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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약함을 담당하신 주님
(마태복음 8장 6~17절)(마가복음 1장 32~33절)(누가복음 4장 40~41절)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저물어 해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온 동네가 문 앞에 모였더라.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오늘의 본문 말씀에는 주님께서 우리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셨다고 하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함께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퍽 짧아서 어떻게 보면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특정의 한 사람을 만나서 병고쳤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계기에서 이루어진 일도 아닌 까닭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많은 사람을 고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가 왜 중요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병고치신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성경 여러 곳에 나옵니다마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찾아와 예수님께로부터 병고침을 받았다고 하는 본문의 이야기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의 세 복음서에 다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다같이 나타나면서 하나의 사건을 저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보아서 그런지 말씀이 감해지기도 하고 추가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하는 문제를 놓고 봅시다. 이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것을 말해줍니다. 마가복음 1장 33절을 보면 "온 동리가 문앞에 모였더라"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셨다는 소문이 좍 퍼졌습니다. 예수님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다가 예수님께서 일으키시자 벌떡 일어났다. 중풍병들린 사람도 일어났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다 고쳤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겠습니까? 오늘날에 이런 일이 생긴다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일 것입니다. 요새도 간혹 그런 일이 있다고는 합니다. 실제로 있기도 합니다. 그 대부분이 내과적(內科的)인 경우입니다. 가령 소화기능이 나았다든가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눈에 띄지 않게 낫는 것이 많습니다. 만약에 앉은뱅이가 일어난다든가, 장님이 눈을 뜬다든가, 문둥병자가 일시에 깨끗해지는 사건이 나타난다면 굉장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신문이나 방송 기자들의 등쌀에 못견딜 것입니다. 온 세계에서 사람들이 떼로 몰려올 것입니다. 예나 오늘이나 이런 복된 소식, 이런 특별한 소문은 빨리 퍼지게 마련입니다. 또한 퍼지는대로 사람들은 거기에 응답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구경꾼들만 모이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환자들이 몰려왔다는 것입니다. 너도나도 병을 고치려고 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 많은 병자들이 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일단 소문을 낸 사람들에 대해서 그 공로를 치하해야 합니다. 좋은 소문은 되도록 많이 내야겠습니다. 간혹 이런 경우를 만납니다. 무척 낫기 어려운 병인데 간단히 약 한 봉지를 먹고 나았습니다. 이런 소문은 자꾸 퍼뜨려야 됩니다. 소문을 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좋은 소식은 열심히 전파해야 됩니다. 전파하는 가운데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아름다운 일들이 파급되어 이루어집니다. 그런고로 여러분이 신앙적으로 얻은 간증,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복,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누린 은혜가 있으면 잠잠하지 말고 기회 있는 대로 소문을 내야 됩니다. 저는 전도라는 말을 별다르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전도라는 것이 별것 아닙니다. 전도란 소문을 내는 것입니다. "소망교회에 가봅시다. 참 좋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 전도입니다. 이것이 다 소문입니다. 소문을 자꾸 내야 합니다.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소문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저 사람의 병을 고쳤다면 내 병도 고칠 것이다 라고 생각한 점입니다. 그래서 모든 환자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대목입니다. 저 사람의 문제가 해결되면 내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저 사람이 예수를 믿어서 복 받았다면 나도 예수 믿으면 복 받을 것이다-이렇게 생각했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복음에 대한 진실한 응답입니다.
