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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로 취하지 말라(야고보서 2 : 1-4)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 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 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 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동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사도 야고보는 오늘의 본문에서 성도로서의 이웃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가 어떠해야 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바로 될 때에 나와 이웃과의 관계도 바로 될 것이며 또 그리되어야만 합니다. 수직적인 관계가 바로 되는 동시에 수평적인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수직적인 것이 근본이요 수평적인 것이 그 결과입니다. 수평적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 수직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관계를 바로 맺음으로써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맺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됨으로써, 그 결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바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혹 누군가와 사이가 잘못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인간 관계가 문제되어 있습니까? 혹 사이가 잘못되어버린 그 사람에게 잘해보자고 해서 선물을 준다거니 새삼 친절하게 대해 준다거니, 혹은 찾아가 빌어 본다거니 하고 갖은 애를 다 써보지만 인간 관계의 범주에서는 될 일이 아닙니다.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는 안될 일입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잘못되었는데 그것을 바로잡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면 이제 그리로 신경을 쓰지 말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잡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올바른 성도로서의 모습을 되찾을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그 '대속하신 구속의 은혜'를 깨달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성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이일에 먼저 힘쓸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고 보면 이웃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이웃과의 관계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 원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이웃과의 관계를 잘 가져서 바로 되면 그 공로로 하나님과의 길이 통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이는 복음이 아니라 이단(異端) 교리입니다. 바른 신앙이 되지 못합니다. 이웃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나름의 생각으로 아무리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한다해도 단 한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합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단 한사람과의 관계도 바로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바로 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바른 신앙생활이 바른 인간관계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 1절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가 퍽 윤리적이다 싶었는데, 이런 말씀을 대하고 보니 철저하게 신학적이다 싶은 것입니다.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신앙을 근거로 하여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했습니다. 근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광의 주"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사도 야고보가 즐겨 쓰는 특별한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근본적으로 실수했던 일이 무엇인고 하니, 영광의 메시야만 생각하고 고난의 메시야를 생각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다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에 그만 낙심하고 말았습니다. 모든 소망이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속적인' 영광을 누리게 될 줄로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대나라 정치적인 왕이 될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러했던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성령이 강림하는 것을 체험하면서야 비로소 '영광의 주'라고 하는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사도 야고보가 지금 '영광의 주' 라고 말씀하는 것은 '고난의 메시야'의 길을 통하여 영광을 얻으신 그 예수님을 가리킴입니다. 신학적 용어로는 'exalted Christ'입니다. 역사적인 예수님이 아니라 영광받으신 예수님입니다. 기억에 있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과거의 예수님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님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보십시오. 그들은 과거의 역사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 속의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지금 살아 계시는 예수님,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그 예수님을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그 엄청난 역사는 그래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영광의 주'-지금 살아 계시는 예수님, 그 놀라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받았으니 여기서부터 비로소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중생(重生)인 것입니다. '믿음을 받았다'고 하는 말도 원문상 매우 중요한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것은 내가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받은 것입니다.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믿음이 내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선물입니다. 믿음은 내 의지가 아니요 내 지식이 아니요 나의 노력으로 가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고는 아무도 믿을 사람이 없습니다. 믿음은 얻은 것이지 나의 공로로가 아닙니다. 나에게 믿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연전에 제가 로마서를 강해할 때, 이것이 방송으로 나간 적이 있는데, 멀리 하얼빈에서 이 방송을 듣고 중생한 분이 있습니다. 그분이 서울에 왔다가 저를 만나게 되었고, 만나자마자 제게 '로마서 강해'를 한 권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은 하얼빈에서 저의 로마서 강해를 방송으로 들으면서 노트에 필기를 해놓고 그것을 되풀이해서 읽었다고 합니다. 방송을 따라 적었으니 제대로나 적을 수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빨리 썼다 해도 빠뜨린 것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을 모르고 살던 그분이 방송으로 로마서 강해를 듣고 거듭났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이제 그는 남은 생을 다 그리스도께 바쳐서 어떤 핍박이 있다 해도 복음을 전하고 살다가 죽겠다고 결심했고, 지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이야말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로마서의 주제가 그것입니다.
믿음을 받았다는 것, 곧 믿음을 영접했다는 말은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를 영접했다는 말입니다. 내 의나 내 공로가 아니요 그의 의를 내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의롭다 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Justified Christian 인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지금 하나님의 의롭다 함을 얻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입장에서 이제 수평으로 이웃관계를 맺습니다. 이제 다른 사람을 볼 때에 어떤 눈으로 보겠습니까? 내게 아무런 교만이 없습니다. 교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의 내가 나의 공로로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므로 이웃을 볼 때에 부드럽습니다. 덕 있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게 됩니다. 당연히 그렇게 됩니다.
