로 체험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도 '그저 나오는 길이니까 한 번 더 나가지.' 이래서는 안됩니다. 내가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한 종말론적인 해결을 얻어야 되겠다는, 정말 내 생명을 거는 마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은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나왔다가 그저 돌아가서는 안됩니다. 믿음으로 나오고, 정성으로 나오고, 뜻을 가지고 나오십시오.
바로 며칠 전에 우리 교회 음악실에서 외국어대학 교수님들이 신우회 모임을 가졌는데, 거기에 나온 어떤 분이 얘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분에게 독창을 하라고 시켰더니 나와서 독창을 하는데 감기가 걸렸더군요. 그분 하시는 말씀이 "감기 걸린 이유가 이렇습니다. 나는 주일날이면 교회에 나올 때에 가장 정성된 마음으로 나오고 싶어서 다른 날과는 다르게 꼭 새벽에 목욕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따라 목욕을 하는데 더운물이 안나오더군요. 그래도 안 할 수 없어서 찬물로 목욕을 했더니 감기가 걸렸습니다." 그렇게 찬물로 목욕을 하고 나왔다는 그분의 음성이 조금 걸걸했어요. 독창을 하시는데 은혜가 더 많습디다. 우리 생각해보십시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도 그렇습니다. 죄송하지만 우리가 이 새벽기도에 나올 때에도 세수도 안하고 그냥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러 오는데 그렇게 하고 나옵니까? 안될 일입니다. 정성을 다하십시오. 간단하게라도 세수를 하고 옷을 단정히 입고 나와야 합니다. 가능하면 화장도 하고. 그런데 도대체 사람 만나러 갈 때에는 그렇게 모양을 내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는 아무 정성도 없습니다. 못씁니다.
마음과 정성, 중요한 것입니다. 이 여인이 차마 "예수님"하고 부를 용기도 없고, 고쳐달라고 애원할 용기도 없어서 떨리는 손으로 수줍은 듯 애틋하게 살짝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모습-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훌륭합니다. 예수님께로서 흘러나오는 '마술적 능력'을 도둑질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옷에도 능력이 있겠지. 슬쩍 닿기만 해도 무슨 기적이 나타나겠지. 그러면 나는 아무도 몰래 병만 고치고 돌아가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여자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그 순간에 혈루증이 딱 멎습니다. 피가 흐르던 것이 그치는 것을 직감했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알아보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여자는 깜짝 놀랐습니다. 예수님의 몸에 손이 닿는 사람도 많고 옷깃을 스치는 일도 많았을 텐데 어떻게 이 사실을 꼭 집어서 알아보셨던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찾으십니다. "누구냐?"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닙니다. 능력이 나간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이 여자를 못 찾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여인 스스로가 고백하고 나오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우연히 만진 사람 말고, 어쩌다 만진 사람 말고, 믿음으로 만진 사람이 누구냐?' 그 한 여인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찾아 만나주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개인적인 것입니다. personal love 입니다. 기어이 만나주십시다.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마침내 이 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스스럼없이 말해버립니다. 이제는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마침내 가슴을 열고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몇 가지 상황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여인이 두려워합니다.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간증을 합니다. 무릇 간증하는 사람은 두려움으로 해야 됩니다. 자랑거리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은혜를 소개하는 것이기 때문에 간증할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할 것이요, 감사한 마음으로 할 것입니다. "내게 이러한 은혜를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을 하자는 것, 그것이 바로 간증입니다. 둘째는, 부끄러움 없이 숨김없이 사실대로 다 터놓고 아뢰었습니다. 마음을 활짝 열었습니다. 이제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두려워하며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바로 이 순간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그야말로 샬롬, 에이레네 샬롬의 축복을 하십니다. "평안히 가라." 이 말은 바로 영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지금까지는 육적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육이 구원받음과 함께 영적인 병도 낫습니다. 평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평안, 하나님이 내게 개별적으로 은혜주시는 바 평안, 이 평안을 가슴 가득히 안고 그 여자는 물러나게 됩니다.
교부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이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서 자기 집 앞에다 기념비를 세웠답니다. '모월 모일 예수님께서 내 병을 고치시다.' 이렇게 기념비를 세워놓고 가는 사람 오는 사람에게 증거를 했답니다.
"내가 12년 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예수님을 만나서 이렇게 나았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이 여자는 불행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람이 환자가 아니었다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버나움까지 오지 않았겠지요. 예수님을 찾아갈 마음을 먹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여자는 그런 불행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만났고, 육적, 영적으로 다 구원받은 은혜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다 은혜입니다. 실패도 은혜요, 질병도 은혜요, 마지막에는 죽음도 은혜입니다. 다 감사할 것입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구체적 경륜과 사랑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행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불행은 다행으로 바뀝니다. 즉 높은 가치의 의미로 바뀝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실패 때문에 교회를 찾거나, 병 때문에 교회를 찾거나, 답답한 일 때문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남보다 특별히 불행한 일 때문에 남달리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그 불행은 나에게 축복이 되었습니다. 남다른 사랑이 나와 함께 하셨다는 것을 깨닫고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으니, 딸아 평안히 가라"-우리 모두 이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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