세 번째로 생각할 문제는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구세주를 필요로 하는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많은 문제가 있는데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의사도 못고치고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습니다. 누가 해결해줄 수 없을까, 무슨 방법이 없나 하는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넓은 의미로 말해서 구세주를 기다리는 백성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 필요, 그 간절한 영적 욕망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있어서 복음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누구보다 먼저 예수를 만났던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 아무 문제도 없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소문이 파다해도 '나중에 한번 시간 있으면 구경이나 가봐야지'하고 그만입니다. 그러나 환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일생에 한 번뿐인 절호의 기회다, 꼭 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환자의 가족 역시 그렇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환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야 되겠다고 서두릅니다. 구세주에 대한 이런 갈망, 구세주에 대한 욕구가 있고서야 행동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앞에 나아오는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11장 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서글픈 이야기입니다. 복음에 대한 소문이 넓게 퍼져나갔지만 실제로 복음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달려나온 사람은 환자뿐이었습니다. 눌린 자뿐이었습니다. 오늘도 가난한 마음, 배고픈 마음, 다시 말해서 병자로서 치료받아야겠다는 마음, 간절히 바라는 마음, 주리고 목마른 것 같은 마음이 있는 사람만이 이 복음을 바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만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은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마는 영적인 의미에서 복음이 누구에게 전파되느냐 하면 바로 목마른 것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입니다. 마치 병자가 낫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간절한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만 생명의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렇게도 환자가 많았고, 고난 당하는 자가 많았고, 눌린 자가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소문을 듣자마자 순식간에 물밀듯이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집단성과 개인성의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많은 사람이 모였습니다. 전체를 상대하는 것입니다. 그 수가 얼마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습니다마는 아무튼 작은 마을이므로 100명이든 200명이든 모인 상황입니다. 여기에 모여 앉은 사람들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집단적이요 공동체적입니다. 앞을 다투어가며 와글와글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람들을 일시에 전체적으로 집단적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모이기는 집단적으로 모였는데 만나기는 개별적으로 만나십니다. 누가복음 4장 40절을 보면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서 고쳐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때에 저라면 한마디만 외치겠습니다. "여기에 모인 모든 환자들아, 다 깨끗할지어다!" 능력이 모자란 것도 아닌데 못할 것도 없지 않습니까? 어떤 목사는 사람들을 일일이 대하기가 귀찮아서 다 모아놓고 아픈 데에다 손을 얹으라고 한다고 합디다. 어떤 사람은 배에다 손을 얹고 어떤 사람은 발가락에다 손을 얹습니다. 무좀이 있는 사람은 발가락만 붙들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손닿은 곳의 모든 병이 나을지어다" 한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는 능력이 모자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학적인 문제를 생각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인류를 집단적으로 대하시기도 하나 우리를 만나주실 때에는 개별적으로 만나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개별적으로 만나십니다. 목자는 양을 300마리 이상을 거느립니다. 많은 양을 집단적으로 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에 양을 넣을 때에는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가며 넣습니다. 이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다 사랑하시는 동시에 나 한 사람을 특별히 개별적으로 사랑하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 하나만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인 것처럼 우리 모두를 사랑하신다." 저는 이 말씀을 퍽 귀히 여깁니다. 나 하나만이 사랑하는 자인 것처럼 하나님은 특별히 나만을 사랑하시는지도 모릅니다. 나 하나만을 위하여 이런저런 일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나 하나만을 위하여 큰 일도 있고 세계적인 일도 있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나 하나만을 위하여-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입니다. 개인적인 관심이자 개인적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개별적이요 일대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개별적으로 사랑하셨습니다. 그 계시로서 많은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셨습니다. 아픈 부위에 손을 친히 대시고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루만지시면서 치유하셨다는 말입니다.
좀더 깊은 의미에서 볼 때에 제가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은 병 고치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다음 시간에도 다시 말씀드릴 것이고 이 이적을 공부하는 동안은 계속 이어질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저 병 고치러만 오신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에 병 고치는 것이 목적이라면 한 사람씩 만나서는 안됩니다. 어느 세월에 그 많은 환자들을 치유하겠습니까? "유대나라에 있는 모든 환자들아, 일시에 나을지어다." 이 한마디면 충분합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이 부족한 것입니까? 왜 만나는 환자만 고쳐주시는 것입니까? 왜 그렇게 인색하신 것입니까? 왜 한 사람 한 사람을 일일이 만나야 했습니까? 병 고치는 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병 고치는 사건을 통하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사랑을 계시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아무리 환자가 많다 해도 문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일일이 만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의 개인적인 사랑에 대한 확실한 표적으로서 기적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말씀입니다. 단순히 병고쳤다고 하는 사건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어떻게 말하면 대단히 인간적이요 신학적이요 신앙적입니다.