내가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을 저울질하겠습니까? 무릇 인간관계 치고 가장 나쁜 관계는 사람을 물건으로 보는 관계입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짜리'로 본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을 볼 때, 이 사람을 친해두면 내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부터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약하게 나쁜 시선이지요. 돈 있는 사람은 낫게 봐주고 돈 없는 사람은 눈 아래로 봅니다. 이런 사람이 너무도 많은 세상입니다. 인간 관계 치고 또 하나의 나쁜 관계는 이웃을 내 향락의 도구로 생각하는 관계입니다. 내게 기쁨을 주면 좋은 이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거들떠도 안봅니다. 내칩니다. 이웃을 내 향락, 내 생활의 한 수단으로 삼는 것입니다. 한심스런 관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어느 누구도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인간관계의 또 하나의 형태는 인도주의적 관계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관계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고 하는 관계입니다. 이 만큼이면 꽤 훌륭한 관계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로써도 모자랍니다. 이보다 좀더 높은 차원의 관계가 바로 형제관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가 형제관계입니다. 나도 하나님의 자녀요 그도 하나님이 자녀입니다. 나와 너는 하나님 안에서 형제입니다. 형제관계이므로 그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도 아직 부족합니다. 좀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바, 이웃을 그리스도 대하듯 대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의 핵심 요절이라고 하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4장 15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했습니다. 내가 나를 볼 때에도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을 생각하고 나를 봅니다. 이웃을 볼 때에도 그리스도께서 저분을 위하여 죽으셨다 생각하고 그를 봅니다. 그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뵙는 것입니다.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를 뵙는 것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여덟 남매가 있었어요. 그들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로 일곱이 어린 막내 하나를 끔찍히 사랑합니다. 일곱이 번갈아 금이야 옥이야 안고 어르고 합니다. 어째서 그토록이나 극진히들 위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어머니가 그 여덟 번째 딸을 낳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지긋한 나이에 해산을 하다보니 그 수고가 지나쳐서 눈을 감았는데, 마지막으로 자식들에게 남긴 말이 "내대신 이 아이를 잘 키워다오"라는 부탁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 남매는 어머니가 그리울 때마다 이 막내를 보는 것입니다. 아이 보고 어머니 생각하고, 어머니 생각하고 아이 보고…… 그러니 이 아이가 여간 소중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웃을 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저 사람 위하여 죽으셨다-이렇게 생각하고 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을 위하여 엄청난 값을 치르셨습니다. 이것을 알고 이웃을 대하는데 내가 무슨 할말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 하나가 천하보다 귀중한 것입니다.
"외모로 취하지 말라"의 헬라 원문은 단 하나의 단어입니다. '프로소포램프시야'입니다. '얼굴로 취하지 말라'라는 뜻이 됩니다. 얼굴이 잘 생겼느냐 못 생겼느냐로 사람을 구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적인 것으로가 아니라 외적인 것으로 인간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신 당시로 돌아가서 보십시다. 남녀 차별이 아주 극심하던 때였습니다. 인구조사를 하는데도 남자만 셉니다. 여자는 당연히 남자를 따르니 셀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자유인과 노예의 구별이 있었습니다. 노예는 사람도 아닙니다. 사고 팔고 할 수 있는 물건에 불과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도 있어서 유대인이 이방인을 얼마나 무시했는지 모릅니다. 이렇듯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정치적 입장에서 로마인과 비 로마인, 지위가 높은 사람과 낮은 사람-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나오고, 또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1절)"-누구에게나 똑같이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교회에 전직 장관이었던 분이 나옵니다. 본디 다른 교회의 집사님이었는데, 우리 교회로 옮겨왔다고 합니다. 저는 그 사실도 그 교회의 목사님이 나중에 말해주어서 알았습니다. "우리 교회의 집사님이 소망교회로 갔습니다. 잘 좀 위해드리세요"하고 저한테 알려줍디다. "누가 오라고 했습니까? 특별히 위해드리지 못합니다"라고 딱 잘라 대답하고 말았습니다마는, 얼마 후 그분이 저를 찾아와서 묻지도 않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 교회를 옮기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전에도 높은 지위에 있었는데 어느 날 장관이 되고 교회에 나오니 태도가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장관님, 장관님"하면서 의자까지 따로 마련하여 위합니다. 그러지 말라고 극구 사양해도 안되어서 하는 수없이 그 교회를 떠나기로 작정하고 우리 교회로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소망교회에서는 아무도 특별히 알아주지 않아서 좋다고 합니다. 특별히 보아주는 일없이 똑같이 대해주어서 얼마나 편안한지 모르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스운 이야기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모 재벌의 부인이 우리 교회를 나왔습니다. 이 교회를 나가도 특별히 위해주고 저 교회를 나가도 특별히 위해줍니다. 이것이 싫고 귀찮았던 것입니다. 소망교회는 다같이 대해준다더라, 그래서 우리 교회로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누구 하나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글쎄 6개월이 넘도록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너무 섭섭해서 어느 날 교회 사찰 집사님을 붙들고 말을 건넵니다. "집사님, 내가 누구인지 아세요?" "모르겠는데요." "내가 아무개 인인데 정말 모르겠어요?" "모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그 집사님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영화배우들도 많이 나옵니다. 내가 그들도 몰라보는데 당신을 어찌 알겠습니까?" 결국은 또 교회를 옮겼다고 합니다. 이렇게 몰라주는 것도 문제입니다 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평등한 대우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평등한 대우받는 것이 섭섭하다면 아직 중생하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평등합니다. 