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약속하신 면류관(야고보서 1 : 12)

by 【고동엽】 2022. 11. 5.

 

목차로 돌아가기

약속하신 면류관(야고보서 1 :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우리말 성경에는 본문말씀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지만, 이 말씀의 헬라말 원문을 보면 "복되도다, 시험을 참는 자여"하고 '마카리오스'-'복되도다 (Blessed)' 라는 말이 첫머리에 나오고 있습니다. 영어로도 "Blessed is the man who endures trial" 이렇게 되겠습니다. 똑같은 형식의 말씀이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도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여기서도 '마카리오스' 로 시작하여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자복되도다 애통하는 자" "Blessed are those who……"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팔복(八福)' 수훈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복의 개념을 교정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서적 의미에서의 복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재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 의 개념을 세속적으로 파악하려고만 했습니다.

어쩌다 택시를 타보면 운전기사가 젊은이인데도 이른바 '복조리'라는 것을 차안에 대롱대롱 매달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리'라고 하면 대오리를 엮어서 조그마하게 삼태기 모양으로 만든 것인데, 쌀을 이는 데 쓰입니다. 요새는 거의 쓰이지를 않아서 젊은 사람들은 한참을 설명해주어도 알아들을까말까 입니다. '쌀을 이는 제구'라기보다 새해이면 볼 수 있는 '복조리' 라고 설명을 해야 겨우 고개를 끄덕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 이라고 하면 흔히들 '제물(財物)' 곧 돈이면 황금을 연상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것이 많으면 유복(有福)이요, 이런 것이 없으면 무복(無福)이 됩니다. 복주머니니 금붙이니하고, 지극히 세속적, 물질적으로만 생각이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런 착각에서 탈피를 해야 합니다. 물질적, 가시적(可視的)인 것을 떠나서 '' 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난은 해도 지혜가 있으니 복되다' '의로운 것이 복되다' '손에 쥔 것은 없어도 몸 건강하니 복이 아닌가'-복의 개념을 이런 식으로 의미를 바꾸어 파악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무릇 사람의 불행은 재물을 복으로 이해하는 데서부터 비롯됩니다. 재물은 손안에 움켜쥔 모래알과 같아서 수월히 없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재물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 재물이 탐스럽고 좋아보이지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가장 값어치가 작은 것이 재물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재물이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다.

건강을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다. 명예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명예를 중히 여기는 독일사람들의 격언입니다 마는,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건강, 명예, 사람의 성품, 혹은 슬하의 자녀, 그리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믿음다 놓고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건강이냐 재물이냐-우리가 재물을 택하겠습니까? 명예냐 재물이냐-명예가 중하지 재물이 중하겠습니까? 재물이냐 자식이냐-자식이 우선하지 않습니까? 그 무엇하고 비교해보아도 재물은 가치가 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물' '매먼(Mammon)' '부의 신()' 이 되어 권좌에 높이 앉는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624절에 보면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들 살고 있습니까? 재물에 따라서 행불행을 운위합니다. 재물에 따라서 실패했다거나 성공했다거나 합니다. 잘못되어도 여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시편 11절은 노래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바로 의()를 복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재물 이야기는 끼어들지도 않았습니다. 특별히 가장 어려운 고난을 많이 겪은 욥은 어떠했습니까?

'동방의 부자'라고 일컬어지던 그가 하루아침에 몰락하여 멸시를 당하고, 또 병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5 : 17)"--바로 이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복의 개념을 교정하고 있습니다. 매를 맞아도 하나님께 맞는 것은 복되다고 찬양합니다.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라"라고 깨우칩니다. 목적 있는 징계요, 약속 있는 징계요, 뜻있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니 복이 있다--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 엄청난 밑천을 들여 공부한 진리입니다. 엄청난 값을 치르고 터득한 진리입니다. 소중하기 그지없는 진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닌 행복관이 이방인이 지니고 사는 행복관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전혀 달라야 마땅합니다. '이러이러하면 행복하다'라고 세상사람들은 말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과 한 자리에 앉아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마다 늘 생각합니다.

'온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제일 행복하다'라고요. 직업이 많지만 목사만큼 행복한 직업은 없다, 목사도 소망교회 목사이니 제일 행복하다, 이만하면 '상팔자', 이만하면 부러울 것이 없다-실제로 이런 생각을 저는 자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이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을 것 같거든요.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과연 어떤 것을 복되다고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것-이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반가운 낯으로 바라볼 수 있고, 하나님의 전(殿)에 늘 사는 것-이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행복을 때마다 고백하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식(自意識)을 가질 때에 라야 우리는 행복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나를 사랑하는 이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으면 어린아이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편안하고 넉넉할 수가 없습니다. 부러운 것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께 이같은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10 : 14)"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으로 말씀해주신 여덟 가지 복도 종합을 해보면 결국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 신령한 생활, 영원한 가치에 사는 것, 미래지향적으로 사는 것, 그리고 약속 있는 생을 사는 것이 복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음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고, 온유한 자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십니다. 복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교정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복의 개념을 중생(重生)해야 합니다. 오늘 야고보서에 나타난 복의 개념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야고보서가 말씀하는 복을 굳이 분류해본다면 우리는 이를 서너가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시련을 이길 때에 복이 있습니다. 시련을 이기는 것이 복입니다. 둘째는, 상급을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복이 있습니다. 상급을 바라볼 수 있음이 복입니다. 세째는 미래에의 약속이 있을 때에 복이 있습니다. 오늘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좀 불행하다 해도 괜찮습니다. 내일에의 약속이 내게 분명하다면 그것이 복입니다.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천국에의 비전이 있으면 그것이 복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건 종국에 천국을 못가는 사람이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없이 살았다 해도 종국에 천국을 가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저는 교인들의 임종을 많이 봅니다. 보면 천국 가는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주면서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장례식을 집전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습니다. 주위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느라면 "이사람 왜 우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왜 그렇겠습니까? 이토록 훌륭하게 죽어가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아무나 그렇게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 잠든 이사람 만큼 행복하게 죽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남기고 죽을 수가 있을까?'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럴진대 기뻐할 일이지 슬피 울 일이 아니거든요.

