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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예수의 종 야고보(야고보서1:1)

by 【고동엽】 2022. 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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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종 야고보(야고보서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성경책 가운데서 제일 많이 읽는 책이 빌립보서요, 그 다음이 야고보서입니다. 혹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에도 낮공부 시간에는 주로 빌립보서나 야고보서를 강해해왔습니다. 꽤 많은 부흥회를 다녀서 손꼽아보면 수백 교회에 이르고보니 그 만큼 빌립보서와 야고보서를 많이 강해한 터이라 이제는 거의 외다시피 되었습니다. 이 두 책은 어느 때에 읽어보아도 참 좋은 말씀입니다. 어느 때에 강해를 하고 교인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어도 더할수없이 좋은 말씀입니다. 참으로 귀한 복음인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책이나 다 귀한 말씀이지만 아시다시피 그 중에서도 저 마다 특별히 좋아하는 성경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칼뱅같은 이는 에베소서를 좋아했고, 루터는 시편과 갈라디아서를 특별히 좋아했습니다. 사람에 따라 이처럼 특별히 좋아해서 은혜를 많이 받는 성경이 따로 있는 동시에, 한 사람의 생애를 놓고 보더라도 젊었을 때에 좋아하는 성경이 있는가 하면 나이 들어서 더 많이 읽게 되는 성경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할 때에 좋게 느껴지는 성경이 있고, 병들었을 때나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에 은혜가 되는 성경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같이 귀한 성경이지만 어떤 때에는 이 성경책을 읽고 어떤 때에는 저 성경책을 읽으면서, 나름의 특별한 상황에서 주시는 다른 은혜를 각별하게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의 처지와 나이와 건강 상태에 따라서 음식을 달리 먹어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를테면 특별히 외로울 때에는 시편을 읽는 것이 좋겠고, 나이 많은 분들이 답답할 때에는 잠언같은 것을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 고난 당할 때에는 빌립보서를 읽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다면 베드로서를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믿음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거나 믿는 내용에 회의가 생길 때에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시험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부디 야고보서를 읽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복음입니다. 시련을 당한 사람, 시험 중에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성공한 사람도 읽을 것입니다. 일이 잘되어나갈 때에, 말하자면 믿음에 다소라도 교만이 생길 수 있을 때에, 그리고 내 믿음에 게으름이 스며들 때에 야고보서를 읽으면 내 믿음이 어느 싯점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으므로, 시련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특히 개혁교회에서 한동안 야고보서를 벽안시했던 때가 있습니다. 까닭인즉 마르틴 루터가 야고보서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루터는 그 점이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예수' 라는 말씀이 꼭 두 군데만 나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일반적인 윤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기독교적 복음을 말씀하는 것으로는 약하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영생에 대한 교훈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이런 차원에서 이른바 케리그마적 메시지들에 비하면 빈약하다고 생각하여 야고보서를 등한시했던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마르틴 루터는 시작도 끝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것을 강조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믿음으로 시종일관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야고보서에는 그런 주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말씀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씀이 없다는 것으로는 야고보서를 나무랄 일이 못됩니다. 그 말씀은 히브리성도 없고, 네 복음서에도 없습니다.