내가 가졌으면 얼마나 가졌으며, 잘난들 얼마나 잘났습니까? 다 같은 죄인이요, 모두 지옥 갈 사람인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사실밖에는 가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선은 내 마음이 평등한 대우에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똑같이 대해주는 것이 편안해야 합니다. '나는 특별해야 돼!' 라는 마음이 든다면 다시 한번 회개하여야 합니다. 더 얻어맞아야 할 사람입니다. 손이 땅에 닿을 때까지 내려가야 정신을 차릴 사람입니다. 또한 내가 남을 대할 때에도 평등하게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 건 똑같이 대하는 것입니다. 재물이 있거나 없거나 상관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똑같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아시다시피 로마제국이 얼마나 엄청난 나라였습니까? 그러나 기독교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렇게도 핍박하던 기독교를 마침내 국교로 공인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공로자가 둘 있습니다. 그 하나가 여성입니다. 당시의 여성들은 노예와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는데, 예수를 믿으면서 비로소 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를 열심히 믿을 수밖에요, 어디를 가든지, 로마사람의 아내가 되건 헬라사람의 아내가 되건 예수를 열심으로 믿습니다. 자식을 낳아서도 훌륭한 그리스도인으로 키웁니다. 바로 이 여성들이 대로마제국을 뒤집어놓은 장본인이었다는 것입니다. 여성의 공로가 참으로 컸습니다. 그 둘은 노예입니다. 로마 시민의 3분의 1이 이들 노예였습니다. 노예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자 도저히 다스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곳곳에서 노예 폭동이 일어납니다. 주인에게 반항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를 믿는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노예는 진실합니다. 주인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평안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마침내 주인들이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그 노예들에게 감동을 받습니다.
마침내 그들에게 자유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 노예들의 힘이 대로마제국을 뒤엎어놓은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역할을 여성과 노예가 해낸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기독교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기독교가 들어올 당시, 우리 사회는 아주 봉건적이어서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철저했습니다. 천민은 아예 사람도 아닙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마제국에서와 같은 일들이 생깁니다. 천대받던 여성들이 먼저 예수를 믿습니다. 한국교회가 발전하는 데에 여성의 공로가 절대적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어느 교회를 보나 여성들이 많습니다. 너무 눌려서 살다가 예수 덕분에 많은 혜택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기에 더 열심으로 믿는 것이지요. 또한 천민의 역할이 컸습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 마는, 저부터라도 조선시대에 났더라면 평생가야 벼슬 하나 못했을 것입니다. 이북사람에게는 어림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또한 이북에서부터 예수를 믿게 된 연유입니다. 소외당한 사람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아무리 학식이 출중해도 이북 출신이면 절대로 벼슬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천민 취급을 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눌러 살던 사람들이 갈 데가 어디 있었겠습니까?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언제든지 눌린 사람, 낮은 사람, 박해받는 사람과 같은 소외당한 사람이 예수를 믿어도 철저하게 믿습니다. 이들이 우리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교회도 언제나 소외당한 자의 편에 섭니다. 그들을 높입니다. 지위가 높다고, 재물이 많다고 특별 대우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대합니다. 이 말은 소외당하는 자를 높인다는 것이 아니요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대하라는 말입니다. 동등하게 대하라, 여기에 교회의 매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힘이요, 교회가 성장하는 근본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십니다. 바리새인이건 이방인이건, 니고데모건 막달라 마리아건 구별을 두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대하십니다. 심지어 누가복음 13장에서 보는바,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있는 여자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딸'이라 하십니다. 그 여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이 귀한 뜻을 받들어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똑같이 대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자매로 똑같이 대하고자 하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본문 2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라는 말씀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일을 그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금가락지를 끼고' 곧 귀족을 가리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이 말은 원문대로 하면 빛난 옷이라는 뜻이 됩니다. 번쩍거리는 옷을 입고 교회에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음 사람을 보니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은 좋은 자리에 앉게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여 구별해서 대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옷을 보고서 사람 대하는 것이 달라져서는 안됩니다. 잘못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마는, 60년대 초기에는 너도나도 국민복을 많이 입었습니다. 저도 겨울이면 넥타이 매는 것이 싫어서 고르덴으로 만든 국민복을 즐겨 입었습니다. 한번은 조선호텔에 볼일이 있어서 갔는데, 수위가 문간에서 못 들어가게 합니다. 왜 못 들어가느냐고 대들었더니 나중에야 들여 보내줍디다. 이렇듯 옷 입은 것으로 평가를 합니다. 그러니 입은 옷으로 평가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옷이 그 사람의 소유나 지위, 그리고 신분을 나타내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습니다마는, 그것으로 그 사람을 평가하려 들어서는 안됩니다. 교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똑같이 대하여야 합니다.