울어야 할 성격이 아닌 것입니다. 천국이야말로 으뜸가는 복이니까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험' 이 바로미터입니다. 첫째, 시험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볼 때, 시험이 없는 게 복이 아니라 시험이 있는 게 복인 것입니다. 둘째, 참는 자-그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시험이 왜 있어야 하겠습니까? 시험이 없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마귀도 시험을 걸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시험해서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내게 시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시험을 많이 당합니다. 나쁜 의미에서의 시험도 당합니다. 재물을 보면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좋은 집을 보면 '야아, 나는 언제나 저런 집에 한번 살아보나'하고 선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쁜 여자를 보면 사귀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느 때가 되고 보면, 예쁜 여자가 지나가도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다. 맛난 음식을 보아도 먹고 싶다는 마음이 안생깁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보아도 부럽지가 않습니다. 값진 재물을 보아도 탐이 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지기도 합니다. 다만 '나의 이 허리 아픈 것이나 덜했으면 좋겠다'-이런 처지가 됩니다. 다된 인생인 것입니다. 시험이 없습니다. 시험될 것이 없습니다. 끝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돈 있으면 뭘합니까? 돈이 있어도 쓸 수가 없습니다. 남들처럼 세게 여행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있다 해도 내 몸이 건강해야 타보지요. 다 그림의 떡입니다. 싸움도 서로 상대가 되어야 싸움이 되듯이, 시험도 시험 걸만한 인생이라야 걸지요. 끝난 인생, 다된 인생한테야 뭘 보고 시험을 걸겠습니까? 마귀도 이런 인생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상대할만한 상대, 곧 살아 있는 사람이라야 시험이 시험으로 먹혀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시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게 아직도 생명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당연히 시험은 복입니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시험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잘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참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참는다'-이 말로 번역된 헬라말 '휴퍼메노' 는 우리말로 적절하게 번역하기 어려운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휴퍼' '밑에 있다' 라는 뜻이요 '메노''머문다' 라는 뜻입니다. 이를 어우러보면 결국 '휴퍼메노' 는 시험을 '당한다' 라기보다 시험을 '맞이한다' 라는 뉘앙스를 가졌다고 할까, 아무튼 수동적이라든가 피동적인 것이 아니고 능동적인 자세를 뜻합니다. 시험이 있을 때, 이를 피하려고 한다거나 '이거 큰 걱정이구나' '이제 망했구나' '어이쿠, 내가 얼마나 죄가 많으면 이런 시련을 당하나'하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당하는 순간에 이미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분명하게 그 시험의 뜻을 알고 있으며, 결코 나의 죄 때문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심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일환으로 주시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려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기쁘게 여깁니다. 기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잘 참는 것입니다. 이 참는다는 자세는 영어로 웰컴(welcome)의 자세입니다. 거부하거나 자책에 빠지지 않고 기꺼이 맞이하는 자세입니다. 어디까지나 능동적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게 견디는 사람, 견디어내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맞아 원망이나 불평이 없습니다. 시험이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았고, 시험이 은혜 안에서 되는 일이고, 축복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잘 견디어냅니다. 이런 사람, 기쁨으로 견디어내는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공동번역에는 이 말씀이 "시련을 견디어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왜 행복하겠습니까? 첫째,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 끝에 오는 약속이 있습니다. 곧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의미 없는 사건이 아닙니다. 큰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의미의 문제입니다. 의미를 받아들일 때에 보람이 있습니다. 보람이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똑같은 수고를 하더라도 보람있는 수고라야 기쁘게 수고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합니다. 열심히 하는데, 이 열심 끝에는 열매가 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면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학교에 반드시 가게 되어 있다고 한다면, 공부하는 시간이 즐겁고 기쁩니다. 반대로, 자신이 없고 회의가 떠나지 않는다면 그렇지를 못합니다. '합격을 할까 못할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시험치는 날 재수나 좋았으면' 이런 깜냥이라면 공부 그 자체가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약속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롭기만 합니다. 약속이 있다면, 그리고 그 약속을 확신하고 있다면 나의 수고는 즐겁기만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당하는 시련, 성도가 당하는 시련은 그 속에 '약속'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결정적 미래입니다. 왜 아니 기쁘겠습니까? 그것을 알고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당연한 말씀입니다.