여러분, 가끔씩이나마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기회가 있을 때에 우편으로 돈을 보내는 따위의 짓일랑 하지 마십시다. 걸핏하면 구제금을 낸다면서 방송국에 갖다주고, 신문사에 갖다주고 합니다마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래서는 안됩니다. 얼마 전에 홍수가 났을 때만 해도 수재민 기금을 내달라고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소망교회에서도 좀 보내주셔야겠습니다." "저희는 하지 않겠습니다." "왜요? 다른 교회는 다하는데요. 소망교회만 하지 않으면 교회 명예에 누가 될 텐데요." "교회는 명예를 챙기지 않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거절하고는 우리 구제부 부원들과 목사님들이 동행하여 직접 한 교회 한 교회 찾아다니면서 기금을 전달하였습니다. 지난번에 나주 지방과 광주 지방에 들렀더니 당시에 수재민 기금을 받았던 교회에서 저를 무척 반깁디다. 그때에 도움 받은 것을 말할 수 없이 고마워하였습니다. 고맙다고 하는 인사가 너무나 간절해서 되레 송구합디다. 그 몇백만 원도 안 되는 돈을 그토록 고마워하는 것을 보고는 주소를 적어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더 필요한 곳이 있을 것 같아 남겨두었던 기금 중에서 얼마를 우편으로 보내주었습니다. 여러분, 직접 하여야 합니다. 개별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돈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지 물질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자칫 유물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공산주의자가 따로 없습니다. 돈이면 다라고 하는 것이 공산주의입니다. 물론 돈은 필요하지마는 저만치 떼어놓아야 합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우스운 이야기 하나 해보겠습니다. 지금은 생활이 많이 넉넉해져서 집안에 목욕탕을 두고 삽니다마는 옛날에는 목욕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중목욕탕에 늘 가곤 했습니다. 저는 토요일 새벽마다 다가오는 주일을 위해서 목욕을 하러 가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막 목욕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저의 집에 제법 드나드는 문둥병 환자와 마주쳤습니다. "목사님, 오랜만입니다. 좀 도와주세요." 저를 보자마자 나오는 소리입니다. 목욕탕에 갔다오는 사람이 무엇을 가졌겠습니까? 아무 것도 없으니 없다고 할 수밖에요. "지금 돈이 없는데요." "아이 그러지 마시고 좀 주세요." 답답하게도 목사님 말을 믿지 않고 생떼를 쓰는 것입니다.
래서 가까이 다가오게 한 후 그 사람 손을 덥석 붙잡고 말했습니다.
"여보게나, 진짜로 없단 말일세." 그랬더니 금새 얼굴이 밝아지면서 넙죽 절을 합니다. "돈 받은 것보다 더 고맙습니다." 목욕탕에서 씻고 나온 말끔한 손으로 제일 먼저 문둥이 손을 만져주었으니 참으로 고마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반드시 돈이라야만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시고 일일이 만나셨다는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병 낫는 것만을 위해서라면 그럴 필요까지 없습니다. "모두 다 일어날지어다"하면 그만이니까요. 그러나 그것이 아닙니다. 그 희한한 광경에 한번 놀랄 수는 있겠지마는 마음에 깊이 파고드는 사랑의 응답은 가질 수 없습니다.