아무튼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만을 강조하다보니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 쯤으로 간주해버렸습니다. 지푸라기라고 하니 사람들은 형편없는 것이구나, 쓸모없는 것이구나 하기 쉬운데, 이것은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에 비한다면 지푸라기는 아무런 가치도 없지 않은가-이렇게 쉬 말해버릴 것이 아닙니다. 루터의 성경관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마치 말구유와도 같다고 보는 것이 루터의 성경관입니다. 성경이라는 말구유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워 있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말구유가 중요한 것은 아기 예수가 거기 한가운데에 누워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가 있음으로 귀한 구유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 없는 구유는 뜻 없는 한낱 말구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이라는 말구유에서 아기 예수에 해당하는 것이 복음서 내지 로마서갈라디아서요, 아기 예수 밑에 강보가 있고 강보 밑에 지푸라기가 있는데, 이 지푸라기에 해당하는 것이 야고보서라고 본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마르틴 루터가 야고보서를 많이 읽지 않고 등한시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깊이 상고하면서 읽어보면 결코 믿음을 등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야고보서는 바른 신앙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얻을 수 있는 바른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이것을 말씀해주는 복음서가 야고보서입니다. 간혹 우리는 믿음과 행함을 양자택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젊은이들이 토론할 때에도 보면 믿음이냐 행함이냐 하고 변론을 벌입디다마는 무모한 일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따로 떼어놓고 양자택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하나로 보아서 말씀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2 : 21-22)"-믿음이 행함과 함께하며, 행함으로 인하여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말씀하는 귀한 요절입니다. 즉 야고보서는 믿음을 등한시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바른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 열매가 있는 믿음, 곧 살아 있는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은 죽은 몸이듯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관념적인 믿음, 지식적인 믿음은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거나 교리를 잘 안 다거나 줄줄이 꿰어서 남에게 설명할 수 있다거나 해도 그것으로만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행함이 따르는 살아 있는 믿음이라야 된다고 강조함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보아도 야고보서는 믿음을 등한시하지 않습니다. 좀더 현실적이요 좀더 깊은 차원에서 믿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서를 그렇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락의 복음 (빌립보서)' '은혜의 복음(갈라디아서)'과 같이 야고보서에 굳이 별칭을 지어 붙인다면 '행위의 복음' '생활의 복음' '실천의 복음' '살아 있는 믿음에 대한 복음'이요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복음'이 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성경에 야고보란 이름은 대표적으로 세 사람이 나옵니다.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 알페오의 아들인 사도 야고보, 그리고 주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그들입니다.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야고보서의 저자인 것은 2천 년 교회사에서 별다른 이견 없이 전승되어 왔습니다.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기둥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로 초대교회에서 가장 높임을 받은 사람이 셋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요, 하나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요, 하나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늘 가까이 두신 수제자였고, 천국열쇠를 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는 뭐니해도 베드로의 위치가 가장 높임을 받을만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제로는 야고보가 베드로보다도 더 존경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야 예수를 믿고 초대교회에서 높임을 받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경건했고 덕망 있고 신심이 깊었습니다.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이끄는 교량 역할을 함으로써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입니다. 당연히 높임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에 높임을 받은 것 같다고도 말합니다. 이 또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니 예수님과 외모부터 닮았을 것이며, 예수님과 한솥밥을 먹고 자란 형제이니 그에게서 예수님의 체온까지도 느끼지들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나니 새삼새삼 예수님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때마다 예수님이 뵙고 싶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이런 때이면 으레 두 사람을 바라보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얼마나 우러러보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렸을 때에 어떠하셨습니까?" "이런 때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이라면 이런 때에 어떻게 하셨을까요?"-제자들이나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마리아를 붙들고 부지런히 말을 걸었을 것입니다. 야고보에게도 많은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야고보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예수를 믿지 않았었다고 하는데, 그 믿지 않았다고 하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75절을 보면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말 믿지 않은 것입니까? 실인즉 그렇지 않습니다. 71절로부터 자세히 보십시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다가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에 남아 계셨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예수님을 재촉합니다.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내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예수님의 등을 떠밉니다. 초막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인다는데 왜 시골에 남아 있습니까? 빨리 가서 많은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고 능력을 나타내고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라고 재촉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이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다, 분명 유대나라의 왕으로 오셨다-예수님의 지혜와 능력, 이적과 기사 같은 것들을 믿고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만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주 되심을 몰랐습니다. 가장 중요한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건성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이나 보며 좋아하였습니다. 예수님 덕을 보아 출세나 좀 해보아야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요한의 견해로는 예수 믿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해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평생을 함께 살아도 말짱 헛일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예수님의 형제들이 열두 제자만큼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랐다고는 볼 수 없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역사 하신 3년 동안에도 예수님을 따랐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전설에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행하시는 그 자리에 야고보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집례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이것은 내 살이요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피요 받아 먹으라" 하시며 심각한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데, 야고보는 그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우리 형님 참 답답하시구만. 그 능력 그 지혜 그 인격으로 이 나라를 둘러엎을 수도 있을 텐데, 왜 그런 큰 일은 하실 생각 않으시고 죽는 이야기만 하실까?' 그러기에 받아먹으라는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곧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아직 그 깊은 뜻은 다 모르겠지만 그래도 순종하고 받아먹으라는 것입니다. 이때 야고보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안 먹겠다 하고 나가버렸습니다. 못마땅해서 나가버린 것입니다. 예수 안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마침내 야고보가 회개를 합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몸으로 야고보에게 독대(獨對)로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57)"-야고보가 독대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가 빠진 열한 제자가 모여 있을 때에 나타나시고, 열 제자한테, 또 갈릴리에서 일곱 제자한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에게는 단독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일대 일로 만나신 것입니다. 그 때의 상황이 전설로는 이렇게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떡과 포도주를 가지시고 "야고보야, 이제는 받아 먹으라" 하셨다고 합니다. "받아 먹으라"-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자 야고보는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이다지도 사랑하십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받치게 되고, 초대교회에서 높임을 받는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마침내 예루살렘교회의 제 1 대 감독이 됩니다. 흔히들 예루살렘교회의 제 1 대 감독이 베드로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가톨릭교인들이 억지로 하는 이야기요 성경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야고보가 제 1 대 감독입니다. 그는 삼십 년 동안 역사하고 끝내 바리새인들의 가혹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야고보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예수를 부인하라고 윽박지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절대로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늘을 쳐다보며 "저기를 보라,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라고 외칩니다. 그들에게 전도를 합니다. 그러자 옆에서 야고보의 예수 부인(否認)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떠밀어 땅으로 떨어뜨립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그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질을 합니다. 야고보는 죽는 순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외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순교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평생을 통하여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비교적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아주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이 지극히 검소했습니다. 그에게는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임을 특징짓는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약대 무릎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약대는 무릎을 잘 꿇고 있습니다. 꿇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약대의 무릎은 둥그렇습니다. 야고보의 무릎도 늘 꿇고 기도하는 바람에 군살이 박히고 약대의 무릎처럼 둥그렇게 되었다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그는 실천의 사람이었고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높이 존경을 받고 평생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순교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야고보서의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야고보서는 윤리적이요 훈계적이요 목회적입니다. 성경 첫머리를 보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1)." 그는 현재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만을 목회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을 비롯하여 유대사람, 나아가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유대사람까지 모두 '내가 책임지고 관장해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생각입니다.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그래서 전 유대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편지를 공동서신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믿고 있지 않더라도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이 그 편지를 읽게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윤리적이요 훈계적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제 1 대 감독으로서 모든 교인들에게 당당하게 훈계하는 높은 영적 권위와 목회적 권위를 가진 편지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형식상으로 명령형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전체가 5108절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108절 가운데 절반인 54구절이 명령 구절이라고 합니다. 설명조가 아니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명령조라는 것입니다. 역시 여기에도 목회자적 권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자인 야고보의 스타일도 알고 보면 좀 명령적인 데가 있습니다. 게다가 직선적입니다. 설명을 길게 하지 않습니다.