둘째, "사랑하는 자들에게"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사랑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개별적으로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증거로 내게 시련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자녀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부모님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사랑에서 오는 잔소리라고 생각한다면야 마다할 까닭이 없습니다. 게다가 부모님한테 한대 쥐어박히거나 매라도 맞아보십시오, '내 장래를 위해서 아버지가 사람되라고 때리시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는커녕 '공연히 나한테 화풀이야' 라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나를 위한 매라고 '아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히 그런다' 고 생각하는 자녀에게 매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밖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으니까 집에 들어와서 야단이다' '어머니가 할머니한테 꾸중을 듣더니 엉뚱한 나한테 화풀이를 한다'-이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이들은 다 압니다. 꾀가 멀쩡합니다.

자녀로 하여금 '오늘은 내가 괜히 맞아주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시어머니한테 꾸중들은 며느리가 개 옆구리 찬다는 말이 있습니다. 엉뚱하게 죄 없는 개만 수난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식의 징계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시련이요,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시련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교인들의 복잡한 문제를 많이 상담합니다. 그 상담의 주제는 늘 한가지입니다. 저는 어떤 말로건 상담해오는 본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시련으로 믿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 상담의 결론이자 목적입니다.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시련이다' '사랑하시는 자에게만 주시는 시련이다'-이렇게만 믿으면 문제될 것 없습니다. 이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고민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죄가 많아서 이 시련을 당한다' '이 시련은 아무개의 죄 때문이다'-시련을 저주요 심판으로 생각하는 데에 고민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조상까지 탓합니다. 조상이 죄가 많아서 내가 이 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련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순교자들의 순교도 그러합니다. 제삼자인 우리는 순교야말로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이다 라고 쉽게 바라보지만, 순교의 현장에 서 있는, 잠시 후면 죽음을 맞게 될 당자의 심경은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숱한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내가 왜 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나는 젊습니다. 할일도 많습니다. 왜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하필이면 왜 사자의 밥이 되어야 합니까?'억울해서 고통을 겪다가도 어느 순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의 죄가 크고도 많습니다. 결국 죄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죄 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그랬을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매를 늘씬하게 얻어맞고 죽게 되었을 때, 스데반의 죽어가던 모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나는 맞아죽어 싸다.' 지난날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데 동조했던 바울입니다. 그런 죄책에서라면 이제 감옥에서 죽어도 할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인과응보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이다'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에서 머물렀다면 그 감옥에서 눈물로 한숨으로 끝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재삼 생각합니다. '내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데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할 수 있으니 고맙다, 하나님께서 내게 사랑으로 주신 순교요, 나만의 특권이다'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순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차피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한번 죽는 죽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특권 가운데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까지 고백했을 법합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며 쫓아다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벼락맞아 죽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사도가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제 나를 순교자의 반열에까지 넣어주시려 하십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십니까?'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찬송을 부릅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순교자의 마음입니다. 순교자라면 으레 거쳐가야 하는 사건이요 극복해야 할 사건입니다. 순교자에게는 내 육신의 고통과 죽음, 혹 그 죽음에 대한 억울함 따위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순교자의 가장 깊은 고민은 이 죽음이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닐까 하는 의문입니다. 이 의문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순교하려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하기에 너를 순교자의 반열에 두고자 하노라."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어느 순교자가 고민을 하면서 죽어가겠습니까? 여러분, 모든 사람의 고통의 심연에는 똑같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 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라는 말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시련, 그 약속과 사랑을 바로 믿을 수 있을 때에 시험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이제,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약속과 사랑을 믿게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높이 성숙한 사람이라야 소화할 수 있습니다. 유치한 사람에게는 그저 돈보따리나 들어오는 것이 복이요, 손해가 나면 저주입니다. 건강하면 복받은 것이요, 감기라도 걸리면 시험에 걸린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벌벌 떱니다. 모름지기 시험을 당할 때에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성숙한 수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인정하심을 받아’, 헬라말로 '도키모스' 라고 하는 이 말은 영어로 'approved' 입니다. 입증되었다는 말입니다.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격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시험을 통해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수준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시련을 통하여 인정하십니다. 수준을 격상시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디 '도키모스' 라고 하는 말은 물리적인 용어입니다. 금이나 은과 같은 금속을 불 속에서 달군 뒤 꺼내어서 때리고, 다시 불 속에 넣었다가 꺼내어서 때리기를 반복하여 순도를 높인다는 것이 '도키모스'의 본뜻입니다. 불 속에 넣었다가 꺼내어 때릴 때마다 금속은 더 쓸모있어집니다. 불순물이 제거되어서 그렇습니다. 금이면 금 아닌 것이 빠져나가야 되고, 쇠이면 쇠 아닌 것이 빠져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순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또한 때리면 때릴수록 입자가 서로 가까워집니다. 그 밀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강도가 높아집니다. 이렇게 하여 강하게, 보다 순수하게 만듭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하여 'purify'-정화(淨化)되어갑니다. 불순물이 제거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 스스로 버리지 못하는 것을 시험을 통하여 버리게 하십니다. 나 스스로 끊지 못하는 것을 시험을 통하여 끊게 하십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미적거릴 때, 하나님께서 시험을 걸어 기어이 끊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대단하십니다. 사건을 통하여 능력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여 수준을 높여주십니다. 허물과 죄와 나쁜 습성, 옛버릇과 옛성격을 다 제거하시어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또한 소망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소망을 순수하게 만드십니다. 사람은 돈 있으면 돈에 의지하고, 가족 있으면 가족에 의지하고, 명예 있으면 명예에 의지하고, 건강 있으면 건강에 의지하려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소망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순수한 소망의 것이 아닙니다. 시련을 통하여 가치관을 순수하게 하시고 마침내 소망을 깨끗하게 만드십니다. 그리하여 인격을 격상시켜주십니다. 높은 신앙적 인격으로 만드신 다음에, 다시 말하여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마침내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순수하고, 질적으로 격상된 수준이 된 연후에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생명의 면류관'-여기에 보면 '스테파노스' 라는 말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면류관을 뜻하는 헬라어가 또 하나 있습니다. '디아데마' 라고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디아데마는 '왕관'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 아니고는 못씁니다. 왕권의 상징으로, 권세의 상징으로 주어지는 것이 '디아데마 입니다. 반면에 '스테파노스' 는 아무나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격상될 때에만 쓸 수 있습니다. 먼저, 꽃으로 만든 면류관이 있습니다. 행복을 상징합니다. 결혼할 때, 신랑 신부가 머리에 쓰는 면류관입니다. 행복을 상징하는 면류관입니다. 또하나, 충성을 상징하는 면류관이 있습니다. 신하가 왕을 위하여 수고하였을 때, 그 충성을 인정하는 상급으로, 또 그의 명예를 높여주기 위하여 왕이 신하에게 씌워주는 면류관입니다. '이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다. 모범적인 사람이다'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음으로, 월계관이 있습니다. 승리를 상징하는 면류관입니다. 마라톤 같은 운동경기를 할 때, 우승한 사람에게 씌워주는 것으로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입니다. 올림픽경기의 상징이 월계관입니다. 승리의 상징입니다. 한편, 영광과 위엄과 지혜를 인정하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면류관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씌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사람의 지식이나 능력, 명예가 격상되었을 때에 주는 것입니다. 본문의 면류관도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면류관이 여러 가지입니다. 썩지 않는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면류관은 가시 면류관입니다.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 면류관보다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가시 면류관을 먼저 쓴 다음에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되는 줄로 압니다.