다시 본문을 보면 '저물 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세 복음서에 다 나타납니다. 저물매, 저물어 해질 때에, 해질녘에-이에 대한 세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 하나는 다 아시는 대로 모든 병이 낮에는 괜찮다가 저녁이 되면 쑤시고 아파 오기 때문에 그 통증을 못 참아서 사람들이 달려오지 않았나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거가 빈약한 이야기입니다. 또 하나의 학설은, 뜨거운 낮에는 다닐 수가 없어서 서늘해진 저녁에 찾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입니다. 중동지방의 한낮은 햇볕이 수직으로 모래에 내려 쬐기 때문에 뜨거워서 다니지를 못합니다. 하물며 환자들이기에 더욱 왕래가 힘듭니다. 이것 역시 흡족한 이야기가 못됩니다. 위급한 환자가 뜨거운 것 서늘한 것 가리겠습니까? 만사 제쳐놓고 빨리 와서 병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뜨거운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지배적인 학설이 있습니다. 이 날은 안식일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이 걸림돌이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고치신 일로 말미암아 시비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온 것입니다. 그곳의 시간 관념으로는 해가 지면 날이 바뀝니다.
우리 관념으로는 해가 떠야 다음날이 되는데 거기서는 토요일에 해가 지면 곧바로 일요일로 넘어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지기를 기다렸다가 해가 떨어지자마자 우 몰려온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지배적인 학설입니다.
여기에는 퍽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병고침을 받는 데에 왜 그렇게 시비가 많습니까? 안식일이 왜 그렇게 큰 문제가 됩니까?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안식일 문제는 꽤나 심각합니다. 이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시비, 율법학자들의 변론이 분분합니다. 이런 것이 귀찮은 것입니다. 소위 율법을 지키느라고 내내 기다리고 있다가 해떨어지자마자 모여든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는 항상 율법이라는 걸림돌에 걸리기 쉽습니다. 은혜의 자유함이라는 것은 때때로 율법에 큰 방해를 받습니다. 그런데 오늘 안식일을 피해서, 안식일이 지난 다음에 이 사람들이 그대로 떼를 지어 예수님 앞에 모였습니다. 상상해보십시오. 이들이 안식일이 어서 지나가기를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겠습니까?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시간을 맞추어서 예수님 앞에 모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은혜를 위하여 일하는 길에는 어떤 인간적인 규례나 습관적인 터부(금기) 같은 것들이 은혜를 그르치는 예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 다음, 우리는 본문에서 귀신들린 자와 병자를 동일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세계관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귀신들린 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마는 언제나 같게 생각합니다. 귀신들린 것도 병이요 병든 것도 귀신들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는 병자가 단순히 육체의 병에만 걸린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이것은 육체의 병이면서 정신병이요, 정신병인 동시에 도덕적인 병이요, 도덕적인 병인 동시에 영적인 병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병이란 총체적입니다. 우리도 가끔 병에 걸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 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심지어 자동차 사고 나는 것도 그렇습니다. 많이들 하는 이야기지만 자가용 운전수를 채용할 때에는 부부 사이가 좋은 사람을 택하려고 합니다. 부부싸움이 잦은 사람이 운전을 하면 사고나기 쉽습니다. 아침 출근 전에 부부싸움을 한바탕 치르고 나왔다고 해봅시다. 나가다가 '꽝' 합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세상 일들이 다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것 같아도 정신적인 것에서 비롯됩니다.
병도 그렇습니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한번 소화가 안 되는 것부터 시작하여 어떤 병에 걸리는 것까지, 거기에는 다 정신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정신적인 것은 곧 영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문제가 거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병을 보실 때에 총체적으로 보셨습니다.