어느 큰 교회에서 성탄절 축하예배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화려한 옷으로 차려입고 예배당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한 가난한 흑인이 예배당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문간에서 못 들어가게 합니다. "당신은 못 들어가." 밖으로 내쫓겼습니다. 예배당 밖에서 울고 섰는데, 옆에 한 사람이 더 서 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예수요." "예? …… 예수님께서 왜 여기 서 계십니까?" "나도 못 들어갔소." 보십시오 여러분, 예수님을 내쫓고 예배를 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만큼은 절대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흔히 우리가 돈과 의를 동격시할 때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게 됩니다.
돈이 많으면 축복 받은 사람이요 가난하면 저주받은 사람이다 라는 종교적 착각에서 사람을 구별하여 대합니다. 또 하나, 부자가 되어야 교회 일을 많이 할 수 있다, 가난하면 돈이 없으니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하여 돈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대우하기 쉽습니다. 하나 이것은 착각입니다. 제가 오랫동안 목회 하면서 보니 돈 있는 사람은 교회에 돈을 내지 않습디다. 교인의 손에 있는 돈이 무슨 소용입니까? 헌금을 해야 교회 돈이지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형편이 어려운 분들이 오히려 정성을 다하여 십일조를 냅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그야말로 저들의 푼돈만 내어도 교회에서 큰 일을 할 수가 있겠는데, 내지 않습니다. 돈 많은 교인, 다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외모로 사람을 취하거나, 재산을 보고 사람을 취하거나, 능력과 지위를 보고 사람을 취해서는 안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사람을 안내하게 되거나 교제할 때에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일반적인 인간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딸을 시집보내거나 며느리를 맞이하는 혼사에서 돈 이야기를 꺼내어서는 안됩니다. 돈을 보고, 지위를 보고 사람을 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요즘은 똑똑한 청년들이 많아서 돈 많은 집의 딸은 일부러 사양을 한다고 합니다. 다 좋은데 돈이 많아서, 지위가 높아서 안되겠다고 한답니다.
분명하게 하여야 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외면이 아니라 내면으로, 물질이 아니라 인격으로, 더 나아가 영적 상태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 4절에서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죄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받았다고 하는 감격을 가지고 또 다른 구원받은 사람을 보십시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다고 하는 기독론적 입장에서 나를 보고 이웃을 볼 것입니다.
그 밖의 다른 것은 볼 것 없습니다. 나이도 재산도 외모도 문제가 안됩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보고 나를 보는 그러한 인간관계를 맺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우리 소망교회 목회 방침으로 가지고 있는 열 가지 중의 하나입니다. 절대로 특별대우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직분까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장로니 집사니, 특별하지 않습니다. 기능상의 구별일 뿐입니다. 직분을 가지고 종교귀족인 양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갈는지는 두고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같이 구원받은 죄인이요, 또한 구원받은 의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대화에서 똑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제가 특별히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장로투표 같은 것을 할 때에 보니 지위니 재산이니 하는 것들은 깨끗이 무시하고 투표를 합니다. 참 잘하는 것입니다. 돈 있다고 찍어주고 지위가 높다고 찍어주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판단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말씀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모름지기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자매라고 하는 그 사랑 안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이웃을 보고 인간관계를 맺어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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