본문말씀의 '생명의 면류관' 은 행복과 충성과 승리의 영광을 한데 어우른 것입니다. '그 사람' 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내, 그 사람의 신앙, 그 사람의 시련을 통하여 그가 비로소 격상된 신앙적 인격이 되었으므로 주는 면류관입니다. 곧 천국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적인 생명에 대한 보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향하여 가는 길에 반드시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고 그 시험을 잘 견디는 사람, 시험을 참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서야 저 앞에서 면류관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기뻐하라, 시험을 당할 때마다 나는 복되다 라는 마음을 가져라-이렇게 시험에 대처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하고는 얼마나 다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들 내 앞에 시험이 닥치면 '아이구, 저주받았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누가 어려운 시련을 당하게 되면 '저 사람 또 무슨 큰 죄를 지었나보다'라고 비난하기 일쑤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시험 당하는 것도 아니요 의인이라고 시험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러줍니다. 욥에게 무슨 죄가 있었습니까?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부하고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는 그는 남달리 어려운 시험을 많이 당해야만 했습니다. 주의 종들, 선지자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시험 당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죄 때문에, 신앙이 약해졌기 때문에, 혹 내가 나약해졌기 때문에 시험을 당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를 놓고 우리는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시험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시고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모름지기 시험에 대하여 그릇된 자세를 가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시험을 믿음으로 참고 기쁨으로 견디어 낼 때, 주님께서 그의 신앙적 인격을 격상시키시고, 바람직한 수준이 되었을 때에야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약속하신 면류관(야고보서 1 :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우리말 성경에는 본문말씀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지만, 이 말씀의 헬라말 원문을 보면 "복되도다, 시험을 참는 자여"하고 '마카리오스'-'복되도다 (Blessed)' 라는 말이 첫머리에 나오고 있습니다. 영어로도 "Blessed is the man who endures trial" 이렇게 되겠습니다. 똑같은 형식의 말씀이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도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여기서도 '마카리오스' 로 시작하여 "복되도다 마음이 가난한 자복되도다 애통하는 자" "Blessed are those who……"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팔복(八福)' 수훈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복의 개념을 교정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서적 의미에서의 복이 무엇이냐 하는 것을 재삼 확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 의 개념을 세속적으로 파악하려고만 했습니다.