그런고로 치유하실 때에도 전인적으로 치유하십니다. 환자를 보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죄 문제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환자의 문제를 정신 문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신 문제를 치유하는 것이 육체를 치유하는 것이요, 영을 치유하는 것이 육체를 치유하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전인적인 것이었습니다. 병을 보실 때에도 총체적으로 보시고 치유도 전인적으로 하십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헬라 사상에는 이원론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육체는 육체요 정신은 정신이다, 물질과 정신은 별개다, 이렇게 따로따로 봅니다. 그러나 성경적 진리와 예수님의 교훈에서 이것은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인 병만을 병이라고 보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귀신들린 자와 병자가 늘 같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실 때에도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라고 말씀합니다. 함께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귀신에 대한 것을 믿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믿어야만 됩니다. 총체적이며 전인적인 치유입니다.
일전에 귀신들려 발광하는 한 사람을 기도하여 깨끗하게 고친 일이 있습니다. 고치자마자 저는 그 가족들에게 두 가지를 당부하였습니다. "좀 있다가 깨어나면 아마 배고프다고 할겁니다. 그러니 죽을 쑤든지 해서 음식을 준비해놓았다가 잘 먹이십시오. 그 다음에는 곧바로 수면제를 먹여서 재워야 합니다." 제가시키는 것을 그대로 실행하였더니 불과 일주일만에 깨끗한 몸과 정신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다 성경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여기 정신병자나 귀신들린 사람이 있다고 할 때에 적어도 이 사람은 귀신만 들린 것이 아닙니다. 한 열흘 내지 보름동안 잠을 못 잤기 때문에 이 사람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일단은 수면제를 먹여서 재워야 됩니다. 또한 정신적인 문제로 시달렸습니다. 신경이 극도로 곤두서 있으니 소화가 되었겠습니까? 말할 것도 없이 바싹 마릅니다. 그야말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충분히 먹여야 합니다. 기도하여 귀신을 내어쫓았으면 수면제를 먹여서 재우고 한편으로는 음식을 주라는 이야기입니다. 너무 인간적이다 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예수님을 보십시오. 병들어 죽은 야이로의 딸을 능력으로 살리셨으면 됐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왜 하십니까?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막 5 : 43)"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행하지 못하는 능력은 주님께서 행하십니다. 그러나 나머지 인간적으로 해야 될 일은 우리가 해야만 됩니다. 예수님의 치유 방법은 총체적이요 전인적인 방법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되겠습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치유하십니다.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귀신을 내어쫓으실 뿐만 아니라 병까지도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병을 고치십니다. 오늘도 말씀을 똑바로 받으면 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 병에 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바로 받는 한 건강할 수 있습니다. 말씀은 단순한 지식도 아니요 단순한 교리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능력성이 있습니다. 치유성이 있습니다. 이것을 분명히 알고 나서 오늘의 이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얼마 전 새벽기도 시간에 드렸던 이야기입니다. 어느 침례교 목사님 한 분이 위암 환자로서 두 달밖에 못산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 소망교회 설교를 담은 카세트 테이프를 듣고 있느라면 그 동안만은 통증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듣지 않으면 계속 아픕니다. 그 사모님이 교회에 와서 더도 아닌 일년 분을 다 사갔습니다. 그리고는 3개월 동안을 줄기차게 들었더니 병이 완전히 나아버렸다고 합니다. 저는 잘 모르는 목사님입니다만 증인 목사님 친구 두 사람과 함께 와서 제게 분명히 간증하고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말씀의 능력성을 잊지 마십시다. 말씀으로 고치시는 동시에 믿음의 응답을 요구하십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 8 : 17)"라는 말씀은 이사야 53장 4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병을 짊어지셨도다-고난의 종의 모습입니다. 이 병 고치시는 모습을 십자가의 고난으로 지금 조명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만을 속죄의 제사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병 고치시는 것 자체에도 대속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거기에 구세주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속적이요 제사장적인 의미가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적이며 현실적인 것입니다.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의 '담당한다'-'엘라벤'이라고 하는 말은 '람바노'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영어로 말하면 'take'입니다. 몸에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순히 동정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약함을 담당하셨다, 즉 내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이 병든 책임이 마치 내게 있는 양, 내 것인 양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야, 이놈아, 무슨 죄를 지어 이 모양이 되었느냐! 어쩌다가 이 병신이 되었느냐! 그렇게 술을 퍼마시더니 드디어 위장병이 터졌구나!" 이렇게 비판하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한번은 어느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말이 많습니다. 환자를 앉혀놓고 어쩌고저쩌고 잔소리가 깁니다. 얌전히 듣고 있던 환자가 참다못해 말합니다. "설교는 그만하시고 치료나 좀 해주세요." 의사도 지지 않았습니다. "원인을 알아야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닙니까?" 둘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옆에서 보자니 참 답답한 사람들이다 싶어요.
