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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입음(에베소서 4:17-24)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거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는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집이 깨끗하지 못한 집에 갈 때에는 이것이 또한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바닥을 제대로 손질하지 못해서 여기 저기에서 흙이 나옴으로 저야 아무 것도 묻어도 상관이 없지만 주인 되시는 분은 그저 제 옷에 무엇이 묻을까봐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럴 때이면 "괜찮아요. 낡은 옷입니다."하고 저는 마구 앉는데 주인으로서는 여간 미안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이런 집에 갈 때에는 이런 옷을 입고, 저런 집을 갈 때에는 저런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만 은 그렇다고 하루에 몇 번씩 옷을 바꾸어 입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특별히 어려운 때가 종종 있는 것은 아침에는 장례식에 갔다가 조금 뒤에는 어린아이의 돌집에 가게될 때입니다. 그러니까 장례식을 위해 새까만 넥타이를 매었었는데 이제는 어린아이의 생일 집에 가야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 때문에 넥타이를 가지고 다녀야 되는데, 이것 역시 옷입니다.
이와 같이 옷이라는 것은 그 분위기, 그 사람의 마음가짐, 그 당시의 기능적 역할 등에 전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 말씀은 일상 생활 속에서 그 누구에게나 있는 것을 비유로 하여 우리에게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본문이 주시는 바 우리의 마음도 새로워지는 상징적 의미를 살려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낡은 옷은 벗고 새 옷을 입는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을 보면 특별히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옷이란 귀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옷 하나를 가지고 할아버지가 입고 나면 아버지가 입고, 다시 그것을 받아서 아들이 입는, 그러니까 3대를 입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은 사람이 있으면 그 시체로부터 옷을 벗겨 입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얼마나 옷이 귀했겠습니까? 그 때문에 옛날에는 옷이 하나의 귀한 보화였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만 하더라도 이렇게 좋아진 것이 얼마 되지 않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만큼 옛날에는 옷이 귀한 것이었습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옷은 신분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는 점입니다.
요즈음 우리들은 민주화를 해보겠다며 이런 저런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잘 잘못을 떠나 구석구석에 많은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옷을 입는 양상입니다. 여기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돈 많은 사람들이 비싼 옷을 입느라고 야단들을 합니다 만은 제가 보기에는 별로 비싼 것 같지도 않거니 그렇다고 특별하게 멋있어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비싸다는 옷이나 시장에서 값을 깎아가면서 싸게 산 옷이나 그저 그게 그것처럼 비슷하게 보일 뿐 크게 차이나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이는 그만큼 옷이 민주화된 것이라 하겠습니다.
특별히 학생들에게서 교복을 벗기고 머리를 기르게 한 것도 그렇습니다. 한창 자라는 나이에 이런 저런 모습으로 변화를 부려보고 싶은 때인데, 이것을 군인처럼 제복을 입히고 머리는 얼굴과는 어울리든 어울리지 않든 손톱 발톱 자르듯이 똑같이 잘라 놓았으니, 조금 잘못하면 누가 누구인지조차 알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복을 자율화하므로 민주화에 대한 의식이 새로워지는 것은 물론 옷 자체가 민주화된 것입니다.
요즈음은 부하고 가난한 것이 옷에 의해서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학생들의 교복을 자율화하면서도 빈부의 차이가 옷으로 나타날까봐서 염려들을 하였습니다만은 처음에는 다소 그런 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었겠지만 결국은 청바지의 바람이 불고, 싼 옷을 멋으로 입는 청소년다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현상이 남녀 노소에게 다같이 나타나는 것이고 보면 정말 옷이 민주화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빈부 귀천 그 신분에 따라서 옷의 모양이나 질이 달랐던 것입니다. 또한 갓이나 모자, 의관을 갖추는 모양이나 정도도 다 다른 것이어서 아무 것이나 자기가 쓰고 싶다고 쓰거나 입고 싶다고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옛날 우리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로마나 헬라 사회에서는 물론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더욱 엄격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우선 제사장의 옷이 다르고, 왕과 왕족의 옷이 다르며, 귀족, 상민, 노예, 죄인 등 모두가 입는 옷이 다르므로 자연히 옷으로 신분을 구분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감옥에 가서 죄수들이 입은 옷을 보는 것 외에 군인들까지도 외출 시에는 사복을 하게 함으로 특별히 구별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군인에게는 분명 군인의 옷이 있음에도 외출 시에 사복을 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보아도 그렇습니다 만은 특별히 외국 사람들이 볼 때 일반 시내에 군인들이 왔다갔다하는 것을 봄으로 그들의 생각에 한국 시가지가 온통 군인인 것을 보니, 그만큼 사회가 경직되고 전재의 위험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공포와 혐오감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서 나온 발상인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얼마나 민주화가 된 것이겠습니까? 