어쩌다 택시를 타보면 운전기사가 젊은이인데도 이른바 '복조리'라는 것을 차안에 대롱대롱 매달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조리'라고 하면 대오리를 엮어서 조그마하게 삼태기 모양으로 만든 것인데, 쌀을 이는 데 쓰입니다. 요새는 거의 쓰이지를 않아서 젊은 사람들은 한참을 설명해주어도 알아들을까말까 입니다. '쌀을 이는 제구'라기보다 새해이면 볼 수 있는 '복조리' 라고 설명을 해야 겨우 고개를 끄덕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 이라고 하면 흔히들 '제물(財物)' 곧 돈이면 황금을 연상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것이 많으면 유복(有福)이요, 이런 것이 없으면 무복(無福)이 됩니다. 복주머니니 금붙이니하고, 지극히 세속적, 물질적으로만 생각이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런 착각에서 탈피를 해야 합니다. 물질적, 가시적(可視的)인 것을 떠나서 '' 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가난은 해도 지혜가 있으니 복되다' '의로운 것이 복되다' '손에 쥔 것은 없어도 몸 건강하니 복이 아닌가'-복의 개념을 이런 식으로 의미를 바꾸어 파악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무릇 사람의 불행은 재물을 복으로 이해하는 데서부터 비롯됩니다. 재물은 손안에 움켜쥔 모래알과 같아서 수월히 없어지게 마련인 것입니다.

재물은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때로 재물이 탐스럽고 좋아보이지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가장 값어치가 작은 것이 재물임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재물이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돈을 잃는 것은 조금 잃는 것이다.

건강을 잃는 것은 많이 잃는 것이다. 명예를 잃는 것은 전부를 잃는 것이다'-명예를 중히 여기는 독일사람들의 격언입니다 마는,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건강, 명예, 사람의 성품, 혹은 슬하의 자녀, 그리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믿음다 놓고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건강이냐 재물이냐-우리가 재물을 택하겠습니까? 명예냐 재물이냐-명예가 중하지 재물이 중하겠습니까? 재물이냐 자식이냐-자식이 우선하지 않습니까? 그 무엇하고 비교해보아도 재물은 가치가 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물' '매먼(Mammon)' '부의 신()' 이 되어 권좌에 높이 앉는 우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태복음 624절에 보면 주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어떻게들 살고 있습니까? 재물에 따라서 행불행을 운위합니다. 재물에 따라서 실패했다거나 성공했다거나 합니다. 잘못되어도 여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시편 11절은 노래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바로 의()를 복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재물 이야기는 끼어들지도 않았습니다. 특별히 가장 어려운 고난을 많이 겪은 욥은 어떠했습니까?

'동방의 부자'라고 일컬어지던 그가 하루아침에 몰락하여 멸시를 당하고, 또 병까지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고난 가운데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습니다.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5 : 17)"--바로 이것입니다. 욥은 이렇게 복의 개념을 교정하고 있습니다. 매를 맞아도 하나님께 맞는 것은 복되다고 찬양합니다.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라"라고 깨우칩니다. 목적 있는 징계요, 약속 있는 징계요, 뜻있는 고난을 당하는 것이니 복이 있다--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 엄청난 밑천을 들여 공부한 진리입니다. 엄청난 값을 치르고 터득한 진리입니다. 소중하기 그지없는 진리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금 생각을 가다듬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닌 행복관이 이방인이 지니고 사는 행복관과 같아서는 안됩니다. 전혀 달라야 마땅합니다. '이러이러하면 행복하다'라고 세상사람들은 말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과 한 자리에 앉아 이렇게 예배를 드릴 때마다 늘 생각합니다.

'온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제일 행복하다'라고요. 직업이 많지만 목사만큼 행복한 직업은 없다, 목사도 소망교회 목사이니 제일 행복하다, 이만하면 '상팔자', 이만하면 부러울 것이 없다-실제로 이런 생각을 저는 자주 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이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을 것 같거든요.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다시 한번 생각해봅시다. 도대체 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과연 어떤 것을 복되다고 할 것입니까?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것-이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을 언제나 반가운 낯으로 바라볼 수 있고, 하나님의 전(殿)에 늘 사는 것-이것이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은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행복을 때마다 고백하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식(自意識)을 가질 때에 라야 우리는 행복합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나를 사랑하는 이 어른들에게 둘러싸여 앉아 있으면 어린아이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편안하고 넉넉할 수가 없습니다. 부러운 것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께 이같은 어린아이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것(10 : 14)"이라고 말씀하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으로 말씀해주신 여덟 가지 복도 종합을 해보면 결국은 하나님 중심의 생활, 신령한 생활, 영원한 가치에 사는 것, 미래지향적으로 사는 것, 그리고 약속 있는 생을 사는 것이 복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음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고, 온유한 자가,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하십니다. 복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교정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복의 개념을 중생(重生)해야 합니다. 오늘 야고보서에 나타난 복의 개념을 다시 한번 보십시다. 야고보서가 말씀하는 복을 굳이 분류해본다면 우리는 이를 서너가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첫째, 시련을 이길 때에 복이 있습니다. 시련을 이기는 것이 복입니다. 둘째는, 상급을 바라볼 수 있을 때에 복이 있습니다. 상급을 바라볼 수 있음이 복입니다. 세째는 미래에의 약속이 있을 때에 복이 있습니다. 오늘이 문제가 아니라 내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좀 불행하다 해도 괜찮습니다. 내일에의 약속이 내게 분명하다면 그것이 복입니다.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으로 천국에의 비전이 있으면 그것이 복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건 종국에 천국을 못가는 사람이라면 불행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없이 살았다 해도 종국에 천국을 가는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저는 교인들의 임종을 많이 봅니다. 보면 천국 가는 증거를 확실하게 보여주면서 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장례식을 집전할 때에는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습니다. 주위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느라면 "이사람 왜 우나?"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왜 그렇겠습니까? 이토록 훌륭하게 죽어가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아무나 그렇게 죽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 잠든 이사람 만큼 행복하게 죽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남기고 죽을 수가 있을까?' 부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럴진대 기뻐할 일이지 슬피 울 일이 아니거든요.