논리를 비약할 때도 많습니다. 논리적으로만 설명하려들지 않습니다. 또한 비유를 많이 씁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것입니다.

특별히 제가 야고보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서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이 많은 중요한 교리를 담고 있는 반면에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부분이 없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라는 한 마디 말씀만이 인용되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아생전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 케리그마적 사건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자신이 일찍이 알고 있던 율법적 방법론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교리를 풀어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서신의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그에 비하여 야고보서나 요한일서나 베드로서를 보면 중간 중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3년 동안 들은 사람들이니 당연히 그 말씀들이 머리속에 들어 있다가 술술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으로 보아 야고보서는 절대로 소외당할 수 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에는 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의 요절이 무려 스물일곱 군데에나 있습니다. 전체의 4분의 1가량이 복음서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다운 방법론과 비유법을 쓴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서, 특별히 산상보훈 같은 것은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야고보서의 특징이요 매력이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에서는 한 믿음과 믿음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서신 전체를 통하여 '예수' 라는 말이 두 군데(1 : 1, 2 : 1)밖에 나오지 않는 이 글이 어떻게 의미가 있느냐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깊은 마음으로 보면 이해할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 할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것을 따져보면 됩니다. 벵겔이라는 성서학자는 이 문제를 재미있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 예수님의 친동생이기 때문에 '예수' 하면 곧 '형님' 하는 것과 같아서 될수있는대로 예수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을 나타내면서 자신의 이름까지 드러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이 해석이 참 마음에 듭니다. 야고보는 예수의 동생-이렇게 드러나는 것을 피하려고 예수의 이름을 되도록이면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본문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라는 말은 다윗이나 모세도 많이 쓴 바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예수의 종' 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르치면서 "나는 예수의 종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야보고가 예수님을 두고 "당신은 주인이요 나는 종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먼 사람으로부터 어떠한 계기로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다면 간혹 "나는 그분의 종입니다" 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간에 아무리 형님의 혜택을 많이 받았기로서니 그 형님을 가리켜 "당신은 주인이요 나는 종입니다"라는 말을 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존경하지 못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내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모르고, 내 남편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를 모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남들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존경하고 있는데 정작 아내는 '뭐 그리 대단하다구, 아직도 어리광이나 부리는 사람인걸'합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그림과 사람은 멀리서 봐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멀리서 보면 참 훌륭한 그림인데 가까이에서 보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그럴듯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결코 옳은 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좋은 사람은 가까이 갈수록 좋은 것입니다.