이제는 대통령의 옷이라고 해서 다른 데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기 우리 중 조금 특별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누구도 나무라거나 상관할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만큼 옷에 대한 우리의 의식도 문화도 민주화로 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옷이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으라고 하는 말은 바로 그 신분과 인격을 나타내고자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네 신분은 이러이러하니 지금까지 입었던 그 헌 옷을 벗어버리고 새 옷을 입으라는 말씀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이 옷에 대한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3:5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인의 옷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여"흰옷"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3:18 말씀에서는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흰옷은 곧 그리스도의 옷을 말하며 예수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 의의 옷을 입어서 너의 죄악된 모습을 가리우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3:4 말씀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내게 있어"라는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다른 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옷을 다 더럽혔는데 몇 명은 더럽히지 않고 그대로 깨끗하게 지켰다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의 신분, 그 신앙, 그 지조를 끝까지 지켰다고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얼마나 귀하고 중요한 말씀입니까? 뿐만 아니라 4 : 4 말씀에는 "이십 사 장로들이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이 흰옷 역시 성도의 옷이요, 그리스도의 옷이며, 그리스도인의 깨끗한 신분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 역시 로마서 13:14 말씀에서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 온 몸을 가리워 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록 천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귀족의 옷을 입으면 귀족처럼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으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어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 봅니다. 탕자에게는 탕자의 옷이 있습니다. 돼지우리에서 지내던 냄새나고 더러운 그 남루한 옷이 탕자의 옷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더럽고 추한 옷을 입은 탕자가 거지가 되어 지금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반기면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 입히라며 종들에게 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내 아들이라는 것을 뜻하고 있는 말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죄스럽기 그지없는 탕자의 입장에서는 사양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입으라고 하면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옷을 입음으로 꼼짝 못하고 아들이 되는 것이며, 이제부터는 탕자가 아닌 아들로서 옷에 걸 맞는 생각과 생활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임인바 이는 도덕적 수준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로 옷 입히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의로 구원받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말해주는 상징적 내용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먼저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고 하였습니다. 새 옷을 입으려면 먼저 헌 옷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목욕까지도 깨끗이 하고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46 이하에 보면, 소경 거지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길가에 앉아있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이때가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으로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떠들며 소리를 지르느냐고 꾸중을 합니다 만은 더욱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님을 부르게 될 때, 예수님께서 들으시고 머물러 서셔서 저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때에 옆에 있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고 하자, 성경에 보면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께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얻어서먹는 거지인 바디매오에게 있어서 이 옷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언젠가 한번 다른 곳에서 목회를 할 때 그 일을 경험한 바가 있습니다.
어느 길목을 지나가면 언제나 한 사람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눈을 감고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며 오며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도와주고는 하였는데 하루는 심방을 다녀오다 보니 멀쩡한 신사가 되어 부인과 함께 걸어오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피할 수도 없이 정면으로 만나게 되자, 자기도 나를 여러 번 본터이라 "아이구 목사님 미안합니다."하고 인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 보세요,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거요?"라고 하였더니 "그때 입었던 그것은 제 직업이예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옷을 입고야 얻어먹을 수 있지 않느냐고 하는 말입니다. 사실 얻어먹는 사람의 옷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소경으로서 얻어먹는 사람인 바디매오가 겉옷을 내어버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고 보면 바디매오는 믿음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를 만나면 나는 확실히 눈을 뜬다는 것이며, 다시 이 옷을 입지 않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과거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겉옷을 내어버리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버렸다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그렇게도 충격을 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옛 사람을 옛날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방임하고 포기하고 혹은 무지하고 허망하고 총명이 어두워지고 더러운 욕심에 버려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옛 사람, 옛 사람의 타락성을 깨끗이 벗어버리라고 하는 것이며, 그런 이후에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새 사람을 입은 새 사람과 그가 입은 옷이 걸맞아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제가 한 2년전 홍콩에 집회를 인도하러 갔다가 참 재미있는 방법에 의해서 정확하게 중국 사람을 알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방법이란 옷 입는 모습, 특별히 넥타이를 비뚤어지게 맨 모습을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인민복만 입던 중국사람들이 홍콩 나들이를 하면서 모처럼 양복을 입긴 입었으나 이것이 잘 맞지도 않거니와 생전 처음 매어보는 넥타이인지라 제대로 맬 줄을 몰라서 전부 비뚤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정말 사람과 자기 옷이 맞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새 옷을 입으면 새 옷에 맞는 거기에 어울리는 바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면 그리스도의 옷에 맞는 생각, 맞는 언행이 있어야 하는 것이지 옷만 입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오늘 본문은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라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근본적인 것은 심령입니다. 