울어야 할 성격이 아닌 것입니다. 천국이야말로 으뜸가는 복이니까 말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다시 보십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험' 이 바로미터입니다. 첫째, 시험이 있느냐 없느냐를 두고 볼 때, 시험이 없는 게 복이 아니라 시험이 있는 게 복인 것입니다. 둘째, 참는 자-그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시험이 왜 있어야 하겠습니까? 시험이 없으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에게는 마귀도 시험을 걸지 않습니다. 죽은 자를 시험해서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내게 시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오늘도 여러분은 시험을 많이 당합니다. 나쁜 의미에서의 시험도 당합니다. 재물을 보면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좋은 집을 보면 '야아, 나는 언제나 저런 집에 한번 살아보나'하고 선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쁜 여자를 보면 사귀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느 때가 되고 보면, 예쁜 여자가 지나가도 마음이 동하지 않습니다. 맛난 음식을 보아도 먹고 싶다는 마음이 안생깁니다. 아무리 좋은 집을 보아도 부럽지가 않습니다. 값진 재물을 보아도 탐이 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귀찮아지기도 합니다. 다만 '나의 이 허리 아픈 것이나 덜했으면 좋겠다'-이런 처지가 됩니다. 다된 인생인 것입니다. 시험이 없습니다. 시험될 것이 없습니다. 끝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돈 있으면 뭘합니까? 돈이 있어도 쓸 수가 없습니다. 남들처럼 세게 여행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있다 해도 내 몸이 건강해야 타보지요. 다 그림의 떡입니다. 싸움도 서로 상대가 되어야 싸움이 되듯이, 시험도 시험 걸만한 인생이라야 걸지요. 끝난 인생, 다된 인생한테야 뭘 보고 시험을 걸겠습니까? 마귀도 이런 인생은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상대할만한 상대, 곧 살아 있는 사람이라야 시험이 시험으로 먹혀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게 시험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게 아직도 생명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당연히 시험은 복입니다.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시험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시험을 잘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합니다. 참는 힘이 있어야 됩니다. '참는다'-이 말로 번역된 헬라말 '휴퍼메노' 는 우리말로 적절하게 번역하기 어려운 뉘앙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휴퍼' '밑에 있다' 라는 뜻이요 '메노''머문다' 라는 뜻입니다. 이를 어우러보면 결국 '휴퍼메노' 는 시험을 '당한다' 라기보다 시험을 '맞이한다' 라는 뉘앙스를 가졌다고 할까, 아무튼 수동적이라든가 피동적인 것이 아니고 능동적인 자세를 뜻합니다. 시험이 있을 때, 이를 피하려고 한다거나 '이거 큰 걱정이구나' '이제 망했구나' '어이쿠, 내가 얼마나 죄가 많으면 이런 시련을 당하나'하고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당하는 순간에 이미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분명하게 그 시험의 뜻을 알고 있으며, 결코 나의 죄 때문이라든가 하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심판하심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사랑의 일환으로 주시는 사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려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험을 기쁘게 여깁니다. 기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잘 참는 것입니다. 이 참는다는 자세는 영어로 웰컴(welcome)의 자세입니다. 거부하거나 자책에 빠지지 않고 기꺼이 맞이하는 자세입니다. 어디까지나 능동적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렇게 견디는 사람, 견디어내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맞아 원망이나 불평이 없습니다. 시험이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았고, 시험이 은혜 안에서 되는 일이고, 축복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에 잘 견디어냅니다. 이런 사람, 기쁨으로 견디어내는 이런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공동번역에는 이 말씀이 "시련을 견디어내는 사람은 행복합니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왜 행복하겠습니까? 첫째,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 끝에 오는 약속이 있습니다. 곧 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 사건은 의미 없는 사건이 아닙니다. 큰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의미의 문제입니다. 의미를 받아들일 때에 보람이 있습니다. 보람이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똑같은 수고를 하더라도 보람있는 수고라야 기쁘게 수고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공부를 합니다. 열심히 하는데, 이 열심 끝에는 열매가 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를 하면 내가 목표로 하고 있는 학교에 반드시 가게 되어 있다고 한다면, 공부하는 시간이 즐겁고 기쁩니다. 반대로, 자신이 없고 회의가 떠나지 않는다면 그렇지를 못합니다. '합격을 할까 못할까? 아무래도 자신이 없어. 시험치는 날 재수나 좋았으면' 이런 깜냥이라면 공부 그 자체가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닙니다. 약속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롭기만 합니다. 약속이 있다면, 그리고 그 약속을 확신하고 있다면 나의 수고는 즐겁기만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당하는 시련, 성도가 당하는 시련은 그 속에 '약속'이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보장이 있습니다.

결정적 미래입니다. 왜 아니 기쁘겠습니까? 그것을 알고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당연한 말씀입니다.