여러분, 환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됩니까? 때로는 할말이 많습니다.
"마음씨를 그렇게 쓰니까 병에 걸렸지. 마음을 곱게 써"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깊이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비판도 없으셨습니다. 연약함을 담당하셨습니다. 자기 책임인 것처럼, 자기가 아픈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담당할 줄을 알아야 됩니다.
가끔 보면 환자의 집을 방문해서는 쓸데없는 소리를 합니다. "시어머니가 그토록 잔소리를 하더니만 결국 며느리가 병들었구만." "애들이 하도 속을 썩이니 엄마가 드러누웠지." "당신은 남편 등쌀에 이 지경으로 고생하는 거야." 이 사람 원망하고 저 사람 책임 묻고, 도대체 시비가 많습니다.
여러분, 아무 말도 하지 마십시다. 욥이 환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친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이 이레 밤낮 동안 차마 아무 말도 못하고 있을 때에 욥은 오히려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욥이 입을 열어 자기 생일을 저주하기 시작하자 이에 친구들이 슬금슬금 하고 싶은 말들을 꺼냈습니다. 잘 생각해봐라, 네가 큰 죄를 지었나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럴 수가 있느냐, 아는 체합니다. 마침내 욥은 참다못해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욥 16 : 4)"하며 입 좀 다물라고 합니다. 연약함을 담당한다는 것은 그 책임을 함께 진다는 말입니다. 내가 같이 진다, 비판 없이 그 아픔을 같이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병을 짊어지셨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짊어졌다, '에바스타센'이라는 말은 '바스타조'라고 하는 동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걸머진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병을 내가 대신 걸머진다, 내가 너희를 모두 사랑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표현입니다. 무슨 말로 위로하거나 정신적으로 위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상한 주문을 외어서 치유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를 보는 순간 몸으로 그 아픔을 같이 느끼십니다. 그리고 치유하십니다. 이사야의 이 말씀은 번역상으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히브리 원문대로는 고통을 짊어지신 것으로 되어 있고, 70인역에는 죄를 걸머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히브리 원문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2장 24절의 말씀을 보면 70인역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토록 중요한 의미가 여기 있습니다. 복잡한 성서학적인 이야기는 접어두겠습니다. 문제는 병과 죄를 동시에 하나로 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병, 죄를 예수님께서 걸머지셨습니다. 우리 대신 어깨에 지셨습니다. 몸으로 지셨습니다. 그것이 치유로 나타난 것입니다. 능력이 남아돌아서 취미 삼아 고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감상적으로 장난 삼아 고쳐주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치병,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걸머지시는 결과로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매우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죄를 걸머지는 순간, 그 병이 나았습니다. 여기에 담긴 참된 의미를 생각해야 됩니다. 종종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환자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그의 아픔이 내 몸에 전달됩니다. 그를 사랑하는 마음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같이 아픔을 느끼면서 기도하였더니 그의 병이 나았습니다. 이렇게 혼신을 다해 기도하고 나서 집에 돌아오면 몹시 피곤하여 쓰러집니다. 그저 아무렇게나 되는대로 '하나님, 이 사람을 돌보아주십시오'라고 기도한 것은 낫지 않습니다. 능력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모름지기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라는 말씀의 실제적인 의미를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은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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