오래 사귈수록 좋습니다. 일생을 같이 할수록 더 좋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교회를 나오는 것도 그렇습니다. 한 교회에 3년 남짓 다녔으면 이젠 졸업할 때가 된 것이다, 들을 것 다 듣고 배울 것 다 배웠으니 다른 교회로 옮겨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관계는 어떠해야 합니까? 102030년 오래 다닐수록 더욱더 은혜가 됩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에 와닿습니다. 사귀면 사귈수록 더 높이 보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참인격이요, 참그리스도인의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가 순교하고,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유다라는 동생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래서 예수님이 진짜인 것입니다. 만일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높이 보고 있는데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다 도망갔다고 해봅시다. 그야말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실례될까봐 이름을 밟히지 않겠습니다만, 우리가 높이 보고 존경하는 어느 신학자도 그의 가까운 고향사람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멀리서 온 사람도 아니요 이방사람도 아닙니다. 이 사람 바로 예수님과 평생을 같이 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생활까지 샅샅이 알고 있습니다. 먹고 자는 것까지 압니다. 야고보는 자기 형님을 가리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로 봅니다. 곧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위치에 놓은 다음 '나는 그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혈연관계나 인간관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당신은 내 주인이요, 나는 당신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형님 예수를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을만합니다.

야고보는 충성을 맹세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런고로 내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내 목적도 내 능력도 내 지혜도 내 생명도 다 당신의 것입니다-절대 순종, 절대 충성을 거듭 맹세하고 있습니다. 조금의 부끄러움 없이 종됨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모릅니다. 때로 우리는 인간적으로 가깝다는 사실 때문에 신령상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등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가까워도 신령상의 위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고백하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그 신앙을 깊이 상고하면서 본 야고보서의 말씀을 읽고 야고보가 가졌던 신앙간증과 믿음을 이해하고 같은 수준의 믿음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의 종 야고보(야고보서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성경책 가운데서 제일 많이 읽는 책이 빌립보서요, 그 다음이 야고보서입니다. 혹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에도 낮공부 시간에는 주로 빌립보서나 야고보서를 강해해왔습니다. 꽤 많은 부흥회를 다녀서 손꼽아보면 수백 교회에 이르고보니 그 만큼 빌립보서와 야고보서를 많이 강해한 터이라 이제는 거의 외다시피 되었습니다. 이 두 책은 어느 때에 읽어보아도 참 좋은 말씀입니다. 어느 때에 강해를 하고 교인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어도 더할수없이 좋은 말씀입니다. 참으로 귀한 복음인 것입니다.