둘째, "사랑하는 자들에게"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사랑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개별적으로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증거로 내게 시련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자녀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부모님의 잔소리를 듣기 싫어합니다.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서입니다. 사랑에서 오는 잔소리라고 생각한다면야 마다할 까닭이 없습니다. 게다가 부모님한테 한대 쥐어박히거나 매라도 맞아보십시오, '내 장래를 위해서 아버지가 사람되라고 때리시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는커녕 '공연히 나한테 화풀이야' 라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나를 위한 매라고 '아멘' 하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히 그런다' 고 생각하는 자녀에게 매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밖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으니까 집에 들어와서 야단이다' '어머니가 할머니한테 꾸중을 듣더니 엉뚱한 나한테 화풀이를 한다'-이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이들은 다 압니다. 꾀가 멀쩡합니다.

자녀로 하여금 '오늘은 내가 괜히 맞아주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시어머니한테 꾸중들은 며느리가 개 옆구리 찬다는 말이 있습니다. 엉뚱하게 죄 없는 개만 수난을 당한다는 말입니다. 이런 식의 징계라면 문제가 있습니다. 억울하게 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시련이요,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시련으로 받아들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교인들의 복잡한 문제를 많이 상담합니다. 그 상담의 주제는 늘 한가지입니다. 저는 어떤 말로건 상담해오는 본인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시련으로 믿고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제 상담의 결론이자 목적입니다. '사랑하시기에 주시는 시련이다' '사랑하시는 자에게만 주시는 시련이다'-이렇게만 믿으면 문제될 것 없습니다. 이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아서 문제입니다. 고민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죄가 많아서 이 시련을 당한다' '이 시련은 아무개의 죄 때문이다'-시련을 저주요 심판으로 생각하는 데에 고민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조상까지 탓합니다. 조상이 죄가 많아서 내가 이 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련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순교자들의 순교도 그러합니다. 제삼자인 우리는 순교야말로 참으로 영광스러운 것이다 라고 쉽게 바라보지만, 순교의 현장에 서 있는, 잠시 후면 죽음을 맞게 될 당자의 심경은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하나님이여, 숱한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내가 왜 이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나는 젊습니다. 할일도 많습니다. 왜 이렇게 죽어야 합니까?' '하필이면 왜 사자의 밥이 되어야 합니까?'억울해서 고통을 겪다가도 어느 순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자신의 죄가 크고도 많습니다. 결국 죄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돌이켜보면 누구나 죄가 없을 수 없습니다.

죄 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도 그랬을 것입니다. 빌립보 감옥에서 매를 늘씬하게 얻어맞고 죽게 되었을 때, 스데반의 죽어가던 모습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나는 맞아죽어 싸다.' 지난날 스데반을 돌로 쳐죽이는 데 동조했던 바울입니다. 그런 죄책에서라면 이제 감옥에서 죽어도 할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인과응보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이다' -극복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에서 머물렀다면 그 감옥에서 눈물로 한숨으로 끝이 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재삼 생각합니다. '내가 용서받지 못할 죄인인데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할 수 있으니 고맙다, 하나님께서 내게 사랑으로 주신 순교요, 나만의 특권이다' 하고 말입니다. 여러분, 순교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차피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 한번 죽는 죽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죽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기회가 아닙니다. 특권 가운데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까지 고백했을 법합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며 쫓아다니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벼락맞아 죽었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사도가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제 나를 순교자의 반열에까지 넣어주시려 하십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까지 사랑하십니까?' 어려운 시련 속에서도 찬송을 부릅니다.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이것이 순교자의 마음입니다. 순교자라면 으레 거쳐가야 하는 사건이요 극복해야 할 사건입니다. 순교자에게는 내 육신의 고통과 죽음, 혹 그 죽음에 대한 억울함 따위가 문제되지 않습니다. 순교자의 가장 깊은 고민은 이 죽음이 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아닐까 하는 의문입니다. 이 의문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순교하려는 그 순간,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 내가 너를 특별히 사랑하기에 너를 순교자의 반열에 두고자 하노라."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을 수만 있다면 어느 순교자가 고민을 하면서 죽어가겠습니까? 여러분, 모든 사람의 고통의 심연에는 똑같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 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라는 말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시험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해하고 믿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시련, 그 약속과 사랑을 바로 믿을 수 있을 때에 시험을 잘 견딜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이제, 더욱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떻게 이 약속과 사랑을 믿게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높이 성숙한 사람이라야 소화할 수 있습니다. 유치한 사람에게는 그저 돈보따리나 들어오는 것이 복이요, 손해가 나면 저주입니다. 건강하면 복받은 것이요, 감기라도 걸리면 시험에 걸린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벌벌 떱니다. 모름지기 시험을 당할 때에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사가 있다고 믿을 수 있는 성숙한 수준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말씀합니다. "이것이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인정하심을 받아’, 헬라말로 '도키모스' 라고 하는 이 말은 영어로 'approved' 입니다. 입증되었다는 말입니다. 입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격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시험을 통해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수준을 인정받아야 합니다. 시련을 통하여 인정하십니다. 수준을 격상시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본디 '도키모스' 라고 하는 말은 물리적인 용어입니다. 금이나 은과 같은 금속을 불 속에서 달군 뒤 꺼내어서 때리고, 다시 불 속에 넣었다가 꺼내어서 때리기를 반복하여 순도를 높인다는 것이 '도키모스'의 본뜻입니다. 불 속에 넣었다가 꺼내어 때릴 때마다 금속은 더 쓸모있어집니다. 불순물이 제거되어서 그렇습니다. 금이면 금 아닌 것이 빠져나가야 되고, 쇠이면 쇠 아닌 것이 빠져나가야 됩니다.