이 심령이 새로워지고 생각과 사상이 새로워지며 인격이 새로워지는 것과 더불어 새 옷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옷만 새 옷이 아니라 그 새 옷이 담고있는 상징적 내용인 사람됨 전부가 새로워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먼저 옷을 입으라고 하는 여기에 중요한 복음의 깊은 뜻이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먼저 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다음, 그 옷을 입은 신분에 합당한 사람이 되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먼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즉, 말하자면 세례를 먼저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20년 동안이나 예수를 믿었다고 하면서도 믿음이 좀 더 생기면 받겠다며 계속 세례를 받지 않으려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심지어 토요일에 나와서 세례 문답을 하고 갔는데도 주일 아침에 오더니 "저 세례 그만 둘까보아요"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길래 제가 그분에게 말하기를 "사랑을 완전히 하고서 결혼을 할꺼요? 결혼식하고서 사랑할꺼요? 결혼은 사랑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요. 그저 결혼식하고 이제부터 사랑합시다."라고 하였더니 그 말씀이 맞는다고 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말입니까? 이는 솔선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새 사람, 새 옷을 입었으니 내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이요, 이웃과의 관계는 그들이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보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에는 그리스도인으로, 예수 이름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옷 입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해서 단번에 완전한 변화가 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때문에 옛날 이야기 중에 당시 가장 천민으로 대우받던 한 백정의 딸이 양반의 집으로 시집을 가서, 하루는 시아버지 점심상을 들고 가노라니 그날 따라 시아버지께서 문턱을 베고 주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쩌나 하고 생각하다가 어머니가 일러준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 말이란 양반의 법도를 알 수 없는 어머니이기에 "양반들이래야 별거 없더라. 그저 '님'자를 자주 붙이면 되느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향해 말하기를 "아버님 발님 들어갑니다.
대가리님 치우십시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분이 하루아침에 갖추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이므로 힘이 드는 것임을 알아야 됩니다. 사실 나는 시원치 않는 사람인데 예수 믿고 직분까지 맡고 보니, 과거 같으면 한 바탕 할 것도 못하고 물건 하나도 마음놓고 깍지를 못하고 하는데 이것이 자연스럽고 편합니까? 아니면 불편하고 부자연스럽습니까? 가끔 보면 예수 믿는다는 것을 아주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그 옷에 영 걸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 모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옷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그 때문에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맞는 생각과 언행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탕자가 비록 거북스럽게 돌아오기는 하였지만, 일단 아버지가 주신 새 옷을 입은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지금까지 수년동안 방탕하던 사람이지만 이제부터는 깨끗이 아버지의 둘째 아들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될 것이란 말입니다. 아버지가 주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다시 방탕의 길로 나가서야 되겠습니까? 새 옷을 입었으면 새로운 생활이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철인 소크라테스가 처형되는 날 그 사랑하는 제자 아폴로드로스가 마지막 길을 떠나는 스승을 위해서 새 옷을 한벌 드리면서 이 옷으로 갈아입으시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심각한 시간에 소크라테스가 그 옷을 받아 들고 하는 말이 "자네 생각에는 내가 평상시에 입고 있던 이 옷이 평상시에는 맞지만, 마지막 죽는 시간에 입은 옷으로서는 마땅치 않게 여기는가?"라면서 그 새 옷을 갈아입고 처형을 당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고 한다면, 오늘 내가 주님 앞에 가야 된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옷을 입어야 될 것 같습니까? 가끔 어떤 분들이 저에게 "목사님, 새벽기도 나오실 때도 보니까 꼭 넥타이를 매고 나오시는데 좀 아무렇게나 입고 나오시면 안 되는 겁니까?"하고 물을 때가 있습니다. 물론 반드시 여러분들께서 저와 같이 정장을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들이 귀한 손님을 만나러 간다는 생각을 하면 어떤 차림으로 가야 되겠습니까? 결코 아무렇게나 하고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나오는 시간인데 어떻게 해야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무슨 굉장한 의상을 따로 차려입거나 흰옷을 입고 나와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최소한 어떤 어른을 만나는 것보다는 나은 차림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이 곧 마음가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 앞에 나아 올 때이면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주님 앞에 가는 자의 마음과 몸가짐으로 단정하게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로 옷 입은 자들입니다. 따라서 그 옷을 입은 자에게 합당한 생각과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기독교인의 윤리입니다. 오늘본문은 우리를 향하여 "썩어져 가는 구습을 쫓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입어야할 바 온전한 새 사람을 입기 위해 옷을 벗고 입는 본 비유가 주는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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