성경은 어느 책이나 다 귀한 말씀이지만 아시다시피 그 중에서도 저 마다 특별히 좋아하는 성경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칼뱅같은 이는 에베소서를 좋아했고, 루터는 시편과 갈라디아서를 특별히 좋아했습니다. 사람에 따라 이처럼 특별히 좋아해서 은혜를 많이 받는 성경이 따로 있는 동시에, 한 사람의 생애를 놓고 보더라도 젊었을 때에 좋아하는 성경이 있는가 하면 나이 들어서 더 많이 읽게 되는 성경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할 때에 좋게 느껴지는 성경이 있고, 병들었을 때나 어려운 시험을 당할 때에 은혜가 되는 성경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같이 귀한 성경이지만 어떤 때에는 이 성경책을 읽고 어떤 때에는 저 성경책을 읽으면서, 나름의 특별한 상황에서 주시는 다른 은혜를 각별하게 받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우리가 자신의 처지와 나이와 건강 상태에 따라서 음식을 달리 먹어야 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를테면 특별히 외로울 때에는 시편을 읽는 것이 좋겠고, 나이 많은 분들이 답답할 때에는 잠언같은 것을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 고난 당할 때에는 빌립보서를 읽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다면 베드로서를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믿음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거나 믿는 내용에 회의가 생길 때에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읽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시험에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거든 부디 야고보서를 읽을 것입니다.

야고보서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중요한 복음입니다. 시련을 당한 사람, 시험 중에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성공한 사람도 읽을 것입니다. 일이 잘되어나갈 때에, 말하자면 믿음에 다소라도 교만이 생길 수 있을 때에, 그리고 내 믿음에 게으름이 스며들 때에 야고보서를 읽으면 내 믿음이 어느 싯점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으므로, 시련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다시금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는, 특히 개혁교회에서 한동안 야고보서를 벽안시했던 때가 있습니다. 까닭인즉 마르틴 루터가 야고보서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가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루터는 그 점이 못마땅했던 모양입니다. 야고보서에는 '예수' 라는 말씀이 꼭 두 군데만 나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일반적인 윤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기독교적 복음을 말씀하는 것으로는 약하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영생에 대한 교훈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이런 차원에서 이른바 케리그마적 메시지들에 비하면 빈약하다고 생각하여 야고보서를 등한시했던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마르틴 루터는 시작도 끝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는다는 것을 강조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믿음으로 시종일관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에 야고보서에는 그런 주제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하는 말씀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만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런 말씀이 없다는 것으로는 야고보서를 나무랄 일이 못됩니다. 그 말씀은 히브리성도 없고, 네 복음서에도 없습니다.

아무튼 루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만을 강조하다보니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 쯤으로 간주해버렸습니다. 지푸라기라고 하니 사람들은 형편없는 것이구나, 쓸모없는 것이구나 하기 쉬운데, 이것은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금이나 은에 비한다면 지푸라기는 아무런 가치도 없지 않은가-이렇게 쉬 말해버릴 것이 아닙니다. 루터의 성경관을 보면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마치 말구유와도 같다고 보는 것이 루터의 성경관입니다. 성경이라는 말구유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누워 있다고 그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말구유가 중요한 것은 아기 예수가 거기 한가운데에 누워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가 있음으로 귀한 구유인 것입니다. 아기 예수 없는 구유는 뜻 없는 한낱 말구유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성경이라는 말구유에서 아기 예수에 해당하는 것이 복음서 내지 로마서갈라디아서요, 아기 예수 밑에 강보가 있고 강보 밑에 지푸라기가 있는데, 이 지푸라기에 해당하는 것이 야고보서라고 본 것 같습니다. 아무튼 마르틴 루터가 야고보서를 많이 읽지 않고 등한시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야고보서를 깊이 상고하면서 읽어보면 결코 믿음을 등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야고보서는 바른 신앙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얻을 수 있는 바른 믿음은 어떤 믿음이냐-이것을 말씀해주는 복음서가 야고보서입니다. 간혹 우리는 믿음과 행함을 양자택일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젊은이들이 토론할 때에도 보면 믿음이냐 행함이냐 하고 변론을 벌입디다마는 무모한 일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따로 떼어놓고 양자택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하나로 보아서 말씀합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2 : 21-22)"-믿음이 행함과 함께하며, 행함으로 인하여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말씀하는 귀한 요절입니다. 즉 야고보서는 믿음을 등한시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바른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 열매가 있는 믿음, 곧 살아 있는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은 죽은 몸이듯이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관념적인 믿음, 지식적인 믿음은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많이 읽었다거나 교리를 잘 안 다거나 줄줄이 꿰어서 남에게 설명할 수 있다거나 해도 그것으로만은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행함이 따르는 살아 있는 믿음이라야 된다고 강조함입니다. 이와 같이, 아무리 보아도 야고보서는 믿음을 등한시하지 않습니다. 좀더 현실적이요 좀더 깊은 차원에서 믿음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야고보서를 그렇게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락의 복음 (빌립보서)' '은혜의 복음(갈라디아서)'과 같이 야고보서에 굳이 별칭을 지어 붙인다면 '행위의 복음' '생활의 복음' '실천의 복음' '살아 있는 믿음에 대한 복음'이요 '구원 얻는 믿음에 대한 복음'이 되겠습니다.