그래서 순도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또한 때리면 때릴수록 입자가 서로 가까워집니다. 그 밀도가 점점 높아지면서 강도가 높아집니다. 이렇게 하여 강하게, 보다 순수하게 만듭니다.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시험을 통하여 'purify'-정화(淨化)되어갑니다. 불순물이 제거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 스스로 버리지 못하는 것을 시험을 통하여 버리게 하십니다. 나 스스로 끊지 못하는 것을 시험을 통하여 끊게 하십니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고 미적거릴 때, 하나님께서 시험을 걸어 기어이 끊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대단하십니다. 사건을 통하여 능력을 주십니다. 그렇게 하여 수준을 높여주십니다. 허물과 죄와 나쁜 습성, 옛버릇과 옛성격을 다 제거하시어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또한 소망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소망을 순수하게 만드십니다. 사람은 돈 있으면 돈에 의지하고, 가족 있으면 가족에 의지하고, 명예 있으면 명예에 의지하고, 건강 있으면 건강에 의지하려듭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소망할만한 것이 못됩니다. 순수한 소망의 것이 아닙니다. 시련을 통하여 가치관을 순수하게 하시고 마침내 소망을 깨끗하게 만드십니다. 그리하여 인격을 격상시켜주십니다. 높은 신앙적 인격으로 만드신 다음에, 다시 말하여 어느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마침내 주님께서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순수하고, 질적으로 격상된 수준이 된 연후에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생명의 면류관'-여기에 보면 '스테파노스' 라는 말이 있는데, 이름 그대로 면류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면류관을 뜻하는 헬라어가 또 하나 있습니다. '디아데마' 라고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디아데마는 '왕관'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왕 아니고는 못씁니다. 왕권의 상징으로, 권세의 상징으로 주어지는 것이 '디아데마 입니다. 반면에 '스테파노스' 는 아무나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격상될 때에만 쓸 수 있습니다. 먼저, 꽃으로 만든 면류관이 있습니다. 행복을 상징합니다. 결혼할 때, 신랑 신부가 머리에 쓰는 면류관입니다. 행복을 상징하는 면류관입니다. 또하나, 충성을 상징하는 면류관이 있습니다. 신하가 왕을 위하여 수고하였을 때, 그 충성을 인정하는 상급으로, 또 그의 명예를 높여주기 위하여 왕이 신하에게 씌워주는 면류관입니다. '이 사람은 충성된 사람이다. 모범적인 사람이다'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다음으로, 월계관이 있습니다. 승리를 상징하는 면류관입니다. 마라톤 같은 운동경기를 할 때, 우승한 사람에게 씌워주는 것으로 월계수 잎으로 만든 관입니다. 올림픽경기의 상징이 월계관입니다. 승리의 상징입니다. 한편, 영광과 위엄과 지혜를 인정하는 금이나 은으로 만든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러한 면류관은 어느 특정인에게만 씌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사람의 지식이나 능력, 명예가 격상되었을 때에 주는 것입니다. 본문의 면류관도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면류관이 여러 가지입니다. 썩지 않는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자랑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면류관은 가시 면류관입니다.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 면류관보다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가시 면류관을 먼저 쓴 다음에 영광의 면류관을 쓰게 되는 줄로 압니다.

본문말씀의 '생명의 면류관' 은 행복과 충성과 승리의 영광을 한데 어우른 것입니다. '그 사람' 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내, 그 사람의 신앙, 그 사람의 시련을 통하여 그가 비로소 격상된 신앙적 인격이 되었으므로 주는 면류관입니다. 곧 천국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국적인 생명에 대한 보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향하여 가는 길에 반드시 시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험을 받고 그 시험을 잘 견디는 사람, 시험을 참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는 과정을 통해서야 저 앞에서 면류관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기뻐하라, 시험을 당할 때마다 나는 복되다 라는 마음을 가져라-이렇게 시험에 대처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나하고는 얼마나 다른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들 내 앞에 시험이 닥치면 '아이구, 저주받았구나'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누가 어려운 시련을 당하게 되면 '저 사람 또 무슨 큰 죄를 지었나보다'라고 비난하기 일쑤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시험 당하는 것도 아니요 의인이라고 시험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일러줍니다. 욥에게 무슨 죄가 있었습니까?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부하고 가장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는 그는 남달리 어려운 시험을 많이 당해야만 했습니다. 주의 종들, 선지자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시험 당하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죄 때문에, 신앙이 약해졌기 때문에, 혹 내가 나약해졌기 때문에 시험을 당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를 놓고 우리는 두말할 여지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시험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40일 금식기도를 하시고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모름지기 시험에 대하여 그릇된 자세를 가져서는 안되겠습니다. 시험을 믿음으로 참고 기쁨으로 견디어 낼 때, 주님께서 그의 신앙적 인격을 격상시키시고, 바람직한 수준이 되었을 때에야 마침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