야고보서의 저자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입니다. 성경에 야고보란 이름은 대표적으로 세 사람이 나옵니다.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 알페오의 아들인 사도 야고보, 그리고 주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그들입니다. 이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야고보서의 저자인 것은 2천 년 교회사에서 별다른 이견 없이 전승되어 왔습니다.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기둥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뒤로 초대교회에서 가장 높임을 받은 사람이 셋 있습니다. 하나는 베드로요, 하나는 주님의 형제 야고보요, 하나는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였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늘 가까이 두신 수제자였고, 천국열쇠를 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서는 뭐니해도 베드로의 위치가 가장 높임을 받을만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실제로는 야고보가 베드로보다도 더 존경을 받았습니다. 야고보는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믿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다음에야 예수를 믿고 초대교회에서 높임을 받게 된 사람입니다. 그는 경건했고 덕망 있고 신심이 깊었습니다. 유대인들을 기독교로 이끄는 교량 역할을 함으로써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가 된 사람입니다. 당연히 높임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에 높임을 받은 것 같다고도 말합니다. 이 또한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니 예수님과 외모부터 닮았을 것이며, 예수님과 한솥밥을 먹고 자란 형제이니 그에게서 예수님의 체온까지도 느끼지들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지극히 사랑하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나니 새삼새삼 예수님이 그리웠을 것입니다. 때마다 예수님이 뵙고 싶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이런 때이면 으레 두 사람을 바라보게 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얼마나 우러러보았겠습니까? "예수님은 어렸을 때에 어떠하셨습니까?" "이런 때에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이라면 이런 때에 어떻게 하셨을까요?"-제자들이나 초대교회의 사람들은 마리아를 붙들고 부지런히 말을 걸었을 것입니다. 야고보에게도 많은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제자는 아니었지만 야고보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랐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가 예수를 믿지 않았었다고 하는데, 그 믿지 않았다고 하는 것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75절을 보면 지금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고 하는데, 정말 믿지 않은 것입니까? 실인즉 그렇지 않습니다. 71절로부터 자세히 보십시다.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다가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절기를 지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에 남아 계셨습니다. 형제들이 와서 예수님을 재촉합니다.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스스로 나타내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예수님의 등을 떠밉니다. 초막절이라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인다는데 왜 시골에 남아 있습니까? 빨리 가서 많은 사람에게 말씀을 전하고 능력을 나타내고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라고 재촉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라-이는 예수님의 형제들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행하시는 분이다, 분명 유대나라의 왕으로 오셨다-예수님의 지혜와 능력, 이적과 기사 같은 것들을 믿고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몰랐던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만백성을 구원하시는 구주 되심을 몰랐습니다. 가장 중요한 그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건성으로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이나 보며 좋아하였습니다. 예수님 덕을 보아 출세나 좀 해보아야겠다는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사도 요한의 견해로는 예수 믿지 않은 것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따라다녔다 해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과 평생을 함께 살아도 말짱 헛일인 것입니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예수님의 형제들이 열두 제자만큼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따랐다고는 볼 수 없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역사 하신 3년 동안에도 예수님을 따랐다고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전설에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행하시는 그 자리에 야고보가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집례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이것은 내 살이요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피요 받아 먹으라" 하시며 심각한 종말론적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데, 야고보는 그것이 못마땅했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우리 형님 참 답답하시구만. 그 능력 그 지혜 그 인격으로 이 나라를 둘러엎을 수도 있을 텐데, 왜 그런 큰 일은 하실 생각 않으시고 죽는 이야기만 하실까?' 그러기에 받아먹으라는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곧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아직 그 깊은 뜻은 다 모르겠지만 그래도 순종하고 받아먹으라는 것입니다. 이때 야고보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안 먹겠다 하고 나가버렸습니다. 못마땅해서 나가버린 것입니다. 예수 안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 마침내 야고보가 회개를 합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몸으로 야고보에게 독대(獨對)로 나타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57)"-야고보가 독대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마가 빠진 열한 제자가 모여 있을 때에 나타나시고, 열 제자한테, 또 갈릴리에서 일곱 제자한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에게는 단독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일대 일로 만나신 것입니다. 그 때의 상황이 전설로는 이렇게 전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떡과 포도주를 가지시고 "야고보야, 이제는 받아 먹으라" 하셨다고 합니다. "받아 먹으라"-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러자 야고보는 "주께서 어찌하여 나를 이다지도 사랑하십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먹었다는 것입니다.

그로부터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평생을 주님을 위하여 받치게 되고, 초대교회에서 높임을 받는 권세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마침내 예루살렘교회의 제 1 대 감독이 됩니다. 흔히들 예루살렘교회의 제 1 대 감독이 베드로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가톨릭교인들이 억지로 하는 이야기요 성경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야고보가 제 1 대 감독입니다. 그는 삼십 년 동안 역사하고 끝내 바리새인들의 가혹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야고보를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예수를 부인하라고 윽박지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절대로 예수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늘을 쳐다보며 "저기를 보라,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라고 외칩니다. 그들에게 전도를 합니다. 그러자 옆에서 야고보의 예수 부인(否認)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떠밀어 땅으로 떨어뜨립니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그에게 돌을 던지고 몽둥이질을 합니다. 야고보는 죽는 순간,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외칩니다.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순교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평생을 통하여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비교적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말이 많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아주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먹는 것, 입는 것이 지극히 검소했습니다. 그에게는 특별히 기도하는 사람임을 특징짓는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약대 무릎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약대는 무릎을 잘 꿇고 있습니다. 꿇고 있다가 벌떡 일어나곤 합니다. 그래서 약대의 무릎은 둥그렇습니다. 야고보의 무릎도 늘 꿇고 기도하는 바람에 군살이 박히고 약대의 무릎처럼 둥그렇게 되었다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그는 실천의 사람이었고 검소한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에서 높이 존경을 받고 평생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다가 순교까지 하였습니다.

이제 야고보서의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야고보서는 윤리적이요 훈계적이요 목회적입니다. 성경 첫머리를 보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1)." 그는 현재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만을 목회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을 비롯하여 유대사람, 나아가 각 나라에 흩어져 있는 유대사람까지 모두 '내가 책임지고 관장해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생각입니다.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그래서 전 유대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편지를 공동서신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비록 믿고 있지 않더라도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이 그 편지를 읽게 되기를 바란 것입니다. 윤리적이요 훈계적입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제 1 대 감독으로서 모든 교인들에게 당당하게 훈계하는 높은 영적 권위와 목회적 권위를 가진 편지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형식상으로 명령형이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전체가 5108절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학자의 연구에 따르면 108절 가운데 절반인 54구절이 명령 구절이라고 합니다. 설명조가 아니고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명령조라는 것입니다. 역시 여기에도 목회자적 권위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자인 야고보의 스타일도 알고 보면 좀 명령적인 데가 있습니다. 게다가 직선적입니다. 설명을 길게 하지 않습니다.

논리를 비약할 때도 많습니다. 논리적으로만 설명하려들지 않습니다. 또한 비유를 많이 씁니다. 이것은 히브리적인 것입니다.

특별히 제가 야고보서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서와 유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이 많은 중요한 교리를 담고 있는 반면에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부분이 없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낫다"라는 한 마디 말씀만이 인용되어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살아생전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친히 하시는 말씀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그 케리그마적 사건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자신이 일찍이 알고 있던 율법적 방법론을 가지고 예수님에 대한, 기독교에 대한 교리를 풀어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서신의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그에 비하여 야고보서나 요한일서나 베드로서를 보면 중간 중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로부터 3년 동안 들은 사람들이니 당연히 그 말씀들이 머리속에 들어 있다가 술술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으로 보아 야고보서는 절대로 소외당할 수 있는 복음이 아닙니다.

야고보서에는 복음서와 비슷한 내용의 요절이 무려 스물일곱 군데에나 있습니다. 전체의 4분의 1가량이 복음서를 인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적인 배경을 가진 사람다운 방법론과 비유법을 쓴 것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복음서, 특별히 산상보훈 같은 것은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야고보서의 특징이요 매력이요,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에서는 한 믿음과 믿음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서신 전체를 통하여 '예수' 라는 말이 두 군데(1 : 1, 2 : 1)밖에 나오지 않는 이 글이 어떻게 의미가 있느냐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깊은 마음으로 보면 이해할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 할 수밖에 없었느냐 하는 것을 따져보면 됩니다. 벵겔이라는 성서학자는 이 문제를 재미있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자신 예수님의 친동생이기 때문에 '예수' 하면 곧 '형님' 하는 것과 같아서 될수있는대로 예수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고 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름을 나타내면서 자신의 이름까지 드러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이 해석이 참 마음에 듭니다. 야고보는 예수의 동생-이렇게 드러나는 것을 피하려고 예수의 이름을 되도록이면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또한 본문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이라는 말은 다윗이나 모세도 많이 쓴 바 있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예수의 종' 이라는 말을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가르치면서 "나는 예수의 종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야보고가 예수님을 두고 "당신은 주인이요 나는 종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다릅니다. 전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나와 전혀 관계가 없는 먼 사람으로부터 어떠한 계기로 많은 혜택을 받게 되었다면 간혹 "나는 그분의 종입니다" 라고 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형제간에 아무리 형님의 혜택을 많이 받았기로서니 그 형님을 가리켜 "당신은 주인이요 나는 종입니다"라는 말을 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존경하지 못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내 아들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모르고, 내 남편이 얼마나 훌륭한 사람인가를 모를 때가 있는 것입니다. 남들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존경하고 있는데 정작 아내는 '뭐 그리 대단하다구, 아직도 어리광이나 부리는 사람인걸'합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래서 옛부터 '그림과 사람은 멀리서 봐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멀리서 보면 참 훌륭한 그림인데 가까이에서 보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그럴듯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 말은 결코 옳은 말이 아닙니다. 정말로 좋은 사람은 가까이 갈수록 좋은 것입니다.

오래 사귈수록 좋습니다. 일생을 같이 할수록 더 좋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테면 교회를 나오는 것도 그렇습니다. 한 교회에 3년 남짓 다녔으면 이젠 졸업할 때가 된 것이다, 들을 것 다 듣고 배울 것 다 배웠으니 다른 교회로 옮겨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실한 관계는 어떠해야 합니까? 102030년 오래 다닐수록 더욱더 은혜가 됩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가슴에 와닿습니다. 사귀면 사귈수록 더 높이 보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참인격이요, 참그리스도인의 교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과 가까웠던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가 순교하고,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와 유다라는 동생이 순교를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이래서 예수님이 진짜인 것입니다. 만일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을 높이 보고 있는데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다 도망갔다고 해봅시다. 그야말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실례될까봐 이름을 밟히지 않겠습니다만, 우리가 높이 보고 존경하는 어느 신학자도 그의 가까운 고향사람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좋지 못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별거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멀리서 온 사람도 아니요 이방사람도 아닙니다. 이 사람 바로 예수님과 평생을 같이 한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생활까지 샅샅이 알고 있습니다. 먹고 자는 것까지 압니다. 야고보는 자기 형님을 가리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로 봅니다. 곧 예수님이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위치에 놓은 다음 '나는 그의 종'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혈연관계나 인간관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당신은 내 주인이요, 나는 당신의 종이라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형님 예수를 내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을만합니다.

야고보는 충성을 맹세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그런고로 내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내 목적도 내 능력도 내 지혜도 내 생명도 다 당신의 것입니다-절대 순종, 절대 충성을 거듭 맹세하고 있습니다. 조금의 부끄러움 없이 종됨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모릅니다. 때로 우리는 인간적으로 가깝다는 사실 때문에 신령상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등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가까워도 신령상의 위치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고백하던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의 그 신앙을 깊이 상고하면서 본 야고보서의 말씀을 읽고 야고보가 가졌던 신앙간증과 믿음을 이해하고 같은 수준의 믿음을 가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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